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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 용살자(Dragon Slayer) (2)
당장에라도 분노를 참지 못해 고함을 칠 것 같던 김선혁이 털썩 의자에 주저앉았다. 고개를 숙인 그의 얼굴이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져 있었다.
“넌 알고 있었잖아.”
간신히 내뱉은 한마디는 상처 입은 짐승의 헐떡임처럼 몹시도 고단했다.
“줄리앙이 나한테 어떤 아이인지.”
하지만 그런 헐떡임도 시간이 흐를수록 잦아들다 이내 나중에 가서는 도리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런데도 왜 미리 말해주지 않은 거지?”
[미리 말해주었다 한들 지금과 무슨 차이가 있으랴.]
탄식과도 같은 음성이 이어졌다.
[과거 그대가 용의 독을 해독할 방도를 찾았을 때 이를 거부한 것은 그녀, 이는 스스로가 지닌 잠재력과 미래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던 그녀의 결정이었으니, 그 어디에도 그대가 개입할 여지는 없었노라.]
용은 그의 말을 부정했고, 그는 반박할 수 없었다.
그는 당시에도 몇 번이나 치료를 위해 줄리앙을 설득했다. 하지만 그녀가 받아들이지 않았다. 평생을 꿈꿔온 기사로서의 미래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모든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그대는 과거 그녀가 내린 결정을 번복하기를 바라는가.]
용은 묻고 있었다.
기사로서의 미래를 포기한 줄리앙과, 그와의 관계를 단절한 줄리앙, 어느 쪽이 그녀를 위해 더 나은 결정인지에 대한 질문이었다.
대답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니, 애초에 답을 내리는 것은 그가 아니라 줄리앙이었고, 그녀는 이미 결정을 내린 후였다.
[그대의 분노와 안타까움을 이해하노라. 허나 부디 바라건대 그대의 분노와 증오가 잘못된 곳으로 향하고 있음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늘 제멋대로 나타나 용건만 밝히던 용은 이례적으로 그에게 자신을 이해해줄 것을 호소했다. 용 역시 그가 느낄 심적 부담과 안타까움을 그만큼 가벼이 여기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하.”
자존심 강한 용이 이렇게까지 나오자 김선혁도 더는 화를 낼 마음이 들지 않았다.
“결국 내가 멍청해서 일어난 일이네.”
어쩌면 지금과 같은 상황을 자초한 가장 큰 이유가 스스로에게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내가 그때 그렇게 무모하게 일을 벌이지만 않았어도….”
골드레이크의 테이밍이 어렵지 않게 성공한 뒤로 자만에 빠졌다. 블루곤 역시 골드레이크처럼 쉽게 테이밍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고, 그런 안일함이 줄리앙을 중독되게 만들었다.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다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하지만 그가 이제까지 해온 그 어떤 노력도 지금의 상황을 바꿀 수는 없었다.
줄리앙은 이미 용살자로 각성했고, 한 번 각성한 이상 이를 되돌리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자신은 용살자를 제거해야 완전한 용기사가 될 자격을 얻을 수 있었다.
“후우.”
김선혁이 몇 번이고 마음이 가라앉을 때까지 숨을 가다듬었고, 마침내 평정을 되찾았다.
술에 절어 흐리멍덩했던 눈빛은 더 이상 없었다. 그의 눈빛은 총기로 빛나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죽어 있지도 않았다.
“일단 알아들었어.”
[과거의 그대였다면 결코 지금과 같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을 터, 길지 않은 시간 동안 그대가 이룬 성장이 육신의 것에 그치지 않았다는 사실에 나는 진심으로 경의를 표하노라.]
용은 그가 줄리앙을 제거하기로 마음먹었다고 생각한 것인지, 추켜세우는 음성에 안도의 기색이 가득했다. 혹시라도 그가 과거 마왕을 두고 내렸던 결단을 반복하지는 않을까 적지 않게 염려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안도하기에는 일렀다.
“나는 줄리앙을 제거한다고 말하지 않았어.”
[과거 그대가 보인 인간에 대한 신뢰가 어떤 결과를 불러왔는지 벌써 잊은 것인가!]
용이 기겁을 하며 지옥으로 변한 서부를 돌아보라며 외쳤다.
김선혁의 표정이 굳었다.
마왕의 각성을 방치했던 것은 그에게 있어 역린이나 다름이 없었다.
당시 마왕을 두고 내린 결정은 지금까지도 상당한 부채감으로 남아 있었다. 어쩌면 당시의 일 때문에 더욱더 서부에서 일어난 재난을 수습하기 위해 그리 노력을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의 그에게는 달리 선택권이 없었다.
