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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5.천마(天馬)의 전설 (2)
내달리기 시작한 기병의 기세는 일반 보병들의 기세와는 질적으로 달랐다.
그 앞에 놓인 것이 무엇이든 간에 반드시 박살을 내고야 말겠다는 필살의 의지, 그게 바로 기병들의 투쟁심이고 각오였다.
그런 각오가 하나도 아니고 수만이다.
그것도 어지간한 왕국의 정예 기병들 정도는 어린아이 취급한다는 북방의 사나운 기병들이 내뿜는 전의다.
정련된 정예 기병대들의 그것보다 보다 더 사납고 보다 더 원초적인 투쟁심, 그들의 기세는 적의 목덜미를 물어뜯는 늑대의 흉폭함과도 닮아 있었다.
그 사나운 기세가 하나가 되어 선봉에 선 김선혁에게 모여들었다.
마치 수백 수천의 창이 등판을 콕콕 찌르는 듯한 기분, 꾸물거렸다간 적에게 닿기도 전에 저들의 창이 먼저 자신의 등을 먼저 후벼 파낼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는 덤덤히 그 압박감을 이겨냈다.
자격이 없는 이는 선봉에 세우지 않는다는 건 기병들의 철칙 중의 철칙. 북방의 기병들은 묻고 있었다.
네가 과연 그 자리에 설 자격이 있는지.
익숙한 상황이다. 이미 한 번 겪어봤던 일이다. 뭣도 모르던 시절 처음으로 선봉을 맡았을 때 중갑 기병대의 대원들이 딱 저러했다.
그들 역시 선봉의 자격을 물었고, 그는 마침내 스스로를 입증하였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북방에서 온 사나운 기병들의 질문에 대답해주었다.
속성 지배력을 끌어올렸다. 바람의 힘이 최고조에 도달한 순간, 전방에서 불어오던 세찬 바람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천지사방을 울려대던 말발굽 소리가 조금씩 희미해진다. 그리고 이내 작은 발소리조차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귀를 찢을 것처럼 파고들던 마물들의 포효 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들리는 것이라고는 세차게 뛰어대는 심장의 박동 소리뿐, 속도감마저 사라진 그 기이한 세상 속에서 그의 입술이 작게 달싹여졌다.
“윈드 피어싱.”
그것이 수만 기병들의 질문에 대한 그의 대답이었다.
**
성벽 위에서 김선혁과 북방의 기병들이 내달리는 것을 보고 있던 노기사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설마 정면으로 들어갈 생각인가!”
수만의 기병들이 한 몸처럼 내달리는 광경은 분명 전율이 일 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하지만 상대가 좋지 않았다.
마물들은 무게와 속도가 더해진 기병들의 돌격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게 몸으로 버텨낼 정도로 강인한 존재들이었다.
그런 마물들을 상대로 틀에 박힌 돌격을 시도하는 건 노기사가 보기에 자살행위나 다름이 없었다.
선봉을 맡은 이가 아무리 전승공이라고 해도 그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섣부른 판단이었다.
콰아아아아.
마치 수만의 짐승이 사납게 울부짖는 듯한 바람소리가 전장의 소음을 완전히 집어삼키고, 그 순간 이변이 일어났다.
쩌어어억.
세상이 갈라진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이 쪼개지고, 그 너머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형체조차 남기지 못하고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딱딱한 표피로 둘러싸인 마물이든 살 무른 언데드이든 그 앞에서 무력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강대한 마수들마저도 전승공이 내지른 일격을 견디지 못하고 사지가 갈기갈기 찢겨져 나가고 말았다.
“아….”
노기사가 탄식인지 신음인지 모를 소리를 내뱉었다. 평정을 잃은 노기사의 표정 그 어디에도 평소 보여 왔던 근엄함은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이를 보고 흠잡을 수 없었다.
성벽 위에 자리 잡은 수천의 병사들 역시 노기사와 마찬가지 얼굴을 하고 있었으니까.
어느 누군들 상상이나 했으랴. 단 한 번의 창질에 이 정도의 위력이 담겨 있었을 거라고, 감히 누가 있어 상상이나 해보았을까.
그들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완전히 넋을 잃고 말았다.
