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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 푸어-235화 (235/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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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6. 귀환 (1)

“정말 갈 거예요?”

아쉬움이 가득한 박준민의 말에 김선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야지. 본국에서 귀환 명령이 떨어진 지도 한참 됐는데, 내가 고집을 피우고 있었던 거야. 이제는 더 이상 핑계 댈 것도 없으니 돌아가 봐야지.”

“저 키워주신다면서요. 이렇게 가버리시면 저는 어떻게 하라구요.”

용사의 표정이 꼭 출근하는 주인 앞에 쭈그리고 앉아 생떼를 써대는 강아지처럼 보여 그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인마. 니 레벨이 벌써 48이다. 나보다 9레벨이나 높아. 근데 누가 누굴 키워줘.”

“그래도 아직 한참 부족한데.”

몇 번이나 사정을 말했음에도 억지를 부리는 용사에게 그가 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제부터는 너 혼자 알아서 해야 돼. 혼자 생각하고 혼자 성장하고. 그리고….”

“발뭉이를 너무 믿지 말고, 최소 레벨 70이 되기 전까지는 절대로 마왕과 싸우지 말 것. 형님. 한 번만 더 말씀하시면 이번이 서른 번쨉니다. 서른 번째. 어휴. 귀에 딱지 앉겠네.”

스스로가 나아가야 할 길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용사의 모습에 엄하게 나섰던 것이 무색해지고 만다.

하지만 그게 기분이 나쁘다기보다는 오히려 든든하게 느껴진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서 그는 용사를 나무라는 대신 웃으며 칭찬해주었다.

“그래. 그것만 명심하면 허무하게 당하는 일은 없을 거야.”

“왠지 내가 손해 보는 기분인데. 나는 시꺼먼 남자들 틈에서 마왕이랑 죽네 사네 하는데 형님은 어여쁜 형수님이랑 본국에서 완전 해피 라이프일 거 아니에요.”

용사의 표정에는 억울함이 가득했다. 아무래도 홀로 전장에 남아 마왕이라는 대적과 싸워야 한다는 사실이 생각보다 중압감이 컸던 모양이다.

“난 단지 조금 거들었을 뿐, 애초에 이 싸움은 네 싸움이야. 그러니 엄살 피지 마. 자식아.”

하지만 자신의 역할은 용사가 성장하기까지 잠시 스쳐간 동료 A에 불과했다. 이후부터는 용사 스스로 해결해나가야 할 과제들이었다.

게다가 그라고 해서 앞길이 마냥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당장 자신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아덴버그의 초인들이 즐비했고, 그들의 도전을 모두 이겨낸다고 해서 끝이 아니었다.

용살자.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있다지만 그렇다고 해서 안심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용사가 마왕을 상대하기 위해 전면에 나서지 않고 힘을 기르고 있듯, 용살자 역시 그 모르게 어딘가에 숨어서 힘을 키우고 있을 테니까.

언제고 그자가 찾아올 그날을 대비해야 했다.

“그럼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가볍게 대련 한 번?”

김선혁의 제안에 박준민이 입을 내밀고 툴툴거렸다.

“안 해요. 이번에 또 무슨 망신을 당하라고. 형님 가시고 나면 제가 기지의 정신적 지준데, 이젠 저도 체면 생각해야 한다구요.”

“그래도 레벨이 있는데, 전처럼 지겠냐.”

이미 레벨만 따지고 보면 용사가 그를 역전한 지 오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사는 그의 제안에 질색을 했다.

“형님이 싸우는 걸 못 봤으면 모르겠는데 그걸 보고도 싸울 생각이 들면 미친놈이죠. 진짜 아무리 생각해도 용기병은 사기인거 같아요.”

스텔라와 함께 한 마지막 전투는 기지의 많은 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모두가 아룡이 없는 전승공의 힘이 예전만 못할 거라 생각했었지만, 실제로 눈앞에서 본 전승공의 힘은 그들의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엄청난 것이었다.

