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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4.천마(天馬)의 전설 (1)
댕댕댕.
판테이아 기지의 비상종이 계속해서 울려댔다. 그리고 그 급박한 종소리에 쫓기듯 병사들이 허겁지겁 제 위치를 찾아 자리를 잡고, 기지의 사령관과 수뇌부들이 성벽 위에 마련된 지휘소에 모여들었다.
“순찰대는! 순찰대는 아직인가!”
“곧 도착할 겁니다!”
시끄러운 고성이 오고 가고 이내 저 멀리서 뽀얀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한 무리의 기병들이 나타났다.
“저기 옵니다!”
눈 좋은 파수병의 보고에 기지의 사령관이자 신전 기사들의 수장인 노 성기사가 침통한 얼굴로 혀를 찼다.
“자리가 많이 비는군.”
아무래도 기지의 병사들이 대비를 할 시간을 번답시고 무리를 한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평원에서만큼은 누구보다 날랜 순찰대의 기병들이 저리 많이 당했을 리가 없다.
전속력으로 달려오는 순찰대 뒤로 커다란 먼지구름이 피어올랐다.
“저기 마물들이 보입니다!”
눈 좋은 병사와 기사들이 마물들을 발견하고는 각자 눈어림으로 마물들의 수를 헤아리기 시작했다.
“서북 방면 최소 사만!”
“서쪽 중앙 방면 오만 이상! 대형 마물 다수!”
“마물의 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수도 없이 많은 전투를 치렀지만 이 정도로 많은 마물들이 기지 인근까지 접근한 적은 없었다.
노기사와 지휘관들의 표정이 전에 없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무래도 외곽 초소들은 이미 당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아마 봉화를 피워 올릴 새도 없었겠지요.”
부관의 낮게 가라앉은 음성에 노기사가 가슴께에 성호를 그렸다.
“약속된 낙원에서 그들이 영원하기를.”
하지만 언제까지고 전사한 외곽 초소의 병사들을 추모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마물들은 이제 육안으로 그 흉물스러운 낯짝이 보일 정도로 접근했고, 순찰대의 기병들은 아직도 저들을 완전히 뿌리치지 못했다.
“다이어 울프들입니다!”
어지간한 준마 이상으로 발이 빠르다 알려진 검은 늑대들이 컹컹거리며 순찰대의 뒤에 바짝 따라붙어 있었다.
“빨리! 좀만 더 빨리!”
“힘내라고!”
당장에라도 따라잡힐 것처럼 위태롭기만 한 순찰대의 모습에 성벽 위의 병사들이 혀를 짓씹어댔다.
“조금만 더!”
“다 와 간다!”
병사들의 안타까운 함성에 기지의 수뇌부들이 굳은 얼굴을 해 보였다.
“킹 다이어 울프도 있습니다.”
사납게 짖어대는 늑대들 중에서도 유달리 거대한 늑대가 눈에 들어왔다. 다이어 울프들을 이끄는 상급 마수 킹 다이어 울프였다.
크르르르.
킹 다이어 울프는 마치 도발이라도 하듯 성벽 위를 바라보며 입을 쭉 찢어 보였다.
“일부러 따라잡지 않고 있군. 아마도 아군을 미끼로 성문을 뚫고 난입하려는 모양이다.”
늑대 마수는 교활하게도 순찰대의 기병들을 따라잡을 듯 말 듯 간격을 유지하며, 호시탐탐 성문을 뚫고 들어설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저 상태라면 순찰대가 무사히 성문을 통과하더라도, 다이어 울프들의 난입을 막을 수가 없습니다. 다른 놈들은 몰라도 킹 다이어 울프가 난입하게 두어선 안 됩니다.”
“마법사들과 사제들이 다이어 울프들의 발을 묶기에는 아군과의 거리가 지나치게 가깝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아군도 함께 휩쓸릴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위력을 낮추어 정밀 사격을 가하자니, 다이어 울프들에게 제대로 된 타격을 주기가 어려운 상황입니다.”
모든 정황이 사령관에게 괴로운 결단을 촉구하고 있었다.
“사령관님. 지금이라도 성문을 내려야 합니다.”
어지간한 초인들 정도는 간단히 찢어발기고도 남을 강력한 마수가 다가오고 있다. 수뇌부는 아무래도 순찰대를 포기할 생각인 모양이었다.
“잠시만, 잠시만 기다리게.”
“하지만!”
“저들이 아직 포기하지 않았는데 우리가 먼저 포기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하지만 노기사는 그들의 재촉에도 굳은 표정으로 결정을 번복하지 않았다.
“신전 기사들은 성문 앞에 집결시키고, 만약을 대비하게.”
만약을 대비한 노시가의 지시에 신전 기사들 중에서도 가장 용맹한 이들이 성문 앞에 도열하였다.
“아군이 들어오는 대로 다이어 울프들을 밀어낸다! 성문 밖에 고립되지 않게 각별히 주의하라!”
