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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7. 귀환 (2)
판테이아 기지가 위치한 평원을 나선 김선혁과 일행은 곧장 방향을 틀어 남쪽으로 향했다. 이베리아 연합의 선단을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가는 길은 이렇다 할 소란 없이 평온했다. 그날 십만에 달하는 마물들을 쓸어버린 이후로 교국 근방에서만큼은 마물들이 전선을 넘는 일이 사라지다시피 한 덕이었다.
그들이 이동하는 곳마다 교국의 고위 인사들이 찾아와 어떻게든 친분을 맺으려 했다는 게 유일한 소동이었다면 소동이었을 뿐이었다.
“그럼 그날 그렇게 마물들이 몰려든 게 민영이 때문이라는 거야?”
그동안 일행은 기지 안에 머무는 동안 못다 했던 지난 이야기를 나누었다.
“네. 민영이가 풀어낸 환수들이 지나치게 그 수가 늘어나서 마물들이 더 버티기 힘들었던 모양입니다.”
그 과정에서 김선혁은 그날 과도할 정도로 몰려들었던 마물들이 사실은 최민영과 환수들에게 밀려난 피해자(?)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환수라는 놈들이 그 정도로 강했었나.”
최민영의 소환수인 토르고스를 한 번 겪어본 바가 있는 그도 쉽사리 환수의 힘이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가 놀라움을 표하자 최민영이 그래 봐야 별거 아니라며 겸손을 떨었다. 하지만 그건 절대로 별거 아닌 게 아니었다.
십만의 마물과 수십의 마수들을 몰아내는 환수들이라니, 교국이 자랑하는 신전 기사단과 성전사들이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말도 마십시오. 환계에서 튀어나온 놈들은 죄다 걸신이 들렸는지, 지 배가 터질 때까지 먹어대더군요. 그게 마물이건 마수건, 뭐건 간에 말입니다.”
이수혁은 실제로 과식 끝에 배가 터져 죽은 환수마저 보았다며 너스레를 떨었는데, 다른 이들의 표정을 보건대 그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닌 듯했다.
“사실 교국에서는 듣는 귀가 있을까 싶어 조심스러워 말 못했지만, 저희가 서부에서 대장님의 탐색을 멈추게 된 것도 최민영 덕분입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인지, 김선혁이 어서 말해보라며 이수혁을 재촉했다.
“있는 대로 환수들을 끄집어내 서쪽 땅을 쓸고 다니다 보니, 혼돈의 전령이라는 놈이 찾아왔습니다. 놈은 우리를 회유하려 했지만, 놈이 조건을 전부 말하기도 전에 민영이가 환수를 풀었습니다.”
용인의 힘으로 물리치긴 했지만, 혼돈의 전령은 결코 약한 상대가 아니었다. 어지간한 마수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그 농밀한 악의는 싸우기도 전에 상대의 전의를 꺾는 가장 치명적인 독이었다.
그런데 이수혁은 그런 혼돈의 전령마저도 최민영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한 놈 잡고 좀 지나니, 두 번째 놈이 오더군요. 그래도 처음에 왔던 놈과는 달리 조금 영리하게 멀찍이 떨어져 대화를 시도했는데, 그 과정에서 저희는 대장님께서 서부를 벗어나셨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요컨대 너희들이 찾는 당사자는 더 이상 서부에 없으니, 그만 분탕질 치고 이 땅에서 나가달라고 혼돈의 전령이 부탁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황당한 일이었다.
마왕이 다루는 강대한 마물과 마수들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수족이라 할 수 있는 혼돈의 전령이 싸우는 것을 피할 정도의 환수라니, 들을수록 놀라울 뿐이었다.
“한 번 보고 싶군.”
“지금 보여드릴까요?”
그의 말이라면 죽으라는 시늉을 해도 할 최민영이 눈을 번뜩이며 다가왔다. 하지만 이수혁과 이방인들이 기겁을 하며 그 앞을 막아섰다.