“형님. 그게 전력이었던 것도 아니잖아요.”

그중에서도 박준민은 그게 김선혁의 전력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사실이었다.

그는 쇠약해진 스텔라가 버티지 못할 것을 염려해 용인의 힘을 꺼내지 않았다. 용인화야말로 용기사가 지닌 가장 강력한 힘이라는 사실을 떠올려 보면 그날의 그가 전력을 다 한 게 아니라는 용사의 추측도 틀린 것은 아니었다.

“괜히 돌아가기 전에 힘 빼지 마시고, 그냥 푹 쉬다 가세요.”

“나도 그냥 해본 말이야. 어쨌건 잘 있어라. 살아만 있으면 언제고 다시 만날 수 있겠지.”

용사는 그와의 이별을 진심으로 아쉬워했지만, 끝까지 억지를 부리지는 않았다.

이제는 정말로 헤어져야 할 때였다.

**

“이제 가는 건가?”

“가야지.”

그날 다륜과 북방의 기병들은 교국의 수많은 인사들 앞에서 숨기고 있던 힘을 남김없이 보여주었다. 은근히 자신들을 야만인 취급하며 배척하는 교국의 수뇌부들에게 제대로 무력시위를 한 것이다.

그날 이후 그들의 가치는 재평가 되었다.

그간 은근히 야만인이라며 북방의 기병들을 얕잡아 보았던 대신전에서 처음으로 대화 테이블을 마련했고, 그 협상에서 다륜은 평소의 우직한 모습이 무색하게 능수능란한 태도로 그들에게 원하는 것을 모두 얻어내고야 말았다.

중부 왕국 연맹은 마왕과의 전쟁이 끝이 난 이후, 서부 중 일부를 정식으로 북방 유목민들의 영토로 인정해주기로 협정을 맺었고, 다륜과 기병들은 앞으로 자신들이 싸워 이기는 만큼의 토지를 분배받아 새로운 터전을 마련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그때야말로 혹독한 기후와 척박한 대지로 인해 고통받던 유목민들이 마침내 풍요로운 남부의 어딘가에 새로운 왕국을 세우게 되는 순간이리라.

물론 그 전에 해결해야 할 과제가 산더미였다.

당장 서부를 움켜쥔 마왕을 몰아내야 했고, 차후 용사의 힘을 빌려 오염된 대지를 정화해야 했다.

앞으로 얼마가 걸릴지 모르는 긴 여정이었지만, 김선혁은 다륜과 북방의 사내들을 믿었다.

증오는 증오를 낳을 뿐이라며, 침략 대신 개척을 선택한 이 호방한 사내와 전사들이라면 반드시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었다.

“너와 함께 했던 그날의 전투는 절대로 잊지 못할 거다. 이곳까지 달려오는 동안의 그 정신 나간 질주 역시 마찬가지다.”

“남자끼리 잊고 말고가 어딨어. 낯 간지럽게.”

말은 그리 퉁명스럽게 하면서도 김선혁의 표정에도 진한 아쉬움이 남아있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는 법이다. 그는 담백하게 손을 내밀며 호방한 사내와의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그가 내민 손을 빤히 바라보고 있던 다륜이 힘주어 그의 손을 잡아당겼다. 그리고는 와락 그를 끌어안았다.

“우리 초원의 아들들은 한 번 형제로 여긴 자를 절대로 잊지 않는다. 그러니 언제고 우리가 자리를 잡고 난 후 꼭 찾아와라. 제대로 대접해주마.”

“기대하지.”

짧은 포옹 끝에 다륜이 몸을 돌려 사라졌다.

뒤를 돌아보지 않는 사내다운 깔끔한 이별이었다.

“후.”

진하게 남은 아쉬움을 뒤로 하고 김선혁은 일행에게 돌아갔다.

“일은 전부 끝나셨습니까?”

