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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5.기울어진 저울의 반대편 (5)
지금에 이르기까지 김선혁은 수도 없이 자신보다 더한 강자와 싸워왔다. 그리고 대부분의 전투에서 승리를 얻어왔다.
탐색전을 염두에 두고 내지른 어정쩡한 공격을 단번에 찍어 누르고 초장에 승기를 잡아 결판을 내는 것이 그가 지닌 필승의 전법이었다.
다소 무모한 방식이었지만, 그는 잘만 풀리면 큰 힘 들이지 않고 강적을 처리할 수 있는 선공의 이점을 포기할 수 없었다.
하지만 선수필승의 모험도 상대가 어지간해야 시도해보는 법이었다.
“음….”
공격하려고 마음을 먹기만 해도 난도질당하는 스스로의 모습이 환상처럼 스쳐갔다. 그저 기분 탓이라고 치부하기에는 그 느낌이 지나치게 생생해 꽉 움켜쥔 창을 차마 내지를 수가 없었다.
설마 두려워하는 건가.
잠깐 사이에 땀으로 흥건하게 젖어버린 손바닥을 털어낸 그가 다시 창을 감아쥐었다.
목이 뻐근하다. 과도할 정도로 긴장된 근육은 벌써부터 저릿저릿할 지경이었다. 그만큼 마렉의 존재감은 무지막지했다.
“나는 준비됐네만….”
작게 몸을 움직이며 긴장을 푸는 그를 보며 마렉이 건조한 음성으로 말했다.
명백한 조롱이고 도발이었다.
그는 발끈해서 나서는 대신 가만히 숨을 내쉬었다.
“후우.”
한껏 들이킨 숨을 내뱉고 나니 조금은 무거웠던 머리가 조금은 개운해졌다.
오랜만이군.
상대를 앞에 두고 이리 많은 잡념을 떠올린 것도, 손끝에 망설임이 생긴 것도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그런데 그게 마냥 불쾌하지만은 않았다. 아덴버그로 돌아온 뒤로 다소 풀어졌던 육신이 다시 팽팽하게 조여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나도 막 시작하려던 참이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김선혁이 드본과 함께 날아올랐다.
“풍아.”
그리고 전투가 시작되었다.
**
황무지의 매서운 바람이 순식간에 칼바람이 되고 다시 태풍이 되어 마렉을 향해 날아들었다. 유약한 외모의 노기사 따위는 금세 갈기갈기 찢어버릴 듯 사나운 기세였다.
하지만 세상이 떠나가라 울부짖던 풍아의 포효는 금세 사라지고 말았다.
사악.
단 일 검. 허공에 생겨난 희미한 빗금과 함께 광풍은 산들바람이 되어 이내 흩어져 버렸다.
“진짜 너무하네.”
첫 공격으로 큰 이득을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허무하게 첫 공격이 실패로 돌아갈 줄은 몰랐다.
심지어 마렉은 처음의 자리에서 단 한 발도 움직이지 않은 상태였다.
“최선을 다하게. 그래야 후회가 없을 테니.”
김선혁은 그런 속마음을 내색하지 않고 덤덤하게 대꾸했다.
“아직 제대로 시작도 안 했소.”
“부디 나를 실망시키지 말게나.”
그가 다시 한 번 풍아를 불러냈다.
콰아아아아.
방금 전보다 한층 더 사나워진 광풍에 마렉이 인상을 찌푸렸다. 통하지도 않을 공격을 다시 한 번 시도하는 그에게 조금은 실망한 기색이었다.
사악.
다시 허공에 선이 그려지고 풍아의 기세가 꺾여버렸다. 하지만 먼저 불어온 광풍이 채 흩어지기도 전에 그의 창끝에서 또 하나의 바람이 일어났다.
“풍아. 풍아. 풍아. 풍아.”
하나의 바람이 사라지면 그는 두 개의 바람을 불러냈고, 두 개의 바람이 흩어지면 다시 네 개의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마렉은 풍아가 모습을 드러내는 족족 그 자리에서 흩어버렸다.
“내 말을 제대로 듣지 않았군.”
