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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 푸어-238화 (238/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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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9. 그라두스 넘버 원 (1)

결투의 참관인은 왕가 수호대의 상급 기사였다.

“레인하르트 가의 하인리히 폴그램 후작은 세인들의 평가에 수긍하지 못하여 스스로의 검으로 모든 것을 증명하기로 하였다. 동의하십니까?”

처음부터 이런 상황을 예상했던 것인지 수호대 기사의 어투는 담담하기만 했다.

“동의한다.”

“라인펄의 선혁 라인펄 김 드라흔 전승공작은 하인리히 폴그램 레인하르트 후작의 도전을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동의하십니까?”

수호대 기사의 말에 김선혁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양측 모두 스스로의 검에 정의를 걸었으나, 그중 승자는 하나뿐이리라. 그리하여 이곳에 모인 모두는 신께서 정의를 가려주실 것을 믿으시매, 그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결코 불복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두 분 모두 동의하십니까?”

레인하르트 후작과 그가 대답 대신 각기 칼과 창을 움켜쥐고는 간격을 벌렸다.

“양측 모두 신께서 모든 것을 공정히 가려주실 것을 의심하지 않는 바, 결투가 성립되었음을 선포하노라. 이는 이 땅의 적법한 지배자 아데스덴 왕가가 허락을 한 것이며, 오필리아 라우렐 로 아데스덴 섭정 폐하께서 공증을 한 바, 결과에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노라.”

기사의 말이 이어질수록 후작과 김선혁의 기세가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결투를 시작한다. 한쪽이 전투를 속행할 수 없을 때, 또는 스스로 패배를 인정했을 때만이 결투가 끝나는 순간이리라. 승자는 패자에게 아량을 베풀고 패자는 승자의 검력에 다시는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지어다.”

왕실 기사단에서도 최정예라 할 수 있는 수호대의 기사였지만, 양쪽에서 뿜어대는 두 괴물의 기세를 버텨내기에는 역부족이었던 모양이다.

덤덤하던 기사의 안색이 금세 창백하게 질리고 말았다.

“모두 무기를 드십시오. 두 분 모두 왕국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분들이니 부디 이 결투가 과열되어 왕실에 심려를 끼치는 일이 없도록 하실 것을 당부드립니다.”

마지막 당부의 말을 황급히 끝낸 기사가 도망치듯 두 사람 사이를 빠져나왔다.

그 순간 후작과 김선혁의 기세가 폭발했다.

**

전승공과 레인하르트 후작의 결투 소식을 전해 들은 모든 이들이 이 희대의 결투를 보고자 하였지만, 구경꾼을 허락하지 않는 신성한 결투를 감히 몰래 훔쳐볼 수는 없었다.

단지 멀리서 들려오는 끔찍한 폭음과 섬광을 통해 그들의 결투가 인세(人世)의 그것을 아득히 벗어난 무지막지한 것이라는 사실만을 막연하게 짐작했을 뿐이었다.

“그래도 레인하르트 후작님께서 승리하시지 않을까 싶군. 전승공이 대단한 강자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나, 후작께서 반백 년 가까이 수련해온 검력은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니까.”

“수호대의 기사들은 특히 대인전에 능하니, 야전에 능한 전승공으로서는 그 차이를 만회할 수 없을 거라 보네.”

왕가 수호대의 기사들은 자신들의 수장이 이길 것을 의심하지 않는 눈치였다. 하지만 이수혁과 이방인들은 한 치의 의심도 없이 김선혁의 승리를 확신했다.

“대장님은 이미 인간의 한계를 넘은 분이시지. 나는 대장님이 지는 걸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어.”

“만약 대장님을 이기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진짜 괴물이지.”

그들의 말에 수호대의 기사들이 코웃음을 쳤고, 두 무리 사이에 은근한 신경전이 펼쳐졌다.

하지만 결투에 임한 당사자들 모두 왕국을 떠받드는 기둥들이었던지라 서로가 언사를 조심하니 신경전이 과열되는 일은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마음까지 겉으로 드러나는 것처럼 평온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이 결투가 무사히 끝이 나기를 기다렸다.

한낮에 시작된 결투가 어스름이 깔릴 때까지 이어졌고, 색색의 섬광이 한참이나 떨어진 뤼겐부르크까지 전해졌다.