“절대로! 절대로 안 됩니다! 여기서 환수들을 소환했다간 바로 대참사입니다!”
말릴수록 더욱 호기심이 강해졌다. 도대체 어떤 환수들이기에 피아를 가리지 않고 하나같이 만나기를 피한다는 말인가.
“민영이는 분명 훌륭한 환수사제지만. 안타깝게도 소환 능력에 비해 환수를 통제하는 능력은 그다지 특출 난 편이 아닙니다. 적지라면 모를까. 이런 곳에서 환수를 소환하게 두는 건 미친 짓입니다.”
하지만 이 정도까지 만류를 하고 나서니 굳이 호기심을 채우자고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었다. 그는 적당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고, 그런 그에게 슬쩍 다가와 최민영이 언제고 따로 자리를 만들어 환수 중 몇 놈을 보여주겠다며 속삭였다.
“그래.”
어쩐지 꺼림칙하기까지 한 그녀의 제안에 그는 그저 기대하마 하고 대답을 해주었을 뿐이었다.
그렇게 김선혁이 그간 아덴버그의 이방인들이 서부에서 겪은 일들을 전해 듣는 동안에도 이베리아 연합과의 거리는 가까워지고 있었다.
교국을 벗어난 이후 몇 번인가 전투가 있었다.
하지만 전원이 상급 기사에 준한다 평가되는 퀘이샤 일족이 있고, 아수라장을 살아나온 이방인들이 있었다. 마물들은 가여울 정도로 처참하게 격퇴되었다.
“음.”
그 모습을 보며 김선혁은 성장한 것이 최민영 뿐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수혁을 비롯한 하급 병과 출신의 이방인들은 이제 중급을 넘어 상급이라 해도 부족하지 않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놀라울 정도의 성장이었다.
“역시 레벨이 깡팬가.”
그들이 모두 50레벨을 넘어섰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다시 한 번 레벨의 힘을 실감할 수 있었다.
하찮은 하급 병과라고 해도 노력하고 노력하다 보면 결국 상급 병과에 못지않았던 것이다.
그런 사실도 모르고 자신의 처지에 좌절하여 마왕의 꾐에 넘어간 수많은 이방인들을 떠올린 그가 씁쓸한 얼굴을 해 보였다.
하지만 어쩌랴.
세상은 그들이 성장하기를 마냥 기다려주지 않았으니, 스스로 이겨내지 못하면 결국 시류에 휩쓸릴 수밖에 없었다. 그건 아무리 김선혁이 대단한 힘을 지녔다고 해도 어쩔 도리가 없는 일이었다.
“오오! 전승공! 그간 전승공께서 이룩하신 수도 없는 승리와 기적은 이 먼 이베리아까지 생생하게 전해졌다오. 그 신화와도 같은 행보에 모두가 손에 땀을 쥐고 듣지 않을 수가 없었소.”
최초 김선혁이 서부의 상황을 알게 된 후, 재앙을 온 대륙에 알리는 데 지대한 공을 세운 바가 있는 이베리아 연합의 맹주 디에고 벨라스케스는 그와의 재회를 더 없이 반겨주었다.
“그보다 통신 중개와 여러 방면에서 도움을 받았으니, 어찌 감사를 표해야 할지….”
“별말씀을 다 하시는구려. 전승공과 아덴버그의 발 빠른 대처 덕에 이 중부 땅만큼은 서부에서 일어난 재앙을 피할 수 있었다오. 우리야말로 감사할 뿐이오.”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태도는 숫제 선망하던 영웅을 눈앞에 둔 소년의 그것처럼 맹목적이었고, 호의적이었다.
“이것 참. 내 정신 좀 보게. 원로에 피곤했을 분들을 주책없이 잡고 있었군. 이해해주시오. 내가 그간 오매불망 얼마나 전승공께서 무사히 돌아오시기를 바랐는지, 실례를 해버렸소.”
