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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6. 별이 지다 (2)
“서두르셔야 합니다.”
시종장이 무엄하게도 걸음을 재촉했지만, 김선혁은 이를 나무라지 않았다. 시종장의 마음만큼이나 그 역시 급했던 탓이다.
“어디로 가야 하는가!”
“치, 침소로!”
이제는 거의 뛰듯이 빨라진 그의 걸음에 시종장이 감히 더는 따라오지 못하고 멀리서 외쳤다.
그는 시종장을 뒤에 남겨둔 채 왕성의 복도를 내달렸다.
하지만 너무 늦어버렸던 모양이다.
대앵. 대앵. 대앵.
무겁게 울리는 종소리에 김선혁이 뛰던 걸음을 멈추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불길한 종소리에 마음이 더욱 급해졌다. 돌처럼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그가 다시금 복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테오도르의 침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선황 폐하께서는!”
그의 질문에 침소 앞에 대기하고 있던 시종이 고개를 떨구더니 금세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렸다.
“아….”
갑작스레 밀려오는 현기증에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달려오는 길에 들었던 불길한 종소리가 그제야 무슨 의미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부고를 알리는 종소리였다.
대앵. 대앵. 대앵.
무거운 종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리고 있었다.
“여제께서는 어디 계신가.”
스스로가 놀랄 정도로 메마른 음성에 시종이 흐느끼며 침소 문 너머를 가리켰다.
“문을 열어라.”
곧 문이 열리고 침소 너머의 풍경이 드러났다.
“오필리아….”
그리고 그곳에 그녀가 있었다.
오필리아는 우두커니 방 안에 앉아 눈 감은 제 아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철컥.
문이 닫혔다. 저 문밖 세상에서는 현왕의 죽음을 알리는 구슬픈 종소리가 계속해서 울리고 있건만, 침소 안은 너무도 고요하기만 했다.
그 고요한 세상 속에서 등 돌린 채 앉은 오필리아의 뒷모습이 오늘따라 유달리 가녀리고 작아 보였다.
“왔는가.”
여전히 등을 내보인 오필리아의 음성이 들려왔다.
임종한 아비를 목전에 둔 소녀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덤덤한 음성이었다. 그래서 김선혁은 더욱 마음이 아려왔다.
“오필리아.”
가만히 다가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차갑게 식은 손길이 제 몸에 닿았음에도 여전히 그녀는 미동도 없었다. 그저 눈 감은 제 아비가 다시 일어나기를 바라기라도 하는 것처럼 가만히 테오도르를 바라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작게 한숨을 내쉰 김선혁이 테오도르의 마지막 모습을 눈에 담았다.
아데스덴의 피에 새겨진 저주가 마지막 순간 얼마나 이 현명한 군주의 생명을 갉아먹은 것인지, 주름과 검버섯이 가득한 얼굴은 흡사 100세 노인과도 같았다.
하지만 저주로 인해 끔찍한 고통을 당했을지언정 테오도르는 마지막 순간 미소를 지었다. 주름진 입가에 번진 미약한 미소는 조금의 미련도 없는 만족스러운 것이었다.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해 왕국을 이끌었고, 오필리아라는 훌륭한 후계자를 길러냈다. 이 정도면 괜찮은 왕이었다 할 수 있지 않은가.’
살아생전 테오도르가 했던 말이다. 김선혁은 지금에 와서야 그 말이 한 치의 과장도 없는 진심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뭐가 그리 좋으신 겁니까.
남겨진 사람들이 느낄 비탄과 상실감은 안중에도 없는 듯한 테오도르의 미소가 야속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하지만 살아서도 군주로 살기를 원했고, 죽는 순간까지도 군주로 죽기를 바랐던 테오도르다.
감히 누가 있어 제 평생을 왕국의 안녕과 내일을 위해 헌신한 사자(死者)를 무책임하다 비난할 수 있겠는가.
“살아생전 고통이 극심하셨다고 하는구나.”
여전히 건조한 음성으로 입을 뗀 오필리아가 느릿느릿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나는 까맣게 몰랐으니, 참으로 고약한 딸이 아닌가.”
“오필리아.”
자조하듯 음울한 어투에 나직하게 그녀의 이름을 불러보았지만, 그녀는 그의 부름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문밖을 향해 소리쳤을 뿐이었다.
“밖에 누구 있느냐!”
“신 레인하르트 여기 있나이다!”
언제 도착한 것인지 문밖에서 레인하르트 후작의 침통한 음성이 들려왔다.
“왕국 아덴버그의 마지막 왕이시다. 역사에 다시없을 정도로 성대하게 그 마지막을 기려야 할 것이니, 당장 모든 것을 멈추고 국장의 절차를 시작하라!”
