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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 푸어-255화 (255/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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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6. 각성 임박 (1)

참격(斬格)의 여파는 끔찍했다.

야트막한 언덕이 무너져 내리고, 너른 황무지가 흉물스럽게 속살을 내보이며 주저앉았다. 둘로 쪼개졌다 다시 이어진 하늘에는 쉴 새 없이 광풍이 불었고, 온 세상에 흙먼지가 휘날렸다.

그리고 세상은 한 치 앞도 분간하기 힘든 노란 먼지 안개에 뒤덮이고 말았다.

“용이여! 그대는 정녕 율법을 어길 작정인가!”

볕조차 가려버린 먼지 안개 속에서 마렉이 사납게 외쳤다.

“용이여! 대답하라!”

다그치듯 몇 번이고 외치니, 가려진 세상 저 너머에서 장중한 음성이 들려왔다.

[오직 우리 일족뿐이었노라.]

놀랍게도 제 반려를 제외하고는 한 번도 어느 누구에게 제 목소리를 들려주지 않았던 용이 마렉의 부름에 응한 것이다.

[혼돈과 죄악이 온 세상이 뒤덮여 검지 않은 것이 없었을 때, 그 불결한 어둠에 오염될까 두려워하여 아무도 나서지 않았으니.]

용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하지만 차분하다고 해서 그 안에 담긴 감정까지 차분한 것은 아니었다.

[제 비늘이 검게 물드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나선 것은 오직 우리뿐이었노라]

재촉하던 마렉도 몸서리쳐지는 회한에 입을 다물고 말았다.

[누구보다 열정적이었던 적룡(赤龍)들은 그 꺼지지 않을 것 같던 불꽃이 차갑게 식어 대지에 누웠고, 태산처럼 굳건하던 금룡(金龍)들은 흐물흐물하게 변해 진토가 되었다. 만년빙설(萬年氷雪)처럼 차가운 이성을 지녔던 청룡(靑龍)들은 오랜 싸움에 제 몸마저 불사르고야 마는 광룡(狂龍)이 되었고, 끝내 일족의 손에 뿔과 심장을 적출당하였다.]

흩날리던 먼지 알갱이조차 차갑게 얼어붙어 떨어져 내릴 정도로 짙은 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의 어조는 차분하기만 했다.

[창공을 질주하던 백룡(白龍)들은 날개가 꺾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지혜롭던 흑룡(黑龍)들은 제 몸이 검게 물드는 줄도 모르고 앞장서 싸우다가 마룡(魔龍)이 되어 독기로 자멸하였다.]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용의 음성은 더욱 낮게 가라앉았고, 그 안에 담긴 한기는 북풍한설이 되어 마렉의 옷자락마저 얼려버렸다.

[멸족, 그게 바로 사태를 관망하던 이들이 의지를 다질 때까지 우리 일족이 치러야 했던 대가다.]

그런 용이 갑작스레 목소리를 높이며 다그쳤다.

[동의 조율자여! 대답하라!]

마치 꾸짖듯 준엄한 음성이었다.

[멸족의 대가를 치른 우리 일족이 아직도 세상에 치러야 할 대가가 남아 있는가! 일곱 쌍의 날개 중 여섯 쌍이 잘리고, 세 개의 뿔 중 오직 하나만을 건사한 내가 남은 한 쌍의 날개와 하나의 뿔마저 세상에 바치기를 원하는가!]

용의 울분은 이치에 맞는 합당한 것이었고, 마렉은 그래서 쉬이 대답할 수 없었다.

[세상의 경계 밖으로 내쳐져 천 년을 헤매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세상은 또다시 나를 묶어두려 하는 것인가! 그것이 정녕 그대 조율자들이 말하는 균형인가!]

하지만 용은 마렉이 입을 열 때까지 성난 목소리로 외쳐댔다.

[그대는, 세상은 기어이 나의 반려를 세상의 경계에 묶어두어 나와 함께 밀어낼 참인가!]

