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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2.기울어진 저울의 반대편 (2)
김선혁은 중부를 떠나기 전, 박준민을 불러 레벨이 70을 넘기 전에는 절대로 마왕을 찾지 말라고 당부했다. 용사는 몇 번이나 알았노라 다짐을 했고, 그런 용사가 섣불리 서부로 향했을 리는 없었다.
용사가 서부로 향했다는 건 스스로의 레벨이 70을 넘어섰다는 이야기나 다름이 없었다.
하기야 그가 중부를 떠날 당시에도 용사는 레벨 50을 바라보고 있는 상태였다. 용사의 유별난 성장 속도를 감안해 보면 다섯 달이나 시간이 지난 지금쯤 70레벨에 도달했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70레벨에 도달한 용사가 과연 어느 정도의 힘을 지니고 있을지는 그로서도 알 수 없었다.
죽음마저 조롱하는 그 괴물 같은 재생 능력과 완전히 각성한 성검의 보조를 받는다면, 모르긴 몰라도 몸을 빼내지 못할 정도로 마왕에게 무참하게 패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아니, 설령 패한다고 해도 성검이 용사를 되살릴 테니, 걱정할 건 없었다.
그런데 도대체 왜 이렇게 가슴이 갑갑한 것일까.
김선혁은 영문 모를 불길함에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이미 용사는 서부로 향했고, 이곳은 용사에게 닿기에 너무 멀었다. 지금으로서는 그저 용사가 무사히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오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이후 중부의 전선에 관련된 소식이 들어오면 즉시 보고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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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실의 인물들을 지근거리에서 호위하는 이들답게 황가 수호대의 기사들은 정보력이 남달랐다. 김선혁의 당부가 떨어지자마자 대륙의 정세를 낱낱이 알아온 것이다.
“개전 초기에 큰 피해를 입어 현재 전선을 밀어낼 여력이 없다 알려진 북부의 아리아스 왕국과 나르혼 왕국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왕국들이 공세로 전향했다고 합니다. 동원된 병력의 수만 해도 약 117개 연대, 21만에 달하며, 기사단과 마법사단을 비롯한 정예들 역시 3천 이상 투입되었다고 합니다.”
국력이 최고조에 오른 아덴버그가 동서남북의 방위를 포기하고 병력을 최대한 뽑아냈다고 가정할 때, 평균적으로 약 5만 명 정도의 부대를 가용할 수 있을 거란 분석이 있었다.
이는 황실이 보유한 동서남북 중앙군과 황도를 방어하는 방위군에 귀족들의 사병까지 감안한 숫자로 나라의 근간이 흔들리는 위난이 아니고서야 절대로 동원되지 않을 ‘만약’을 가정한 숫자에 불과했다.
그런데 이번 공세에 동원된 병력의 수가 무려 21만이란다. 동부의 패자로 떠오른 아덴버그 제국을 순식간에 무너트릴 수 있는 어마어마한 병력이었다.
“중부가 아직도 그 정도의 여력이 남아 있었나.”
하물며 그 병력을 뽑아낸 게 오랜 전쟁으로 기력이 쇠할 대로 쇠한 중부의 왕국들이었던 터라 놀라움이 더 클 수밖에 없었다.
“교국에서 칼을 뽑아 들었습니다. 대영주들 중에 이번 전쟁에 적극적으로 임하지 않는 자는 파문(破門)하겠다는 교황의 공문이 각국에 전달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아….”
신전의 영향력이 미미한 동부와는 달리 중부는 예전부터 종교로부터 자유롭지 않았고, 마기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성력임이 밝혀진 지금에 와서는 중부의 왕국들 전체가 교국의 식민국이라도 된 것처럼 눈치를 보게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교국이 파문을 선언한다는 건 작게는 사회적으로 고립이 된다는 것이요, 크게는 마물과 마수가 흩뿌리는 마기로부터 스스로를 지킬 수단을 완전히 상실한다는 뜻이었다.
“대영주들이 휘하의 영주들을 닦달해 상당한 병력을 얻어냈고, 거기에 자신들의 병력과 용병들을 더 해 전선으로 보낸 모양입니다. 사실상 이번 공세에 동원된 병력들 중 절반 이상은 귀족들의 사병과 대영주가 고용한 용병들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미쳤군. 대체 어떤 놈이 이번 작전을 입안한 거지? 중부는 공세 한 번에 나라를 걸 작정인가.”
중부는 지금만 해도 대영주들의 힘으로 간신히 나라의 근간을 유지 중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군소 귀족들의 병력을 더 빼내고 치안을 유지하고 있던 대영주마저 병력을 전선으로 보내고 나면, 겨우 억눌러두었던 혼란의 불씨가 되살아날 수도 있었다.
운이 좋아 이번 공세에서 원하는 만큼의 소득을 얻는다 하더라도, 나라 전체의 치안이 극도로 악화되는 것만큼은 피할 수가 없었다. 최악의 경우 전쟁에서 큰 피해를 입은 몇몇 왕국들은 안에서부터 무너져 내리고 말 것이다.
김선혁의 말에 수호대의 기사가 부연 설명을 했다.