푸른 섬광이 치솟을 때마다 왕가 수호대의 기사들이 작게 탄성을 내뱉고, 금빛 섬광이 퍼져 나올 때면 반대로 이방인들이 환호를 내질렀다.

그렇게 얼마나 먼 하늘을 채우는 섬광의 빛깔에 일희일비하고 있었을까. 어느 순간 은은하게 들려오던 굉음이 뚝, 하고 멈춰버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김선혁과 레인하르트 후작이 돌아왔다.

“음.”

어느 하나라고 할 것 없이 깨어지고 박살이 난 갑주와 흉하게 뜯겨져 나간 옷가지는 얼마나 결투가 흉험했는지를 알려주었지만, 단지 그것만 보고 승자를 구분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제 막 신성한 결투를 치르고 온 이들에게 경망되게 승패를 물을 수도 없었던지라 수호대의 기사들과 이방인들은 그저 두 사람의 눈치를 살피며 참관인으로 나섰던 기사를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창백한 얼굴을 한 기사는 도무지 그들의 의문에 답해줄 상태가 아니었다. 짙은 피로감이 묻어나는 얼굴이 마치 본인이 결투라도 치른 듯 엉망진창이었다.

“대, 대장님?”

비교적 서로가 친밀한 관계인 이방인들이 먼저 눈치를 보다 김선혁에게 달려갔다.

“가자. 피곤하다.”

그는 짧게 한마디를 내뱉고는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성을 향해 사라졌다.

제 대장을 따라 우르르 사라지는 이방인들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후작은 그때까지만 해도 표정을 알 수 없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이방인들이 완전히 시야에서 벗어나자 무표정의 가면에 금이 가고 말았다.

휘청.

“후, 후작님!”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는 후작을 본 수호대의 기사들이 기겁을 하며 달려들었다.

“호들갑 떨지 마라. 조금 지쳤을 뿐이다.”

이제껏 단 한 번도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노기사의 말에 기사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후작은 수하들이 자신을 어떤 얼굴로 바라보고 있는지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후작의 시선은 오로지 김선혁이 사라진 뤼겐부르크 성에 고정된 채였다.

“대체….”

후작의 얼굴에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떠올랐다.

“중부에서 무슨 일을 겪었던 거냐.”

수많은 감정 중에서도 가장 도드라지게 떠오른 것은 경탄과 패배감이었다.

**

숙소에 도착할 때까지만 해도 누구보다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 있던 김선혁은 숙소의 문을 열고 들어서기가 무섭게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죽겠구만.”

한나절을 쉬지 않고 싸운 여파는 고스란히 근육에 남았고, 결투가 끝난 지금도 경련하듯 팔다리가 떨릴 정도로 피로가 어마어마했다.

그만큼 레인하르트 후작과의 결투는 격렬했다.

후작이 반백 년 동안 갈고 닦아온 검은 김선혁으로서는 감히 상상하지 못했던 오묘한 것이었다. 한 수 한 수가 치명적이지 않은 공격이 없었으며, 방어하는 게 쉽지 않았다.

하지만 놀랍게도 후작의 장기는 공격이 아니었다.

후작은 왕족을 지근거리에서 경호하는 최측근 호위로서 누구보다 방어에 능했고, 그는 그 사실을 결투하는 내내 뼈저리게 실감할 수 있었다.

바람을 일으켜도 보고, 땅을 흔들어도 보았지만 후작의 방어는 견고하기만 했다. 결투가 종반에 치닫는 동안 그는 단 한 번도 후작의 방어를 뚫을 수가 없었다.

후작은 마치 거대한 성과도 같았다. 그 철옹성과도 같은 방어를 뚫어야 한다는 생각에 얼마나 암담했던지.

아오. 노인네 힘도 좋아. 진짜.

욱신거리는 팔다리를 주물러대던 김선혁이 불현듯 입술을 치켜 올렸다.

“그래도 내가 이겼어.”

빈틈도 없고, 약점도 없다. 그 완벽의 경지에 이른 방어는 마치 뚫리지 않는 방패와도 같았지만, 결국 그는 그 견고한 성벽을 허물어내는 데 성공했다.

빈틈을 찾는 대신 힘으로 그 방패 자체를 파괴시켜버린 것이다. 우격다짐에 가까운 무식한 공격이었지만 어쨌건 간에 승자는 그였다.

‘이런 무식한 공격이라니!’

