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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 그라두스 넘버 원 (2)
전승공과 레인하르트 후작의 결투는 은밀하게 진행되었지만, 뤼겐부르크 시내 중심까지 전해진 굉음과 섬광 탓에 금세 소문이 퍼지고 말았다.
하지만 당사자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결투의 결과에 대해 함구했다. 유일한 목격자라 할 수 있는 참관인 역시 입을 열지 않았기에 추측만 무성했을 뿐 어느 누구도 결투의 결과를 알지 못하였다.
며칠이 흘러 항해의 피로가 풀린 원정대가 뤼겐부르크 영지를 나설 때까지 그러한 사정은 변하지 않았고 결국 그들이 떠나고 난 자리에는 수많은 소문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아. 뭐가 이리 지루하지.”
왕도 아데스덴으로 향하는 여정은 지루하다 싶을 정도로 느긋했다.
그래서 원정대는 도리어 위화감을 느꼈다.
전장과 한참이나 떨어진 아덴버그였지만, 원정대의 신경은 여전히 날카롭게 곤두선 상태였다.
무리도 아니었다.
밤도 낮도 없는 저주 받은 땅에서 반년이 넘는 시간을 보낸 원정대다.
그들은 하루에도 몇 번이나 마물들의 습격을 받았고, 자고 일어날 때마다 밤사이 마물에게 뜯어 먹히고 남은 전우의 잔해를 치워야 했다.
아무것도 모르던 이방인들은 그렇게 가혹한 상황 속에서 서서히 죽음에 익숙해져 갔다.
하지만 더욱 끔찍한 것은 죽음마저 기만하는 추악한 마의 기운이었다.
오랜 시간동안 마기에 노출된 후유증이 뒤늦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렇게 광증이 도진 병사들은 아군을 공격하기까지 했다.
사제들과 신전 기사들이 최대한으로 그들의 마인화를 늦추어 보았지만, 그건 임시방편일 뿐이었다.
결국 그들은 광증을 이기지 못해 자살하거나 아군의 손에 살해당했다.
그런 끔찍한 시간을 보낸 원정대에게 평화는 몸에 맞지 않는 옷과도 같았다.
그들은 왕국의 최정예라 할 수 있는 왕가 수호대의 기사들과 수천의 중앙군에게 둘러싸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불안해했다.
심지어 자신들끼리 순번을 정해 불침번을 서기까지 했다.
김선혁이 몇 번이나 그들에게 이곳에는 마물들도 마인들도 존재하지 않는다 말해주었지만, 그들은 듣지 않았다.
마침내 지옥을 벗어났지만, 가련하게도 그들의 영혼은 여전히 저주받은 땅 어딘가를 배회하고 있었다.
끄아아아아!
악몽을 채 떨치지 못한 이방인들이 밤마다 괴성을 지르며 잠에서 깨어났다. 그때마다 야영지는 한바탕 소란을 겪어야 했다.
뒤늦게 그것이 이방인들이 채 떨쳐내지 못한 전쟁의 후유증이라는 사실이 알려졌고, 수호대의 기사들와 병사들은 애써 밤마다 들려오는 끔찍한 비명소리를 무시하려 했다.
곧 저들의 악몽이 끝이 날 거라 여긴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생각과는 달리 평화로운 아덴버그의 땅에 도착하고도 꽤나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이방인들의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다.
으아아아아아아악!
화톳불을 등지고 서 있던 초병들이 해쓱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또 시작인가.”
이제는 익숙해질 때도 됐건만 이방인들의 처절한 비명소리는 매번 병사들의 모골을 송연하게 만들었다.
“대체 서부에서 무슨 일을 겪었길래….”
간간히 흘러나오는 비명과 신음소리에 어둠이 더해진 야영지는 어쩐지 을씨년스러웠다. 초병들은 무의식중에 불가에 다가서며 창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다시 날이 밝고 야영지의 어둠이 걷혔다. 밤사이 이방인들이 벌인 소란에 시달린 병사들은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듯 눈가가 퀭하기만 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레인하르트 후작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혀를 찼다.
“쯧. 명색이 왕국의 중심을 떠받드는 중앙군이라는 놈들이 이렇게 심지가 굳지 못해서야.”
바로 곁에 서 있던 중앙군 소속 장교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모르긴 몰라도 후작의 불평은 여파가 결코 작을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후작은 중앙군의 사정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나저나 저 상태라면 왕성 내에 저들을 들이는 건 불가능하네.”
레인하르트 후작은 이방인들의 살기가 지나치게 짙다며 우려를 표했다. 왕가 수호대의 수장이자 왕성의 방위를 책임지는 사령관으로서는 당연한 걱정이었다.
