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래곤 푸어-237화 (237/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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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8. 귀환 (3)

“오랜만이구나.”

퉁명스럽게 인사를 건네오는 꼬장꼬장한 노기사를 발견한 김선혁이 저도 모르게 떨떠름한 얼굴을 해 보였다.

왕실의 먼 어른이자 왕국에도 몇 없는 후작의 위를 지닌 위세 당당한 귀족, 하인리히 폴그램 레인하르트 후작이었다.

‘실제로 전승공께서 왕국에 복귀할 날을 기다리고 계신 분들이 많기는 합니다.’

‘…서열 제 6위에 랭크되신 하인리히 폴그램 레인하르트 후(侯)께서는 공개적으로 이런 내심을 내비친 바가 있습니다.’

그리고 레인하르트 후작은 지금 이 순간 김선혁이 가장 만나고 싶지 않은 인물들 중 하나였다.

“…왕가 수호대를 파견하셨습니다.”

한발 늦은 뤼겐부르크 남작의 설명에 레인하르트 후작이 손을 휘저으며 심드렁한 얼굴로 말했다.

“별 게 다 놀랍구나. 왕가 수호대가 왕실의 일원을 마중 나오는 게 뭐가 그리 놀라울 일이라고.”

물론 하나뿐인 왕위 계승자의 배우자이니만큼 왕가 수호대가 이 먼 곳까지 오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왕가 수호대의 수장이 왕성을 비우고 이곳까지 올 일도 아니었다.

“이베리아의 맹주가 바리바리 참 많이도 싸서 보냈구나.”

레인하르트 후작이 항구에 늘어선 이베리아 연합의 선단을 보며 혀를 찼다.

“뤼겐부르크 남작. 일단 화물을 확인하고, 원로에 지친 이들에게 쉴 곳을 마련해주도록. 나는 전승공과 따로 할 말이 있으니.”

당당한 영주를 아랫사람 부리듯 하는 후작이었지만 뤼겐부르크 남작은 감히 이를 허투루 듣지 못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연신 고개를 주억거리며 후작의 명을 받드는 모습을 보니 그간 꽤나 혹독하게 교육을 받은 눈치였다.

“전승공은 내가 반갑지 않은 모양이군. 인사도 하지 않는 것을 보니 말이야.”

후작의 지적에 뒤늦게 자신이 인사조차 건네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김선혁이 황급히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입니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하나뿐인 왕위 계승자의 배우자라는 타이틀에 더해 스스로의 작위가 이미 공작에 이른 그였지만, 상대는 방계라 하나 왕실의 웃어른이자 테오도르 국왕의 최측근인 레인하르트 후작이었다.

맞먹기에는 상대가 너무 거물이었다.

“섭정 폐하께서 집 나간 부군을 하염없이 기다리시는 걸 곁에서 지켜보느라 속이 좀 타들어가고, 왕국에서는 이제 늙은이라고 창창한 젊은이들 뒤에 줄을 세우기도 하고, 뭐 그런 것 빼면 잘 지낸 것 같군.”

“…….”

전혀 잘 지낸 것 같지 않은 후작의 대꾸에 김선혁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그러는 전승공은 어찌 지냈는가. 오가는 전문을 보아 대략적인 것은 전해 들어 알고 있다지만, 그 얼굴을 보니 아무래도 전문에는 여러 가지로 누락된 이야기들이 많은 모양이야.”

레인하르트 후작이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그를 노려보았다.

“아돌프 호츠네크. 미텐마이어 뷔코크.”

나직한 후작의 음성에 원정대의 인솔자 아돌프 호츠네크와 후송대의 책임자 미텐마이어 뷔코크가 허겁지겁 뛰어나와 자세를 잡았다.

“호츠네크 경. 자네의 보고 중에는 전승공의 얼굴에 그려진 저 아름다운 훈장이 들어있지 않았네만.”

그제야 후작의 표정이 험악해진 이유를 깨달은 김선혁이 반사적으로 제 얼굴의 한가운데를 가로지른 상처를 어루만졌다. 우둘투둘 튀어나온 세 가닥 홈, 강대한 마수 만티코어와의 격전 중에 입은 흉터였다.

“경들 눈에는 저게 보이지 않은 건가. 그게 아니면 고의적으로 보고에서 전승공의 상처를 누락시킨 건가. 전자라면 눈이 삔 것이나 마찬가지니, 내 친히 기사로서의 자네들 인생을 명예롭게 끝장내주고, 후자라면 지엄하신 폐하의 명을 소홀이 여긴 것이니 내 손으로 직접 자네들 인생을 끝장내주지.”

