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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 푸어-252화 (252/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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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3.기울어진 저울의 반대편 (3)

먼저 한 이야기를 다 이해하기도 전에 또 다른 이야기가 튀어나와 온통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고, 대화가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혼란이 가중되었다.

“당신도 그랬다고?”

한마디 질문에 수도 없이 많은 의문이 담겨 있었다. 마렉은 그중에서도 가장 큰 의문 하나를 먼저 풀어주었다.

“나 또한 자네처럼 이 세계의 손님이었지.”

지나치게 많은 이야기를 들었던 탓일까. 어느 순간이 되자 김선혁은 도리어 덤덤해지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대소환이 일어난 건 200년 전이라고 알고 있는데.”

지금의 대소환이 일어나기 200년도 더 전에 먼저 이 세상을 찾은 손님들이 있었다. 그들은 평등을 기치로 걸고 큰 난을 일으켰으나, 수많은 군주와 초인들에게 억눌려 결국은 모조리 처형당하고 말았다.

“혹시 내가 모르는 대소환이 또 있는 거요?”

그들이 만들었던 수많은 이기(利器)와 이념(理念)들은 혹세무민한 것이라 하여 권력자들에 의해 모조리 폐기되어버렸고, 지금에 와서는 그들이 정말로 이 세상에 머물다 가긴 한 것인지조차 모호한 지경이 되었다.

“자네가 알고 있는 대로일세. 마지막 대소환은 200년 전이었네.”

그런데 그렇게 완벽하게 사라져버린 줄 알았던 과거의 존재가 200년이라는 시간을 초월해 갑작스레 눈앞에 나타났다.

“그럼….”

“나는 200년 전에 일어났던 대소환의 생존자일세.”

그게 바로 마렉이었다.

“하. 뭐야. 그게.”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럼 우리가 이 빌어먹을 세상에 영문도 모르고 떨어져 그렇게 개고생을 한 게,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세상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는 거잖소.”

마렉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김선혁은 그 불편한 침묵이 긍정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대체 왜?”

그는 물었다.

이 세상에도 잘난 초인들이 수도 없이 많이 존재했다. 칼 한 자루로 일천의 대군을 홀로 돌파하는 기사들이 대륙에만 수백 수천 명이었고, 손끝에서 일으킨 작은 주문으로 온갖 이적을 일으키는 마법사들이 또 수백 수천 명이었다.

만약 정말로 이 세상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그들만으로도 충분했다. 굳이 다른 세상에서 평범하게 잘 살고 있던 이들까지 불러올 이유가 없었다.

“만약 내가 이겨서 줄리앙을 당신의 후계자로 받아들여야 한다면, 그때는 어떻게 할 작정이었소? 줄리앙은 이방인이 아니오.”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마렉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대화는 여기까지일세.”

풀어야 할 의문은 아직도 산더미였건만, 마렉은 더 이상 그와 대화를 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 이상의 진실이 알고 싶다면, 그만한 책임을 감수하게.”

결국은 의문을 풀고 싶으면 자신의 후계자가 되라는 말이었다.

“지금 장난치는 거요?”

차라리 처음부터 아무것도 몰랐다면 모를까. 기껏 의문만 생기게 만들어놓고 대답은 제대로 해주지도 않고, 멋대로 대화를 마무리 짓는 마렉의 태도는 정말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럴 거면 뭐 하러 얘기를 꺼냈소.”

지긋지긋했다.

진실이 코앞에 다가설 때마다 자격이니 책임이니 운운하며 말을 얼버무리는 작태에는 넌덜머리가 났다.

마치 눈이 가려져 앞만 보고 달려야 하는 경주마라도 된 듯한 기분이었다. 바로 곁에서 뭐가 지나갔는지도 모르고 다른 이가 정해준 골인지점을 향해서 달리는 꼭두각시, 그런 건 이제 사양하고 싶었다.

김선혁은 더 이상 기다릴 생각이 없었고, 진실을 당장 끄집어낼 방법도 알고 있었다.

“나는 지금 당장 진실을 알아야겠소.”

한 발 뒤로 물러선 그의 표정이 더없이 냉담하게 가라앉자 마렉이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당장 결투라도 하자는 건가?”

마렉의 말에 김선혁이 도발적으로 턱 끝을 들어 올렸다.

“못할 건 또 뭐요.”

잠시 탐색의 시선이 오고갔다.

마렉은 그가 진심인지 아닌지 떠보듯 한참이나 그의 눈을 뚫어져라 바라보았고, 그는 기꺼이 제 진심을 내보였다.

고오오오.

