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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 푸어-253화 (253/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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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4.기울어진 저울의 반대편 (4)

“음.”

기사들도 편지 안의 내용이 몹시 궁금한 눈치였지만, 침묵을 미덕으로 하는 수호대의 기사들답게 호기심을 겉으로까지 표시하지는 않았다.

“황도에 통신을 연결할 마법사가 있는가.”

“황실의 마법사들 중 하나가 맹스크에 상주 중이옵나이다.”

김선혁은 지체 없이 마법사를 객실로 불러오라 말했다.

“황성과 통신을 했으면 하네.”

“바로 연결하겠습니다.”

여느 마법사들이 그러하듯 황실의 마법사는 난장판이 된 방 안의 상황 따위 거들떠보지도 않고 곧장 제 할 일에 몰두했다.

“연결됐습니다.”

마법사가 세팅한 연락석과 수정구에서 잠시 빛이 번쩍인다 싶더니, 수정구 너머에서 오필리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대는 어찌 된 것이 한 번 나갔다 하면 돌아올 줄을 모르시오.]

전적이 있으니 할 말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는 오필리아의 질책에 진땀을 흘리며 궁색한 변명을 주워섬겼다.

“그게 어쩌다 보니 일이 또 꼬여서….”

[정녕 그대는 내가 그대를 황도에 묶어두기를 바라시오?]

급기야 오필리아는 으름장을 놓았고, 김선혁은 오늘의 일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이런 일을 만들지 않겠다고 약속을 했다.

물론 오필리아는 그의 약속을 믿지 않는 눈치였으나, 더는 질책하지 않았다.

[그보다 무심한 그대가 이리 연락을 준 걸 보니, 편지를 읽은 모양이오.]

묻기도 전에 먼저 용건을 헤아려 이리 이야기를 꺼내니, 한참 동안 진땀만 뻘뻘 흘려대던 김선혁으로서는 반갑기만 했다.

“대체 어떻게 아신 겁니까?”

[궁금한 것이 많겠지만 이는 그대가 돌아오면 모두 풀릴 것이요.]

반색을 하고 묻자 오필리아가 지금은 정보를 어떻게 얻었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고 대답했다. 척 보니 통신 마법의 보안을 염려하는 눈치라 그도 더는 캐묻지 않았다.

어차피 그녀의 말마따나 지금 중요한 건 정보의 출처나 정보를 얻은 경위 따위가 아니었으니까.

[일찍이 부왕께서는 로아힘 공이 황도 내에 머무는 것만으로도 얻는 것이 적지 않다 여기셨고, 이를 위해서 상당한 융통성을 발휘하신 바가 있소.]

하기야 조율자의 의무와 제약을 생각해보면 마렉은 정상적인 귀족으로서의 생활 자체가 불가능한 자였다. 게다가 성격까지 제 멋대로였으니, 그런 자를 황도 안에 묶어두려면 보통 귀족 대하듯 해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마도 쉽지는 않았으리라.

절대적인 군주의 권위를 위해 귀족들의 세를 억제하던 군주에게는 더더욱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테오도르는 특혜를 베풀어서라도 검성이라는 자를 잡아둘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던 모양이다.

마렉의 진정한 능력을 어렴풋이나마 인지한 김선혁으로서는 납득할 만한 결정이었지만, 한 편으로는 단지 경지에 오른 기사라는 이유만으로 베풀기에는 지나치게 큰 특혜이기도 했다.

기본적으로 아데스덴의 용인술(用人術)은 서로가 주고받는 것이 있어야 성립하는 거래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런데 마렉만이 유일하게 일방적으로 특혜를 받기만 했으니, 한 번도 제대로 된 능력을 보여주지 않은 초인의 무엇을 보고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그런데 그 의문에 대한 해답이 오필리아가 보낸 편지에 적혀 있었다.

- 친애하는 그대에게.

마렉 슈나일 로아힘의 레벨은 68, 이는 제국 내에 존재하는 상급 기사들의 평균 수치인 40레벨을 아득히 초월하는 것으로 제국에서도 손에 꼽히는 기사인 레인하르트 후작조차도 54레벨에 불과하다는 점을 보았을 때 놀라운 경지라고 볼 수 있소. 그러니 가급적이면 검성과 검을 맞대는 일을 피하되, 만약 여의치 않다면 반드시 나에게 연락을….

놀랍게도 아데스덴이 인재를 판단하는 근거는 레벨이었다. 이방인들 사이에서나 통용될 기준이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튀어나왔으니 놀라지 않는 게 도리어 이상한 일이었다.

놀라운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편지에는 마렉의 레벨뿐이 아니라 병과까지 기입되어 있었다.

마렉의 병과는 ‘검주(Sword Master)’였다. 단지 의지만으로 검을 형상화해 상대를 압박할 수 있는 검성에게는 더 없이 잘 어울리는 병과였다.

마렉의 정보를 알았다고 해서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었다.

