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래곤 푸어-248화 (248/305)

00249    =========================================================================

249. 용살자(Dragon Slayer) (1)

살아생전 그토록이나 원망했던 제 조부가 모든 것을 자신에게 일임하고 떠났을 때 줄리앙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원망을 채 풀어낼 시간도 없이 떠나가 버린 친 혈육의 죽음을 안타까워했을까. 그도 아니면 마지막까지 냉소했을까.

김선혁으로서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속 여린 그녀의 마음속에 남은 회한이 깊지 않기만을 바랐을 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오는 동안 수도 없이 고민했다. 그녀가 느낄 혼란을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하지만 정작 저 멀리서 다가오는 줄리앙을 보았을 때, 김선혁은 단 한 마디 위로의 말도 건넬 수가 없었다.

검은 상복으로 작은 몸을 감싼 그녀가 다가오던 걸음 그대로 멈춰 섰다.

“아….”

반가움이 가득하던 눈동자에 혼란이 번져간다. 그리고 혼란은 마침내 불길함이 되어 그의 가슴을 옥죄었다.

덜덜.

팔다리가 떨리고 불로 지진 듯 눈가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제 몸에 일어난 갑작스러운 변화를 미처 깨닫기도 전에 가슴 속에서 밑도 끝도 없는 증오와 분노가 일어났다.

존재 자체를 위협하는 끔찍한 위기감에 현기증마저 느껴질 지경이었다.

두근두근.

미칠 듯이 뛰어대는 심장,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마음속에 일어난 살의가 순식간에 몸을 지배하고 저 작고 가녀린 목을 비틀어낼 것만 같았다.

그는 분노와 증오를 억누르고 튀어나오려는 살의를 필사적으로 도로 삼켰다.

고통스러웠다.

몸 밖을 향해 내달리다 억지로 되삼켜진 분노와 살의가 뜨거운 불길이 되어 그의 몸속을 휘저었다. 마치 오장육부가 불로 지져지는 듯한 끔찍한 고통에 저도 모르게 신음이 흘러나왔다.

당장에라도 이 몸속에서 일어난 불길을 토해내고 고통을 덜어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이 모든 분노와 증오가 향하는 것이 자신이 친애해 마지않던 어린 종자, 줄리앙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그녀가 자신을 증오와 살의로 범벅이 된 눈동자로 노려볼지라도 그는 분노를 억눌러야 했다.

사각.

그 순간 갑작스럽게 김선혁의 앞에 새하얀 선이 생겨났다. 그리고 방금 전까지 그를 지배했던 영문모를 살의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쯧.”

언제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일까. 검을 비스듬히 내린 검성이 그를 바라보며 혀를 찼다.

“또 운명이란 놈이 장난을 친 게로구나.”

노기사의 한탄이 끝이 나기도 전에 저 멀리 다가오던 맹스크의 무리 사이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영주님!”

허물어지듯 기울어가는 줄리앙의 모습이 슬로우모션처럼 스쳐갔다.

“아….”

마침내 털썩 눈 깔린 대지 위에 몸을 뉘인 작은 소녀를 본 김선혁이 소스라치게 놀라 검성을 노려보았다.

“영주님께서 정신을 잃으셨다!”

“사제를 불러라!”

그가 막 뭐라 입을 열기 전에 저쪽에서 고함소리가 연달아 터져 나왔다. 그제야 줄리앙이 단순히 정신을 잃었을 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그의 눈에 태평스럽게 걸음을 옮기는 검성의 뒷모습이 보였다.

“잘 썼네.”

수호대 기사의 말안장에 메어져 있던 검집에 착, 하고 검을 밀어 넣은 검성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헛.”

그때까지만 해도 말 위에 멍하니 앉아 검성을 바라보던 기사가 뒤늦게 검성의 손에 들려 있었던 검이 자신의 것이었다는 사실을 알아채고는 헛숨을 들이켰다.

“수호대!”

상급 기사의 호령에 수호대 기사들이 호위 간격을 좁히고, 황실의 기병들이 검성을 포위하듯 둘러쌌다.

“영주님을 성으로 모셔라!”

철컥거리는 철갑 부딪치는 소리 사이로 맹스크 사람들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그런 소란 따위는 지금 이 순간 아무래도 좋았다.

김선혁은 넋 나간 얼굴로 수하에게 업혀 성으로 실려 가는 줄리앙의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줄리앙이 왜….”

그런 그의 눈동자에 혼란스러움이 가득했다.

**

“갑작스러운 소란으로 먼 길 오신 대공께 심려를 끼쳐 송구스러울 뿐이옵나이다.”

줄리앙이 정신을 잃는 바람에 손님맞이가 엉망이 되자 맹스크 가의 가신이 나서 거듭 사죄를 했다.