그렇게 지시를 내린 그녀가 다시금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혼자 있고 싶구나.”
방금 전보다 한층 메말라 잔뜩 갈라지는 음성에 한참이나 그녀를 바라보던 김선혁은 조용히 자리에서 물러났다.
**
신임 여제의 엄명 아래 국장은 성대하게 치러졌다.
바로 직전에 있었던 대관식으로 인해 아직 황도를 떠나지 않았던 제국의 귀족들과 각국의 특사들은 다시금 자리에 참석해 한 시대를 풍미했던 현명한 군주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살아생전 왕권 강화를 위해 평생을 바치고, 치세에 전념하였던 현왕 테오도르 티베리우스 로 아데스덴은 제국의 기틀을 마련하고 수많은 귀족들의 애도 속에서 고이 잠들었다.
오필리아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 모든 과정을 직접 챙기고 또 지켜보았다.
“먼 길 오느라 수고하였으니, 여독이 풀릴 때까지 언제까지고 황도에 머물러도 좋다.”
그리고 마지막 절차가 끝이 났을 때, 참석해준 모든 이들을 치하해주고는 자리를 떴다. 마지막 순간까지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는 굳건한 모습이었다.
“허어. 대범하다고 하셔야 할지, 그도 아니면….”
식이 끝나고 자리에 모인 귀족들은 그 흔들림 없는 여제의 모습에 복잡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말과는 달리 귀족들은 제 혈육의 죽음 앞에서조차 동요가 없는 여제에게 적지 않게 질린 기색이었다.
“여제께서 저리 굳건하시니 제국의 앞날이 참으로 밝구려.”
그들은 전대 군주보다 몇 배는 독하고 실천력 강한 여제의 통치에서 위축될 자신들의 미래를 떠올리고는 우울한 얼굴이 되었다.
쇠와 같은 피가 흐르는 여인이라 하여 벌써부터 ‘철혈의 여제’라 부르는 이들마저 생겨났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김선혁은 알고 있었다.
그녀는 피 대신 쇳물이 흐르는 그런 냉혈한이 아니었다.
단지 스스로가 짊어진 짐의 무게를 알고 있기에 타인들 앞에서 일말의 흔들림도 내색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피곤하구나.”
국장을 치른 그날마저도 여느 날처럼 국정의 크고 작은 부분을 챙기다 느지막이 침소에 돌아온 오필리아는 얼핏 보기에는 평소와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오필리아.”
하지만 아비를 잃은 딸이 멀쩡할 리가 없었다.
그는 침대에 앉은 가녀린 여인을 가만히 안아주었다. 그녀는 그를 밀쳐내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손 뻗어 마주 안아오지도 않았다.
그저 우두커니 앉아 그가 하는 대로 제 몸을 맡겼을 뿐이었다.
“내 앞에서까지 굳이 그렇게 애쓰지 않아도 돼요.”
김선혁은 그 작은 등을 수도 없이 쓸어주며 작게 속삭였다.
하지만 오필리아는 여전히 슬픔을 내보이지 않았다. 평생 동안 군주로 길러져 마침내 여제의 자리에 오른 그녀는 현명했지만, 반대로 바보 같을 정도로 서툰 면이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그녀의 무감정한 모습은 어찌 슬픔을 표현해야 할지 방법을 알지 못해 어쩔 줄 모르는 아이의 무지와도 같은 것이었다.
그는 더 이상 그 어떤 말도 해주지 않았다. 그저 품에 안긴 여인의 작은 어깨와 등을 몇 번이고 쓸어 만져 주었을 뿐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오필리아는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았지만, 가슴께에 열기가 확 하고 와 닿았다. 그리고 금세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작은 떨림조차 없는 어깨, 흐느끼는 소리도 없었다.
모든 것을 배웠지만 슬퍼하는 법은 배우지 못한 군주는 그렇게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며 제 슬픔을 달랬다.
눈물로 흥건하게 젖었던 가슴팍에 물기가 말라갈 때 즈음, 오필리아가 슬며시 그를 안았다.
“그대는 부왕께서 내게 남기신 선물이다.”
그녀의 목소리는 잔뜩 잠겨 웅얼거리듯 잘 들리지 않았지만, 김선혁은 분명하게 들을 수 있었다.
“그대가 있어서 다행이다.”
그 미약한 음성에 그는 다시 한 번 그녀를 힘주어 끌어안아 주었다.
**
국장은 끝이 났지만, 황도의 시민들과 귀족들은 한동안 검은 상복을 입고 떠나간 군주를 애도하였다. 떠들썩하던 분위기는 착 가라앉아 지난 축제의 열기 따위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사람들이 추모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에도 대륙의 정세는 숨 가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녹테인과 그리핀도르를 비롯한 몇몇 국가들이 동부 왕국 연맹과 결별을 선언하고 반 아덴버그 제국적 성향의 연맹을 결성하였다.