짐을 꾸린 채 기다리고 있던 이수혁과 이방인들이 그를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주고는 원정대의 사람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만 해도 어딘지 모르게 어설픈 구석이 있던 이방인들이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어설픔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한 자루 칼처럼 날카롭게 선 기세가 과히 역전의 용사들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를 위해 그들이 치러야 했던 대가는 결코 적지 않았으니, 그들의 성장이 뿌듯하면서도 안타까운 김선혁이었다.

‘전사한 녀석들 중에서도 대장님을 원망하는 녀석은 없었습니다. 어차피 우리가 이 먼 중부까지 온 건 싸우기 위해서지, 관광이나 하러 온 게 아니니까요. 게다가 서부로 들어간 건 우리의 선택, 그런 것까지 책임을 떠넘길 정도로 저희는 나약하지 않습니다.’

빈자리를 보며 씁쓸해하는 그를 보며 이수혁과 이방인들은 도리어 당신의 탓이 아니라 위로해주었다.

그래도 이렇게 절반 가까이 비어버린 자리를 보고 있노라면 가슴이 저려오는 것만큼은 그도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그렇게 감상에 젖어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는 애써 서글픔을 털어내고는 일행을 돌아보았다.

“채비가 끝났으면 출발하자. 갈 길이 멀다.”

그의 말에 원정대의 인원들이 각자 짐을 챙겨들고는 그의 뒤에 섰다.

“가자. 우리들의 집으로.”

**

김선혁은 곧장 기지의 성문으로 향했다.

그동안 제 나름대로 동고동락했다 여겼던 기지의 병사들은 어쩐지 그를 본체만체 하였다.

“이 새끼들 진짜 너무하네.”

이수혁이 발끈해서 인상을 찌푸렸지만, 정작 김선혁은 전혀 서운하지 않은 얼굴이었다.

“전쟁 중간에 떠나는 입장이다. 저들 입장에선 끝까지 함께 싸우지 않고 도망가는 배신자로 보여도 할 말이 없겠지.”

이제껏 대의를 위해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싸워왔던 그였기에 병사들이 지금 느끼는 배신감이 더 한 것도 아예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간 대장님께서 해 오신 게 있는데. 이 배은망덕한 새끼들.”

“맞아. 지금 이 기지 주변이 조용한 것도 전부 대장님 덕분인데.”

이방인들이 불만을 표했지만, 피난민들을 겪으며 나름대로 깨달음을 얻은 김선혁은 오히려 그런 그들을 다독여주었을 뿐이다.

“사람이란 게 원래 그런 법이다. 그러니 너무 그렇게 열 올리지 마라. 누가 뭐라 해도 이들은 앞으로도 전장에 남아 대륙의 미래를 걸고 싸울 이들이다. 무운을 빌어줘야지.”

당사자가 괜찮다고 하니 더 이상 떠들어대기도 뭐했고, 계속해서 구시렁댈 수만은 없었던지라 이방인들도 금세 입을 다물고 말았다.

하지만 표정이 사나워지는 것만큼은 김선혁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동안 수고하셨소. 교국과 중부의 왕국들은 그간 전승공께서 보여주신 그 헌신과 희생을 절대로 잊지 않을 거요.”

어느덧 기지의 입구에 다다른 김선혁은 자신을 배웅 나온 노기사와 기지의 수뇌부들과 간단한 인사를 나누었다.

그간 그가 해온 일에 비하면 지나치게 초라한 배웅이었다.

“후우. 참자. 참자.”

바로 뒤에 있던 최민영이 위험스러운 기운을 풍기며 숨을 몰아쉬긴 했지만, 김선혁과 일행들은 비교적 조용하게 기지를 나설 수 있었다.

“빌어먹을 새끼들. 중부 쪽으로는 다시는 오줌도 안 싼다.”

마침내 성문을 빠져나온 이수혁이 더는 참지 못하고 욕설을 내뱉었다. 다른 이방인들 역시 험악한 표정으로 교국의 병사들을 욕했다.

하지만 너무 성급한 판단이었던 모양이다.