결국 마렉은 한기로 파랗게 질린 입술을 달싹이며 용의 질문에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나로서는 과거 용족이 이 세상을 위해 얼마나 큰 대가를 치렀는지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구려. 일족을 잃은 비탄과 천 년을 세상 밖에 머문 그 한스러움이 얼마나 깊을지 감히 혜량할 수 없소. 그저 애도와 경의를 보낼 뿐이오.”

[그렇다면 대답하라. 그대가 보내는 애도와 경의가 진정 거짓 없는 것이라면, 그대는 어찌하여 아직도 나의 반려에게 그대와 같은 족쇄를 채우려고 하는 것인지.]

용의 채근에 마렉이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과거 세상을 지탱하던 이들이 영락(榮落)한 지금, 그대와 그대의 반려가 지닌 힘은 지나치게 강한 것이오.”

마렉이 김선혁을 다음 대의 조율자로 지목한 건 그저 우연이 아니었다.

조율자가 되기에 충분하다 못해 넘치는 재능을 지닌 그는 경우에 따라서 세상에 크나큰 해악을 끼칠 수도 있는 존재였다.

[감히 내 앞에서 그 알량한 균형의 율법을 들먹이지 마라! 나의 일족은 그대 이전에 헤아릴 수 없는 세월을 조율자로 살아왔으니, 감히 그대는 율법을 운운하여 궤변을 일 삼치 말라.]

마렉 이전에도 대소환이 있었고, 그 이전에도 있었다. 그리고 그 이전에 일어난 최초의 대소환이 있기도 이전, 까마득하게 먼 옛날 세상의 균형을 책임져온 것은 바로 용족이었다.

어찌 보면 용족이 멸족하여 세상의 경계 밖으로 밀려났기에 이방인들이 그 의무를 대신해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상황에서 마렉이 용 앞에서 율법과 균형을 운운하는 건 영 적절치 못한 행동이었다.

마렉 역시 그 점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마렉이 이 자리에 선 것은 스스로의 의지로 인한 것이 아니었다.

세상이 다음 대의 조율자를 원하고 있고, 용의 반려는 그 누구보다 다음 대의 조율자 자리에 어울리는 자였다. 그리고 그건 마렉이 아닌 이 세상이 정한 것, 용의 처지를 동정하고 연민한다 해도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어쩌겠소. 이미 그대의 반려는 승패에 따라 조율자의 운명을 받아들이기로 약속했소. 이는 그대와 그대의 일족이 과거 세상을 위해 보인 거룩한 헌신과는 별개의 것이니, 이제 와서 뒤집을 수는 없는 것이요.”

사실이었다. 용이 이제 와서 과거의 비사를 꺼내든다고 해서 마렉과 김선혁이 한 약속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만약 강제로 이 약속을 뒤엎으려 한다면 용은 그동안 쌓아온 언령(言霊)을 스스로 무로 되돌리는 것과도 같았다. 그리고 그건 아무리 지고하고 강대한 용이라고 해도 쉬이 만회할 수 없는 크나큰 손실이었다.

“이 이상 결투에 관여하지 마시오. 그대 스스로 어긴 율법의 대가가 벌써 적지 않을 터, 앞으로 더 억지를 부리는 건 그대나 그대의 반려에게 모두 해로울 뿐이요.”

용의 음성에 담긴 비탄과 회한에 한발 물러났던 마렉이 준엄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는 동의 조율자로서 과거 헌신한 용족에게 보이는 마지막 경의이자 선의. 만약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나는 부득이하게 세상이 나에게 부여한 집행(執行)의 권능(權能)을 사용할 수밖에 없소. 물론 실체를 드러내지 않은 그대 대신 그 대가를 치르는 것은 그대의 반려겠지.”

마렉의 경고에도 용은 대답하지 않았다. 마렉은 그 거북스러운 침묵을 더 이상 용이 결투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섣부른 판단이었다.

[착각하고 있구나.]

잠깐의 텀을 두고 들려온 용의 음성에는 방금 전과 같은 회한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그대의 부름에 응한 건 그대의 그 작은 머릿속에서 나온 졸렬한 꾀를 꾸짖고자 했음이다. 만약 내가 이로 인해 치러야 할 대가가 있다면 그건 내 가장 작은 비늘 하나에도 미치지 못하는 사소한 것이리라.]