“도, 돌파했습니다!”
사람들이 정신을 차린 건 전승공이 수도 없이 늘어선 마물들을 완전히 관통하고 난 뒤였다.
노기사는 핏발이 선 눈으로 전장을 노려보았다.
전승공과 수만 기병들이 지나고 난 자리에 남아있는 건, 찢어지고 흩어져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되어버린 마물들의 잔해뿐이었다.
단 한 번의 돌격으로 10만에 달하는 마물의 대군 한가운데가 완전히 허물어진 것이다.
놀라움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마물들을 완전히 관통한 전승공이 길게 선회하여 다시 기병들을 이끌고 검은 파도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방금 전과 똑같은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필생의 힘을 모아 단 한 번 겨우 펼쳐낸 공격이었을 뿐이라 해도 믿어지지 않았을 엄청난 돌격이 연달아 펼쳐진 것이다.
수도 없이 많은 마물들이 또다시 세상과 함께 쪼개졌다.
한 번, 두 번, 세 번….
전승공과 기병들은 계속해서 돌격했고, 마물들은 계속해서 휩쓸려나갔다. 어느 순간이 되자 단지 선봉을 따라 내달렸을 뿐이던 후열의 기병들이 넓게 펼쳐져 마물들을 몰아쳤다.
날카롭던 창이 둔탁한 몽둥이가 되어 마물들을 두들겼다.
끼에에에에!
마물들이 비명을 질러댔다. 마지막 하나가 남더라도 절대 흉성을 버리지 않던 마물들이 겁에 질려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사냥이 시작되었다.
전승공을 뒤따르던 수만 기병들 중 일부가 무리에서 떨어져 나온 마물들을 짓밟았다.
“이 무슨….”
놀라운 건 전승공의 힘뿐만이 아니었다.
사납고 날래지만 그래봐야 야만인들이라 내심 얕잡아 보았던 북방의 기병들은 교국의 기사들이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힘을 숨기고 있었다.
“맙소사. 저들 모두 최소 기사 이상의 경지에 오른 강자들입니다.”
눈이 좋은 신전 기사 하나가 본대에서 떨어져 나온 북방의 기병들을 보다 신음을 내뱉었다.
“아니. 저들뿐만이 아닙니다. 전승공을 따르는 본대에도 그런 강자들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보십시오. 후미를 따르는 이들마저도 견습 기사 급 강자들입니다.”
전승공에게 시선을 빼앗겼던 지휘관들이 전장의 전체를 보기 시작하면서 북방 기병들의 진면목이 드러났다.
“전승공과 함께 온 이들은 단순한 기병들이 아니었습니다.”
노기사의 부관이 침음을 삼키며 말했다.
“그들 전체가 하나의 기사단이었던 겁니다.”
사만에 달하는 기사단은 하나의 왕국을 주춧돌도 남기지 않고 쓸어버릴 수 있는 엄청난 전력이었다.
그런 괴물들이 교국의 영토 내에 들어와 있었는데도 까맣게 몰랐었다는 사실에, 지휘부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그들의 눈에 북방의 기병들이 신들린 것처럼 마물들을 학살하는 광경이 보였다.
이제껏 교국의 정예들이 마물들을 상대한다고 고생해온 것이 무색해질 정도로 그들은 수월하게 마물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크아아아아아아!
한참 넋 놓고 전승공과 북방 기병들의 활약을 지켜보고 있는데, 갑작스레 귀청을 찢는 듯한 포효소리가 들려왔다.
“사, 상급 마수들입니다!”
몇 차례 이어진 돌격에 크게 여덟 덩이로 쪼개진 마물들의 대군 사이에서 유달리 거대하고 흉포 해 보이는 마수들이 튀어나왔다.
음흉하게 존재감을 숨기고 있던 진짜 괴물들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마수들이 이쪽으로 옵니다!”
수십에 달하는 마수들은 교활하게도 전승공과 북방의 기병들을 상대하는 대신, 기지를 향해 달려드는 것을 선택했다.
아무래도 눈앞의 상대보다 기지 쪽의 병력이 쉬운 상대라 판단한 듯했다.
“감히!”
