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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 푸어-250화 (25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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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기울어진 저울의 반대편 (1)

허공중에 불쑥 튀어나온 검은 목젖 바로 앞에서 멈춰 섰지만, 아직 안심할 수는 없었다. 검성은 아직 검을 거두지 않았고, 눈빛에 서린 예기 역시 그대로였다.

후우.

김선혁은 숨을 고르며 언제든 용인화를 이룰 수 있게 준비했다. 그럴 리야 없겠지만 혹시라도 검성이 생각을 바꿔 검을 내지를 경우 즉시 반격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검성은 검을 내지르지도 그렇다고 거두지도 않았다. 그저 서늘한 눈빛으로 한참이나 그를 노려보았을 뿐이었다.

김선혁은 작게 감탄했다. 눈앞의 검성이 자신이 알던 그 자가 맞는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눈치라고는 쥐뿔도 없고 호승심만 강했던 노기사는 더 이상 그 자리에 존재하지 않았다. 깊게 가라앉은 눈동자는 그 속을 알 수가 없었고, 무표정한 얼굴은 마치 무기물의 그것처럼 건조하기만 했다.

기세의 문제가 아니었다. 검성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기라도 한 것처럼 기질 자체가 변해 있었다.

그리고 김선혁은 이것이야말로 검성이라는 껍데기 속에 감춰져 있던 마렉이란 사내의 진짜 얼굴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잠시 탐색의 시선을 보내는 사이 목가를 파고들 듯 날카로움을 더해가던 검의 예기가 사라졌다.

“일단 앉지.”

한참 만에 입을 연 검성의 음성은 지독할 정도로 메말라 있었다.

털썩.

방금 전만 해도 자신의 목덜미에 검을 쑤셔 넣을 듯 했던 검성이었지만, 김선혁은 그런 것 따위는 기억에도 없다는 듯이 아무렇지도 않게 자리를 잡았다.

“먼저 묻겠네. 어디까지 알고 있는가.”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던져오는 질문에 김선혁이 짧게 대답했다.

“대륙 동서남북에는 각기 세상의 균형을 조율하는 이들이 있고, 그중에 당신이 담당하는 것이 동쪽이라는 것과 당신이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나이가 많다는 것 정도?”

그의 대답에 검성의 표정이 한결 더 가라앉았다.

“그리고 당신이 그리 목매달던 결투 역시 허울에 불과할 뿐, 사실 당신은 처음부터 결투 따위는 관심도 없었다는 것도 알고 있소.”

세상은 검성을 가리켜 검에 미친 기사, 자신의 검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일이라도 마다치 않는 사내라 말했다.

그리고 지금 김선혁은 그 모든 게 그저 허상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당신이 원했던 건 단지 나라는 인간이 어떤 놈인지 가까이서 지켜볼 구실이었지. 그리고 만약 내가 위험하다 싶으면 내친김에 치워버릴 생각 아니었소?”

놀랍게도 검성은 그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대략적인 건 전부 알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겠군.”

“아마 그럴 거요.”

잠시 텀을 두고 검성이 느릿느릿하게 말했다.

“누구에게 들었는지는 묻지 않겠네. 애초에 조율자라는 이름은 세상의 이면으로 밀려난 옛 존재들이나 부르던 먼지 쌓인 이름, 자네와 연이 있을 법한 옛 존재라면 필시 그녀뿐일 테니.”

검성은 용에 대해 알고 있는 듯한 눈치였다.

이 세상 모든 이들이 용의 실존을 믿지 않고 있음에도 검성은 마치 용을 직접 보기라도 한 것처럼 확신을 담아 말했고, 김선혁은 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전날 밤 용에게 들었던 조율자의 정체를 생각하면 검성이 그보다 더한 것을 알고 있다 해도 놀랄 만한 일은 아니었다.

“맹스크 가의 여백작이 내 후계자가 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도 알고 있나?”

김선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도 지금 그녀가 나의 후계자가 되기를 바라는 건가?”

검성의 음성은 기이할 정도로 깊은 울림을 담고 있었고, 그래서 한결 더 무겁게 느껴졌다.

김선혁은 검성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가만히 전날 밤 용과 나누었던 대화를 되새겨보았다.

**

“대체 검성이라는 자의 정체가 뭐지?”

김선혁은 몇 번이고 검성의 정체에 대해 용에게 물었다. 용의 말투가 마치 검성이란 비밀 많은 노기사의 정체를 알고 있었던 것 같았던 탓이다.

[나와 같은 존재들이 경계 밖 영역으로 밀려난 이후 세상의 크고 작은 어그러짐을 바로잡아왔던 이들이 있었으니.]