후작의 말은 결코 허언처럼 들리지 않았다. 물론 인재를 귀하게 여기는 아덴버그에서 젊은 나이에 상급 기사의 경지에 오른 전도유망한 기사들을 정말로 절단내겠냐마는, 허투루 듣기에는 한 자루 칼처럼 벼려진 후작의 기세가 살벌해도 너무 살벌했다.

“자. 대답해보게. 왜 보고에는 전승공의 상처에 대한 이야기가 없었지?”

“죄송합니다.”

두 기사가 후작 앞에 무릎을 꿇었다.

“아니야. 아니야. 내가 원한 대답은 그게 아니란 말이야.”

하지만 후작은 그들의 사죄가 그다지 마음에 차지 않은 모양이다. 도끼눈을 뜬 후작의 기세가 정말로 두 기사를 당장에라도 요절낼 것처럼 사나웠다.

“죄송합니다. 그 어떤 벌이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두 기사는 그 어떤 핑계도 대지 않았다.

결국 보다 못한 김선혁이 나서야 했다. 그대로 두었다가는 정말로 두 기사가 큰 벌을 받을 것 같았던 탓이다.

“그들은 아무런 잘못이 없습니다. 그들은 단지 제 부탁을 들어주었을 뿐, 섭정 폐하께 심려를 끼쳐드리지 않기 위한 제 생각이 짧았던 모양입니다.”

그의 말에 레인하르트 후작이 두 눈에 쌍심지를 켰다. 하지만 당장에라도 폭발할 것 같았던 후작은 화를 내지 않았다.

“전승공이 저렇게까지 말하니, 경들의 과오는 불문에 부치도록 하지. 하지만 앞으로 또 한 번 이런 일이 생길 경우 상급 기사의 위도 무사하지 못할 테니, 단단히 주의하도록 하게.”

후작이 억지로나마 화를 가라앉히자 왕가 수호대의 기사들이 헛숨을 들이켰다.

한 번 화를 내기 시작하면 끝장을 보기 전에는 멈추지 않는 노기사가 양보를 했다는 사실에 놀란 눈치였다.

“드릴 말씀이 많습니다. 그러니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도록 하시지요.”

김선혁의 말에 못 이기는 척 끌려가는 후작의 모습을 보며, 왕가 수호대의 기사들은 또 한 번 웅성거렸다.

**

“일부러 그런 걸세. 일부러.”

굳이 먼 중부까지 힘든 임무를 마치고 온 기사들을 그렇게 공개적으로 질책해야 했냐는 김선혁의 말에 레인하르트 후작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일부러 말입니까?”

“입 가벼운 뤼겐부르크 남작을 통해 이제 곧 소문이 퍼질 걸세. 전승공에게는 그 꼬장꼬장한 레인하르트도 어쩔 수가 없구나 하고 말이야.”

후작은 마치 남 이야기라도 하듯 떠들어댔다.

“그리고 소문을 들은 이들은 전승공의 권위가 예전과 다름을 알게 될 거야. 그게 바로 내가 원하는 바일세.”

후작이 스스로의 권위를 깎아 먹어가면서까지 그리 해야 할 이유가 대체 뭔지 그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네의 명성은 실로 대단해. 대륙에서 전승공을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니, 지금에 와서 기사들과 백성들에게 자네는 왕국의 수호신이나 다름이 없는 존재가 되었지. 하지만 말일세.”

레인하르트 후작의 눈이 똑바로 그의 눈을 마주 보았다.

“앞으로 자네가 있어야 할 곳은 전장이 아닐세. 그런데 자네는 전장이 아닌 곳에서는 영 미덥지가 않다는 말이지. 전장에서 보여주는 모습의 반의반만이라도 보여주면 좋겠지만, 어쩌겠나. 그게 자네 천성인걸.”

신랄하기까지 한 평이었지만 김선혁은 반박할 수 없었다.

“병사들과 기사들에게야 권위를 내세우지 않는 자네 같은 사람이 퍽 좋은 상관이겠지만, 능구렁이 귀족들에게는 이용해먹기 좋은 존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야.”

실제로 교국에서도 그를 만만히 본 베네딕트 대주교가 수작을 부리기도 했다. 결국 합당한 대가를 치르게 하긴 했지만, 정치에 능한 이들이 보기에 자신이 비교적 만만해 보인다는 건 사실이었다.

“왕국은 지금 그 어느 때보다 강하게 팽창하고 있네. 그런 상황에서 장차 여왕이 되실 섭정 폐하의 배우자가 호락호락해 보이는 건 결코 바람직한 상황이 아닐세. 물론 자네가 알아서 해결할 능력이 있다는 건 의심하지 않아. 하지만 그런 은밀한 시도와 도전 자체가 왕실의 권위를 좀먹는 곰팡이나 다름이 없다네.”

