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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7.별이 지다 (3)
이제는 황실의 일원이 되어버린 전승대공은 황가 수호대의 기사들이 여제 다음으로 가장 엄중히 지켜야 할 대상이었다. 아무리 스스로 지닌 능력이 제국 제일이라 불리는 폭풍의 기사라고 해도 황가 수호대로서는 호위에 한 치도 소홀함이 있을 수 없었다.
그런 대공의 행렬 앞에 갑작스레 튀어나온 불청객이다.
당연하게도 황가 수호대의 대응이 부드러울 리가 없었다.
“감히 존엄하신 대공의 행렬을 가로막은 자여! 당장 무릎 꿇고 합당한 경의를 표하라! 그대의 정체는 그 이후에나 들을 것이다.”
수호대의 상급 기사가 앞으로 나서며 호통을 치는 동안 남아 있는 기사들이 대형을 좁히며 방패를 세우고, 불청객을 압박했다.
왕실 기사단과 중앙 기사단에 모인 내로라하는 인재들 중에서도 가장 실력이 출중하고 성정이 곧은 이들을 엄선하여 만든 황가 수호대다. 그런 기사들이 작정하고 내뿜는 기세가 호락호락할 리가 없었다.
칼처럼 벼려진 기세가 불청객을 난도질 낼 것처럼 휘몰아쳤다.
그런데 놀랍게도 불청객은 그 모든 기세를 이겨냈다. 그냥 이겨낸 것도 아니고, 너무도 태연한 신색으로 기사들의 기세를 무마해버렸다.
충직한 기사들의 안색이 더없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당장에라도 칼부림이 나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 그때 김선혁이 나섰다.
“검을 거둬라. 그는 적이 아니다.”
그의 말이 떨어지고 나서야 황가 수호대의 기사들은 기세를 거두고 검을 도로 집어넣었다. 하지만 긴장된 얼굴로 상대를 경계하는 것은 여전한 모습이었다.
“후우.”
즉위식 이후로 부쩍 엄중해진 호위에 벌써부터 갑갑증을 느낀 김선혁이 한숨을 내쉬었다. 평생을 이런 과보호(?) 속에서 살아왔을 오필리아가 얼마나 답답했을지 새삼 이해가 될 지경이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한탄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는 행렬의 이동을 가로막은 망토 뒤집어 쓴 괴한을 보며 물었다.
“그래. 여긴 어인 일이오.”
그의 말에 상대가 잠시 멈칫했다. 아무래도 뭐라 대답을 해야 할지 말을 고르는 듯했다.
김선혁은 상대의 반응을 이해할 수 있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서로 대등한 입장이었던 자가 갑작스레 대공의 자리를 꿰차 지고한 군주의 위치에 올랐으니, 얼마나 난감할까.
“로아힘 공. 일정이 빠듯하여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소만.”
괴한은 은둔공작 마렉 슈나일 로아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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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지도 못한 괴한의 정체에 황가 수호대의 기사들이 잠시 웅성거리다 도로 입을 다물었다. 제국의 기사라면 누구나 만나기를 원하나 그 성향이 은자에 가까워 만나기가 하늘의 별따기와 마찬가지라던 전설적인 검사를 만난 것 치고는 꽤나 싱거운 반응이었다.
하지만 황가 수호대의 기사들에게 있어 황족의 수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으니, 어찌 보면 이런 분위기 역시 당연한 것이었다.
황가 수호대의 기사들은 상대가 검성이라는 사실을 알았음에도 조금도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방금 전보다 더욱 대형을 좁히며 만일을 대비하기까지 했다.
과연 어떤 상황에서도 방심하지 않는 수호대다운 모습이었다.
후드를 벗은 검성은 잠시 기사들의 기세에 인상을 찌푸렸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기세를 흘려대는 황가의 기사들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여제께서 일정을 서두를 것을 명하셨던지라 이리 시간을 낭비하는 게 달갑지는 않소. 만약 다른 용건이 없다면 이대로 지나가겠소.”
김선혁이 한마디 쏘아붙여 주고 나서야 겨우 검성이 입을 열었다.
“기다리기로 약속을 하였으나, 시일이 너무 지체되는 듯하여 직접 만나러….”
한참을 끙끙거리다 겨우 내뱉은 대답은 그 끝이 잔뜩 뭉개져 있었다. 아무래도 여제의 배우자이자 대공의 위에 오른 그의 위치가 부담스러워 더 이상 하대를 할 수도, 그렇다고 해서 공대를 하자니 자존심이 상한 모양이었다.
“미안하지만 조금 더 기다리셔야겠소.”
