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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 푸어-240화 (24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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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 그라두스 넘버 원 (3)

장거리 순찰대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평원에는 당장 전쟁을 치러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병력이 운집해 있었다.

“아데스덴 중보병대와 왕실 기병댑니다.”

제 몸을 가릴 정도로 거대한 방패를 세운 중갑의 보병들은 왕도 아데스덴 방위군의 중보병들이었고, 혈통 좋은 전마 위에 올라탄 붉은 코트의 기병들은 왕실 기병대 소속의 정예들이었다.

“왕가 수호대와 중앙 기사단도 있습니다.”

전면전을 치른다 해도 어지간해서는 쉽게 지지 않을 엄청난 전력이었다. 하지만 그조차도 과하지 않다 느껴진 것은 저들이 보호해야 하는 대상이 그 이상으로 중요한 인물이었던 탓이었다.

각 군의 소속을 알리는 높게 솟아오른 깃발 중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서 나부끼는 깃발, 그 금빛 깃발이야말로 왕국의 최정예들이 이곳에 모여든 이유였다.

아덴버그를 지배하는 아데스덴 왕가를 상징하는 왕실기였다.

척. 척.

중앙을 가로막고 있던 중갑보병들이 길을 열고, 그 사이로 화려한 갑주로 무장한 왕가 수호대와 중앙 기사단의 기사들이 대열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그들마저도 양 옆으로 물러서고, 잡티 하나 없이 깨끗한 순백의 털을 한 백마 위에 올라탄 여인이 나타났다.

오필리아 라우렐 로 아데스덴, 아덴버그의 차기 여왕이자 현 섭정인 그녀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하인리히 폴그램 레인하르트, 섭정 폐하께서 내리신 지엄한 명을 무사히 수행하였나이다.”

레인하르트 후작이 말에서 내리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수고하였다.”

근엄한 표정으로 후작의 노고를 치하해준 오필리아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선혁 라인펄 김 드라흔이 오필리아 라우렐 로 아데스덴 섭정 폐하를 뵈옵나이다.”

한쪽 무릎을 꿇으며 인사를 건넨 김선혁의 가슴 한 켠이 아릿하게 아파왔다.

고개를 숙이기 전 언뜻 본 것만으로도 오필리아의 얼굴은 그가 떠나기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수척해져 있었다.

그게 과중한 섭정의 업무 때문이었는지, 그도 아니면 온갖 사고란 사고는 다 치고 다니는 남편에 대한 걱정 때문이었는지는 그로서도 알 수 없었다.

그저 미안하고 또 미안했을 뿐이었다.

다각. 다각.

일만에 가까운 병력이 운집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정도로 고요한 평원, 그 사이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그마저도 이내 사라지고, 오필리아가 말에서 내리는 기척이 느껴졌다. 그리고 작은 발소리가 들려오더니, 고개 숙인 그의 눈에 고운 빛깔의 드레스 자락이 들어왔다.

“고개를 들라.”

“네. 섭정 폐하.”

대답과 함께 고개를 든 김선혁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한 겨울 뽀얀 숨이 닿을 듯 가까이 다가온 오필리아의 얼굴이 바로 코앞에 있었던 탓이다.

“아….”

이렇듯 가까이서 보니 그간의 시간이 결코 짧지만은 않았다는 사실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시간동안 그녀는 참으로 많이도 변해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그 외 다른 모든 면에서 몰라볼 정도로 성숙해진 모습이었다.

그전의 그녀가 껍데기만 여인의 것을 뒤집어 쓴 소녀와도 같은 분위기였다면, 지금의 그녀는 겉과 속이 조화를 이루어 더 없이 한 점 위화감조차 느껴지지 않는 완벽한 여인의 모습이었다.

그 자태가 그의 기억 속에 있는 오필리아의 그것보다 몇 배는 곱고 아름다웠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와의 해후를 마냥 즐길 때가 아니었다. 그녀가 질책하듯 말을 건네 온 것이다.

“참으로 오래도 걸렸구나.”

한숨 섞인 음성에 짙은 책망의 기색이 잔뜩 어려 있었다.

“죄송합니다.”

신혼의 신부를 두고 먼 타지를 전전하다 무려 1년이 넘는 시간 만에 돌아온 그는 명백한 죄인이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그런 말을 듣고자 한 것이 아니니라. 나는 대륙의 안녕을 위해 헌신한 기사를 책망할 정도로 속이 좁지 않….”

겉과 속이 다른 말을 태연하게 속삭이던 오필리아가 불현듯 입을 다물었다.

“섭정 폐하?”

그런데 그렇게 입을 다문 그녀의 표정이 심상치가 않았다. 하얗게 질린 얼굴이 마치 큰 충격이라도 받은 듯하기도 했고, 어떻게 보면 또 화가 극도로 난 것 같기도 했다.