뒤늦게 정신을 차린 디에고 벨라스케스가 숙소를 준비해두었다며, 그의 등을 떠밀었다.
“근래 들어 온갖 물자와 병력이 오가는 이베리아 연합은 전쟁으로 재정 상태가 악화된 다른 왕국들과 달리 오히려 더 큰 부를 축적하여 그 위상이 교국에 못지않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베리아는 그렇게 축적한 부를 통해 막대한 수의 용병을 고용해 교국 이상으로 전선을 잘 막아내고 있는 상황입니다.”
동부의 거의 모든 물자가 대부분 이베리아 연합을 통해 중부에 전달되다 보니 중간에서 챙기는 것도 만만치 않았던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전쟁의 와중에도 유난히 활발한 도시의 모습이 생경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근래 들어 목이 빳빳해진 이베리아 연합의 맹주가 이 정도로 환대를 할 줄은 몰랐습니다. 이게 다 전승공의 위상 덕분이겠지요.”
호송 임무가 끝난 뒤로 마치 그의 부관이라도 된 양 뒤를 졸졸 따라다니던 뷔코크 미텐마이어가 자랑스러운 얼굴로 그를 추켜세웠다.
하지만 그로서는 높아진 명성이 실감도 나지 않거니와 그다지 원하던 것도 아니었던지라 그저 시큰둥하게 그러냐 하고 넘어갔을 뿐이었다.
저녁이 되자 디에고 벨라스케스는 아덴버그의 인사들을 모두 초대하여 만찬을 대접하였다. 아덴버그에서도 받아보지 못한 화려하고 성대한 연회였다.
그리고 다음 날이 되자 김선혁과 일행은 그라나도의 항구를 향해 안내되었다.
“마음 같아서야 전승공을 붙잡아두고 싶지만, 이리 귀한 분이니 본국에서도 오매불망 귀환을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아 차마 그리 할 수 없어 안타까울 뿐이오.”
디에고 벨라스케스는 김선혁과의 이별을 엄청나게 아쉬워했다. 그 태도가 얼마나 지극한지 곁에서 지켜보고 있던 일행이 놀랄 정도였다.
“언제고 때가 되면 다시 한 번 들리지요.”
하지만 그에 비해 당사자의 태도는 덤덤하기만 했다.
“부디 귀환하는 그 길이 평안하기를 바라겠소.”
한참을 더 그를 붙들고 늘어지던 디에고 벨라스케스는 항구까지 따라와 배웅을 해주었고, 그들은 마침내 고국으로 향하는 선단 위에 오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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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고 벨라스케스의 호의는 단지 말뿐이 아니었다. 놀랍게도 함선 중 하나를 비워 그 안을 진귀한 물건들로 가득 채워두어 김선혁에게 선물을 한 것이다.
“이건 좀 과한데요?”
아무리 돈이 썩어날 정도로 넘쳐나는 이베리아 연합이라고 해도 그 호의의 정도가 과했다. 하물며 지금은 돈 한 푼이 아쉬운 전시가 아닌가.
이수혁이 인상을 찌푸리며 하는 말에 김선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에 공짜는 없지.”
마치 그 태도가 디에고 벨라스케스와 뭔가 밀약이라도 나눈 듯한 태도였다.
‘전승공. 나는 두렵다오. 교국은 정의로우나 그 정의가 지나치게 독선적인 면이 있다오. 중부의 모든 왕국들이 친 교국 인사들로 채워진 지금 우리 이베리아는 상당한 위기감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소.’
그리고 실제로 김선혁은 디에고 벨라스케스로부터 청탁을 받은 게 있었다. 말하자면 함선 하나를 가득 채운 사치스러운 선물은 일종의 뇌물과도 같은 것이었다.
‘교국은 전부터 우리 연합의 자유로움을 방종이라 폄하하여 못마땅하게 여겼으니, 전쟁이 끝이 난 이후 어찌 나올지 모르는 상황이오.’