“근래 들어 좋지 못한 일을 겪으신 영주님의 마음을 부디 헤아려주소서.”

“맹스크 여백작이 깨어나면 애도의 마음을 전해주게.”

김선혁은 적당히 대꾸를 해주었고, 그가 화가 나지 않은 듯하자 맹스크 가의 가신은 안도한 얼굴이 되었다.

“저분은 누구십니까?”

맹스크 가의 안내를 받아 영주 성으로 향하는 도중, 아샤 트레일이 다가와 물었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태연스러운 얼굴로 걸음을 옮기는 검성이 있었다.

아무래도 상당한 경지에 이른 그녀였던지라 찰나의 시간 동안 전면에 나섰던 검성의 존재감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나중에. 나중에 다 이야기해주겠소.”

하지만 김선혁으로서는 지금 당장 검성의 정체를 두고 그녀와 대화를 나눌 생각이 없었다. 그는 지금 줄리앙에 대한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머릿속이 터질 것처럼 복잡했다.

다행스럽게도 아샤 트레일은 이를 두고 꼬치꼬치 캐묻는다거나 그를 번잡하게 하지 않았다. 그저 짧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황가 수호대의 곁에 자리를 잡았을 뿐이었다.

“그럼 편히 쉬소서.”

안내를 자처한 백작가의 가신은 숙소를 여백작이 정신을 차리는 대로 기별을 주겠다 말하고는 그대로 사라졌다.

“하….”

숙소에 자리를 잡은 김선혁은 짙은 탄식을 내뱉었다.

“대공이시여. 로아힘 공께서 찾아오셨나이다.”

미처 외투를 벗고 자리에 앉기도 전에 검성이 찾아왔다. 그렇지 않아도 기다리고 있었던 그는 지체 없이 검성을 맞이해주었다.

“대체 뭘 한 거요.”

검성은 그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객실의 한 켠에 놓인 진열장에서 술을 꺼내들었다.

“한잔 마시겠나.”

그렇지 않아도 목이 타던 김선혁이었던지라, 검성이 내미는 술병을 거절하지 않았다.

한 모금, 두 모금.

그는 턱을 타고 흘러내리는 술을 닦아낼 생각조차 하지 않고 계속해서 술병을 기울였다.

“크윽.”

그렇게 단번에 술병의 반이나 비운 그가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술병에서 입을 떼어냈다.

“이제 좀 진정이 되는가.”

한꺼번에 독한 술을 들이킨 탓인지 취기가 순식간에 올라왔다. 그래서인지 내내 이어지던 상념과 잡념이 다소 멀어져버린 느낌이었다.

“고맙소. 한결 낫소.”

조금은 흐트러진 음성으로 그렇게 대꾸하니 검성이 술병을 받아들고는 벌컥벌컥 들이켰다.

“아까는 뭘 한 거요.”

갑작스레 나섰던 검성은 분명 무언가를 베어내기라도 한 듯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는 허공에 그어진 새하얀 선을 보았다.

하지만 검성이 무얼 하고자 했고, 또 무엇을 베어낸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단지 알 수 있는 것이 있었다면 검성이 검을 휘두른 후 끓어오르던 살의와 분노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는 것뿐이었다.

“신경 쓸 것 없는 잔재주네.”

기어이 병을 다 비우고야 만 검성은 또 다른 술병을 집어 들었다. 이번에는 방금 전처럼 단번에 마시는 대신 잔에 따라두고는 간단하게 입을 축였다.

김선혁이 뭐라 다시 물어보려는데 잔을 내려놓은 검성이 선수를 쳤다.

“그보다 대공이 먼저 이야기해줄 것이 있지 않은가?”

독주를 반이나 비우고도 검성의 눈동자는 한 점 흐트러짐이 없었다.

“대체 맹스크의 신임 여백작과 무슨 관계이기에 그리도 고약한 염(念)을 주고 받은 겐가.”

검성은 마치 그와 줄리앙 사이에 찰나 간 흘렀던 살의를 제 눈으로 보기라도 한 것 같았다.

“내가 세상사에 그리 밝은 것은 아니나, 대공과 맹스크의 신임 여백작이 꽤나 각별한 사이였다는 것만큼은 귀동냥으로 들을 수 있었네. 혹여 내가 늙어 귀가 어두워 잘못 들은 건가?”

김선혁은 검성의 앞에 놓인 잔을 빼앗아 훌쩍 들이켰다.

“각별한 사이라.”

전대 백작의 부탁으로 억지로 떠안은 어린 종자는 당시까지만 해도 언제 혹독한 전장에서 내일을 기약할 수 없던 그에게 있어 애물단지나 다름이 없는 존재였다.

하지만 그녀는 어린아이이기 이전에 당당한 군인이었고, 제 꿈을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는 훌륭한 어른이었다.