“그게 무슨 소리요.”

이해하지 못할 용의 말에 마렉이 인상을 찌푸렸다.

[나는 애당초 이 결투에 관여할 생각도 또 관여한 적도 없다는 말이다.]

미처 상황판단을 마치기도 전에 먼지 안개 너머에서 시퍼런 안광이 번쩍 흘러나왔다.

“그럼….”

[그대의 참격을 견뎌낸 것은 오로지 그 스스로가 지닌 본신의 능력.]

용의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유황내 나는 숨결이 쏟아져 나와 마렉을 집어삼켰다.

**

경천동지할 참격이 온 천지를 박살낸 뒤, 끈질기게 버텨낸 용인의 숨결이 다시 한 번 대지를 휩쓸었다.

참격에 상당한 기력을 쏟아부은 마렉은 머리가 그을리고 피부가 익는 것을 피하지는 못했지만, 역시 숨결을 견뎌냈다.

그리고 다시 한 번의 강력한 참격이 있었고, 그 뒤로도 몇 번인가 강렬한 검격이 있었다.

그조차도 용인은 버텨냈다.

마렉이 계속해서 맹공을 퍼부었다.

이미 상당한 기력을 소모한 탓일까. 방금 보였던 세상을 뒤엎을 정도의 검기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그저 여느 상급 기사라면 충분히 발휘할 수 있을 법한 검광, 물론 그조차도 경지가 남다른 마렉의 손에서 펼쳐지니 찌르고 베는 동작 어느 하나 치명적이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 끔찍한 참격 마저 견뎌낸 용인의 육신이다. 용인은 제 비늘이 잘려나가고 거죽이 베이더라도 끈덕지게 마렉을 향해 달려들었다.

한 걸음마다 잘려져 나간 비늘이 우수수 떨어지고, 다시 한 걸음 내딛으면 피가 흩뿌려졌다. 용인이 흘린 피가 얼마나 많았는지 대지가 질척하게 변할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부는 쉽게 나지 않았다.

용인은 극심한 부상을 입은 상태였지만 어쩐 일인지 기력이 남아도는 모습이었고, 반대로 마렉은 부상은 없었지만 기력이 상당히 고갈된 모습이었다.

마렉의 공격이 조금씩 서서히 예기와 빛을 잃어간다.

그리고 나중에 가서는 마렉의 검격에는 평범한 수준의 검광조차 맺혀있지 않게 되었다. 그저 심상으로 만들어낸 검 특유의 예기에 의지해 용인을 두들겨 댈 뿐이었다.

검이 용인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날렵한 베기였지만 예기가 부족하니 단단한 용인에게는 몽둥이질에 지나지 않았다.

머리가 꺾인 용인이 비틀대며 주먹을 뻗었다. 마렉은 몸을 숙여 우악스러운 주먹질을 피해냈다. 하지만 공격을 이어가기엔 호흡이 달렸는지 앞으로 나가는 대신 한 발 물러나 숨을 몰아쉬었다.

그런 마렉에게 용인이 다시 달려들었다.

비슷한 광경이 연출되었다. 비늘을 뚫지 못하는 검, 상대를 맞추지 못하는 주먹과 창. 수없이 많은 공방이 오고 갔지만 어느 하나 의미 있는 것이 없었다.

“헙.”

기력이 돌아오는 족족 빛을 머금은 칼날을 찔러보지만, 마렉의 공격은 용인을 쓰러트릴 수 없었다. 어지간한 이였다면 당장 죽었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피를 흘린 용인의 몸짓은 그런 마렉을 따라잡기에는 지나치게 굼떴다.

볼썽사나웠다.

대륙에서도 손꼽히는 강자일 게 분명한 두 초인의 결투는 처음의 장엄함 따위는 온데간데없는 막 싸움이 되었다.

머리채라도 잡을 듯 달려드는 용인과 우악스러운 공격을 피해 이리저리 뒹굴며 검을 찔러넣는 노기사, 둘 다 엉망진창의 몰골이 된지 오래였다.