아무래도 종교적 색채가 강한 교국의 특성상 온갖 이민족들과 문화가 자리 잡은 이베리아 연합의 풍토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니 만일 훗날 우려하는 일이 벌어진다면 부디 우리 연합과의 우정을 잊지 말아주시오.’
디에고 벨라스케스는 그런 날이 올 경우를 대비하여 아덴버그라는 보험을 들고 싶어 했다.
지금에 와서는 당당히 대륙의 최강국으로 떠오른 아덴버그는 충분히 교국의 압박을 해소해줄 수 있는 유일한 국가였다. 만약 그게 불가능하다면 전승공이라는 이름이 가진 힘을 빌리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교국의 전선에서 1년이 넘도록 싸워온 전승공이라면 굳이 아덴버그가 나서지 않아도 충분히 영향력을 발휘해줄 수 있을 거라 믿은 것이다.
김선혁이 당장 디에고 벨라스케스에게 확답을 준 것은 아니었다. 이베리아의 맹주 역시 그에게 당장 대답을 바란 것은 아니었다.
지금의 청탁과 선물은 먼 훗날을 대비한 포석에 불과했다.
어쩌면 마왕과의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대륙이 조용해질 것 같지는 않은 기분에 그는 괜스레 저 멀리 보이는 그라나도의 항구를 돌아보았다.
온갖 문화가 합쳐져 이국적인 풍취를 지닌 도시는 충분히 아름답고 융성했지만, 난세를 견뎌낼 정도로 공고해 보이지는 않았다.
“하. 진짜 전쟁이라면 이제 넌덜머리가 난다.”
전쟁이 무서운 건 어쩌면 그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증오와 탐욕이 어디로 튈지 모르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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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베리아 연합의 선단은 항해에 있어서만큼은 대륙 최고라 해도 자부할 정도로 숙련된 이들이었다. 그들과의 항해는 순조로웠다.
간간이 모습을 드러내는 해적들도 이베리아 해군의 깃발을 보고는 줄행랑을 쳤으며, 이따금씩 나타난 해양 몬스터들은 김선혁 일행이 나서기도 전에 이베리아의 해군들이 정리하였다.
과연 이런 수준의 해군을 보유하고 있으니 아덴버그와 동부의 왕국들이 굳이 이베리아 연합을 통하는 해로를 이용해 중부를 지원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렇게 이베리아 해군의 능숙한 리드 아래 김선혁 일행은 한 달이라는 시간 만에 아덴버그의 남부 항구에 도착하였다.
과거 블루곤을 처음으로 만났던 뤼겐부르크 영지였다.
“전승공의 귀환을 환영합니다.”
언젠가 해룡의 독에 당한 줄리앙을 치료하기 위해 신세를 졌던 로스타인 뤼겐부르크 드미트리 남작이 그를 극진한 태도로 반겨주었다.
두 번째 찾은 뤼겐부르크는 전과 완전히 달랐다. 뤼겐부르크 영지가 달라진 것은 아니다. 김선혁 스스로가 달라진 것이다.
과거의 그는 이곳의 영주인 드미트리 남작과 대등한 입장이었지만, 지금의 그는 감히 상대가 마주할 수 없을 정도로 고귀한 존재가 되었다.
실제로 드미트리 남작은 과거의 자신이 혹시라도 그의 기분을 상하게 했던 건 아닌지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과거 줄리앙 일로 신세를 졌던 것도 있었던 김선혁은 굳이 상대를 괴롭힐 생각이 없었기에 적당히 부드러운 태도로 남작을 얼러주었다.
“진즉부터 왕실에서 나온 사람들이 전승공께서 오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뒤늦게 그가 앙심이 없음을 깨달은 남작이 안심한 얼굴로 왕실에서 마중 나온 인물들의 존재를 알려주었다.
“왕실에서 말입니까?”
“네. 놀랍게도 섭정 폐하께서는 전승공을 마중하기 위해….”
남작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리고 그 음성을 들은 김선혁은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