“그럼 후작께서는 제가 나설 줄 알고….”

김선혁은 탄성을 내뱉었다. 그제야 후작의 의도를 알아차린 것이다.

“유치한 눈가림이지. 하지만 효과는 더 없이 탁월할 거야. 입 가벼운 뤼겐부르크 남작을 통해 소문을 전해들은 이들은 전승공의 위상이 전과 같지 않음을 알게 될 걸세. 그들은 자네를 더 이상 과거처럼 한량공이라 부르지 못할 테고, 또 함부로 이용할 생각을 품지 못하게 될 걸세.”

설마 거기까지 노린 것인지는 생각하지 못했던 그는 후작의 노림수에 다시 한 번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후작님의 권위가….”

“한 번 양보를 했다고 날 만만하게 볼 놈은 적어도 이 왕국 내에는 없어. 만약 있다면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될 거야. 그러니 내 걱정은 말게. 게다가 내가 살아봐야 얼마나 살겠나. 젊은 자네에게 내 이름값을 조금 나눠준다고 해서 내게 무슨 큰 의미가 있겠느냐는 말일세.”

덤덤하기만 한 후작의 말에 그가 황급히 대꾸했다.

“무슨 말씀입니까. 이렇게 정정하신데. 어지간한 기사들은 여전히 후작님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할 겁니다.”

이 꼬장꼬장한 노기사가 세월 앞에 무릎 꿇는 것을 보는 건 그다지 유쾌한 일이 아니었고, 그는 진심으로 이를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진심으로 후작의 정정함을 강변해주었다.

“내 생각에도 그래.”

“네?”

갑작스레 후작의 태도가 돌변했다.

“아직 나는 한창때일세. 근데 뭣도 모르는 놈들이 나를 젊은 것들 뒤에 두려 한단 말이지. 아주 고얀 놈들이야.”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말하는 후작을 보며 김선혁은 불현듯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래서 친히 내가 아직 늙지 않았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알리려고 하네.”

“방금 전에는 이름값 정도는 나누어줘도 전혀 아까울 게 없다고….”

슬슬 구체화되는 불길함에 그가 슬며시 엉덩이를 띄웠다. 여차하면 자리를 박차고 나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후작은 그런 그의 생각을 빤히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처럼 선수를 쳤다.

덥석.

“귀족으로서의 내 이름은 기꺼이 나눠줄 수 있지만, 무인으로서의 이름까지 헐값에 넘길 생각은 없네.”

김선혁은 힘주어 손을 빼내려 했지만, 무슨 노인네가 힘이 그리 센지 후작은 요지부동이었다.

“섭정 폐하께서 좋아하지 않으실 겁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험악한 전장에서 생고생을 하다 온 저 아닙니까.”

그의 구차한 핑계에 후작이 피식 웃었다.

“섭정 폐하께서 허락하신 일일세. 아니. 오히려 섭정 폐하께서는 역마살이라도 낀 것처럼 밖으로 나도는 배우자의 다리몽둥이를 부러트려주기를 바라시는 눈치였지.”

“그럴 리가 없습니다.”

먼 타지에 나가 있는 남편이 다칠까 자나 깨나 염려하는 오필리아가 이 결투를 허락했을 리가 없다. 그가 강하게 부정하자 후작이 껄껄거리며 웃었다.

“그러게 연락이라도 좀 자주 드리지 그랬나.”

아무래도 오필리아는 아직 화가 전부 풀린 게 아닌 모양이었다.

“나 하인리히 폴그램 레인하르트는 선혁 라인펄 김 드라흔 전승공작에게 결투를 신청하는 바이다!”

잠시 오필리아를 생각하고 있는 사이에 레인하르트 후작이 덜컥 결투 신청을 해버렸다. 아무리 사석에서는 서로를 편히 대하는 후작과 그라고 해도 한 번 기사로서 결투를 신청한 이상 웃어넘길 수는 없었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합니까?”

“좋게 생각하게. 날 꺾으면 자네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놈들 중에 나보다 서열이 낮은 놈들과 드잡이질을 할 필요가 없어질 테니까.”

딴에는 일리가 있는 말이었지만, 본국에 귀환한 첫날부터 결투 신청을 받을 줄은 몰랐던 김선혁은 한숨을 내뱉고 말았다.

“혹시 피로를 풀 시간이 필요한가?”

배려 같지 않은 배려에 그가 고개를 저었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럴 줄 알았네.”

벌써부터 투지로 번들거리는 눈동자를 보며 김선혁이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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