결투가 시작된 지 꽤나 시간이 흘렀음에도 그가 계속해서 의미 없는 공격만 시도하자 마렉이 건조한 얼굴로 경고했다.
“분명 후회를 남기지 말라고 했을 텐데.”
마렉의 경고에도 그는 다시 하나의 바람을 소환했다.
“풍….”
“거기까지.”
사방이 바람 소리로 가득 차 귀가 먹먹한 가운데에도 유달리 선명한 마렉의 음성, 섬뜩한 예기에 김선혁이 반사적으로 드본의 고삐를 잡아채며 창을 내질렀다.
쾅.
언제 생겨난 것인지도 모를 거대한 검 한 자루가 짓쳐 들다 창에 막혀 깨어져 나갔다.
끼에에엑!
기수와는 달리 위에서 내리찍는 엄청난 힘을 견디지 못한 드본이 비명을 지르며 곤두박질쳤다.
만약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이 지탱해주지 않았다면, 드본은 그대로 바닥과 충돌해 피떡이 되었을 것이다.
켁켁.
부드럽게 받쳐주는 바람이 사라지기 직전 간신히 정신을 차린 드본이 날갯짓을 하며 균형을 잡았다.
하지만 충격을 완전히 해소하지는 못했는지, 그 날갯짓이 힘겹기만 했다.
“역시 무리였나.”
단 한 번의 충돌로 완전히 전투력을 상실한 드본을 가만히 바라보던 김선혁이 한숨과 함께 뛰어내렸다.
“나이도 많은 양반이 강해도 너무 강한 거 아니요?”
완전히 겁에 질린 드본을 보며 그가 구시렁거리자, 마렉이 대꾸했다.
“이만하면 충분히 기다려줬다고 생각하네.”
마렉은 그다지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만약 또 같은 짓을 할 거라면, 이 자리에서 그리핀의 날개를 잘라버릴 걸세.”
“애꿎은 짐승한테 괜한 화풀이 하지 마시오.”
적당히 맞받아친 그가 드본을 밀어냈다.
“잠깐 피해 있어.”
겁에 질려 제대로 마렉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있던 드본이 작게 울었다.
“난 괜찮으니까 다시 부를 때까지 멀리 가 있어.”
새하얀 머리통을 부드럽게 쓰다듬어주며 몇 번이나 말하니, 그제야 드본이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이제 다 된 건가?”
드본이 시야에서 사라져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었을 즈음 마렉이 말을 걸어왔다.
“대충은.”
“결투 한 번 하기 힘들군.”
어깨를 으쓱해 보인 김선혁이 숨을 가다듬었다.
지금에 와서는 풍아가 그다지 부담스러운 스킬도 아니게 되었다지만, 그래도 연이어 사용할 정도로 그 기력의 소모가 소소한 것은 아니었다.
잠시라도 숨을 돌릴 필요가 있었다.
“쯧. 쓸데없는 데 힘을 쓰다니.”
그는 못마땅한 얼굴로 혀를 차는 마렉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자신이 풍아를 연거푸 펼치며 체력을 소모한 만큼 상대 역시 기력의 소모가 있을 거라 생각했던 탓이었다.
하지만 기대와는 다르게 마렉은 숨결 하나 흐트러진 기색이 없었다.
어. 이거 혹시 정보가 잘못된 건 아니야?
처음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마렉의 모습을 보며 김선혁은 오필리아와의 통신을 떠올렸다.
‘부왕께서는 로아힘 공의 능력을 높이 사면서도 그 능력이 홀로 나라를 뒤엎고도 남을 정도라는 것을 항상 우려하셨고, 만약에 대한 대비를 하고자 하셨소. 하지만 오랜 시간을 두고 고민해온 결과, 대륙에 다시없을 이 초인에게 약점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에 이르셨소.’
‘그럼 검성을 막을 방법은 없는 겁니까?’
마렉의 병과와 레벨까지 알아낸 아데스덴 황실로서도 이 괴물 같은 초인의 약점만큼은 알아내지 못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약점이 없다고 해서 공략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니, 현명한 아데스덴의 혈족들은 비범한 능력 가운데 비교적 처지는 능력을 찾아내는 성공했다.