김선혁은 이 행렬이 비텐펠트 로이엔 맹스크 백작을 추모하기 위한 황실의 행렬임을 알려주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였다.
하지만 검성은 그의 대답에도 물러나지 않았다.
“대체 어쩌자는 거요.”
다른 이들의 사정 따위는 조금도 배려하지 않는 검성의 태도에 그도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뒤를 따르리다.”
언제나 아쉬운 쪽이 굽히고 들어가는 건 만고불변의 진리였다. 지금 또한 그러했다. 검성은 기약 없는 기다림에 시달리는 대신 직접 그의 뒤를 따르며 결투를 할 기회를 찾는 것을 선택했다.
“마음대로 하시구려.”
김선혁은 그런 검성을 보며 혀를 찼다.
검으로 이룬 그 드높은 경지가 무색한 검성의 말과 행동에 완전히 정나미가 떨어진 것이다.
“출발하라.”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그가 이내 멈춰있던 대열을 다시 출발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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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혁 일행은 빠른 이동을 염두에 두고 최소한의 물자만 갖고 서부로 향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챙겨야 할 물자가 적지 않았다.
하필이면 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한겨울에 나선 길이었던지라, 혹한의 추위에 대비를 해야 했다. 거기에 더해 그 스스로가 황실의 일원이자 제국 서부를 아우르는 대공의 위에 올랐으니 야전 지휘관이었을 때처럼 막사에서 함부로 몸을 굴리는 건 자제해야 했다.
물론 그 스스로야 그런 품위 따위 안중에도 없었지만, 황실의 위엄이 걸려 있으니 마음 내키는 대로 할 수도 없었다.
그러다 보니 생각했던 것만큼 영 속도가 나지 않았다.
마음은 벌써 서부를 달리고 있는데 몸은 이제 겨우 중부를 지나고 있으니, 그로서는 답답할 뿐이었다.
어째 지위가 올라갈수록 편한 게 아니라 몸을 옭아매는 것이 많아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황가 수호대의 기사들이 황족 전용의 화려한 막사를 준비하는 것을 보며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멀찍이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되는 대로 야숙 준비를 하는 검성의 자유분방한 모습이 부러워질 지경이었다.
“드시지요.”
어느새 막사를 설치한 수호대 기사가 생각에 잠긴 그를 막사 안으로 안내했다.
고귀한 황족을 위해 특수하게 고안된 막사는 매서운 바람 부는 바깥세상과는 달리 너무도 따뜻했다.
간사한 게 사람 마음이라고 방금 전까지의 갑갑증은 금세 걷혀나가고, 황족의 호사에 만족스럽게 웃는 김선혁이었다.
“그런데 정말 저리 둬도 괜찮은가?”
그가 막사를 슬쩍 둘러보고는 밖으로 나서려는 수호대 기사를 붙잡고 방치되다시피 한 검성에 대해 물었다.
“로아힘 공께서 명성 높은 기사이자 고귀한 자리에 앉은 귀족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나, 그 명성에 비해 알려진 것이 극히 드문 분입니다. 그분께서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지 알 수 없으니, 저희로서는 만에 하나를 염두에 두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놀랍게도 황가 수호대의 기사들은 검성을 철저하게 배척했다. 이동하는 내내 가장 경지 높은 기사들을 사이에 두어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하는가 하면, 밤이 되어 휴식을 취할 때는 아예 야영지 밖에 따로 막사를 쳐주어 야영지 내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경계했다.
“그래도 날씨가 이리 추운데, 행여나 나이 든 양반이 몸이라도 축 나지 않을까 걱정되는군.”
제 멋대로인 검성의 행동이 못마땅한 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였지만,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이 한겨울 바람 매서운 초원에 홀로 야영을 하는 것을 보니 조금은 마음이 불편했다.
근래 들어 테오도르와 맹스크 백작을 연달아 떠나보내며 이런 부분에 관해서 조금은 조심스러워진 면이 있었던 모양이다.
아무리 스스로 이룩한 경지가 높다 해도 병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었고, 검성은 이 추위를 견디기에는 지나치게 나이가 많았으니까.
물론 그런 걱정은 기우였다.
경지 높은 검호라기보다는 학자에 가까운 유약한 모습이었을지언정 검성은 검성이었다. 갑작스레 내린 폭설로 인해 일행의 발이 묶였던 그날에도 검성은 홀로 불도 피우지 않고 밤을 지새우고도 멀쩡한 모습이었다.
노인네 엄청 정정하구만.
추위를 막을 것이라고 해봐야 간편한 복장 위로 걸친 그다지 두꺼워 보이지도 않는 망토뿐이었다. 그런데도 검성은 한겨울 매서운 추위에 조금도 영향을 받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더욱 놀라운 것은 따로 있었다.
