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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3. 검성 (1)
“드라흔, 아니 오필리아가 공의 위를 내렸으니, 이제 전승공이라 불러야 하나.”
늙수그레한 음성 그 어디에도 과거와 같은 패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오랜만에 만난 테오도르 티베리우스 로 아데스덴은 흡사 70대 노인이라도 된 양 노쇠해 있었다.
하얗게 바랜 머리는 푸석푸석했고, 주름진 얼굴은 윤기 하나 없었다. 탁한 눈동자는 더 이상 총기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오도르 국왕의 카리스마는 여전했다.
“폐하.”
만인을 내려다보는 군주의 기상에 김선혁은 경의를 표했다.
“이리 가까이 오게. 그대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구만.”
이제는 시력마저 쇠퇴해버린 걸까. 테오도르 국왕의 말에 그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처음 이 땅에 떨어졌을 때까지만 해도 아데스덴 왕실은 억지로 빚을 지워 이방인들을 부리는 악덕 고리대금업자나 다름이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자신을 훈련소에 처박아 모진 훈련을 시켰고, 용기병으로 전직한 이후로는 변방으로 내몰아 전쟁에 휘말려 들게 만들었다.
그때는 온통 왕실의 영향력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맹스크 백작과의 대화를 통해 그런 생각을 버릴 수 있었다. 그리고 왕실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 편견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데스덴 왕실은 합리적인 통치자였다.
전투에서 승리할 때마다 많은 것이 주어졌다. 그리고 그 이상으로 큰 왕실의 신뢰를 받았다. 그 어디에도 출신이 불분명한 이방인에 대한 차별은 없었다.
작위가 올라가고, 차기 여왕의 배우자라는 타이틀도 얻었다.
험악한 전장을 전전해야 했지만, 전장을 벗어나면 누구보다 고귀한 존재가 되었다. 남부럽지 않은 재산과 영지, 그리고 아름답고 현명한 아내까지.
그가 이룩한 모든 것은 사실상 테오도르 국왕의 합리적인 통치 이념에서 기인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런 테오도르 국왕이 죽어가고 있었다.
아데스덴의 피에 새겨진 저주가 이 현명하고 강력한 군주를 이리 만든 것이다.
“그런 얼굴로 보지 말게. 아직은 버틸 만하니까.”
“송구스럽습니다. 폐하.”
저도 모르게 내심이 드러났던 모양이다. 테오도르 국왕의 말에 김선혁이 황급히 사과를 했다.
국왕이 손을 휘저었다. 뼈가 앙상하게 드러난 주름투성이 손, 그의 마음이 또다시 먹먹해졌다.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나는구나.”
테오도르 국왕의 눈이 회상에 젖어들었다.
“혁혁한 공을 세운 그대였지만, 어설픈 구석이 많았지. 그런데 그런 자네가 이제는 공작이라는 자리가 어색하지 않은 거인이 됐다. 그대의 성장을 처음부터 지켜본 자로서 나는 그대가 참으로 자랑스럽고 대견하다.”
신뢰가 가득한 눈빛에는 조금도 거짓된 구석이 보이지 않았다.
“오필리아는 나 이상으로 군주의 자질이 뛰어난 재목이지만 지나치게 곧고 그 성정에 융통성이 없어 늘상 걱정했었다. 언제고 그 단단함이 독이 되어 그 아이를 궁지에 몰아넣지 않을까 염려했던 게지. 하지만 그런 걱정도 이젠 다 옛말이 되었다.”
김선혁은 불안해졌다.
“시시때때로 왕국의 서부를 유린하던 녹테인은 감히 더 이상 왕국을 도모치 못하게 되었고, 왕국은 지금 더 없이 평화롭고 융성하다. 그 모두가 섭정이 이룬 것이니, 그녀는 이미 훌륭한 왕이다.”
테오도르 국왕의 말이 마치 마지막을 준비하는 자의 말처럼 들렸던 탓이다.
“폐하.”
유언과도 같은 말을 차마 끝까지 들을 수 없던 그가 나지막이 테오도르 국왕을 불러보았지만, 국왕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평생토록 짊어졌던 짐을 모두 털어버렸으니, 지금 나는 그 어느 때보다 마음이 평화롭다.”
