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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2. 그라두스 넘버 원 (4)
중앙대로를 가로지르는 퍼레이드는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끝이 났다. 전승공과 원정대가 왕성의 문 너머로 사라지자 끝까지 남아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도 하나둘 흩어졌다.
그렇게 개선식은 끝이 났지만, 왕도의 열기는 식지 않았다.
아데스덴 왕가가 전승공의 무사귀환을 기리는 의미로 7일간 축제를 선포한 것이다.
전승공이 사라진 문 너머로 왕성의 시종과 하인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그들은 밤사이 시민들이 먹고 마실 음식과 술을 잔뜩 쌓아놓고는 바쁘게 축제를 준비했다.
군침 도는 향기와 알싸한 주향이 금세 왕도에 퍼져나갔다.
왕도의 시민들은 당장 저녁부터 시작될 축제를 즐길 생각에 벌써부터 잔뜩 들떠 고래고래 악을 써댔다.
하지만 정작 시민들이 그리 소란을 떠는 동안 왕도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왕성은 조용하기만 했다.
머나먼 중부에서 왕도까지 오는 동안 여독이 쌓였을 전승공과 원정대에 대한 오필리아의 배려였다.
이수혁과 최민영을 비롯한 이방인들과 퀘이샤들은 왕성에 마련된 숙소로 안내되었다. 아마도 그들이 다시 숙소를 나서는 것은 왕실이 주최하는 환영 파티가 시작될 저녁 무렵이 되어서나 일 것이다.
일행과 떨어진 김선혁은 곧장 시종들이 미리 준비하고 있던 따뜻한 목욕물에 몸을 담갔다.
“아. 좋다.”
1년이 넘도록 온갖 전장을 전전하며 생고생을 한 피로가 풀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저희가 감히 귀하신 분의 몸에 손을 대어도 되겠나이까?”
가만히 탕 속에 누워 온기를 즐기고 있자니, 시종들이 다가와 물었다.
왕실에서도 손 기술이 좋기로 유명한 시종들이었다. 고개를 끄덕여 허락을 하자, 그들이 금세 그의 어깨와 팔을 붙잡고 안마를 하기 시작했다.
“어흐으….”
아픈 듯 시원한 듯, 괴상한 신음이 절로 나왔다.
안마의 효과는 훌륭했다. 김선혁은 금세 온몸이 풀어져 한없이 늘어지고 말았다. 조여질 대로 조여져 있던 마음도 함께 풀어졌다.
아. 여기가 천국이네.
문명이 발달할 대로 발달한 저쪽 세상에서조차도 누리지 못한 호사에 그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천국과도 같은 시간은 길지 않았다. 욕조의 물이 식을 즈음하여 욕실을 나선 그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오필리아였다.
“가슴에 셋, 배에 둘.”
이건 또 무슨 말인지 순간적으로 그녀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김선혁이 무심코 제 몸을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황급히 헐벗은 몸을 가렸다.
가슴에 난 흉터 세 가닥, 배를 꿰맨 흉터 둘. 그녀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뒤늦게 알아챈 것이다.
하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등에는 열하나, 팔과 다리의 흉터는 셀 수도 없다지.”
오필리아는 마치 그의 온몸을 세세하게 들여다본 것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했다.
김선혁은 그녀가 어떻게 제 몸에 난 상처의 개수를 저리도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것인지 깨닫게 되었다.
그와 시선이 마주친 시종 하나가 뜨끔 놀라 고개를 숙였다. 방금 전 욕탕에서 그의 몸을 대차게 주물러대던 시종이었다.
처음부터 안마는 핑계였던 게 틀림이 없었다. 시종은 오필리아가 그의 몸을 살피기 위해 보낸 첩자(?)였다.
뒤늦게 그 사실을 알았지만, 이미 수습하기에는 늦어버렸다.
“그중에 비교적 최근에 생긴 것 같은 흉터도 넷이나 있었다지.”
이미 시종은 오필리아에게 모든 보고를 마친 후였고, 냉엄한 그녀의 표정은 쉽게 풀릴 것 같지 않았다.
“전장이 험한 것은 알고 있었으나, 그 정도가 지나치구나. 그대의 몸은 마치, 마치….”
조심하라는 당부를 끝내 무시한 남편에 대한 분노가 지나쳤던 것일까. 그녀가 드물게 말을 잇지 못했다.
그가 변명이라도 주워섬길 생각으로 입을 열려는데, 오필리아가 미처 꺼내지 못했던 말을 끝마쳤다.
“…넝마처럼 변하지 않았는가.”
“아….”
분노가 아니었다.
짙은 한숨과 떨리는 목소리, 그리고 안타까움이 가득한 눈동자, 그녀의 몸짓 하나하나가 자신의 남편에 대한 절절한 염려를 나타내고 있었다.