“당장 전사자들을 메우는 건 둘째 치고 기나긴 전쟁으로 인해 각국의 재정과 치안 상황이 한계에 달한 상황입니다. 지금이 아니라면 더 이상 기회가 없다고 보는 게 차라리 맞을 겁니다.”
결국은 궁지에 몰린 중부의 왕국들이 돌파구를 찾기 위해 사력을 다한 공세를 펼친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미치겠군.”
당장 용사를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만약 중부가 무너진다면 그다음은 동부 차례였다.
“중부의 왕국들과 국경을 맞댄 그리핀도르와 몇몇 왕국들은 벌써부터 동부가 보다 실질적인 지원 방안을 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중부가 무너지면 가장 먼저 전쟁에 휘말릴 곳들이니 발등에 불이 떨어진 기분이겠지요.”
그런 생각을 한 게 비단 김선혁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하. 이래서야 중부가 약해졌을 때, 먼저 공격하자고 나서지 않는 걸 다행으로 알아야 할 지경이야. 폐하께서는 지금의 상황에 대해 뭐라고 하시던가.”
“폐하께서도 마찬가지로 이후의 상황을 대비하기 위해 연맹국들의 최고위 회의를 발의하셨습니다.”
겨우 전쟁터를 벗어나 동부로 왔더니, 이제는 동부가 전쟁에 휘말릴 판국이었다. 이래서야 자신이 전쟁을 찾아다닌 것인지 전쟁이 자신을 따라다니는 것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일단 이기기를 바라야겠군.”
수호대의 기사 역시 무거운 얼굴로 그의 말에 공감을 표했다.
“일단 동원된 병력이 병력이니만큼, 당장 결과가 나오지는 않겠지요. 어쩌면 이번 공세로 인해 마왕의 세가 한풀 꺾일 수도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21만에 달하는 병력이 한 부대처럼 연계를 하기는 어렵겠지만, 그 규모가 대륙 역사에 유례가 없을 정도로 대단하니 승전을 기대해보는 것도 영 무리한 바람은 아니었다.
다만 영문 모를 불길함이 마음에 걸릴 뿐이었다.
준민아. 네 어깨에 대륙의 평화가 달려 있다.
용사, 용사 하더니 정말로 대륙의 안위를 걸고 싸움에 임하게 된 용사를 떠올린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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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로도 계속해서 전선의 상황이 속속 날아들었다.
[정체 중인 일부 전선을 제외한 모든 전선 진격 중.]
[용사 박준민, 마수 열다섯을 격퇴하고 3만의 마물들을 격파. 빠르게 서진 중.]
[각국의 마법사단이 준비한 원거리 광역 마법이 전선 너머를 무차별 폭격 중. 마물들의 증원 눈에 띄게 둔화.]
[북방 기병대 3만, 파죽지세로 진격. 남서부 지역 일부 평정.]
막상 공세를 시작하자 우려와는 다르게 승전보가 이어졌다.
중부의 지휘관들은 결코 서두르는 법이 없이 차근차근 마왕의 피조물들을 박멸해나갔고, 용사 박준민은 그렇게 마물들이 쓸려나간 대지를 정화하여 원래대로 되돌리고 있었다.
벌써부터 상당히 많은 지역에서 마왕의 영향력을 제거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내가 괜한 걱정을 했나.”
하루가 멀다하고 날아드는 승전보에 김선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중부의 왕국들이 사활을 걸고 자국 내의 내로라하는 초인들과 명장들을 대거 투입한 전쟁인데, 아무래도 자신이 지나치게 상황을 민감하게 받아들였던 모양이다.
계속해서 날아드는 승전보에 이대로라면 중부의 왕국들이 빠르면 반년 이내에 오염된 대지의 3할 이상은 수복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마저 생겨나기 시작했다.
[혼돈의 전령이라 스스로를 자칭하는 이가 서남부에 출몰했으나, 미르하치의 대족장 다륜과 그 수하의 기병들이 격전 끝에 격퇴. 혼돈의 전령은 도주.]
심지어 마왕의 최측근이라 할 수 있는 혼돈의 전령마저 패퇴했다는 소식이 들려올 즈음이 되니, 내내 신경이 곤두서 있던 김선혁도 조금이지만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마렉. 궁금한 게 있어서 그런데 뭣 좀 물어봅시다.”
그날 이후로 세속적인 관계를 벗어나게 된 김선혁과 검성은 서로를 이름으로 부르며 편히 대하게 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당장 둘이 둘도 없는 친우가 되었다거나 신뢰관계가 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서로의 위치가 지닌 특수함으로 인해 세속의 작위나 명성으로 상대를 대우하는 게 무의미하다고 여겼을 뿐이었다.
“말하게.”
그래도 정체가 까발려진 마당에 더 이상 숨길 게 없다고 생각한 것인지 마렉은 그의 질문에 비교적 대답을 잘 해주는 편이었다.
“당신과 같은 조율자가 각기 동서남북에 있다면, 왜 서쪽의 조율자는 마왕을 그대로 두는 거요.”