폭급한 전룡의 기운이 순식간에 풀려나 온 방 안을 휘젓고 다녔다. 마렉 역시 지지 않고 칼처럼 예리한 기세를 풀어 사나운 용의 기운이 자신을 넘볼 수 없도록 하였다.

두 초인은 단 한 걸음도 물러섬이 없었고, 그 바람에 애꿎은 방안의 집기들만 요란스러운 소리를 내며 깨어져 나갔다.

쨍그랑.

“대공이시여!”

문밖에서 다급한 고함소리가 들려온다싶더니, 대답을 채 하기도 전에 금빛 갑주를 두른 기사들이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대공을 모셔라!”

그들은 방 안을 가득 채운 두 초인의 기세에 잠시 혼란스러워 했을지언정 자신들의 의무를 잊지는 않았다.

철컥. 철컥.

듣기 거북한 철갑의 마찰음이 들려온다 싶은 순간, 이미 김선혁의 주변에는 인의 장막이 생겨났다.

“수호대 발검!”

상대는 검으로는 따를 자가 없다 알려진 검성이자 제국의 당당한 공작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호대는 검을 뽑아드는 데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흡!”

한 줌 호흡과 함께 검을 뽑아든 기사들이 기어이 마렉을 향해 검을 겨누고 검력을 끌어 올렸다.

당장 검광이 흩뿌려지고 누군가가 피를 뿜으며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 방 안은 두 초인과 기사들이 뿜어대는 기세로 완전히 엉망진창이 되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입니까!”

“물러서시오! 이곳은 대공이 계신 곳! 누구도 대공의 허락 없이는 이 안에 들어설 수 없소!”

이 안의 소란이 저 밖에까지 퍼져나갔는지, 저 멀리서 실랑이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곳은 맹스크요! 최소한 무슨 일인지 정도는 알려주어야 하지 않겠….”

“같은 말을 반복하게 하지 마시오! 물러서시오!”

방 안도 방 바깥도 엉망진창이었다.

하지만 이 모든 소란의 원흉인 김선혁과 마렉은 일말의 요동조차 하지 않았고, 자신들의 앞을 가로막은 금빛 갑주 너머로 상대를 노려보았을 뿐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자네,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군.”

열리지 않을 것 같이 굳게 다물려 있던 마렉의 입술이 떨어졌다.

“가장 빠른 길을 두고 굳이 돌아갈 필요는 없으니까.”

김선혁의 대답에 마렉이 혼잣말을 내뱉었다.

“가장 빠른 길이라….”

아무래도 그의 말이 지나치게 광오하게 들렸던 모양이다. 마렉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어쩌면 빨리 가려다 영영 발이 묶이는 수가 있네. 그때 가서 후회해봐야 늦은 일일 걸세.”

만약 자신에게 패배한다면 꼼짝없이 조율자의 운명을 받아들여야 하니, 신중하게 결정하라는 의미였다.

“글쎄. 그래도 내 눈에는 아직도 그 길이 지름길로 보인다오.”

단기간 내에 자신이 갑자기 강해진다거나 승패가 뒤바뀔만한 일이 생길 것 같지는 않았다. 굳이 더 이상 시간을 끌 이유가 없었다.

“어떻게 할 거요? 당장 여기서 끝을 보겠소? 아니면 자리를 옮기겠소?”

그의 질문은 상대가 물러설 여지자체를 주지 않는 일방적인 것이었다.

“자리를 옮기지. 손님으로 찾아와 주인의 성을 부숴놓는 건 예의가 아닐 테니.”

칼처럼 날카롭게 날이 섰던 마렉의 기세가 순식간에 잦아들었고, 김선혁 역시 그에 맞추어 기세를 거두어들였다.

“수호대. 물러나라.”

그의 말에 수호대가 검을 거두었다. 하지만 호위대형을 풀지는 않았다.

“두 번 말 하게 하지 마라. 물러나라. 수호대.”

방금 전과 같은 폭급한 기세는 더 이상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말의 무게가 가벼운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황가 수호대의 기사는 마치 준비했던 것처럼 그에게 대답했다.

“폐하께서 말씀하시기를, 대공께서는 때로 엉뚱한 일을 벌이기도 하는데, 그게 하나같이 위험한 일이니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목숨으로라도 막으라 말씀하셨나이다.”

서릿발 같은 표정으로 수호대의 기사를 노려보던 김선혁이 오필리아라는 말에 움찔 몸을 떨었다.

“외람되오나 제가 보기에 지금이 바로 그 목숨을 바쳐야 하는 순간이 아닌가 싶나이다.”

