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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 푸어-247화 (247/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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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8.별이 지다 (4)

두말할 것도 없이 마왕에 대한 이야기였다.

“마왕 박상진, 그자라면 로아힘 공의 상대로 부족함이 없을 거요.”

검을 겨루어본 것은 아니나 김선혁은 이 검성이라는 괴물이 마왕에 못지않은 강자임을 느끼고 있었다. 어쩌면 이 심신 모두 극의 경지에 달한 노기사라면 마왕을 쓰러트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음.”

그런데 이야기를 들은 검성의 반응이 이상했다. 당장에라도 서쪽으로 찾아가겠다고 안달을 내지 않을까 했던 검성은 어쩐 일인지 그의 말에도 묵묵부답이었다.

“나는 이미 그자와의 싸움에서 모든 힘을 다하고도 패배했소. 만약 내가 로아힘 공을 만족시키지 못한다 해도 마왕이라면 공을 만족시킬 수 있을 거요.”

혹시라도 세상사에 관심이 없는 은둔공작이 마왕에 대한 소문을 듣지 못한 것일까 싶어, 지난 전투에 대해 언급하며 마왕의 강함을 알려주었다.

하지만 검성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투지로 이글거리는 눈은 분명 마왕이라는 상대에 호승심을 느끼는 게 분명한데, 꽉 다물린 입은 뭔가 걸리는 것이라도 있는 것처럼 잔뜩 비틀려 있었다.

대체 뭐가 문제인지 김선혁으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안타깝지만 내가 마왕이라는 자와 검을 겨루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걸세.”

한참 만에 입을 연 검성은 뜻밖에도 그의 제안을 거절하였다.

“혹시 마왕이 상대로 부족하다 생각하….”

“아니야. 아니야. 그런 게 아닐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검성이 고개를 저었다.

“그럼 대체 왜…?”

오로지 검을 견주겠다는 일념 하에 한겨울 내달리는 대공의 행렬을 수행원 하나 없이 쫓아올 정도로 맹목적인 검성이다.

그런 검성이 마왕이라는 좋은 상대를 보고도 모른 척한다는 게 김선혁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검성은 그 이유를 알려주지 않았다.

“만약에. 아주 만약에 대공이 내 검을 꺾는다면 그때는 말해줄 수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아무것도 해줄 이야기가 없네.”

그저 모든 것을 결투 이후로 미루었을 뿐이었다.

**

그날 이후로 김선혁은 그간 전장을 전전하느라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초인들이 즐비한 대륙에 과연 검성만이 유일한 괴물일까.

말이 되지 않았다. 대륙 어딘가에 검성과도 같은 이가 한 둘쯤 더 있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그래서 검성에게 물었다.

이 대륙에서 가장 강한 것이 누구냐고.

검에 목숨을 바친 이 노기사라면 어쩌면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해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나 역시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기 위해 평생을 헤맸지만, 아직 답을 찾지는 못했지.”

그렇게 말하는 검성은 왠지 모르게 그 표정이 복잡하였다.

“음.”

검성의 대답은 뜬구름 잡듯 모호한 것이었지만, 김선혁은 그 짧은 대답 속에서 한 가지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다.

이 대륙 어딘가에 검성에 못지않은 괴물들이 존재하는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오로지 자신의 검을 증명하기 위해 살아온 자존심 강한 노기사가 저리 대답을 회피했을 리가 없다.

혼란스러웠다.

서쪽 땅에서 시작된 재앙은 이제 서부를 넘어 중부를 위협하고 있었고, 교국을 비롯한 중부의 왕국들은 애지중지 아껴두었던 초인들까지 동원하여 전선에서 일진일퇴를 거듭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왜 대륙의 숨은 강자들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일까. 그들이 전장에 한팔 거드는 것만으로도 수시로 국경을 넘는 마수와 마물들에게 시달리는 중부의 숨통이 트일 텐데.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의문이 이어졌지만, 지금의 그로서는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약속해주시오.”

서부의 초입, 이름도 모를 평원 어딘가에서 김선혁은 검성에게 말했다.

“결투에서 내가 이긴다면, 공이 아는 걸 전부 말해주시오.”

“만약 대공이 내 검을 꺾는다면.”

짤막한 대답은 승낙이나 마찬가지였고, 비로소 그는 검성과의 결투에서 이겨야 할 보다 구체적인 이유를 찾게 되었다.

**

황도를 출발한 지 3주가 지났을 무렵, 드디어 그리운 라인펄 영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영주님!”

무리에서 떨어져 나간 기병들의 기별을 받은 라인펄의 사람들이 마중을 나왔다.

한센과 클라크, 요나슨과 잭슨. 한때 생사를 함께 했던 전우들이었다.

“아이고. 일찍도 오십니다. 그렇게 돌려보낼 때는 금방 오실 것 같더니.”