“이곳에 오기까지 중부의 전선을 가로질렀습니다. 이베리아 해군과 함께 한 이후로는 몇 번이나 해양 몬스터들의 습격을 받았지요. 아직 저들이 이곳에 전장이 아님을 깨달으려면 시간이 더 필요할 겁니다.”
김선혁의 대답에 후작이 한숨을 내쉬었다.
“부디 왕성에 도착하기까지 저들이 그 사실을 깨달았으면 좋겠군.”
“이겨낼 겁니다. 그 지옥 같은 곳에서도 제정신으로 돌아온 놈들입니다. 저들은 결코 약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대답하는 그의 눈에 밤 사이 일어난 소란이 무색할 정도로 밝은 표정을 한 이방인들의 모습이 보였다.
“저들처럼 지나치게 날이 선 것도 문제지만, 저 퀘이샤들이라는 자들처럼 지나치게 평온한 것도 문제야. 도무지 저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으니, 영 찝찝하구만.”
후작의 시선이 퀘이샤들을 향했다.
복면을 한 채 눈만 빼꼼 내민 퀘이샤들은 후작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조용히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자네의 보증이 있고, 섭정 폐하의 지엄한 명이 있으니 마지못해 명을 따르기는 하지만, 솔직히 말해 나는 저들이 부담스럽다네.”
후작은 상급 기사에 준하는 힘을 지닌 이종족들이 이렇듯 왕국의 영토를 버젓이 활보하는 게 부담스러운 눈치였다.
하기야 일천 이상의 상급 기사에 준하는 퀘이샤들이라면 어지간한 왕국 정도는 통째로 뒤집고도 남을 막강한 전력이었으니, 왕실의 안위라면 터럭만 한 위협도 용납지 않는 후작의 심기가 불편한 것도 이해가 가는 일이었다.
그런 후작의 우려는 일행의 대열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일견 평범한 호위대형인 듯 보이는 병력의 배치는 실상 퀘이샤들의 포위에 가까웠다. 언제든 명령만 떨어지면 안쪽에 자리 잡은 퀘이샤들을 섬멸할 수 있도록 이동 중에도 항시 무기에서 손을 놓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런 의도를 모를 김선혁이 아니다.
안락한 성에서보다 전장에서 구른 시간이 긴 그는 지금에 와서는 어지간한 군기와 기세 정도는 읽을 정도로 노련한 야전 지휘관이 되었다. 그런 그가 빤히 그 의도가 빤히 보이는 병력 배치를 알아채지 못하는 게 도리어 이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이 정도의 조치 정도는 그도 진즉에 예견하고 있었다. 나지마를 통해 이어진 인연이 어머니 나무를 만나 더욱더 공고해졌지만, 후작에게는 그와 퀘이샤들 사이에 맺어진 유대감이 없었다.
단지 말 몇 마디로 이 꼬장꼬장한 후작의 생각을 바꾸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퀘이샤들 역시 그러한 상황을 이해하는지 때때로 지나칠 정도로 자신들을 경계하는 아덴버그군을 보면서도 그 어떤 불만도 표하지 않았다.
인간보다 몇 배는 기감이 예민한 요정들에게는 거북스러울 군기에도 그저 더없이 고요한 눈빛으로 인솔을 따를 뿐이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머니가 자리 잡을 땅 한 줌이면 족할 이들입니다. 만약 다른 뜻이 있다고 해도 그게 후작님이 염려하는 종류의 것은 아닐 거라 장담합니다.”
“사람 마음은 모르는 법이네. 하물며 저들은 인간도 아니지 않은가. 저들이 무슨 꿍꿍이를 가졌는지 자네도 모르지 않는가.”
후작의 말에도 김선혁은 흔들림이 없었다.
“제가 속을 들여다보는 재주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건 저도 모르지요. 하지만 그런 저도 아는 게 있습니다.”
“그게 뭔가.”
눈살을 찌푸리며 묻는 후작을 보며 그가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어떤 경우에도 저들이 제 앞에서 일을 벌이는 경우는 없을 거라는 것 말입니다.”
듣기에 따라서는 상급 기사에 준하는 요정 일천 이상을 혼자서 억제할 수 있다는 뜻으로 들릴 수도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광오하게까지 들리는 말을 내뱉고도 당사자의 표정은 덤덤하기만 했다. 그래서 더욱 그 말이 거짓처럼 들리지 않았다.
“그날 전력을 다한 게 아니었군.”
후작의 말에 김선혁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서로 마찬가지 아닙니까?”
김선혁은 알고 있었다.