‘모든 수치가 160대를 넘어서는 로아힘 공의 스테이터스 중에서 유독 지구력만큼은 110대에 불과했다오. 물론 이조차도 전성기의 레인하르트 후작을 아득히 넘어서는 비범한 것이었지만.’
그게 바로 지구력이었다.
‘하여 부왕께서는 로아힘 공을 상대하는 유일한 방법이 적군의 단단한 병진을 깨는 것과 그 맥락이 다르지 않다는 결론에 이르셨소. 보다 강하고 많은 병력으로 상대가 스스로 파탄을 보일 때까지 두들기는 것이지.’
결과적으로 김선혁이 기대했던 필승의 전략이나 거창한 약점 따위는 없었다. 오필리아가 전해준 비책은 이기는 법이 아니었다. 지지 않는 법이었다.
‘녹테인의 수많은 기사들을 떨게 만들었던 창공의 기사라면 가능할 거요.’
물론 완벽하지는 않았다.
원거리에서 공격하며 상대의 힘을 빼면 최소한 지지는 않을 거라던 오필리아의 예상은 빗나갔다. 마렉은 원거리 공격에 무방비한 녹테인의 기사들과는 달리 검도 없이 원거리의 상대를 베어낼 수 있는 괴물이었고, 드본은 마렉의 체력을 소모시키기도 전에 전투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아직은 기회가 있어.
비록 원거리에서 비교적 안전하게 상대가 지치기를 기다린다는 처음의 계획은 어그러졌지만, 아직 그의 밑천이 전부 떨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에게는 마렉에게 없는 것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땅의 정령왕이 남기고 간 생목으로 만든 창이었다.
두 발을 대지에 붙이고 있는 이상 사용자에게 끊이지 않는 활기를 제공하는 이 창 앞에서 레벨의 고하는 무의미했다. 최소한 지구력에 관해서만큼은 말이다.
문제는 마렉이 지치기 전까지 자신이 그 공격을 버텨낼 수 있느냐였다.
풍아마저 단 칼에 베어내는 검은 단 한 방만 맞아도 이 나약한 육신 따위 갈기갈기 찢겨지고 말 테니까.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에게는 또 하나의 밑천이 남아 있었다.
“드라카네이드.”
인간의 나약한 피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단단하고 강인한 전룡의 비늘, 그것이야말로 눈에 보이지도 않는 마렉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는 유일한 방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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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 뛰어난 조율자가 될 재목이라 생각했던 김선혁이 보인 무의미한 공격은 여러모로 마렉을 실망시켰다.
어쩌면 상대가 이룩한 눈부신 전공과 승리들이 저 알량한 스킬과 병과로 거져 얻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그만큼 김선혁이 보인 모습은 실망스러웠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가장 유력한 조율자 후보였다.
과도할 정도로 스킬에 의존하는 전투 스타일은 김선혁 뿐만이 아닌 모든 이방인들의 공통적인 문제였다.
자신 또한 조율자로서 수도 없이 많은 적을 상대해오기 이전에는 똑같은 모습이었으니까.
애들 장난 같은 전투 법은 차차 가르쳐서 고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은 김선혁이 금빛 용으로 화한 뒤에 더욱 확고하게 굳어져 버렸다.
저돌적이지만 서두름이 없고, 무모하지만 이를 보완할 강인함이 있다.
이 정도면 조금만 가르쳐도 당장 자신의 자리를 메우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대소환 이후로 가속화된 레벨 다운 탓에 한 시라도 빨리 다음 대의 조율자를 찾아야 하는 상황에서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건 결투에서 이 사나운 용인을 잠재우고 나서나 생각할 일, 그는 허공에 한 자루의 검을 불러냈다.
그리고 허공에서 검이 홀로 춤을 추기 시작했다.
크아아아아아.
눈 깜짝할 사이에 십여 차례나 공격을 두들겨 맞은 용인이 괴성을 질렀다. 찬란하게 빛나던 금린이 순식간에 난도질 되어 엉망진창이 되었다.
하지만 피투성이가 되었을지언정 용인의 흉성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음.”
마렉은 인상을 찡그렸다. 아무래도 큰 상처 없이 상대를 무릎 꿇리는 건 포기해야 할 것 같았다.