그 무렵 골드레이크를 따라 중부까지 왔던 사내들이 서운함을 토로했다. 하지만 그도 잠시였을 뿐 그들은 이내 유쾌하게 웃으며 온 영지가 떠나가라 외쳤다.

“집 나갔던 영주님께서 돌아오셨다!”

흡사 가출 청소년이 된 기분에 황가 수호대의 기사들 보기가 민망해졌지만, 기분은 썩 나쁘지 않았다.

1년 만에 돌아왔음에도 조금도 변함이 없는 사내들의 모습이 기꺼웠던 탓이다.

하지만 가만히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당장에라도 축제를 열 것처럼 떠들썩하게 외쳐대는 옛 전우들을 말려야 했다.

“상중이다. 법석 떨지 마라.”

그가 슬쩍 검은 망토를 들어 보이며 말하니, 그제야 사내들이 입을 다물었다.

아무래도 상중임을 알리는 검은 망토가 초원을 달리는 동안 눈과 먼지로 색이 바래 미처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도 아니면 오랜만에 만난 영주에 대한 반가움이 너무도 컸던 것이리라.

라인펄 영지는 그간 눈부시게 발전했다.

황실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영주의 저택이 증축되어 이제는 어엿한 성이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가 되었고, 주변을 둘러싼 마을은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번화해 있었다.

“몽테뉴 경이 수고가 많았겠군.”

이 모든 게 영지 관리인 안토인 몽테뉴의 공이라는 사실을 떠올린 그가 그렇게 말하니, 클라크와 사내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아.”

근래 들어 연이은 부고를 접했던 탓일까. 김선혁은 그들의 그런 표정이 어떤 의미인지 단번에 깨달을 수 있었다.

짐작대로였다.

줄리앙의 초빙을 받아 라인펄 영지의 관리가 되었던 노학자는 연로한 나이를 이기지 못해 몸져누운 상태였다.

“참으로 많이 늦으셨습니다.”

총기 가득하던 눈동자는 세월의 힘을 이기지 못해 탁하게 죽어버리고 난 후였다.

좀처럼 영지에 붙어있지 않는 영주 탓에 영지의 대소사를 직접 챙겨야 했던 노학자는 그동안 많이도 늙어 있었다.

“미안하오. 경에겐 짐만 떠넘겼구려.”

미안함을 담아 사과를 했더니 노학자가 초탈하게 웃었다.

”평생 갈고 닦아온 배움을 원 없이 써보았으니, 그래도 나름 즐거웠답니다.“

이계의 문물과 신문물에 대해 과도할 정도로 배타적인 황실, 하지만 오직 라인펄만이 그 모든 제약에서 자유로웠다. 그리고 노학자는 그게 퍽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그동안 수고하셨소. 경 덕분에 영지가 몰라보게 달라졌으니, 원하는 것이 있다면 말해보시오.”

노학자는 그저 정말로 자신의 공이 있다면 자신의 식솔들을 잘 보살펴 달라 말했을 뿐이었다.

그날 밤 노학자의 병세가 악화되었다.

황도에 홀로 남은 오필리아가 걱정되어 최대한 일정을 서두르려던 김선혁으로서도 자신을 위해 여생을 헌신한 노학자를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그는 3일간 자리를 지켰으며, 끝내 나흘이 되기 전에 임종하고야 만 노학자의 마지막을 배웅해주었다.

“하아.”

노학자를 보내고 난 후 김선혁은 한숨을 쉬었다. 자꾸만 주변에 있던 이들이 하나둘 떠나가니 영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는 새삼 자신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클라크와 사내들을 돌아보았다.

한창때 만나 전장을 달렸던 사내들은 더 이상 젊은이가 아니었다.

탄탄하게 다져진 근육질 육신이야 여전했지만, 세월이 녹아든 눈동자에는 연륜만이 가득할 뿐 젊은 날과 같은 치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하기야 무리도 아니었다.

험한 전장에서 평생을 살아온 이들이다. 남들보다 조금 빨리 노화가 일어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우린 아직 거뜬합니다.”

그의 시선에 담긴 씁쓸함을 알아차린 것인지, 클라크가 장난스럽게 팔근육을 부풀려 보이며 으스댔다.

“그래도 좀 불공평하군요. 저희는 팍 삭아 버렸는데 영주님은 아직도 처음 만났을 때랑 크게 다르지 않으니까요.”

요나슨이 제 이마에 잡힌 주름을 꾹꾹 누르며 불만스럽게 말했다.

그 말마따나 김선혁은 처음 이 세상에 떨어졌을 때와 비교하여 크게 변한 것이 없었다. 변한 것이 있다면 예전에는 없었던 관록과 위엄이 생겼다는 것과, 얼굴을 가로지른 세 가닥 상흔의 유무뿐이었다.

그게 용의 반려에게 주어진 특별함 때문인지, 그도 아니면 동양인 특유의 더딘 노화 때문인지는 그도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자신의 모습이 이리도 변함이 없었기에 세월을 느끼지 못했던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소 마음이 무거워졌을 뿐이었다.