마렉은 레벨이 높을 뿐이 아니라 병과마저 최상위일 거라 짐작되는 특수 병과였고, 이는 결투를 앞둔 그에게는 그다지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단지 한 가지 위안거리가 있었다면, 마렉의 힘이 지금 이 순간에도 빠르게 쇠락하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부왕께서 로아힘 공을 처음 보았을 때, 그의 레벨은 분명 92였소. 하지만 대소환이 일어난 직후 그는 무려 10 이상의 레벨이 하락하였고 지금에 와서는 그보다 못한 68에 불과하게 되었소.]

오필리아는 레벨의 하락이 노화로 인한 것이라 여긴 모양이지만, 김선혁의 생각은 달랐다.

대소환 직후 갑작스럽게 일어난 레벨 다운, 그리고 급작스럽게 후계자를 찾는 마렉의 행동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마렉은 지금 죽어가고 있었다.

그게 이 세상이 부여한 조율자로서의 운명이 다하였기에 미루어두었던 죽음이 성큼 다가온 것인지, 그도 아니면 마렉의 명이 다하였기에 세상이 새로운 조율자를 찾는 것인지 까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가급적이면 먼 훗날 그대와 로아힘 공의 결투가 성사되기를 바랐으니, 이는 해가 지날수록 로아힘 공의 힘이 쇠락하는 반면, 그대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성장해나갈 것을 알았기 때문이오.]

다만 확실한 건 지금 이 순간에도 마렉의 힘이 빠르게 쇠락하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렉의 레벨은 무려 70에 육박했고, 그와의 격차는 너무도 컸다. 그리고 그 격차를 메우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쩌면 패배는 기정사실인지도 몰랐다.

만약 그가 혼자였다면 말이다.

[하지만 일은 이미 벌어졌고, 언제까지고 그대를 탓하고만 있을 수도 없을 노릇. 하여 나는 부왕께서 만일을 대비해 남겨두신 비책을 알려줄 생각이오.]

그리고 오필리아는 그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

다음 날, 아침 동이 터오기도 전에 맹스크 영지에 손님이 찾아왔다.

“대공.”

“롤랑 경. 오랜만이군.”

한때 그리핀도르의 기사였으나 지금은 아덴버그 제국의 기사로 전향한 장 마리 드 롤랑과 그리핀 드본이었다.

“대체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습니다. 일단 명령 받은 대로 최대한 서둘러서 오기는 했는데.”

얼마나 서둘러서 날아왔는지 평소 겉치장을 중시하는 롤랑의 꼴이 말이 아니었다. 척 보니 자세한 사정 따위는 듣지도 못하고 무작정 맹스크까지 날아온 게 분명했다.

그마저도 며칠 전에 미리 출발하지 않았다면 시일을 맞출 수 없었을 거라 푸념하는 롤랑에게 김선혁이 잠시 치하의 말을 건넸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제 방문이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일 뿐입니다.”

허영심 강한 롤랑은 무려 대공씩이나 되는 자가 한껏 자신을 추켜 세워주니 꽤나 기분이 좋은지, 연신 웃음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롤랑의 웃음은 길지 않았다.

“오늘 하루만 경의 그리핀을 빌리겠다.”

갑작스레 그가 드본을 빌려 쓰겠다 말할 줄은 상상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드, 드본은 갑자기 왜….”

그리핀 라이더의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고국마저 버린 롤랑이다. 그의 요구가 반가울 턱이 없었다.

“몇 날 며칠을 쉬지 않고 날아온 놈이라 당장은 쉬어야 합니다.”

원거리 비행의 피로를 핑계 삼아 요구를 거절하는 롤랑에게 김선혁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나 또한 와이번 라이더, 그 정도쯤은 알고 있으니 걱정 말게.”

거절의 여지조차 주지 않는 그 단호한 대꾸에 롤랑은 몇 번이나 항의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핀의 현재 주인은 김선혁이었고, 롤랑은 단지 라이더로서 그리핀을 빌려 타는 입장에 불과했다. 원주인이 아예 달라는 것도 아니고 단 하루만 빌려 쓰겠다는데 끝까지 고집을 피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드, 드본이….”

“드본. 괜찮지?”

크르릉.

롤랑의 말을 깡그리 무시한 그가 날개 접은 괴수에게 다가가 친한 척을 하니, 드본이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머리를 부비며 애교를 떨어댔다.

그 어디에도 롤랑을 신경 쓰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아….”

평소 애지중지하며 관리했을 괴수마저 자신을 외면하자 롤랑은 충격을 받은 얼굴이 되었다.

“혹시라도 위험한 건 아니겠지요?”

그러고도 미련이 남는지 롤랑은 꼭 드본이 상하는 일이 없도록 해달라며 몇 번이나 부탁했다.

“노력은 해보겠다.”

물론 돌아오는 대답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애매한 것이었고, 롤랑은 이제 완전히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쉬고 있게나. 나는 잠시 이놈과 함께 날아볼 생각이니.”