단지 비밀 많은 노기사의 정체가 찝찝해 캐물었을 뿐이다. 그런데 막상 들은 용의 대답은 그가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달랐으니,

[한쪽으로 기울어진 저울을 되돌리기 위해 세상이 준비한 쇠뭉치, 마침내 평형을 이루고야 마는 오롯한 저울의 일부.]

세상을 지탱하는 거대한 진실에 관한 것이었다.

[때에 따라서는 제국의 황제라 해도 목을 베어낼 수 있으나, 사사로이 세상에 관여할 수 없는 모순된 존재, 그렇기에 어떤 경우에도 관조를 잃지 않는 이 세상의 현자, 그게 바로 조율자이노라.]

그리고 김선혁은 용의 말에서 자신의 고민을 해결할 해답을 찾아낼 수 있었다.

[조율자의 숭고한 의무 앞에 놓인 그 어떤 것도 가치를 잃을 것이니, 이는 그 어떤 것보다 조율자로서의 의무가 우선하기 때문이노라.]

**

“다시 묻겠네. 진정 자네가 원하는 게 뭔가.”

건조한 음성에 상념에서 깨어난 김선혁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줄리앙에게 주어질 새로운 숙명이 기존의 모든 굴레로부터 그녀를 자유롭게 만드는 것. 그게 내가 원하는 바요.”

오직 그것만이 줄리앙이 용살자라는 얄궂은 운명으로부터 벗어날 유일한 길이라는 사실을 그는 이미 확신하고 있었다.

그런 그를 보며 검성이 눈살을 찌푸렸다. 진면목을 드러낸 뒤로 처음 보이는 표정의 변화였다.

“나는 동부를 벗어날 수도 없네. 만약 맹스크의 여백작이 나의 후계자가 된다면 그녀 역시 같은 신세가 되겠지.”

“알고 있소.”

어차피 줄리앙이 대륙 동부를 벗어날 일이 있겠냐마는, 설령 있다고 해도 최소한 자신의 손에 죽는 것보다는 나았다.

“또한 앞으로 그녀는 스스로의 의지로 이 세상에 영향을 끼칠 수가 없게 될 거네.”

“이기적이라 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저 그녀가 나와 대적하지 않게 되기를 바랄 뿐이오.”

김선혁의 얼굴은 더없이 어두웠지만, 결정을 번복하는 일은 없었다.

검성은 한참 동안이나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그를 뚫어져라 노려보았을 뿐이었다.

“후.”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검성이 길게 숨을 내뱉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네의 조건 받아들이도록 하지.”

상대가 자신의 요구를 받아들였지만, 김선혁은 웃지 않았다.

“명심하게.”

그런 그를 보며 검성이 차갑게 경고했다.

“제국의 공작 마렉 슈나일 로아힘이 평생에 걸쳐 쌓아온 깨달음은 고작 한 개의 검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정도지만, 조율자 마렉은 그 이상의 것들을 지니고 있다네. 그리고 나는 조율자로서 자네와의 대결에 임할 생각이네.”

검성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조율자로서의 자신과 은둔공작으로서의 자신을 구분하고 있었고, 그의 요구가 제국의 공작이 아닌 조율자에게 해당되는 것임을 분명히 하였다.

“혹시 세상에 관여하지 못하는 조율자의 검이 자네에게 방패막이가 될 거라 생각하지는 말게. 잠시나마 세상의 눈을 가릴 정도의 수완 정도는 익혀두었고, 나는 필요하다면 기꺼이 대가를 감수할 생각이라네.”

혹시라도 안일하게 자신에게 덤비는 것이라면 지금이라도 생각을 고쳐먹으라는 검성의 경고였다.

“각오하고 있소.”

김선혁은 바짝 굳은 표정으로 다시 한 번 확답을 해주었다.

“결투의 때는 맹스크의 여백작이 답을 내리고 난 뒤로 하도록 하지. 만약 그녀가 원하지 않는다면 오늘의 대화는 없었던 것이 될 테지.”

“이미 편지를 보냈으니, 조만간 답이 올 거요.”

검성은 잠시 못마땅한 듯 눈살을 찌푸려 보이고는 자리를 떠났다.

[어쩌면 저 자는 자신의 운명을 마뜩치 않게 여기고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그가 홀로 남자 용이 말을 걸어왔다.

[그런데도 그대는 그녀에게 조율자로서의 운명을 강요할 생각인가.]

검성이 몇 번이나 물어왔던 질문, 용 역시 같은 것을 물어왔다.

“최소한 죽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그리고 그 역시 이번에도 같은 대답을 해주었다.

[만약 그대가 진정으로 이를 원한다면 나는 관여하지 않으리라.]