뿌우우우우우.

갑작스레 등 뒤에서 뿔 나팔 소리가 울렸다. 혹시라도 하필 이 타이밍에 마물들이 나타난 것은 아닌가 깜짝 놀란 일행이 뒤를 돌아보았다가 그대로 굳어버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제 할 일에 집중하느라 아덴버그 일행을 본체만체 하고 있던 병사들이 어느새 성벽의 동문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었다.

“뭐, 뭐야. 갑자기.”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한 얼굴을 해 보인 아덴버그 일행을 보며 노기사가 검을 뽑아들고 외쳤다.

“판테이아 기지 내 총 병력! 전승공께 대하여 경례!”

“부디 앞으로도 전승공의 앞날에 승리만이 있기를!”

노기사의 우렁찬 호령에 성벽 위를 가득 채우고 있던 신전 기사들과 사제, 병사들이 일제히 경건한 자세로 군례를 취해 보였다.

“전승공! 그간 감사했소! 언제고 신세 꼭 갚겠소!”

“판테이아 기지의 형제들은 전승공의 일이라면 열 일 제치고 찾아가 한 손 거들 겁니다! 부디 이곳의 형제들을 잊지 마십시오!”

“전승공께서 구해주신 수많은 생목숨을 우리는 앞으로도 기억할 겁니다!”

함성을 내지르는 병사들 중에는 아덴버그 일행이 기지 내를 지나며 보아왔던 병사들도 있었다.

“아….”

그들의 얼굴을 보고 나서야 일이 어찌 된 것인지 깨달은 김선혁이 성벽 위를 보며 피식 웃었다. 팔이 떨어져나가라 흔들며 이쪽을 바라보는 용사는 더 없이 흡족한 얼굴이었다. 이 유치한 배웅이 누구의 머리에서 나온 것인지 알 수 있는 광경이었다.

“준민이 아이디어군.”

유치하기 짝이 없는 깜짝 쇼, 하지만 솔직하게 말해 기분은 좋았다.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 일행을 다독여주기는 했지만 감사를 모르는 이기적인 군상들을 지켜보는 건 김선혁에게도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으니까.

“형님! 다음에 볼 때는 절대로 안 집니다! 그러니 기다리고 있으라고요!”

용사의 말에 김선혁이 마주 소리쳤다.

“오냐! 기대하고 있으마!”

왠지 모르게 코끝이 찡한 기분에 그가 다시 한 번 기지를 돌아보았다.

열렬히 손을 흔들며 자신들이 아는 덕담이라고는 죄다 꺼내 앞날을 축복하는 병사들의 모습과 체면조차 잊고 과격한 축언을 내뱉는 사제들과 신전 기사들의 모습을 그는 오래오래 눈에 담았다.

“가자.”

사정도 모르고 병사들을 욕했던 것이 미안했는지 머쓱한 얼굴을 하고 있던 아덴버그 일행이 그의 말에 슬쩍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그를 따라 몸을 돌렸다.

“선혁 님.”

기지 밖에서 진즉부터 대기하고 있던 나지마와 퀘이샤 일족이 그를 보고는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리고는 곧장 아덴버그 일행의 뒤에 자리를 잡았다.

“갑시다.”

그런데 그 순간 지축을 울려대는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다륜과 북방의 사내들이었다.

“선혁!”

멀찍이서 자리를 잡은 다륜과 기병들이 일제히 창을 들어 올렸다.

“초원의 바람은 한 자리에 머무는 법이 없지만, 언제고 같은 모습으로 다시 찾아오게 마련이다! 우리의 만남 또한 이러할지니! 먼 훗날 그대와 나, 모두 오늘과 같은 모습으로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그렇게 외친 다륜이 품속에서 뿔 나팔을 꺼내 들었다.

“다시 보자! 형제여!”

다륜과 수만의 기병이 불어대는 뿔 나팔 소리가 온 평원을 가득 채우고, 그 속에서 김선혁과 일행은 기지를 떠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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