“대체… 대체 얼마나 많이 죽을 고비를 넘었기에 그리도 많은 상처를 입었더냐.”
오필리아는 제 남편의 몸에 난 흉터의 개수를 곱씹으며 그가 얼마나 많은 사지를 넘어서야 마침내 돌아올 수 있었는지 전부 헤아린 듯했다.
그 절절한 감정의 편린을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지은 죄가 너무 많아 몸을 사리기만 했다. 너무 늦게 돌아온 자신에 대한 원망만 생각하여 그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
자신이 그렇게 상황을 모면할 생각만 하는 동안에도 오필리아는 끊임없이 제 남편을 염려하고 있었다.
단지 왕국을 지배하는 군주로서 차마 다른 이들 앞에서 감정을 내보일 수 없었을 뿐이다.
“그래도 이렇게 무사히 돌아왔잖아요.”
그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인지 오필리아가 눈살을 찌푸렸다. 뭐라고 입을 열려는 그녀에게 그가 먼저 말했다.
“보고 싶었어요. 오필리아.”
함부로 일컬을 수 없는 지고한 이름, 하지만 반려이기에 허락한 이름이다. 그가 부드럽게 그 이름을 입에 담자 오필리아의 표정이 묘해졌다.
화를 낼 수도 그렇다고 마냥 좋아할 수도 없어 짓는 애매한 얼굴, 그가 성큼성큼 다가가 그녀를 안아주었다.
“그것도 아주 많이요.”
미약한 몸짓으로 저항하던 그녀가 이내 그를 마주 안아주었다.
“대낮부터 부끄럽지도 않은가.”
힘없는 투정이었다.
“하던 일이 있어 곧 돌아가 봐야 하느니라.”
말과는 달리 더욱 깊게 제 품에 안겨오는 가녀린 몸을 그는 꽉, 하고 안아주었다.
그 사랑스러움을 생각하면 슬쩍 손짓으로 시종에게 물러가라 손짓을 하는 앙큼스러운 여인의 행동을 모른 척해주는 건 일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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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분할 정도로 해후의 정을 나눈 김선혁과 오필리아의 분위기는 눈에 띄게 부드러워졌다.
그는 더 이상 상황을 모면할 궁리를 하지 않고 오로지 그녀에게만 집중했으며, 그녀 역시 그간 켜켜이 쌓아온 그리움과 염려를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혹시라도 내 당부를 잊었던 게로구나. 그게 아니라면 어찌 또 상처를 입었다는 말이더냐.”
그래서인지 그녀의 말에서 더 이상 질책의 기미는 느껴지지 않았다.
“아, 이 상처요? 이건 레인하르트 후작님과 결투를 하다가 입은 상처예요.”
“레인하르트 후작이 그랬다는 말인가.”
대꾸하는 그녀의 음성이 서늘했다. 자신이 후작에게 본때를 보여주라 지시한 것 따위는 이미 잊은 듯한 태도였다.
“네. 후작님의 검이 얼마나 날카로운지, 하마터면 팔이 날아갈 뻔했다니까요.”
김선혁은 마치 고자질이라도 하듯 오필리아에게 지난 결투를 세세하게 알려주었다. 은근히 그녀가 얄미운 후작을 골탕 먹여주기를 기대하는 마음이었다.
물론 사리분별이 누구보다 바르고 공과 사의 구분이 칼로 자른 듯 명확한 그녀가 이 일로 후작을 질책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지금은 그저 솔직하게 감정을 터놓고 무슨 말이든 그녀와 대화를 나누는 게 즐거웠을 뿐이었다.
“근데 안 궁금해요? 누가 이겼는지?”
“그깟 결투의 승패가 뭐가 중요한가. 지금 중요한 건 그대가 이리 무사히 돌아왔다는 것이지.”
오필리아의 음성은 부드러웠다. 혹시나 결투에서 패배하여 상심했을지 모를 남편에 대한 배려였다.
“그래요? 나는 말해주고 싶은데.”
하지만 그녀의 우려와는 달리 그는 지지 않았다.
“제가 이겼어요.”
한껏 거들먹거리는 그의 태도가 마치 아이와도 같았다.
하지만 그 내용은 결코 가볍지도, 소소하지도 않았다.
검성이 은둔공작이라 불리며 두문불출하는 동안 사실상 실질적인 왕국 최강의 호칭은 레인하르트 후작을 향해왔다.
그런 후작을 꺾었다. 이제 김선혁이 자타공인 왕국 최강의 기사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만약 누군가가 그 호칭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면, 그건 최강이라는 이름의 원 주인인 검성 본인뿐이었다.
그리고 그 시각 검성이 왕성에 입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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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국의 대소사를 전부 도맡아 챙기는 아데스덴 왕가의 정력적인 통치야 이미 왕국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건 현 섭정 오필리아 라우렐 로 아데스덴도 마찬가지였다.