마렉이 또 하나의 검을 불러냈다.
“나중에 원망하지 말게. 이 또한 자네가 예상 이상으로 강했기에 일어난 일이니.”
짧은 당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마렉의 몸이 잔상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소드 댄스(Sword Dance).”
마렉이 사라지고 난 뒤 남은 것은 오직 두 자루의 검 그림자 뿐, 황홀한 검무가 시작되었다.
오색찬란한 빛을 뿌리며 홀로 움직이는 검 한 자루, 마렉의 손에 쥐어진 또 다른 검 한 자루. 두 자루의 검이 용인의 주변을 맴돌며 혈화를 피워 올렸다.
“음….”
그런데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끔찍한 상처를 온몸에 입고도 용인은 좀처럼 쓰러지지 않았다.
실로 놀라운 맷집이고 회복력이었다.
하지만 단지 버티는 정도로는 승패에 영향을 미칠 수 없었다. 그저 얼마나 빠르게 결투가 끝이 나냐의 차이였을 뿐이었다.
마렉은 또 하나의 검을 불러냈다.
검성 마렉으로는 이루지 못했으나, 조율자가 되어 마침내 얻어낸 세 번째 검이었다.
그리고 또다시 검무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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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렉이 이상을 느낀 것은 막 네 번째 검을 불러냈을 즈음이었다.
수도 없이 검에 베이고 찔린 용인이 시간이 지날수록 도리어 더욱 생생해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아니, 그저 기분 탓이 아니었다. 실제로 검이 파고드는 깊이가 조금씩 얕아지고 있었다.
이제 네 자루의 검 중 용인의 비늘의 뚫고 피부에 박혀드는 건 마렉이 직접 손에 쥐고 휘두르는 검 한 자루뿐이었다.
게다가 더욱 놀라운 것은 용인의 상처가 점점 회복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깨어지고 잘려나간 비늘이 떨어져 나가고 그 위로 새로운 비늘이 돋아났고, 그렇게 돋아난 비늘은 먼저 떨어져 나간 비늘보다 훨씬 더 단단했다.
“내가 너무 슬렁슬렁 한 모양이야.”
결투에 제대로 임하지 않은 건 상대뿐만이 아니었다. 자신 역시 가급적이면 멀쩡하게 결투를 매듭짓는답시고 어정쩡하게 임했다.
하지만 상대는 그렇게 어설픈 마음가짐으로 꺾을 수 있을 정도로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이제는 인정해야 했다. 전성기의 자신이라면 모를까, 거듭 레벨 다운을 겪은 지금의 자신으로서 여유를 부릴 상대가 아니었다.
“자네의 맷집이 놀랍지만, 이제 슬슬 끝내야겠네.”
용인의 머리통을 후려쳐 물러나게 만든 마렉이 허공에 또 하나의 검을 불러냈다. 무려 다섯 번째 검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생겨난 검이 먼저 소환되었던 네 자루의 검을 먹어치웠다.
“이만 쉬게나.”
심상치 않은 기세를 느낀 용인이 흉악한 주둥이를 벌리고 유황내 나는 불길을 토해냈다.
하지만 불꽃이 완전히 피어나는 것보다 마렉의 검이 더 빨랐다.
“참(斬).”
용인의 거체를 단번에 베어내고도 남을 정도로 거대한 검이 위에서 아래로 그어졌다.
지극히 단순하고 볼품없는 동작,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조율자 마렉이 지닌 최강의 스킬이자 세상에 베어내지 못할 것이 없는 극의에 이른 참격이었다.
쩌어억.
땅이 갈라지고 하늘이 일그러졌다. 검 앞에 놓인 세상이 모조리 두 동강이 났다. 용인이 뱉어낸 화염의 숨결 역시 마찬가지였다.
크르르르.
그렇게 모든 것이 두 조각 난 세상 속에서 제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용인뿐이었다.
방금 전의 공격으로 막대한 기력을 소모한 마렉이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버럭 고함쳤다.
“스스로 정한 율법을 어길 참인가!”
전에 없는 분노가 담긴 창노한 음성이었다.
“대답하라! 용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