후작이 이런 근본도 없는 무식한 공격이 어디 있냐며 억울함을 토로했지만, 후작 스스로도 그게 궁색한 항의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승부에 불복하는 추태를 보이지는 않았다.

무식한 한 수든 교활한 한 수든 간에 이기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이게 젊음의 패깁니다.’

한나절에 걸쳐 이루어진 결투 끝에 무릎 꿇은 후작 앞에서 그는 한껏 거들먹거렸다.

처음 왕도에 도착했을 때까지만 해도 감히 후작에게 이길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지금에야 후작의 됨됨이가 어떤지 잘 알고 있다지만 당시의 그는 자신을 멋대로 좌지우지하려는 후작에게 깊은 반감을 품었었다.

제 나름대로는 복수를 한답시고 꾀를 부린 게 고작 먼지를 뒤집어쓰고 줄행랑을 치는 정도였다. 그마저도 세 번의 공격을 양보 받은 다음에야 성공할 수 있던 일이다.

그런데 감히 올려다보는 것조차 버겁던 초인을 불과 6년 남짓한 시간 만에 추월했으니, 그 기쁨이야 이루 말할 수 없는 게 당연했다.

“후. 그래도 진짜 괴물은 괴물이네.”

왠지 모르게 비겁한 수를 쓰는 것 같아 정령왕의 창은 숙소에 두고 결투에 임했다. 하지만 그 하나를 제외하고는 최선을 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리는 쉽지 않았으니, 왕국의 정점에 오른 초인들이라는 작자들이 얼마나 강한 존재인지 뼈저리게 느끼고 말았다.

그런 초인적인 힘을 실감하고 난 뒤라 후작이 결투 끝에 남긴 말이 유달리 마음에 걸렸다.

‘후우. 사실상 그라두스의 서열 중에서 한 자리 수를 받은 이들은 나와 그 경지가 크게 다르지 않지. 그날그날의 컨디션에 따라 이기고 지고가 얼마든지 뒤집힐 수 있다는 말이지. 하지만 단 한 명, 완전히 격이 다른 괴물이 있네.’

레인하르트 후작 같은 강자마저도 격이 다르다며 경의를 표하는 존재.

‘이제껏 수도 없이 그 자에게 도전을 해왔지만, 나는 단 한 번도 그자에게 이기지 못했네. 아니, 솔직하게 말하면 일방적으로 졌지.’

심지어 그냥 진 것도 아니고 일방적으로 졌다니 직접 후작의 힘을 겪어본 김선혁으로서는 차마 믿기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게 검성입니까?’

‘맞아. 그가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타공인 왕국 최강의 검이었던 초인이자, 은둔공작이라 불리며 폐하께서도 왕국 내에 존재하는 것으로 족하다 평한 바 있는 강자, 마렉 슈나일 로아힘일세.’

인재를 끔찍할 정도로 혹사시키는 테오도르 국왕마저도 단지 검성이 왕국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더 없이 큰 이득이라 말하는 강자.

‘이제껏 영지에 처박혀 외유에 나서지 않던 그 은둔공작이 왕도에서 자네가 돌아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네.’

후작의 경고는 더 없이 진지했다.

‘조심하게. 은둔공작은 검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신경 쓰지 않는 미치광이, 자네의 신분이 섭정 폐하의 반려라고 해서 결코 사정을 봐주는 일은 없을 테니까.’

가만히 후작과의 대화를 떠올리고 있던 김선혁이 벌떡 몸을 일으키고는 숙소 한 켠에 두었던 정령왕의 창을 잡아들었다.

고오오.

대지에 만연한 생명력을 무한히 제공하는 정령왕의 창이 순식간에 근육에 스며든 피로를 걷어내고 새로운 활력을 전해주었다.

‘지금 저와 검성을 비교한다면 어떻습니까?’

‘만약 나와의 결투에서 보인 게 자네가 가진 밑천의 전부라면, 자네는 백 번 싸워 백 번 다 질 거라고 장담하네.’

후작은 몇 번이나 검성의 괴물 같은 강함을 말해주었지만, 전력을 다 하지 않은 것은 김선혁도 마찬가지였다.

만약 상대가 후작의 말대로 인간을 아득하게 초월한 존재라면, 그 역시 인간을 초월한 존재였다.

전룡의 형상.

생사를 결하는 전투가 아니기에 꺼내지 않았던 용기사 최후의 힘을 그는 아직 꺼내지 않은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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