이번에는 말문이 막힌 건 그였다. 설마 오필리아가 이런 상황까지 예견하고 당부를 해두었을 줄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다.

“차후 지엄하신 대공의 명에 거역한 죄, 달게 받겠나이다.”

진심 어린 말에 김선혁이 한숨을 내쉬는데, 한 발 물러나 있던 마렉이 피식 웃었다.

“아무래도 여제께서는 자네와 내 결투를 바라지 않으시는 모양이군.”

마치 약이라도 올리는 듯한 태도에 그가 와락 인상을 찡그렸다.

수호대의 기사들을 억지로 물리고자 한다면 못할 건 없었다. 다소 이들의 입장이 곤란해지긴 하겠지만, 지금은 그보다 진실을 알아내는 게 더 중요했다.

잠시 고민하던 그가 결정을 내리고는 수호대의 기사를 물리려고 했다. 만약 상대가 품속에서 황실의 직인이 찍힌 봉투를 꺼내들지 않았다면 기사의 명예를 운운해서라도 저들을 물리쳤을 것이다.

“폐하께서는 정히 대공께서 생각을 달리 바꾸시지 않으신다면, 이 편지를 꺼내 보이라 하였나이다.”

“으음.”

뭔가 나쁜 짓을 하다가 아내에게 걸린 듯한 기분이라 다소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그는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 마렉에게 잠시 기다려줄 것을 부탁했다.

“가내가 평안해야 두루 마음이 평안한 법. 기다리겠네.”

다른 이들이 개입한 순간 조율자의 진면목을 숨기고 다시 눈치 없는 노기사로 돌아온 마렉이 이죽거렸다.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요.”

한숨을 내쉰 그가 편지의 봉인을 뜯어냈다.

“폐하께서 뭐라고 하시든가.”

편지를 보고는 그대로 굳어버린 그를 보며 마렉이 물었다. 그런데 그 말투가 이미 반쯤은 결투가 물 건너갔다고 여기는 기색이 역력했다.

김선혁은 대답하는 대신 가만히 손을 들어 잠시 더 기다릴 것을 부탁하고는 편지를 계속해서 읽어나갔다.

“흠.”

그리고 마침내 편지의 가장 마지막 부분을 읽은 그가 고개를 들었다. 그런 그의 시선이 똑바로 마렉을 향했다. 그런데 그 눈빛이 어딘지 모르게 남달랐다.

“놀랍군.”

“뭐가 말인가?”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오필리아의 편지를 소중히 품 안에 갈무리했을 뿐이었다.

“아무래도 결투를 잠시 미뤄야겠소.”

“그럴 것 같았네.”

마렉은 당연히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이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하도록 하….”

“내일 이 시간.”

그런 마렉에게 김선혁이 단호하게 말했다.

“성 밖에서 기다리고 있겠소.”

오필리아의 만류로 결투를 무한정 미룰 것 같았던 그였지만 정작 결투의 날짜는 생각보다 일러도 한참은 이른 내일이었다.

“자네 표정을 보니, 점점 그 편지의 내용이 궁금해지는군.”

“궁금할 것도 많소. 부부간의 편지가 무에 그리 궁금하다고.”

“부부간의 편지라….”

잠시 인상을 찌푸린 마렉이 물었다.

“고작 안부 인사 정도라면 왜 자네의 표정이 그렇지?”

“뭐가 말이오?”

천연덕스러운 그의 대답에 마렉의 표정이 한층 더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지금의 자네는 마치….”

파고들 듯 예리한 마렉의 눈빛이 그를 향했다.

“이미 결투에서 이기기라도 한 것 같은 얼굴이지 않은가.”

김선혁이 저도 모르게 제 얼굴을 쓸어 만졌다.

“내가 그랬소?”

스스로도 느껴질 정도로 말려 올라간 입매, 하지만 그는 굳이 표정을 다잡지 않았다.

“공이 그렇게 느꼈다면 그랬었나보지.”

그 자신감 넘치는 태도가 얄미울 지경이라 어지간해서는 표정 변화가 없는 마렉이 사나운 얼굴을 해 보였다.

“내일 찾아오도록 하겠네.”

방을 나설 때 보인 투기가 어찌나 농밀한지 수호대의 기사들이 반사적으로 검력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하지만 정작 김선혁은 마렉이 얼마나 사나운 표정을 지어보였는지 따위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설마 이런 식으로 도움을 받을 줄이야.”

그저 품에 갈무리했던 편지를 다시 꺼내보며 감탄스러운 얼굴을 해 보였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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