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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4. 검성 (2)
단단한 체구에 검 한 자루를 빗겨 맨 번뜩이는 눈의 검사, 그게 바로 김선혁이 상상했던 검성 마렉 슈나일 로아힘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본 검성은 그의 상상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팔다리가 길게 뻗은 몸은 단단하다기보다는 유연해 보였고, 눈빛은 맑았지만 결코 형형하게 빛난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심지어 검성은 검조차 차지 않은 모습이었다.
위명 높은 기사가 아닌 저명한 학자라고 해도 믿어질 모습, 그 어디에도 왕국 최강이라 불리는 검사의 강인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선혁은 눈앞의 노인을 처음 보는 순간 상대가 검성이라는 사실을 한 치도 의심할 수가 없었다.
만약 모르고 지나쳤다면 기억에도 남지 않을 평범한 노인, 하지만 실망도 없었다. 오히려 기대 이상이었다.
“음.”
마치 세상을 내려다보는 듯한 지고의 격, 놀랍게도 검성의 존재감은 마왕의 그것에 못지않았다.
아덴버그 왕국 최강의 기사, 김선혁은 무심코 그 칭호에 납득하고 말았다.
“구경은 다 한 겐가?”
저도 모르는 사이에 검성을 빤히 쳐다보았던 모양이다. 뒤늦게 자신이 실례를 했음을 깨달은 김선혁이 초로의 공작에게 사과했다.
“아. 초면에 실례했습니다. 선혁 라인펄 김 드라흔입니다.”
그는 일단 상대의 나이와 명성을 생각해 적당히 자세를 낮추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태도가 비굴했던 것은 아니었다.
정중한 말투와는 달리 그의 태도는 꽤나 도전적이었다.
“마렉 슈나일 로아힘. 그게 내 이름일세.”
왕국에서도 몇 되지 않는 공작들의 인사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간략한 인사가 오고 가고, 김선혁이 검성의 맞은편에 앉았다.
“용건만 간단히 말하도록 하지.”
검성은 그다지 말을 돌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성격으로 보였다. 그런데 그 정도가 심해도 너무 심했다.
“검을 겨뤄보고 싶네.”
달그락.
찻잔에 찻물을 따르던 시종이 놀라 몸을 떨었다. 그 바람에 찻주전자의 주둥이가 잔에 부딪혀 듣기 거북한 소음을 냈다.
“죄, 죄송합니다.”
보통 귀족들의 대화도 아닌 무려 공작씩이나 되는 이들의 대화다. 시종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황급히 사과를 했다.
하지만 둘 중 어느 누구도 시종을 쳐다보고 있지 않았다.
“검 말입니까?”
두 사람은 오로지 상대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검이 됐든 창이 됐든 뭐가 됐든 간에 한번 겨뤄봤으면 좋겠구만.”
파격적인 검성의 화법에 김선혁이 속으로 혀를 찼다.
‘조심하게. 은둔공작은 검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신경 쓰지 않는 미치광이, 자네의 신분이 섭정 폐하의 반려라고 해서 결코 사정을 봐주는 일은 없을 테니까.’
레인하르트 후작의 말대로였다.
검성은 검밖에 모르는 미치광이가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인사도 채 제대로 나누기도 전에 이리 거북스러운 용건부터 꺼내들었을 리가 없었다.
“제가 만약 거절한다면 어찌하실 겁니까?”
어지간히도 상식을 무시한 검성의 태도에 그가 슬쩍 심술을 부려보았다.
“받아들이도록 만들어 봐야지.”
검성은 만만치 않았다.
그 아무것도 아닌 말에 담긴 압박감이 상상을 초월했다. 하지만 김선혁도 만만치 않기로는 검성에 못지않았다.
“협박입니까?”
“동기부여라고 해주면 좋겠군.”
단도직입적인 그의 말에 검성이 덤덤하게 대꾸했다.
덜덜.
찻물을 엎는 바람에 접객실을 빠져나가지도 못하고 테이블을 닦고 있던 애꿎은 시종만 이 살벌한 대화에 끼어 몸을 덜덜 떨어댔다.
스윽.
그런 시종을 구해준 건 김선혁이었다. 당장 기절해도 이상하지 않을 시종을 발견한 그가 손짓으로 물러가라 지시했다.
천하의 검성에게 결투 신청을 받은 것 치고는 꽤나 여유가 있는 모습이었다.
“흐음.”
김선혁은 가만히 깍지를 끼고 의자에 깊게 몸을 묻었다. 그리고는 한참이나 대답하지 않았다. 검성 역시 그를 재촉하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다 식어버린 찻잔을 들고 입을 축였을 뿐이었다.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한참이나 입을 다물고 있던 김선혁이 입을 열었다.
“얼마나?”
그의 대답에 검성이 되물었다.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지금 왕도와 왕성에는 축제와 연회가 한창이었다. 그리고 자신은 축제의 주인공이었다. 오필리아는 그를 내세워 왕국 내 왕실의 권위를 더욱 공고히 하고, 동부의 왕국들에게 그 세를 과시하려 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주인공이 빠지는 건 불가능했다.