탄식과도 같은 음성에 그가 물었다.

“정말 조율자가 되면 용살자의 운명은 사라지는 거지?”

[세상의 저울추는 절대로 한 쪽으로 치우침이 없으니, 만약 그대의 뜻대로 일이 이루어진다면 대적자의 운명은 온데간데없게 되리라.]

용의 확답을 듣고도 조금도 기쁜 마음이 들지 않은 것은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결국 후회할 수밖에 없을 거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방법이 없었다.

용기사와 용살자가 서로를 적대하는 것은 뱀이 개구리를 잡아먹고 늑대가 돼지를 잡아먹는 것과 다르지 않은 본능이었다.

그리고 결국 잡아먹히는 쪽은 줄리앙이었다. 지금의 그녀는 용살자로서 아직 완전한 힘을 각성한 게 아니었으니까.

“그나저나 마지막 시험을 앞두고 일이 이렇게 됐으니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야?”

용살자를 제거하는 것이 용기사로서 스스로를 입증하는 마지막 시험이었다. 그런데 만약 줄리앙이 조율자가 되어 기존의 운명을 벗어나게 된다면 용살자는 더 이상 존재하게 되지 않는 것이니 시험의 결과가 어찌 나올지 알 수 없었다.

[나로서도 알 수 없다.]

용은 줄리앙이 아닌 또 다른 대적자가 태어나게 될지, 그도 아니면 생각지도 못한 엉뚱한 결과가 튀어나올지 자신도 알 수 없다 말했다.

“일이 어찌 되건 간에 넌 조금 더 기다려야겠네.”

[때가 무르익었으니 그 기다림은 길지 않을 터, 설령 그 시기가 예상보다 길다 한들 천 년을 기다렸는데 잠시 더 기다리지 못할까.]

반려의 독단적인 결정에 길길이 날뛸 거라 여겼던 용은 뜻밖에도 고분고분하기만 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만약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용까지 날뛰어대면 그는 정말로 힘들어질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용 역시도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모든 것을 내려놓았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대가 염려해야 할 것은 따로 있노라.]

“나도 알고 있어.”

용의 말에 김선혁이 다부진 얼굴을 해보였다.

지금은 일단 조율자로서 모든 힘을 이끌어낼 마렉과의 결투에서 승리하는 게 가장 중요했다.

**

아샤 트레일을 통해 편지를 보낸 지도 며칠이 흘렀건만 줄리앙은 그 어떤 답도 주지 않았다.

하기야 갑작스레 불어닥친 용살자라는 운명을 받아들이기도 전에 또 다른 숙명이 찾아왔으니, 쉬이 결정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김선혁은 차분히 그녀가 결정을 내리기를 기다려주었고, 다행스럽게도 검성 역시 그녀가 답을 내리기 전까지는 그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다.

하루가 더 지나고 다시 또 하루가 지났다.

“대공이시여. 황실에서 마법 전문이 도착했다는 소식입니다.”

“마법 전문이?”

문밖에서 들려오는 수호대 기사의 전언에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황실이 마법 전문까지 사용해가며 자신에게 말을 전할 거리가 무엇인지 도통 생각이 나지 않았다.

잠시 허락을 구한 뒤 수호대의 기사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여기 받으소서.”

“음.”

기사가 건네준 전문을 확인해보니, 전문은 하나가 아니었다.

하나는 황도에서 보내온 것이었고, 하나는 저 먼 중부 아스토리아에서 온 것이었다.

김선혁은 그중에서 황도에서 보내온 전문을 먼저 읽어보았다. 혹시라도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오필리아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닌가 걱정이 되었던 탓이다.

[대공께서 자리를 황도를 떠나신 뒤로, 교국에서 양방향 통신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대공의 부재로 인해 통신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 뒤로 교국에서 따로 전문을 보내왔습니다. 이에 교국의 전문 일체를 따로 첨부하도록 합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전문에는 일상적인 안부의 말과 갑작스레 전문을 보내게 된 사정만이 적혀있었을 뿐이었다.

문제는 교국에서 보내온 전문이었다.

[형님. 통신 걸어봤는데 안 계시더라고요.]

마치 저쪽 세상의 문자라도 보내듯 시시껄렁한 말투가 과연 박준민 다웠다. 하지만 그는 이 정겨운 말투를 보고도 도저히 웃을 수가 없었으니, 뒤에 이어진 전문의 내용 때문이었다.

[그래도 떠나기 전에 형님하고 대화 좀 하면 마음이 놓일 거 같았는데. 그래도 뭐 어쩔 수 없죠.]

김선혁의 표정이 바짝 굳었다.

[이제 저 마왕 때려잡으러 갑니다. 행운을 빌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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