노기사가 사납게 눈을 치떴다. 마수들에게 얕보였다는 사실에 노기가 치민 모양이었다.
“더 이상 꺼릴 것이 없으니, 사제들과 마법사들은 저들을 요격하는 데 있어 주저함이 없어야 할 것이다!”
전승공과 북방 기병들의 놀라운 활약에 경쟁심이라도 느낀 것일까. 노기사가 전력을 다해 마수들을 격퇴할 것을 명령했다.
추상과도 같은 명령이 순식간에 성벽 위에서 대기하고 있던 마법사들과 사제들에게 전달되었고, 그들은 각자 지닌 최고의 마법과 신성주문을 읊조리기 시작했다.
신전 기사들 역시 언제든 마수를 맞아 싸울 수 있도록 성벽 위에 올라와 칼날에 성광을 끌어낸 상태였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들은 마법을 사용할 기회도, 검을 맞댈 기회도 없었다.
갑작스레 창공에서 무언가가 벼락처럼 내리꽂힌다 싶더니, 성벽 바로 코앞까지 짓쳐 들었던 킹 다이어 울프를 짓뭉개버린 것이다.
“전승공입니다!”
킹 다이어 울프를 창끝에 꿰어 들고 있던 이는 전승공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한참은 떨어진 곳에서 마물들과 드잡이질을 하고 있던 전승공이 어떻게 그 짧은 시간 동안 기지의 바로 근처까지 도달한 것일까.
사람들은 금세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펄럭.
새하얀 육신에 어울리는 우윳빛의 뽀얀 한 쌍의 날개가 우아하게 펄럭였다. 그 모습이 신화 속에나 등장하는 천마(天馬, Pegasus)와도 같았다.
“허어.”
더는 놀랄 기분조차 들지 않았다.
전승공의 전투는 존재만으로 신의 기적을 입증하는 이들이라 일컫는 신전 기사들이 보기에도 놀라운 광경의 연속이었다.
그들이 얼빠진 얼굴로 잠시 전승공을 지켜보는 사이에 천마가 날개를 펼치고 날아올랐다.
캬악!
십수 마리의 마수들이 방향을 바꿔 천마를 향해 달려들었다.
새하얀 날개를 펼친 천마와 그 위에 올라탄 금빛 갑주를 두른 기사, 그리고 사악한 괴물들. 마치 신전 벽화에서나 볼 법한 광경이었다.
상급 마수들은 과연 강력했다. .
치명적인 마기와 독으로 무장한 그들의 독니와 발톱이 조금이라도 몸에 닿았다간 순식간에 몸이 녹아내려 한 줌 핏물이 되고 만다.
또한 마수들의 기기괴괴한 울음소리는 불길을 일으키고 눈보라를 불러내는 강력한 주문이었다.
콰아아아아아아.
하늘에서 불의 비가 내리고, 대지가 꽁꽁 얼어붙었다. 어쩌다 튄 불꽃과 얼음덩이에 판테이아 기지의 단단한 성벽이 녹아내리고 부서져 버렸다.
하지만 그런 사악한 이능도 천마에 올라탄 전승공에게는 미치지 못했다.
전승공은 마치 바람처럼 하늘을 누비며 마수들을 상대했다. 한 번 돌격하면 반드시 마수 하나가 피를 뿌리며 나가떨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투는 쉽게 끝이 나지 않았다.
마수들은 끈질겼다.
그들은 어떻게든 전승공의 육신을 갈기갈기 찢어발기기 위해 안간 힘을 다 써댔다.
성벽마저 녹아내리는 치명적인 독액을 뱉어내고, 어금니를 딱딱거리며 끊임없이 전승공을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모든 신화가 그러하듯 사악한 괴물들은 본디 그들이 왔던 무저갱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털썩.
턱 아래부터 정수리까지 마치 꼬치처럼 창에 꿰인 마지막 마수 하나가 절명하는 것을 끝으로 전장에 더 이상 살아남은 마수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무리를 이끄는 마수들이 쓰러지자 사방에 흩어져 전투를 이어가던 마물들이 퇴각하기 시작했다.
“이, 이겼다!”