“후우.”

참격으로 인해 변해버린 지형, 높게 일어난 지면을 굴러 멀찌감치 물러난 마렉이 숨을 몰아쉬었다.

스르륵.

이제는 흐릿하게 변해 형태조차 간신히 유지하는 둥 마는 둥 했던 심상의 검이 마침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더 이상 검을 유지할 기력조차 남지 않게 된 것이다.

“마치 예전으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구만.”

하지만 궁지에 몰렸음에도 불구하고 놀랍게도 마렉의 표정은 덤덤하기만 했다.

“솔직히 말해 누가 이기게 될지 더 이상 나도 모르겠네.”

높은 곳에 서 있기에 더욱 거대해 보이는 용인을 보며 마렉이 말했다.

“그래도 하는 데까지는 해봐야겠지.”

마렉이 가슴 앞에서 양손을 모았다.

“서몬 아이언 소드 (Summon Iron-sword)”

섬광이 나타났다 사라지고 마렉의 손에 한 자루 철검이 쥐어져 있었다.

“그때는 질 좋은 검 하나 구하는 게 그렇게 어려웠는데 말이야.”

복잡한 얼굴로 철검을 바라보던 마렉이 콱, 하고 검을 바닥에 박아 넣었다.

“오게.”

때마침 용인이 쿵쾅거리며 언덕을 구르듯이 달려왔다. 철검을 슬며시 비껴내린 마렉이 타이밍 좋게 물러나며 검을 튕겨 올렸다.

팟.

검과 함께 끌려온 흙과 모래가 용인의 얼굴에 흩뿌려졌다. 검성이라는 이름이 아까운 치사한 공격이었다.

“치사하더라도 좀 이겨야겠네.”

마렉 역시 자신의 공격이 제 명성에 걸맞지 않다는 사실을 아는지,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변명을 주워 삼켰다.

그러는 사이에도 손에 쥐어진 철검은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서걱.

흔한 검광 하나 머금지 못한 평범한 검격에 용인의 비늘이 잘려져 나갔다. 간신히 멈췄던 출혈이 다시 일어나며 용인이 괴성을 질렀다.

마렉이 다시 검을 휘둘렀다. 그리고 그때마다 용인의 몸에서 피가 튀었다.

“어차피 이기면 그만 아니겠는가.”

이번에는 아예 작정했는지 마렉이 흙을 움켜쥐고 확 흩뿌렸다.

방금 전과는 달리 손을 들어 눈에 흙이 들어가는 것만큼은 피해낸 용인이 한 발 물러났다. 전투가 시작된 후로 내내 돌진만을 해오던 용인이 처음으로 물러난 것이다.

“나도 그 말에 공감하오.”

짐승이 으르렁대듯 거북스러운 음성, 용인의 말에 마렉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 상태로는 말도 못하는 줄 알았네.”

“뭐, 보통은 그런데. 피를 너무 흘려서 그런지 좀처럼 식을 줄 모르던 머리가 조금은 차가워진 기분이오.”

그렇게 말한 용인, 김선혁이 제 몸에 난 상처를 쓰윽 둘러보더니 말했다.

“머리가 식는 건 좋은데 이러다가는 내 몸도 완전히 식을 지경이오. 당신도 이제 밑천이 다 떨어진 것 같으니, 이제 그만 결투를 좀 끝내야겠소.”

“바라던 바네.”

그의 말에 마렉이 다시 철검을 고쳐 잡으며 자세를 취했다. 최후의 승부를 준비하듯 쥐어짜낸 검력이 날을 따라 희미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들어오시게.”

마렉의 도발에 당장에라도 달려들 듯 자세를 낮추었던 김선혁이 도리어 허리를 꼿꼿이 세우며 손을 늘어트렸다.

“아티야. 누다르.”

말이 끝나는 순간, 허공과 흙 속에서 고대 정령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무리.”

‘네. 주인님!’

‘명하신 대로!’

다치고 지친 두 초인과는 달리 너무도 생생한 정령들의 대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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