“어찌하여 그대의 얼굴에 그리 흉한 상처가 난 것이냐.”

미세하게 떨리는 음성이 지금 그녀가 얼마나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고 있는지를 알려주었다. 그래서 김선혁은 더욱 심장이 쪼이는 듯한 기분이었다.

“대답하라. 나는 그 어떤 보고에서도 그대의 얼굴에 난 이 흉한 상처에 대해 듣지 못하였노라.”

한층 더 가라앉은 그녀의 음성에 그는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

척.

왕가 수호대의 기사들이 망토를 넓게 펼치고 오필리아와 김선혁의 사이를 둘러쌌다. 그것만으로도 두 남녀와 병사들 사이에 벽이 생겨났다.

그렇게 생겨난 붉은 장막 너머로 레인하르트 후작을 비롯한 이들이 멀찍이 물러나는 기척이 느껴졌다.

“성에 돌아간 뒤에 모든 이야기를 들으려 했으나, 그 흉터를 보니 지금 대답을 듣지 않을 수가 없구나.”

냉엄하기까지 한 오필리아의 음성에 김선혁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솔직하게 그간의 일을 설명해주었다. 물론 장소가 장소인지라 과정과 결과를 뭉뚱그린 간략한 설명이었다.

그의 이야기를 전부 들은 오필리아는 대답이 없었다.

격전이 있었다는 사실은 들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얼굴의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흉터를 직접 보고나서야 제대로 전장의 흉험함을 느낀 모양이었다.

“하마터면 눈이 멀 뻔했구나.”

한참 만에 들려온 그녀의 대답은 여전히 차가웠지만, 그 한구석에 짙은 염려의 감정이 담겨 있었다.

“보는 것과 달리 그리 깊은 상처는 아닙니다. 그저 마수의 독기가 강해 흉터가 제대로 사라지지 않았을 뿐입니다.”

거짓말이었다. 그는 이 상처로 인해 실명할 뻔하기도 했다. 하지만 곧이곧대로 말해 그녀의 걱정을 가중시킬 수는 없었다.

“참으로 어리석구나. 대관절 그 아룡이라는 놈이 얼마나 중요하기에 이리 목숨까지 내걸었단 말이냐.”

한결 누그러진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김선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부디 이번이 그대가 보인 마지막 무모함이었기를 바라노라.”

“명심하겠습니다.”

염려했던 것보다 훨씬 더 수월하게 상황을 모면할 수 있을 거라 여긴 것이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나지마라는 퀘이샤가 누구더냐.”

하나의 난관을 넘었지만, 그에게는 더 큰 난관이 남아있었다.

**

“그대가 나지마라는 자인가.”

고귀한 왕녀가 퀘이샤 여인의 머리채를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일은 없었다.

“물러가라.”

오필리아는 나지마를 불러 한 번 그 모습을 훑어보는 것을 끝으로 더 이상 그녀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온갖 변명을 준비하고 있던 김선혁으로는 맥이 빠질 정도로 싱거운 반응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필리아가 나지마를 마땅하게 여긴 것은 아니었다. 나지마를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은 마치 도둑고양이라도 보듯 마뜩찮은 기색이 역력했다.

“자고로 반려라는 말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으니, 그녀와 그대 사이에 통용되는 의미는 동료의 범주를 벗어나서는 안 될 것이다.”

“나지마가 얽매인 퀘이샤의 율법 역시 반드시 가약의 뜻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라 하였습니다. 저 역시 그녀를 동료로 생각할 뿐, 한 번도 그리 여긴 적은 없습니다.”

서부에서 여러 일을 겪으며 깊은 유대를 맺기는 했지만, 그와 나지마 사이에 놓인 감정은 연인의 그것과는 사뭇 달랐다.

그에게 있어 나지마는 믿을 수 있는 파트너에 지나지 않았다.

단호한 그의 대답이 퍽 마음에 들었던 것일까. 오필리아의 얼굴이 눈에 띄게 풀어졌다.

하지만 김선혁은 긴장을 풀지 않았다. 워낙에 친 사고가 많으니, 이번에는 또 어떤 질책을 받을지 몰랐기 때문이다.

다행스럽게도 오필리아는 더 이상 그를 질책하지 않았다.

이곳은 왕성이 아닌 왕도 밖 평원, 이야기를 이어가기에는 그다지 좋은 장소가 아니었다.

어찌 보면 김선혁으로서는 운이 좋았다고 볼 수도 있었다. 오필리아의 성격상 한 번 짚고 넘어간 일을 다시 끄집어낼 가능성은 없었으니까.

**

“우리 아덴버그는 그대 일족의 방문을 환영하오.”