전부터 궁금했다. 만약 세상의 균형을 해칠 자를 배제하는 것이 조율자라면, 마왕은 서부의 균형을 송두리째 무너트린 존재였다. 그런데도 서쪽의 조율자라는 이는 마왕을 방치하고만 있으니, 도대체 그게 어떤 이유인지 갑갑할 노릇이었다.
“혹시 마왕이 벌인 짓거리가 아무것도 아니란 말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소. 셀 수도 없는 사람들이 마기에 잡아먹혔고, 현재도 수많은 이들이 죽어 나가고 있소. 내가 조율자라면 가장 먼저 마왕부터 찾아 목을 비틀 거요.”
다소 과격하기까지 한 김선혁의 말에 마렉이 건조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혼돈이 세상에 깨어나지 않게 봉인을 지키고 있던 자가 서쪽의 저울추였다네.”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그 설마가 맞네. 마왕이 혼돈을 손에 넣었다는 건, 이미 서부의 저울추가 더 이상 조율의 의무를 이어나갈 수가 없는 상황이라는 뜻이겠지.”
“하지만 그때의 마왕은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약했을 텐데?”
마왕이 본격적으로 세를 불리기 시작한 건 온전한 혼돈을 손에 얻고 난 뒤부터였다. 그 이전의 마왕은 대륙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하기에는 턱없이 능력이 부족했고, 그런 마왕에게 조율자가 당했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정확하게 마왕이 무슨 수를 써서 혼돈을 얻은 것인지는 나도 알 수 없네. 나라고 해서 과정을 전부 지켜본 건 아니니까. 단지 지금의 상황에 비추어 결과를 추측해봤을 뿐이지.”
“아무리 그래도 당신들 같은 괴물에게 원하는 것을 얻을 방법이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요.”
암수건 계략이건 그것도 상대가 어느 정도여야 통하는 법이다. 만약 서쪽의 조율자가 동쪽의 조율자와 비슷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면, 마왕은 어떤 방법으로도 혼돈을 얻지 못했어야 정상이었다.
“자네는 파격적이지만, 명석한 편은 아니군.”
갑작스러운 마렉의 혹평에 김선혁은 표정을 찌푸리면서도 가만히 다음 말을 기다렸다.
마렉 같은 자가 뜬금없이 인물평을 하고 싶어진 게 아니라면 괜한 이야기를 꺼냈을 리가 없다 여긴 것이다.
“자네는 내가 자네를 관찰하고 균형에 해로운 자가 여겨지면 제거하기 위해 접근한 것이라 말했지.”
그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그 생각이 여전히 변하지 않았음을 표현했다.
“하지만 그건 틀린 말이네. 나는 자네가 위험한 인물인지 아닌지 판단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네.”
“그럼 정말로 검을 겨뤄볼 생각으로 오기라도 했다는 거요?”
마렉은 고개를 저었다.
“그럼 대체 왜 접근했소.”
그의 질문에 마렉이 입을 열었다.
“내가 자네를 찾아온 건.”
속을 알 수 없는 조율자의 눈빛이 똑바로 그를 향했다.
“자네가 내 후계자로 적합한 인물인지를 판단하기 위해서였네.”
이건 또 무슨 뜬금없는 소리인지 김선혁이 얼빠진 얼굴로 물었다.
“갑자기 그런 이야기를 해주는 이유가 뭐요.”
“나도 조건을 걸겠네.”
이번에도 마렉은 대답을 해주는 대신 엉뚱한 이야기를 꺼내 들었다.
“만약 결투에서 자네가 진다면, 나의 후계자는 맹스크의 여백작이 아닌 자네가 되는 걸세. 그 정도 조건은 돼야 서로 형평성이 맞지 않겠나.”
단순히 승리의 조건을 이쪽에서만 건다는 건 마렉의 말대로 형평성에 맞지 않았다. 상대에게 무리한 요구를 내걸었으니, 자신 역시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받아들이겠소.”
그의 대답에 마렉이 조금이지만 만족스러운 얼굴을 해 보였다.
“하나만 더 묻겠소. 왜 나를 후계자로 염두에 뒀던 거요.”
마렉의 말대로 김선혁은 파격적이고 과감하기는 하지만 그다지 명석한 편은 아니었다. 그가 특출난 건 오로지 전장에서 적을 상대할 때뿐이었다. 그 외에는 그다지 의욕이 있는 편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해서 재기가 번뜩이는 것도 아니었다.
만약 아데스덴 혈족의 전폭적인 지원이 없었다면 그는 주변에 휘둘려도 엄청나게 휘둘렸을 것이다.
그런 김선혁은 스스로가 생각하기에 그다지 조율자라는 임무에 맞지 않았다.
“질문이 잘못됐네. 왜 하필 자네였는가를 생각할 게 아니라.”
마렉은 그런 그의 의문 자체를 부정했다.
“왜 자네가 이곳에 오게 된 것인지를 먼저 생각해내야 할 걸세.”
갑작스레 머리라도 한 대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다. 김선혁은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마렉을 노려보았다.
“그게 무슨 뜻….”
“혼란스럽겠지. 이해하네.”
조율자 마렉의 건조한 얼굴에 진한 감정이 떠올랐다.
“나 역시 그러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