그들은 중부의 맹주 아스토리 교국과 물밑에서 접촉을 하며 대전쟁 이후 대륙에 찾아올 대격변의 시대를 대비하였다.
그렇게 몇몇 국가들이 아덴버그와의 대립각을 세우는 동안에도 제국은 날로 융성해지고 있었다.
먼저 신임 여제의 즉위식에서 이베리아 대공의 위를 수여 받았던 이베리아 연합의 디에고 벨라스케스 집정관이 제국의 속주가 되었음을 만천하에 공표하고, 공식적으로 제국의 위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베리아 령으로 거듭난 이 도시 연합은 아덴버그와 다소 멀리 떨어진 거리를 강력한 해군과 선단을 통해 극복하였고, 당초 다른 왕국들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공고하게 제국 본토와의 유대를 조성하였다.
제국의 남부 해역에 인접한 영지들은 조공품과 교역품을 실어 나르는 이베리아의 선단으로 인해 빠르게 발전했고, 그들의 부와 번영이 다소 낙후되어 있던 제국 남부의 발전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아덴버그와 국경을 직접적으로 맞댔거나 어떤 식으로든 관계를 맺은 왕국들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아덴버그 제국이 융성해질 것은 뻔했고, 시류에 편승하든지 아니면 맞서든지 결정을 내려야 했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이제껏 독립된 왕국으로 존재해왔던 유구한 역사는 그들로 하여금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하게 하였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시간이 많지 않았다.
이베리아의 선단을 통해 본토로 흘러 들어간 막대한 자금이 아덴버그가 새롭게 군대를 양성할 군자금으로 사용될 거라는 소문이 은밀하게 퍼져나간 탓이었다.
동부 왕국들 중 절반이 힘을 합쳐도 겨우 대등해질 정도로 압도적인 초인 전력을 지닌 제국이 이제는 군대마저 그 격에 걸맞은 규모로 재편하려고 한다.
사태를 관망하고 있던 왕국의 수뇌부들이 조급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또 하나의 사건이 터졌다.
중부에서 한창 교국을 도와 마왕군과 격전을 펼치던 북방의 기병들이 이 신생 제국의 탄생을 지지하고 나선 것이다.
그들은 전승대공이 북부의 형제임을 강조하며, 아덴버그가 위난에 처할 시 기꺼이 힘을 보태줄 것이라 선언하였다.
결단을 보류하고 있던 왕국들도 상황이 이쯤 되자, 대륙의 판도가 완전히 새롭게 바뀌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동부에 탄생한 제국은 이미 대륙의 중심이나 마찬가지였다.
각 왕국의 특사들은 제각각 제 나름의 계산을 갖고 제국으로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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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의 정세가 계속해서 변하는 사이, 김선혁은 잠시 황도를 떠난 상태였다. 테오도르의 국장으로 인해 채 나서지 못했던 맹스크 백작의 죽음에 애도를 표하고, 신임 여백작을 위로해주기 위해서였다.
“정말 괜찮겠어요?”
아직 완전히 슬픔을 떨쳐내지 못한 오필리아가 염려되어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그녀가 오히려 제 걱정은 말라며 그의 등을 떠밀었다.
“맹스크 백작은 살아생전 변방의 수호를 위해 대영주로서 응당 누려 마땅한 호사를 마다하고 궁벽한 요새에서 평생을 바친 위인, 그런 충신의 죽음을 황실의 분위기가 어수선하다 하여 허투루 넘긴다는 것은 아니 될 말이요.”
그가 대공의 위를 받은 뒤로 반공대를 하던 오필리아의 말투가 국장 이후로 완전히 변해버렸다.
아직은 스스로도 익숙하지 않은지 그 표정과 어투가 어색했지만, 다른 이들이 없는 자리에서만큼은 이제라도 제대로 말투를 고치려 하는 노력이 꽤나 가상했다.
다른 신료들 대하듯 하던 과거에 비하면 그야말로 장족의 발전이라 할 수 있었다.
“대신 빨리 돌아와야 할 것이요.”
물론 최대한 빨리 일을 마치고 귀환할 것을 주문한 그녀였다. 아무래도 한 번 나갔다 하면 돌아올 생각을 않는 배우자가 영 미덥지 않았던 것이리라.
“다녀올게요.”
피식 웃은 그녀의 머리를 슬며시 어루만져준 그가 황가 수호대를 거느리고 황도를 나섰다.
그런데 그렇게 황도를 나서는 그의 앞을 불청객이 막아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