그는 그녀가 자립할 수 있을 때까지 기꺼이 맡기를 결심했다.

하지만 결국 도움을 받은 것은 어리게만 보았던 종자가 아닌 자신이었다. 그녀는 안토인 몽테뉴가 오기 전까지 영지의 살림을 도맡아 처리하며, 현지 물정에 어두운 그의 부족함을 채워주었다.

그 과정에서 보인 그녀의 우직함과 충성스러움은 지금 생각해 보아도 고맙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보답은커녕 자신의 무모함으로 인해 그녀가 해룡의 독에 중독돼는 일이 생겨버렸다. 그로 인해 그녀의 시간은 멈춰버렸고, 그는 그녀에게 평생을 갚아도 부족할 빚을 지고 말았다.

그래서 전대 백작이 떠난 뒤로 기꺼이 후견이 되어줄 것을 자처하였다. 그녀가 앞으로 맹스크의 주인으로서 필요한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도와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녀에게 닥친 비극에 대해 위로의 말을 건네지도 못했다.

“각별한 사이였다가 맞는 말이겠군.”

다시 만난 그녀는 더 이상 그가 알던 줄리앙이 아니었으니까.

그녀의 눈동자에서 타오르던 증오와 살의, 그 절대적인 분노는 서로의 존재를 부정하고 마침내 말살하고 나서야 사라질 저주받은 불꽃이었다.

줄리앙은 이 빌어먹을 세상이 그의 목에 겨눈 가장 치명적인 비수.

용살자였다.

“하지만 지금은 뭐가 뭔지 모르게 되어버렸소.”

언젠가 만나게 될 용살자라는 존재가 이방인들 중 하나일 거라 굳게 믿고 있었던 그가 맞닥뜨린 현실은 너무도 잔인하고 차가운 것이었다.

**

그 뒤로 김선혁은 더 이상 이렇다 할 대화 없이 술만 들이켰고, 검성 역시 그에게 어떤 것도 캐묻지 않았다.

눈치 없는 노기사에게도 그의 얼굴에 가득 떠오른 고통과 고뇌가 영 가볍게만 느껴지지는 않았던 것이리라.

‘주인과 객이 주고받을 염이 아니다 싶어 잠시 잔재주를 부려 그 염을 끊어놓았으나, 이는 미봉책에 불과할 뿐, 대공과 이곳의 주인 사이에 놓인 악연의 고리는 고작 한 번 칼질에 완전히 끊어질 정도로 가벼운 것이 아니었네.’

검성은 자리를 뜨기 전 상대와 피를 보고 싶지 않으면 가급적이면 빨리 이곳을 떠날 것을 권유하였다.

하지만 당장 이곳을 떠난다고 해서 줄리앙이 용살자가 아니게 되는 것은 아니었다. 검성이 증오의 염을 잘라낸 것이 미봉책이었듯이 그가 자리를 피하는 것 역시 미봉책에 불과했다.

“빌어먹을.”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욕설을 내뱉은 김선혁이 자리에 드러누웠다.

[반려여.]

“왜 하필 줄리앙이지?”

갑작스레 귀를 파고든 익숙한 음성, 용의 목소리에 그는 조금도 놀란 기색이 없었다. 마치 용이 말을 걸어올 거라고 예상이라도 한 듯한 모습이었다.

하기야 마왕의 존재를 알게 되었을 때도 그리 격노하여 나섰던 용이 대적자의 존재를 알고 나서도 아무런 말이 없을 리가 없었다.

[운명은 늘 예상치 못한 곳에 비수를 숨겨두기 마련이니, 이는 운명이 지닌 고약한 습성 때문이리라.]

그의 질문에 용이 무거운 음성으로 대답했다. 드물게 그의 어지러운 심기를 헤아리는 모습이었다.

“뜬구름 잡는 소리 하지 말고, 왜 하필 줄리앙이냐고.”

평소와 같은 용의 말투였지만, 지금은 그런 선문답을 즐길 마음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저도 모르게 날카로운 음성으로 용에게 쏘아붙이고 말았다.

[해왕(海王)이 하사한 독배(毒杯)를 견딘 자, 찬탈자의 그릇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도다.]

취기가 올라 다소 몽롱했던 김선혁의 눈동자에 번쩍 불꽃이 튀겼다.

“지금 그게 무슨 말….”

[용의 독을 뒤집어쓰고도 생을 부지하였으니, 결국은 용을 죽일 독을 품게 되었노라.]

“너 이….”

마치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양 떠들어대는 용의 음성에 그가 뭐라 말하려는데,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용이 말했다.

[대적자야말로 기울어진 천칭을 똑바로 세워 마침내 완전에 이르게 만드는 필수불가결의 존재, 이를 이겨낸다면 그대는 비로소 자격을 얻게 되리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