그게 아니더라도 그에게는 먼저 마무리를 지어야 하는 일이 있었다. 오필리아에게 내려진 아데스덴 혈족의 저주를 풀고 퀘이샤들의 처우를 결정짓는 것이 우선이었다.
결투는 그 이후의 문제였으니, 그 스스로도 결투 이후 자신이 멀쩡할지 상상할 수 없었던 탓이다.
그만큼 검성은 상상을 초월하는 강자였다.
이렇게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심력이 빠르게 소모되고 있었다.
겉으로는 태연한 모습이었지만, 그는 결코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속이 편하지 않았다.
최소한 마왕과 대등하다.
물론 실제로 검성이 마왕과 대등한 힘을 지녔을지는 그로서도 알 수 없었다.
대륙의 사분지일을 집어삼킨 마왕은 인세에 다시없을 재앙이었다. 하지만 마왕은 본신의 힘에 비해 정신력이 나약하기 그지없었다. 제 몸에 난 터럭만 한 상처조차도 견디지 못할 정도로 약해빠진 정신 상태는 한심하게까지 느껴질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에 반해 검성은 이미 완성된 존재였다.
굳이 검을 겨루지 않고, 드러나는 기세와 존재감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검성은 이미 겉과 속이 모두 꽉 찬 그릇과도 같았다. 그것도 감히 그 깊이와 너비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용량이 무지막지한 그릇이었다.
어쩌면 이 결투에 목숨을 걸어야 할지도 모른다. 김선혁은 본능적으로 그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하. 산 넘어 산이라더니.
마왕이라는 괴물과 이제 멀어졌나 싶으니, 이번에는 검성이라는 괴물이 튀어나왔다. 스스로가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상대의 격도 올라가니 절로 한숨이 나올 지경이었다.
“기다리겠네.”
한참 만에 검성이 입을 열었다.
“부디 그 기다림이 나의 인내심이 바닥나기 전까지이기를 바라지.”
자리에서 일어난 검성이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이렇게까지 했는데 날 실망시킨다면….”
검성의 기세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태산처럼 존재를 찍어눌러 오던 이제까지의 존재감과는 판이하게 다른 한 자루 잘 벼려진 칼처럼 날카로운 기세였다.
“그럴 일이 없기를 바라야겠군요.”
김선혁은 한마디도 지지 않았다.
기세 싸움이었다. 검을 겨루기도 전에 먼저 위축되었다간 검성의 기세에 잡아먹히고 말 거라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믿겠네.”
그의 대답에 검성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웃어 보이고는 인사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그리고 홀로 남은 김선혁은 다시금 의자에 깊게 몸을 파묻었다.
어디서 저런 괴물이 튀어나와서.
등받이와 맞닿은, 땀에 절어버린 등의 감촉이 영 불쾌하기만 했다.
**
환영 연회는 계속되었다.
하지만 김선혁은 검성과의 일을 생각하느라 연회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기계적으로 귀족들의 인사를 받아주고는 이른 시각 여독을 핑계로 자리를 뜨는 일이 반복되었고, 어느 순간이 되자 귀족들도 더 이상 그를 귀찮게 하지 않았다.
“기세를 가라앉히게. 지금의 자네는 마치 전장에 있는 것 같군.”
레인하르트 후작의 말에 그는 뒤늦게 자신이 지나치게 날이 서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괴물 같은 노인네를 만났더니, 영 마음이 싱숭생숭해서 말입니다.”
애써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라앉혀 보았지만, 곧 찾아올 대적을 앞에 둔 그의 기세는 쉽사리 부드러워지지 않았다.
“실제로 보니 어떻던가.”
“후작님께 죄송하지만, 검성과 몇 번이나 검을 겨루고 후작님께서 지금 멀쩡하시다는 게 믿기지 않을 지경입니다.”
레인하르트 후작은 화를 내지 않았다. 그저 쓰게 웃어보였을 뿐이다.
“아마 내가 더 강했다면 무사하지 못했겠지.”
상대에 비해 약했기에 살아남았다. 후작은 스스로가 검성의 전력을 이끌어내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자네도 영 자신이 없으면 결투를 물리게. 투지도 없는 상대와 결투를 할 정도로 검성은 스스로의 검을 싸구려라 여기지 않으니까.”
후작의 권유에 김선혁은 고개를 저었다.
“늦었습니다.”
지금에 와서 결투를 없던 일로 물리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벌써 도발해버렸거든요.”
레인하르트 후작이 황당하다는 얼굴을 해 보였다. 설마 그 무지막지한 괴물을 마주하고도 그가 도발을 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어쩌자고 그런 괴물을 건드린….”
“그리고 저 역시 결투에서 도망치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김선혁의 눈빛이 투지로 일렁이고 있었다.
싸움을 피해 한량처럼 살기를 원했던 이방인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생과 사가 오가는 전장을 전전하는 동안 자신은 너무도 변해버렸다.