“그러게. 뭐 황궁에서 혼자 좋은 거 드신 거 아닙니까?”

“그런 거 있으면 좀 나눠주십시오.”

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해서인지 떼를 쓰는 사내들의 마음이 느껴져 그가 애써 밝은 얼굴을 해 보였다.

“혼자 먹고 죽을래도 없다.”

그 장난스러운 대답에 사내들도 이내 웃고 말았다.

**

그동안 안토인 몽테뉴가 양성한 관리들이 있었기에 노학자의 부재는 크게 도드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김선혁 역시 홀가분하게 영지를 떠날 수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다시 들리겠다.”

영지를 떠나기 전 김선혁은 옛 전우들에게 자신을 기다릴 것을 당부했다. 더 늦기 전에 이 우직한 사내들에게 조금이라도 보답을 하기 위해서였다.

“언제는 뭐, 저희가 영주님 안 기다렸습니까.”

그들은 낄낄대며 그의 당부에 알았노라 대답을 해주었다.

김선혁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애써 옮기며 맹스크로 향하였다.

“왜 그렇게 보시오.”

노골적인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리니 다소 떨어진 곳에서 검성이 묘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라인펄 영지에 머무는 동안 검성은 딱히 자신의 정체를 밝히기를 원하지 않았고, 슬쩍 존재감을 숨겼다. 그 덕분인지 제국 제일 가는 초인을 앞에 두고도 영지의 인물들 중 그 정체를 알아챈 사람은 없었다.

사람들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진 검성은 영지를 홀로 둘러보기도 하고, 때로는 김선혁의 뒤를 따르며 그 대화를 엿듣기도 하였다.

그리고 지금 검성은 뭔가 감정이 복잡해 보였다.

대답은 없었다. 워낙에 이런 일이 많았던지라 이제는 익숙해진 김선혁도 더 이상 이 괴팍한 기인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았다.

저녁이 되자 검성이 찾아왔다. 초대를 받기 전에 스스로 먼저 검성이 막사에 찾아온 것은 처음이었다.

“한잔하겠나.”

별다른 짐도 없던 검성이 불쑥 내민 술병을 본 그가 어디서 난 것인지를 묻자, 노기사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창고에 많길래 하나 집어왔네.”

대공의 창고를 털었다는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황당한 검성이었다. 하지만 그깟 술 한 병에 쪼잔하게 굴 김선혁도 아니었던지라 이내 술병을 건네받고는 가볍게 한 모금 들이켰다.

어쩐지 술맛이 쓴 듯 단 듯 분간할 수가 없었다.

“뭐 고민거리라도 있소?”

검성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술병이 다 비도록 잔을 기울이다 사라졌을 뿐이었다.

**

전승대공이 라인펄 영지를 들렸다 나섰다는 소문이 돌았던 탓일까. 맹스크의 기병들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앞으로!”

이제는 더 이상 서부군 소속이 아닌 김선혁이었지만, 맹스크의 기병들은 마치 직속상관이라도 마주한 것처럼 절도 있게 군례를 취했다.

“불편함이 없도록 저희가 안내하도록 하겠습니다!”

전선에서 닳고 닳은 기병 특유의 투박한 말씨, 하지만 그 안에 담긴 경의와 선망은 숨길 수가 없었다.

그 맹목적인 선망이 과하게 보이기는 했으나, 그게 결코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폭풍의 기사 드라흔, 전승대공의 전설이 시작된 곳은 다름 아닌 서부였다. 서부의 숙련병들 중에 드라흔과 함께 전선에서 싸워보지 않은 자 없었고, 그에게 구명의 은혜를 입지 않은 이 드물었다.

만약 맹스크와 황도에 부고가 없었다면, 서부의 병사들은 기꺼이 개선식이라도 준비하여 전쟁 영웅의 귀환을 반겨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금빛 투구 꼭대기에 달린 검은 술과 늘어트린 검은 망토는 그들이 아직 상중임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켜주었기에 김선혁과 일행은 비교적 조용히 맹스크 백작령에 입성할 수 있었다.

“대공이시여.”

“아. 트레일 경.”

라인펄 영지를 대표하여 맹스크 백작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맹스크에 와 있던 여기사, 아샤 트레일이 영지의 어귀에 있다 그를 반겨주었다.

“오랜만이오. 잘 지냈소?”

아샤 트레일은 그의 대답에 작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여전히 과묵하고 말이 없는 여인이었다. 그 한결 같은 모습이 백 마디 말보다 그녀의 안녕을 알려주었기에 그는 그저 반가움에 웃고 말았다.

하지만 그도 잠시였을 뿐, 그는 이내 표정을 가다듬고는 영지의 주인을 찾았다.

“줄리앙. 아니, 맹스크 여백작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저 멀리서 맹스크의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온다 싶더니, 그 한가운데를 헤치고 신임 여백작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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