“섭정 폐하께서는 잠시 침소에서 오수 중이시나이다.”
그런 섭정이 한창 일이 바쁜 시기에 낮잠을 자고 있단다. 그것도 하필이면 제 남편이 돌아온 직후에 말이다.
“음. 때를 잘못 맞춘 모양이로다.”
검과 관련된 것이 아니면 무신경하다 알려진 은둔공작도 최소한의 눈치는 있었다.
“어쩔 수 없군.”
마음 같아서야 당장에라도 전승공이라는 자를 찾아 검을 겨루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가 없어 은둔공작은 다음을 기약하기로 했다.
하지만 외유를 끔찍할 정도로 싫어하는 스스로가 헛걸음을 하고 말았다는 생각에 슬며시 심술이 났다.
그래서 검성은 아주 작은 장난을 쳤다.
바로 앞에 있는 시종장조차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은밀한 기운을 슬쩍 풀어냈다.
“인사는 했으니, 다음에 찾아오도록 하지.”
“무슨 말씀이신지?”
영문 모를 말에 시종장이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검성은 굳이 설명해줄 생각이 없었다.
“돌아가겠다.”
짧게 한마디를 남긴 검성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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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알 수 없는 위화감에 저도 모르게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왜인지는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그 순간 김선혁의 눈앞에 검 한 자루가 나타났다.
암살자?
한겨울 얼어붙은 호수에 내동댕이쳐진 듯 차가운 예기에 그는 반사적으로 오필리아를 보호하기 위해 힘껏 끌어안았다.
하지만 착각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선명하게 보이던 검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걱정스레 자신을 바라보는 오필리아만이 있었을 뿐이었다.
대체 뭐였지?
그저 착각이었다 여기고 넘어가기에는 방금 전에 느꼈던 검의 존재감이 너무도 선명했다. 아직도 등가에 흘러내린 식은땀으로 인한 한기가 채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아무리 주변을 둘러보아도 보이는 것은 아무도 없었다.
“오랜 싸움으로 원기가 상한 모양이로다.”
사정을 모르는 오필리아는 그가 아직까지 전장의 피로를 채 떨치지 못한 모양이라며 땀으로 흥건한 그의 뺨과 이마를 쓸어 만져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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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필리아가 밀린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침소를 떠나고, 레인하르트 후작이 찾아왔다.
“검성이네.”
밑도 끝도 없는 말에 김선혁이 인상을 찌푸리자 후작이 부연 설명을 했다.
“실존하지 않는 검, 검성의 짓이라는 말일세.”
그제야 후작의 말을 알아들은 그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되물었다.
“방금 전에 제가 본 검의 환상이 착각 같은 게 아니었다는 말입니까?”
“아니야. 아니야. 그건 환상 같은 게 아니야.”
그러고 보니 후작의 안색도 그의 안색만큼이나 좋지 않았다. 노령에도 불구하고 혈기왕성하던 후작 같지 않은 모습이었다.
“나 역시 과거 그 검을 본 적이 있었다네. 허공에 찰나지간 머물다 사라진 검 한 자루를 말일세.”
김선혁은 신음을 내뱉었다.
“그리고 검성이 찾아왔지.”
후작은 잔뜩 인상을 찌푸린 얼굴로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그건 검성이 자네에게 보내는 인사 같은 거지. 나 역시 오늘 전날 보았던 검을 보았네. 아니, 어쩌면 나뿐만이 아니라 왕성에 있는 기사들 중에서도 몇몇 정도는 같은 것을 보았을 걸세.”
이를 갈아붙이는 후작의 얼굴에 자존심이 잔뜩 상한 기색이 역력했다.
“감히 왕성의 기사들 정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한 그 안하무인의 태도, 다른 이를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그 자의 광오함은 더 이상 새롭지도 않다네.”
하지만 화가 난 듯한 후작은 다른 한 편으로는 허탈해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자는 그럴 자격이 있다네.”
만약 검성이 아닌 다른 자가 왕성에서 이런 수작을 부렸다면 단번에 찾아내 요절을 냈을 후작이 검성에게만큼은 어쩔 수 없다는 태도였다.
그건 그만큼 검성이 강하다는 뜻이었다.
후작은 검성을 가리켜 천재지변과도 같은 자라 말했다. 원망할 수도 시기할 수도 없는 초인에 대한 경외심의 발로였다.
“오늘 보았던 검은 내가 전날 보았던 것보다 훨씬 더 선명하고 날카로웠네. 내 짐작이 맞다면 그자는 전보다 더욱 강해졌을 거야.”
후작은 경고했다.
“조심하게. 그자가 단단히 마음을 모양이니까.”
왕성에 도착한 지 채 하루도 되지 않았건만, 김선혁은 또 다른 도전에 직면하고 말았다.
검성이 보내온 인사, 그건 결투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