당시의 마왕은 명백한 피해자였고, 핍박받는 이방인들을 위한다는 명분이 있었다. 게다가 먼저 나서서 마왕을 막기에는 스스로 지닌 힘과 인맥 역시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부족했다.
[과거의 일을 빌미로 그대를 책하려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대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타이르듯 부드럽게 어르는 용의 말에 그가 굳었던 표정을 애써 풀어냈다.
“그렇다고 줄리앙을 그대로 두고 볼 거라고도 말하지 않았어.”
[대체 무슨 생각인가. 대적자의 운명은 그대도 겪어보았듯이 인간이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이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서로를 위협하여 마침내 상대를 말살하고야 마는 본능과도 같은 것, 그대가 행여라도 그녀와 자신의 유대에 대해 일말의 기대감을 갖고 있다면 생각을 고쳐먹어야 할 것이다.]
용의 말 대로였다.
줄리앙과의 재회는 길지 않았지만, 그간 나누었던 깊은 유대도 대적자로서의 본능을 이기기에는 힘들다는 사실을 깨닫기에는 충분했다.
“만약 네 말이 전부 맞다면 나는 이미 줄리앙을 죽였어야 해.”
하지만 그런 용의 말에도 틀린 구석이 있었다.
[오늘의 일은 요행에 불과하니, 그대는 오늘과 같은 행운이 찾아올 거라 여겨서는….]
“그 요행이 어떻게 생겼는지 잊고 있군.”
오늘 그가 줄리앙의 가녀린 목을 비틀지 않은 것은 그 스스로의 알량한 자제심과 유대감 때문이 아니었다.
“나 혼자서는 감당 못 할 문제라는 건 인정해. 하지만 마침 적당한 인물이 있잖아?”
검성, 그 비밀 많은 노기사가 관여했기 때문이었다.
[음….]
검성에 대해 언급하자 용도 입을 다물었다.
“너 그 사람에 대해서 아는 게 있구나?”
용은 검성에 대해 뭔가 알고 있는 눈치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리 고분고분 입을 다물 리가 없었다.
“말해줘. 대체 그 사람은 어떤 존재지?”
마왕과 비견될 정도의 강자가 왜 대륙에 일어난 재앙에 관여하지 않는 것인지, 또 그 진정한 정체는 무엇인지 김선혁은 묻고 또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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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죄송할 따름입니다.”
다음 날이 되어 다시 찾아온 맹스크 가의 가신은 줄리앙이 정신을 차렸으나 아직 누군가를 만날 정도로 상태가 호전된 것은 아니라며 양해를 구했다.
김선혁으로서는 이에 화를 낼 이유가 전혀 없었다. 오히려 모양새 좋게 대면을 미루게 되었으니 바라던 바였다.
“쾌차를 바란다고 전해주게나.”
적당히 응대를 하여 돌려보낸 그가 아샤 트레일을 불렀다.
“정말 이것만 전해주면 되겠습니까? 대공께서 원하신다면 맹스크 여백작께서도 감히 거부하지 않을 겁니다.”
아샤 트레일은 그가 직접 줄리앙을 찾지 않는 것에 대해 깊은 의문을 표했다.
“음.”
대적자의 존재는 쉽사리 아무에게나 이야기할 사안이 아니었으나, 아샤 트레일은 아무나가 아니었다.
결국 망설였던 것도 잠시였을 뿐, 김선혁은 이내 자신과 줄리앙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짤막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그렇지 않아도 전날 보였던 맹스크 여백작의 눈빛이 마음에 걸리던 차였습니다.”
짧은 설명만으로 용기사라는 병과와 용살자에 대해 모든 것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전날 일어났던 소란과 지금의 그가 보이는 행동을 납득시키기에는 충분했다.
“수호대의 기사들 역시 마치 적지에라도 있는 듯 그 태세가 지나치게 삼엄하다 싶더니, 다 이유가 있었군요.”
검성의 움직임을 놓쳤던 것에 놀란 수호대가 보이는 극도의 경계 태세를 맹스크 가와의 긴장 관계 때문이라 오해한 아샤 트레일의 말이었다.
그는 오해를 풀어주는 대신 당장의 용건에 집중했다.
“줄리앙도 지금 많이 혼란스러울 거요. 아마 스스로 느낀 그 감정이 무척이나 당혹스러울 테지.”