성벽 위에서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병사들이 승리의 함성을 질렀다. 비록 한 것이라고는 떨어져 내리는 불의 비와 냉기를 피해 이리저리 달아난 것밖에 없었지만, 왠지 모르게 가슴이 뜨거웠다.
그리고 그들은 몸이 타는 듯한 그 열기를 함성으로 내뱉어냈다.
“전승공 만세!”
“드라흔 만세!”
기지가 떨어져나가라 외쳐대는 병사들의 함성 속에서 천마가 천천히 날갯짓을 하며 성벽 위에 내려앉았다.
“전승공!”
노기사와 기지의 수뇌부들이 앞다투어 전승공을 향해 몰려들었다.
“십만의 마물들을 격퇴했소! 이 정도면 근방의 마물들 모두가 일소되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오!”
잠시나마 느꼈던 전승공에 대한 경쟁심은 이미 사라졌는지, 노기사는 이 전설적인 기사의 용투에 더없이 순수한 표정으로 경의를 표했다.
“상급 마수들이 이리도 많이 쓰러졌으니, 아무리 그 수가 끊이지 않는 마물들이라고 해도 당분간은 교국을 넘보지 못할 거요. 참으로 장한 일을 하셨소.”
평소 근엄하여 평정을 잃지 않던 노기사는 드물게 들뜬 얼굴로 거듭 그의 승리를 축하해주었다.
“그렇습니까.”
하지만 십만에 달하는 마물의 군대를 물리치고, 십수 마리 마수의 목을 베어낸 신화적인 승리를 일군 당사자라고 할 수 있는 전승공은 어쩐 일인지 조금도 기뻐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그저 서글픈 얼굴로 천마의 갈기를 하염없이 쓸어주었을 뿐이었다.
“전승공?”
노기사가 그 영문 모를 슬픔에 의문을 표했지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수고했어.”
천마의 목을 끌어안은 그가 작게 속삭이고, 그 순간 천마가 다리를 꺾으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천천히 숙여지는 천마의 머리, 전승공이 따라서 무릎을 꿇었다.
“내 평생 다시는 너 같은 녀석을 만나지 못할 거다. 그간 고생했다. 스텔라.”
푸르릉.
천마가 흐리멍덩한 눈을 몇 번 깜박이다 제 주인의 품에 머리를 묻었다. 그리고는 다시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안녕. 스텔라.”
간헐적으로 퍼덕이던 날개가 완전히 멈추더니 이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져버렸다.
“고마워. 아티야.”
도대체가 이게 무슨 상황인지 알 수 없었다. 노기사와 지휘부들은 왠지 모르게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에 그저 어리벙벙한 얼굴로 전승공을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서쪽에서 일단의 병력이 접근 중입니다!”
마물들의 퇴각을 지켜보고 있던 기사 하나가 서편을 향해 손을 가리키며 외쳤다.
“아덴버그! 실종됐던 아덴버그의 병력입니다!”
**
가만히 스텔라의 목을 끌어안고 있던 김선혁이 성벽 저 너머를 바라보았다. 그런 그의 눈에 사지에서 돌아온 아덴버그의 병력을 맞아 다륜과 기병들이 달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꼬질꼬질한 얼굴이지만 크게 다친 곳은 없어 보이는 이수혁과 거검병, 수척해진 최민영과 이방인들의 모습이 보였다.
다륜을 만난 이들이 몇 마디 대화를 나누다 성벽 위를 바라본다.
이내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뭐라 뭐라 외치던 그들이 이쪽을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돌아왔구나.
가만히 그들을 바라보던 김선혁이 스텔라를 바라보았다. 눈 감은 애마의 모습은 평온해 보였다.
턱.
새하얀 육신 위로 순백의 알갱이가 떨어져 내렸다. 처음에는 드문드문 떨어져 내리던 하얀 덩어리가 어느 순간 스텔라의 몸 위로 쌓이기 시작했다.
“아. 눈이네.”
마치 스텔라의 죽음을 기리듯 그 고운 털빛을 꼭 닮은 눈이 내리는 것을 보며 그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제 돌아가야지.
삭풍과 사라졌던 아덴버그의 이방인들이 첫눈과 함께 귀환했을 때, 마침내 김선혁의 전쟁은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