김선혁이 안장에 오르자 드본이 길게 울부짖으며 힘차게 날갯짓을 했다. 마치 처음부터 드본을 타고 다녔던 것처럼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드본….”

그 모습에 또 한 번 충격을 받은 롤랑이 현기증이라도 느끼는지 잠시 휘청거렸다.

**

드본과의 짧은 비행을 통해 한동안 잊고 있었던 비행의 감각을 되찾은 김선혁은 그 이후로 방 안에 틀어박혀 스스로의 컨디션을 끌어올리는 데 최선을 다했다.

오늘만큼은 용살자가 되어버린 줄리앙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았고, 오로지 마렉과의 결투만 몰두했다.

“끄응. 쉽지 않네.”

가상의 마렉을 상대로 이런저런 시도를 해보았지만 결과가 영 신통치 않았던 모양이다. 눈을 감았다 떴다를 반복하는 그가 연심 한숨을 내쉬었다.

무려 30레벨에 달하는 차이를 극복해야 하는 결투다. 가상이든 진짜든 쉽게 승리를 얻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니, 쉽고 어렵고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자신이 마렉을 상대로 이기는 것 자체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를 믿었다. 이미 무수히 많은 불가능에 도전하여 성공한 바가 있었다. 단지 차이가 있었다면 난이도의 차이였을 뿐이다.

“난이도가 높을수록 보상이 큰 법.”

김선혁은 높은 벽에 좌절하는 대신 도리어 더욱 강한 의지를 보였다.

“오필리아한테 공략법까지 받았는데 실패하는 건 안 될 말이지.”

이제 승패는 스스로가 얼마나 공략법을 충실히 따를 수 있느냐에 달려 있었고, 그는 조금이라도 확률을 올리기 위해 가상의 결투에 몰입했다.

“대공이시여.”

너무 집중을 했던 탓일까.

“시간이 되었나이다.”

수호대 기사의 음성에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약속했던 결투의 시간이 되어 있었다.

“으다다닷.”

얼마나 오랫동안 같은 자세로 있었던 것인지, 관절이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굳은 관절과는 달리 그의 표정은 제법 자신에 차 있었다.

아무래도 심상 속에서나마 만족할 만한 결과를 이룬 모양이었다.

“채비를 돕겠나이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수호대 기사들 중 하나가 들어와 그가 갑주를 걸치는 것을 도와주었다.

“필시 과격한 싸움이 될 겁니다. 이리 갑주를 헐겁게 조이면 결투 도중에 큰일 나고 맙니다.”

꼼꼼한 손놀림이 과연 평생을 검과 갑주와 함께 한 기사다웠다.

“고맙네.”

완벽하게 무장을 마친 그가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보고는 만족스러운 얼굴을 해 보였다.

“부디 무운이 있기를.”

“그럼 돌아와서 보지.”

절도 있게 군례를 취해 보이는 기사를 일별한 김선혁이 문밖으로 나서자, 기다리고 있던 수호대의 기사들이 검을 들어 보였다.

“전승의 이름 앞에 또 하나의 승리가 있기를!”

오필리아의 명령을 받은 것인지 수호대의 기사들은 더 이상 그를 만류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들이 목숨 바쳐 지켜야 하는 황실의 일원이 검이 닿지 않는 곳에서 변고를 당하지 않기를 바라며 건승을 빌어주었을 뿐이었다.

“다녀오겠네.”

그렇게 기사들의 배웅을 받으며 드본에 오른 김선혁은 곧장 하늘로 날아올랐다.

쐬에에엑.

기분 좋은 바람 소리와 함께 주변의 풍경이 밀려나고, 순식간에 맹스크 성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어져 버렸다.

“이쯤이 적당하겠군.”

그렇게 맹스크 성에서도 한참이나 떨어진 곳에 도달한 그는 넓게 펼쳐진 황무지를 보며 천천히 고도를 낮췄다.

“음?”

그리고 마침내 착륙한 김선혁은 자신이 결투 시간은 정했지만, 장소는 알려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리고는 난감한 표정이 되었다.

“뭐, 부르면 알아서 찾아오겠지.”

짧게 중얼거린 그가 서서히 기세를 끌어올렸고, 그에 화답이라도 하듯 머나먼 맹스크 성 쪽에서 특유의 날카로운 기세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희미하게만 느껴지던 기세가 조금씩 가까워진다. 그리고 어느 순간이 되자 보이지 않는 검이 바로 턱 아래 겨눠진 것처럼 예기가 선명해졌다.

“장소도 정하지 않았는데 용케 잘 찾아왔군.”

그때는 이미 마렉이 코앞까지 다가온 뒤였다.

“그리 요란하게 날 부르는데 모를 턱이 있나.”

전날 그가 보였던 자신감에 기분이 상한 뒤로 내내 그 상태였던 것인지 마렉의 음성은 칼로 찌르듯 날카로웠다.

“약속은 지키시오.”

“자네야말로.”

짧게 한마디씩 주고받은 김선혁과 마렉이 서로를 마주 보고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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