김선혁은 용살자의 운명에 대해 까맣게 모르고 있을 줄리앙이 느낄 혼란을 염려했고, 그래서 편지를 준비했다. 아마도 이 편지를 읽고 났을 즈음이면 그녀 역시 자신에게 일어난 변화에 대해 조금은 명확하게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이 편지 목숨 걸고 전하겠습니다.”
아샤 트레일은 그가 건네준 편지를 마치 칙서라도 대하듯 소중하게 품에 갈무리했다.
“고맙소. 트레일 경.”
그의 감사 인사에 손사래를 친 그녀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물었다.
“혹시 어제 보았던 그 노기사분도 이번 일과 관련이 있는 겁니까?”
줄리앙과의 일로 다른 데 신경 쓸 겨를이 없었던 전날과는 달리 지금의 그는 제법 안정되어 있었고, 아샤 트레일의 의문을 풀어줄 여유가 있었다.
“그는 이번 일과 관련이 없소. 단지 나와의 결투 약속을 위해 이곳까지 따라온 것이지.”
“대체 누구기에 대공과 결투를….”
대공의 위치로 보나 제국 최고의 기사라는 명성을 보나, 누구보다도 그의 실력과 지위를 존중하고 있던 아샤 트레일이기에 더욱더 강한 의문을 표했다.
“은둔공작 마렉 슈나일 로아힘, 세상은 그를 검성이라 부르더군.”
어지간해서는 표정이 변하지 않는 여기사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설마 전날 보았던 노기사가 제국 최고의 검호라 불리는 검성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그랬군요. 어쩐지 범상치 않은 기세다 싶었습니다.”
역시나 감정의 조절에 능숙한 그녀답게 금세 무표정한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
“그래서 그 결투 받아들이실 생각입니까?”
하지만 일견 아무렇지도 않는 듯한 표정 뒤로 강자에 대한 투쟁심과 열의가 보이는 것을 보니 그녀는 확실히 타고난 기사였다.
‘언젠가 트레일 경과 같은 당당한 기사가 될 겁니다.’
순간적으로 어른스러운 척 재잘거리던 어린 종자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스쳐갔다. 그래서 그는 더욱더 굳게 마음을 먹었다.
“받아들여야지. 이제는 나도 꼭 싸워야 하는 이유가 생겼으니까.”
자신의 무모함으로 생긴 비극이니 수습하는 것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이었다. 이를 위해서라면 얼마나 강할지 모를 검성과의 결투도 기꺼이 감수해야 했다.
그의 속을 모르는 아샤 트레일이 그 결의에 서린 모습을 보고는 멋대로 감탄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여하간에 꼭 좀 부탁하오.”
그의 은근한 재촉에 아샤 트레일이 절도 있게 예를 표해 보이고는 방을 나섰다.
“로아힘 공.”
그녀가 자리를 뜨기가 무섭게 김선혁은 곧장 검성을 찾았다.
“공이 원하는 대로 결투를 받아들이겠소.”
이미 결투를 약속한 바 있었다지만, 지금처럼 그가 확고한 얼굴로 먼저 이야기를 꺼낸 적은 없었다.
“참으로 반가운 말이로다!”
당장에라도 결투를 하자고 조를 것 같은 얼굴로 검성이 껄껄거리며 웃었다.
“하지만 그 전에 먼저 약속해줘야 할 게 있소.”
“만약 대공이 내 검을 꺾는다면 나는 숨김없이 모든 것을 말해줄 것이다. 그러니 염려하지 말라.”
김선혁이 고개를 저었다.
“달리 또 바라는 게 있는 겐가?”
검성은 그가 부탁할 게 뭔지 조금도 짐작이 가지 않는 눈치였다.
“만약 공의 검이 꺾인다면.”
그는 더없이 진중한 어투로 요구했다.
“맹스크의 여백작을 공의 후계자로 삼아주시오.”
“그깟 알량한 작위 원한다면 넘기고말고.”
이번에도 그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말하는 후계자는 그게 아니오.”
고개를 갸웃거리던 검성이 이내 미심쩍은 얼굴로 그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의 흔들림 없는 눈빛을 보고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설마….”
돌처럼 굳은 얼굴을 해 보이면서도 검성은 아직 확신이 없는지, 눈빛에 의혹이 가득했다.
“그 설마가 맞소. 내가 원하는 건 제국의 귀족 로아힘 가의 후계자가 아닌….”
그런 검성을 보며 김선혁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세상이 마렉이란 초인에게 부여한 숙명을 말하는 거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허공에 검이 솟아나 그의 목가를 벨 듯이 짓쳐들었다. 하지만 그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검성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조율자 마렉. 내가 만약 이긴다면 줄리앙을 후계자로 삼아주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