기병 출신인 김선혁의 입장을 고려하여 마차도 없이 순수 기마로만 이동하는 행렬이다. 그리고 그들이 탄 말은 제국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혈통이 훌륭한 준마들이었고 혹한의 날씨에 얼어붙은 땅을 박차고 수십 킬로미터를 질주하기에 충분한 놈들이었다.
그런 준마들의 이동을 검성은 말조차 없이 맨발로 뒤따랐다. 질주하는 기마를 순수하게 제 발로 뛰어 따라잡았으니, 놀라운 노익장이었다.
그런 모습을 계속해서 지켜본 탓일까.
김선혁은 검성이라는 자에 대해 호기심을 느꼈다.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요.“
그래서 따로 자리를 마련하여 검성과 대화를 시도해보았다.
“편하게 말해도 되니까, 그 입 좀 여시오. 제발.”
굳게 입을 다물고 자신을 바라보는 태도가 답답해 그리 말하니, 그제야 검성이 입을 열었다.
“검을 겨루는 데 굳이 이유가 필요한가.”
“황도에서 기다리면 그만일 것을, 굳이 이 추운 겨울에 이 고생을 하며 날 따라다닐 것 까지는 없지 않냐는 말이오.”
이렇게 뒤를 따른다고 해서 당장 결투의 기회가 생기는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리 안달을 내는 검성의 태도를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공은 너무도 공사가 다망한 것처럼 보이더군.”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약속을 잊을 정도는 아니오.”
결투를 원하는 것은 검성뿐만이 아니었다. 그 역시 스스로 이룬 경지가 과연 이 최강이라는 호칭이 부족하지 않는 노기사에게 어디까지 통할지 궁금했다.
“가벼운 대련이라면 지금도 가능하오만.”
“검에는 눈이 없고, 적당히라는 말이 없는 법이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장 결투를 하지 못한 것은 이처럼 한 번 시작하면 반드시 끝을 보고야 말겠다는 검성의 고집스러운 면모 때문이었다.
“고집불통이군.”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겠지.”
화를 낼 줄 알았더니, 의외로 검성은 선선히 그의 말을 인정했다.
“대공은 다시 보기 힘든 강자다. 내가 조급하게 느껴졌다면 바로 그 탓이리라.”
아무리 검밖에 모르고 살아온 검성이라고 해도 떠나간 맹스크 백작과 테오도르가 김선혁에게 어떤 존재인지 신경이 쓰였던 것일까.
어쩐지 궁색하게 들리는 말에 그가 피식 웃었다.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거요?”
검성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굳이 부정을 하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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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를 나누기에 검성은 그다지 좋은 상대가 아니었고, 애초에 두 사내 사이에 공통된 화젯거리가 있을 리도 없었다.
하지만 타오르는 화톳불만 보고 밤을 지세우기에는 겨울밤이 너무도 길었다.
그래서 김선혁은 휴식을 할 때면 때때로 검성을 초대해 가벼운 대화를 나누었다.
놀랍게도 검성은 그때마다 그의 초대를 거절하지 않았다. 검으로 나누는 대화 외에는 타인과의 교류를 즐기지 않을 것 같았던 은둔공작은 의외로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고분고분한 인물이었다.
어쩌면 검만 보고 살다가 성질이 괴팍해져 사람을 어찌 상대해야 하는지 잊은 것이 아닐까.
김선혁은 무덤덤하게 화톳불을 쬐는 검성을 보다 불쑥 물었다.
“근데 나 말고도 강한 이들이 많지 않소?”
“이름이 있다 싶은 자들은 전부 겪어보았지만, 영 신통치 않더군.”
광오한 말이었지만 검성이기에 당연하게 들리는 말이기도 했다.
“다른 나라를 찾아보면 그래도 좀 있을 텐데.”
“있겠지. 하지만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건 그들이 아니라 대공이지.”
한결 같은 검성의 태도에 김선혁이 고개를 저어 보이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로아힘 공은 나와의 결투가 끝이 나고도 계속해서 강자들과 겨루겠군.”
“내 검이 꺾이지 않는다면.”
평생의 신념이 담긴 그 말에 불현듯 김선혁이 뭔가 떠올랐다는 듯이 말했다.
“그럼 내가 한 명 추천해도 되겠소?”
검성은 대답하는 대신 열기 띤 시선으로 그를 재촉했다.
“서쪽에 말이오.”
김선혁은 그런 노기사를 보며 씨익 웃어 보였다.
“적당한 놈이 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