자신이 전룡의 형상을 꺼내들지 않은 것처럼 후작 역시 비장의 한수를 꺼내지 않았다는 사실을 진즉부터 파악하고 있었다.
“그깟 숫자 하나 바꾸자고 섭정 폐하께 심려를 끼치는 불충을 저지를 수도 없지 않은가.”
“저도 마찬가집니다. 섭정 폐하께서 후작님을 아끼는 건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 감히 심려를 끼쳐드릴 수는 없지요.”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보며 무덤덤하게 웃어보였다. 그런데 그 웃음이 지나칠 정도로 건조해 어쩐지 스산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철천지원수도 아닌 바에야 정말로 지닌바 본신의 능력을 다해 재결투를 벌일 수는 없었다.
경지에 오른 두 기사가 전력을 다해 싸웠다간 둘 중 하나는 반드시 피를 보게 될 테니까.
“끄응.”
결국 먼저 고개를 돌린 것은 후작이었다. 여기서 더 이상 자존심을 세웠다간 승부에 불복하여 억지를 쓰는 꼴이 된다고 생각한 듯했다.
“일단은 왕도에 가서 이야기 하지. 지금은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못마땅한 기색으로 화제를 전환한 후작이 불현듯 눈을 빛내며 말했다.
“단단히 각오하게. 왕성에서 자네가 치러야 할 고난이 상당할 테니.”
“검성과의 일이라면 이미 각오했습니다.”
김선혁의 대꾸에 후작이 입꼬리를 치켜 올렸다.
“나는 지금 검성과의 일을 말하는 게 아닐세.”
“그럼…?”
후작의 미소가 진해졌다.
“자네 얼굴에 난 흉터 말이야. 섭정 폐하께서는 아직 모르시지 않는가.”
속 좁은 후작은 아무래도 기어이 그에게 한 방 먹여야 속이 풀릴 모양이었다. 그리고 후작의 계획은 성공했다.
오필리아가 이 선명한 흉터를 그대로 보고 지나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은 김선혁도 알고 있었다.
안색이 하얗게 질린 그가 눈을 질끈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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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덴버그 곳곳에 왕실과 대영주들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으니, 아덴버그의 전 국토는 드물게 안정된 상태였다.
아니, 그게 아니더라도 미치지 않고서야 왕가 수호대의 깃발과 중앙군의 깃발이 나부끼는 행렬에 찝쩍댈 존재는 없었다.
덕분에 김선혁 일행은 그 어떤 불미스러운 일에도 휘말리지 않고 빠르게 왕도를 향해 나아갔다.
“그래도 요즘은 좀 덜해진 것 같군.”
밤마다 터져 나오는 이방인들의 비명은 여전했지만, 근래 들어서는 그 빈도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아무래도 그들도 조금씩 이곳이 마물이 넘치는 서부의 전장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가기 시작한 듯했다.
하지만 그들이 완전히 악몽을 떨치기까지는 아직 더 시간이 필요했다.
레인하르트 후작 역시 아직 살기가 채 가시지 않은 이방인들이 조금이라도 평화에 젖어들 수 있도록 최대한 이동속도를 늦추었다.
“죄송합니다. 대장.”
이수혁이 어두운 얼굴로 사과를 해왔다. 행렬이 지나칠 정도로 느긋하게 이동을 하는 게 자신들의 상태가 호전될 시간을 벌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너희들 탓이 아니다.”
김선혁은 드물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수혁과 이방인들을 격려해주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자신을 구하기 위해 그 지옥 같은 서부행을 결정한 이들이다. 자신이 보듬어주지 않는다면 어느 누가 이들의 처지를 이해해줄까.
후작 역시 자신들의 지휘관을 구하기 위해 지옥으로 뛰어든 이방인들을 몹시도 살갑게 대해주었다. 다른 기사들과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이 헌신적인 이방인들을 명예롭게 대우해주었다.
그런 배려와 보살핌 속에서 이방인들은 빠르게 상태가 호전되었다. 그리고 더 이상 그들의 비명으로 야영지가 발칵 뒤집히는 일이 없어질 즈음하여 일행은 왕도의 지척에 도달할 수 있었다.
“전방에 접근 중인 기병대 발견! 아무래도 왕도의 장거리 순찰대 같습니다!”
일직선상으로 곧장 행렬을 향해 달려오는 기병들을 본 김선혁이 밝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마침내 왕도에 도착한 것이다.
하지만 그 밝은 표정도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섭정 폐하께서 친히 왕도 밖 20킬로미터 지점에서 전승공께서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마음의 준비를 채 끝내기도 전에 최종 보스와 마주친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