“폐하!”
다시 한 번 테오도르 국왕을 불렀다. 그제야 테오도르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먼 곳을 바라보는 듯했던 탁한 눈동자가 비로소 현실을 바라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오필리아에게 이야기는 들었다. 그대가 머나먼 서부에서 아데스덴의 피에 내려진 저주를 걷어낼 해법을 찾아왔다지.”
어머니 나무가 남기고 간 유산이라면 저주에 좀 먹혀 다 타버린 촛불을 되살릴 수 있었다.
“나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겠다.”
“폐하!”
예상치 못한 테오도르 국왕의 말에 김선혁이 기겁을 했다. 하지만 국왕은 손짓으로 그의 입을 다물게 만들고는 평온한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해 왕국을 이끌었고, 오필리아라는 훌륭한 후계자를 길러냈다. 이 정도면 괜찮은 왕이었다 할 수 있지 않은가.”
테오도르 국왕이 웃었다.
“군주로서도 아비로서도 후회는 없다. 마지막 또한 퍽 만족스러운 것이니, 비로소 나는 죽음 이후에야 잘 살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대는 더 이상 나를 욕되게 하지 말라.”
부드럽지만 추상과도 같은 위엄이 있는 음성이었다.
“그대가 구해온 퀘이샤들의 보물은 오필리아에게 주어지리라.”
테오도르 국왕은 자신의 사랑하는 딸 역시 피의 저주로부터 자유롭지 않으니, 그녀를 구하라 말했다.
김선혁은 그런 국왕을 몇 번이나 설득해 보았다. 오필리아에게는 시간이 많이 남아 있으니, 자신이 어떻게든 다른 해법을 찾아내겠다 말했다.
하지만 설득은 통하지 않았다.
“환영 연회에는 참석할 수 없으나, 내 마음으로 그대의 귀환을 반기니 서운해하지 말라.
대화 말미에 이르러 테오도르 국왕은 급격하게 기력이 소진된 듯 말을 잇는 것조차 버거워했다.
“이만 쉬어야겠구나. 그대는 다음에 다시 나를 찾으라. 언제고 그대와의 만남은 거절치 않을 것이다.”
국왕은 눈을 감았고, 한참을 우두커니 서 있던 김선혁은 별수 없이 물러나야 했다.
**
녹테인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아덴버그가 도약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준 전쟁영웅이자, 대륙 중부에서 벌어진 대전쟁에서 누구보다 큰 공을 세운 전승공이 돌아왔다.
당연하게도 환영 연회는 그 어느 때보다 성대하게 치러졌다.
하지만 귀족들만이 출입 가능한 연회는 김선혁의 취향과 영 맞지 않는 것이었다.
속을 숨긴 자들에게 둘러싸여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며, 같은 말을 수도 없이 반복하는 연회는 그에게 있어 고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가뜩이나 테오도르 국왕과의 일로 심란한 그인지라, 그는 다소 이른 시각임에도 여독이 풀리지 않았다는 핑계로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당연하게도 어느 누구도 감히 그를 붙잡지 못했다.
“후우.”
연회장을 빠져나온 그는 답답한 마음에 내성에 마련된 정원을 한참이나 배회하였다.
“고민거리라도 있는 게냐.”
연회 내내 표정이 미세하게 굳어있던 제 남편이 염려되어 찾아온 것인지, 오필리아가 말을 걸어왔다.
“섭정 폐하.”
“공적인 자리가 아니니라.”
그 은근한 압박에 그는 심란한 가운데에도 피식 웃고 말았다.
“오필리아.”
오필리아가 그 살가운 호칭이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표정이 내내 좋지 않은 것을 보니, 필시 폐하의 일이렷다.”
김선혁은 쉽사리 대답할 수 없었다. 아무리 그녀가 의지가 굳다 해도 아비의 생명에 관련된 이야기를 꺼내는 건 그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나 또한 수도 없이 폐하께 진언하였다. 하지만 듣지 않으시더구나.”
하지만 그의 예상과는 달리 오필리아는 이미 제 아비의 결정을 알고 있었다.
“자식 된 도리로 이를 받아들이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나, 의지를 굽히지 않으시니 답답할 뿐이다.”