김선혁과 해후를 마친 오필리아는 퀘이샤들의 방문을 환영해주었다.

“혹여 손님맞이가 박하다 여겨졌을 수는 있으나, 일신에 짊어진 바가 너무도 많아 쉬이 거동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아무쪼록 양해를 바라는 바요.”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는 바, 우리 일족은 이에 대해 아무런 불만이 없소.”

엄정한 기세를 내뿜는 수백의 기사를 사이에 두었을지언정 오필리아와 퀘이샤 장로의 분위기는 시종일관 부드러웠다.

하기야 인재를 귀하게 여기는 아데스덴 왕가의 혈족이 제 발로 넝쿨 채 굴러 들어온 호박을 걷어찰 리가 없었다.

“앞으로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해보아야겠지만, 우리 아데스덴 왕실의 이름으로 약속하건대 그대와 그대의 일족이 이 땅에 자리를 잡기까지 아낌없이 조력을 하겠소.”

퀘이샤 장로의 시선이 잠시 김선혁을 스쳐갔다.

끄덕.

그의 고갯짓에 장로가 마주 맹약의 말을 읊었다.

“어머니 나무의 푸르름이 사라지지 않는 한, 우리 일족은 오늘의 약속을 잊지 않을 거요.”

짧은 대화였지만 아덴버그와 퀘이샤들의 이해가 합치되니 더 이상 꺼릴 게 없었다.

“왕도 아데스덴에 온 것을 환영하오.”

오필리아는 대담하게도 퀘이샤들 전원을 왕도 내로 입성할 수 있도록 하였다.

“끄응.”

곁에서 지켜보던 레인하르트 후작의 표정이 돌처럼 굳어진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전군 호위대형 유지한 채로 왕도를 향해 완보!”

다소 해프닝이 있기는 했지만 김선혁과 그 일행은 장장 1년이 넘는 원정을 마치고 마침내 왕도 아데스덴에 들어설 수 있었다.

**

“선혁 라인펄 김 드라흔 전승공작께서 마침내 귀환하셨으니, 왕도의 시민들은 모두 나와 이 전설적인 기사의 귀환을 반기라!”

성문이 열리고 뿔 나팔이 울려 퍼졌다.

“와아! 전승공! 전승공! 전승공!”

그리고 시민들이 왕도가 떠나가라 함성을 내질렀다.

비록 머나먼 이국땅에서 치러진 전투였다지만, 혁혁한 공을 세워 아덴버그의 이름을 널리 알린 전승공과 원정대는 왕도의 시민들로부터 승전식이나 다름이 없는 환대를 받았다.

시민들은 더없는 환호로 왕국 역사에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이 불세출의 기사를 반겨주었다.

“아데스덴 왕실 만세!

“폭풍의 기사 드라흔 만세!”

“전승공 만세!”

열광적인 환호에 오필리아가 퍽 자랑스러운 얼굴을 해 보였다. 자신의 배우자가 왕국의 시민들에게 열렬하게 환대받는 것이 꽤나 기꺼웠던 모양이다.

김선혁은 온화하게 풀어진 오필리아를 보며 남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가장 염려했던 오필리아라는 관문(?)을 드디어 통과했다 여긴 것이다.

하지만 안도하기에는 너무 일렀던 모양이다.

“돌아가면 그대와 이야기해야 할 게 참으로 많으리라.”

완전히 풀어진 듯 보였던 오필리아가 보내온 경고 아닌 경고에 그가 어색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전승공이 돌아왔소!”

“올 것이 오고야 말았군!”

그가 왕성에 성문을 통과한 순간, 왕도 내의 귀족들이 바빠졌다.

누군가는 단순히 전승공과 친분을 쌓아 향후 자신의 입지를 올리기 위해, 또 누군가는 전승공이라는 왕실의 날카로운 검의 등장에 이후의 일을 논의하기 위해. 귀족들은 저마다 계산을 갖고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리고 귀족들이 그렇게 숨어서 모의를 하는 동안, 왕국의 거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렉 슈나일 로아힘.

은둔공작이라 불릴 정도로 두문불출하던 검성이 굳게 걸어 잠겨 있던 저택의 문을 열고 나섰다.

“전승공 만세!”

귀청이 찢어질 듯 전승공의 이름을 연호하는 왕도 시민들의 함성이 검성의 귀를 파고들었다.

“전승공이라….”

검성은 저 멀리 보이는 높게 솟아오른 아데스덴 왕성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치켜 올렸다.

“어디 그 이름에 걸맞는 자인지, 직접 확인해보리라.”

작게 중얼거린 검성이 곧장 왕성으로 향했다.

김선혁이 중부에 가 있는 동안 멈춰있던 왕도 아데스덴의 시간이 그를 중심으로 다시금 흘러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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