이제는 인정해야만 했다.
자신은 이미 한 마리 싸움개였다.
그것이 투쟁심 강한 전룡의 영향인지, 그도 아니면 생과 사가 오가는 싸움에 중독되어버린 탓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면, 검성이 걸어온 싸움을 피하고 싶지 않다는 것뿐이었다.
**
연회의 마지막 날이 지나고, 오필리아는 퀘이샤들을 불러 추후의 일을 논의했다.
협상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오필리아는 결코 무리한 것을 요구하지 않았으며, 합리적인 선에서 퀘이샤들이 아데스덴 왕실을 이 땅의 주인으로 대할 것을 제안했다. 퀘이샤들은 그런 아데스덴 왕실의 요구를 모두 수락해주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일족의 새로운 어머니 나무가 자라날 한 줌 땅이었을 뿐, 그 외의 모든 조건들은 아덴버그의 제안을 따랐다.
심지어 그들은 왕국과의 공존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외침에 한손 거들겠다는 조항마저 수용하였다.
비록 방어전에 한해서라지만 상급 기사에 준하는 힘을 지닌 일천 이상의 요정 궁사들이 아데스덴 왕실의 강력한 우군이 된 것이다.
그 이후로 더 이상 아덴버그 왕국에는 귀족파와 국왕파의 구분이 무의미해지고 말았다.
가장 세가 강한 귀족파의 귀족도 감히 왕실을 거스를 수 없었고, 바야흐로 아덴버그 왕국에 절대 왕정 시대가 도래하였다.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안정된 왕국의 상황, 테오도르 국왕은 이제 때가 무르익었음을 인지하고 하나뿐인 왕위 계승자에게 정식으로 양위를 할 것을 선포하였다.
아덴버그에 새로운 여왕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중부고 동부고 할 것 없이 대륙에 위치한 모든 왕국들이 새로운 여왕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사절을 파견하였다.
아덴버그는 동부왕국 연맹의 맹주로서 밖으로는 전란에 휩싸인 중부의 왕국들에게 큰 영향력을 발휘하였고, 안으로는 연맹국들의 분쟁과 대소사를 조율하며 그 권위가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였다.
당연하게도 대관식은 그 어떤 왕국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성대하게 치러졌다.
“아데스덴의 피를 이은 왕녀여. 이름을 말하라.”
테오도르 국왕의 음성에는 힘이 있었다. 오늘만큼은 아데스덴의 피에 새겨진 저주로부터 자유로워진 듯한 모습이었다.
“테오도르 티베리우스 로 아데스덴의 장녀 오필리아 라우렐이 제게 주어진 이름이나이다.”
순백의 성장을 차려입은 오필리아가 제 아비의 앞에 무릎을 꿇고 대답했다.
“아데스덴의 오필리아 라우렐이여. 그대가 군주로서 지키고자 하는 신념은 무엇인가.”
“충성스러운 이들에게 은 한 덩어리를, 선량한 백성들에게 빵 한 덩어리를, 사특한 이들에게 철퇴를, 그것이 제 스스로 지키고자 하는 신념이옵나이다.”
대대로 이어져온 아데스덴 왕실의 맹세였다.
“그대의 신념이 왕국에 광영과 번영을 가져올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가.”
“의심하지 않나이다.”
테오도르 국왕이 엄숙한 음성으로 다시 물었다.
“그대 맹세하라. 오늘 이 자리에서 선언한 그대의 신념을 위해 평생을 살아가겠노라고 맹세하라.”
“오로지 그것만을 위해 살아갈 것임을 맹세하나이다.”
오필리아의 대답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고, 테오도르 국왕은 그런 그녀를 대견하게 바라보았다.
“아데스덴의 수장이자, 아덴버그의 적법한 지배자 테오도르 티베리우스 로 아데스덴의 이름으로 오필리아 라우렐을 왕국의 군주로 선포하노니, 강건하고 현명하고 자비로울지어다.”
테오도르 국왕이 오필리아의 머리 위에 아데스덴의 왕관을 씌워주었다.
“오필리아 라우렐 로 아데스덴 여왕 폐하 만세!”
무릎 꿇고 있던 대소신료 귀족들과 사절들이 일제히 만세를 삼창하여 새로운 여왕의 탄생을 축하해주었다.
떠나갈 듯한 함성 속에서 오필리아가 손을 들어 소란을 가라앉혔다.
끄덕.
소란이 잦아들자 테오도르가 그녀에게 작게 고갯짓을 했고, 그녀는 무언가를 결심이라도 한 듯 단호한 얼굴로 좌중을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더없이 낭랑한 음성으로 외쳤다.
“아덴버그의 새로운 군주로서 이 자리에서 선포하노라! 오늘 이후로 아덴버그는 왕국이 아닌 제국으로 거듭날 것이니, 이에 납득치 아니 한 자가 있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적법하게 이의를 제기하라!”
그때까지만 해도 대관식의 열기에 취해 잔뜩 들떠있던 왕국의 사절들이 창백하게 질려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