금세 시름에 잠긴 그녀의 얼굴이 처연하기만 했다.
“제가 퀘이샤들을 설득해보겠습니다.”
퀘이샤들이 지닌 천년화는 하나가 아니었다. 그들이 갖고 있는 천년화는 총 셋, 만약 하나를 더 얻는다면 테오도르 국왕도 더 이상 고집을 부리지는 않을 것이다.
“설령 그대의 뜻대로 된다 하여도 폐하께서는 받아들이지 않으시리라.”
하지만 그건 그만의 착각이었다.
“내가 섭정의 자리에 올랐을 때, 오로지 폐하의 것이었던 군주의 권력은 모두 나에게 주어졌으니, 이는 폐하께서 의도한 것이니라.”
오필리아의 얼굴에 씁쓸한 빛이 떠올랐다.
“그대를 신뢰하는 폐하의 마음은 나의 것과 다르지 않으나, 폐하께서는 그대가 시간 내에 해법을 찾을 수 없을 거라 여기셨노라. 하여 폐하께서는 모든 권력을 나에게 이양하시어, 감히 귀족들이 섭정의 권위에 도전하지 못하게 하셨노라.”
권력이라는 건 호주머니 속의 동전처럼 쉽게 주고 뺏을 수 있는 게 물건이 아니었다. 테오도르 국왕이 작정하고 이양한 권력은 지금에 와서는 완벽하게 오필리아의 것이 되었고, 이를 다시 돌려받는다는 것은 어쩌면 군주의 권위가 나누어질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평생을 귀족을 억제하며 왕권의 강화를 지상명제로 여기며 살아온 테오도르 국왕이 이를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권력의 속성에 대해 다소 무지했던 김선혁으로서는 다소 뜬구름 잡는 이야기처럼 들렸지만, 어렴풋이나마 그녀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모든 상황에 수긍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테오도르 국왕에 대한 그 어떤 이야기도 입에 담지 않았다.
부서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이는 오필리아의 표정을 뒤늦게 보았던 탓이다. 더 이상 국왕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그녀를 괴롭게 만드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일이었다.
그녀 모르게 한숨을 내쉰 그가 성큼 다가가 왕녀의 가녀린 어깨를 안아주었다.
**
김선혁이 왕성에 입국하고 하루가 지나고, 다시 날이 밝았다. 왕도는 여전히 축제 분위기였고, 전승공의 귀환을 축하해주기 위해 속속 왕도에 들어서는 귀족들의 마차로 인해 번잡하기만 했다.
그런 와중에 다시 검성이 왕성을 찾아왔다.
전날 이미 시종장을 통해 검성이 다시 찾아올 거라는 전언을 전해 들었던 김선혁은 잠깐 심호흡을 하는 것으로 마음을 가라앉혔다.
테오도르 국왕과 오필리아에 대한 생각으로 복잡해졌던 머릿속이 조금은 정리되었다. 아무래도 검성이라는 강적에 대한 압박감이 고민을 밀어낸 모양이었다.
“안내하라.”
시종장은 그를 귀빈 중에도 가장 지체가 높은 이들을 맞이하기 위해 만든 접객실로 안내해주었다.
“선혁 라인펄 김 드라흔 전승공작께서 드십니다!”
그가 도착했다는 사실을 소리 높여 알린 시종장이 문 옆으로 물러났다.
“드시지요.”
짧게 숨을 가다듬고는 발을 내딛으려던 김선혁이 멈칫 굳어버렸다.
문 너머에서 느껴지는 거대한 존재감이 그를 사정없이 찍어 눌렀다.
“음.”
질 낮은 도발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하기에는 문 너머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너무도 맑고 평온했다.
아마도 이건 검성의 드높은 존재감 그 자체이리라.
“후우.”
짧게 숨을 들이마셨다. 문 너머에서 느껴지는 존재감은 여전했지만, 그는 더 이상 그 어떤 압박도 느끼지 않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저 숨 한 번 들이쉬고 내뱉는 것으로 거인의 존재감을 완전히 털어낸 것이다.
끄덕.
그의 고갯짓에 시종장이 접객실의 문을 열었다.
서서히 열려가는 접객실 저 안쪽에 은둔공작 마렉 슈나일 로아힘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