“명심해라! 우리의 임무는 다이어 울프들의 섬멸이 아니다! 성문 밖으로 밀어내면 그만이니 초전부터 힘 뺄 생각 마라!”
마기의 천적이라 할 수 있는 신전 기사들이었지만, 킹 다이어 울프 같은 상급 마수는 그들에게도 버거운 적이었다.
“제발!”
“조금만 더 힘을 내!”
신전 기사들은 조금씩 가까워지는 순찰대를 보며 검날에 성스러운 광휘를 휘감았다.
터벅. 터벅.
전에 없이 고조된 기사들의 투기, 그런데 그 사이를 가로질러 걸음을 옮기는 한 쌍의 인마(人馬)가 있었다.
“전승공?”
금빛 화려한 갑주를 차려입은 채 말 위에 올라탄 기사, 뒤늦게 정체를 알아본 신전 기사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순찰대의 기병들이 들어오면 성문을 닫으십시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건넨 그 한마디가 무슨 뜻인지 채 파악하기도 전에 아덴버그에서 온 기사가 성문 밖으로 나가버렸다.
“이런! 전승공께서 홀로 성문 밖으로 나가셨다! 사령관님께 알려라!”
신전 기사들이 갑작스러운 상황을 사령관에게 전하기 위해 부산을 떨고 있을 때, 성문 위 지휘소에 하급 장교가 뛰어들었다.
“무슨 일인가?”
“전승공께서 사령관님께 전하라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전승공께서?”
눈조차 깜박이지 않고 다이어 울프들과 순찰 기병들의 질주를 바라보고 있던 노기사가 뒤늦게 뒤를 돌아보았다.
“이번 싸움은 전승공께서 홀로 맡겠다 하셨습니다!”
“뭐?”
이건 또 무슨 얼토당토않은 소리인지, 노기사의 표정에 당혹스러움이 떠올랐다. 하지만 미처 그 말뜻을 알아듣기도 전에 추가 보고가 들어왔다.
“전승공께서 성문 밖으로 홀로 나서셨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또한 아군이 성문을 통과하는 즉시 성문을 닫으라 하셨습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리저리 꺾이고 덮여 가려져 있던 성문 앞 좁은 통로를 따라 전승공이 모습을 드러냈다.
“전승공!”
노기사가 놀라서 외치자 전승공이 투구의 바이저를 올리며 위를 올려다보았다.
“이 싸움 제가 맡겠습니다.”
몰려드는 마물들의 수가 수만이고 마수들의 수만 해도 기십이었다. 아무리 전승공이라고 해도 홀로 저 끝도 없는 마물들의 파도를 향해 뛰어들게 만들 수는 없었다.
“아니 될 말이오! 기지의 방비가 완벽하니 함께 협력하여 막아내면 저들을 물리치는 것도 어렵지 않을 거요! 그러니 어서 돌아오….”
철컥.
만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전승공이 투구의 바이저를 내리고는 창을 겨드랑이에 꼈다. 그리고는 서서히 말의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전승공!”
눈 깜짝할 사이에 놀라울 정도로 속도가 붙어 내달리는 백마를 본 노기사가 아연실색한 얼굴로 그를 불렀지만,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헛!”
말릴 새도 없었다. 정신을 차린 순간 아덴버그의 기사는 수백의 다이어 울프 무리를 향해 짓쳐 들고 있었다.
**
투구에 난 구멍 사이로 보이는 세상은 지독스러울 정도로 비좁았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숨 가쁘게 달려오는 아군의 모습과 그 뒤에 바짝 따라붙은 수백 마리의 검은 늑대들만이 유일했다.
“말을 돌리십시오!”
선두에서 달려오던 순찰 기병이 비명처럼 외쳤다. 하지만 그조차도 머리를 감싼 투구 탓에 아득하게만 들려올 뿐이다.
후우. 후우.
김선혁은 투구 속에서 숨을 몰아쉬었다. 불길을 삼킨 듯 금세 투구 안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위험합니….”
다급한 경고를 한 귀로 흘리며 김선혁은 그대로 순찰 기병들 사이를 가로질렀다.
한 무리의 기병들이 좁은 투구의 틈 사이에서 사라지고, 그는 그대로 그들의 존재를 잊었다.
이제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오직 적뿐이었다.
가자. 스텔라.
백마가 대답이라도 하듯 길게 울부짖으며 돌격 자세를 취하고, 그 역시 겨드랑이에 낀 창을 콱 움켜잡으며 자세를 낮췄다.
“윈드 피어싱.”
**
“이런 무모한!”
필사적으로 내달리던 순찰대장은 자신을 스쳐가는 기사를 보며 욕설을 내뱉었다. 수백의 다이어 울프와 상급 마수 킹 다이어 울프를 향해 홀로 돌격하는 기사의 무모함에 아연실색하고 만 것이다.
하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지금 속도를 늦췄다가는 마물들에게 따라잡혀 갈기갈기 찢어발겨 지고 말테니까.
쾅!
그 순간 등 뒤에서 엄청난 폭음이 들려왔다. 급박한 상황도 잊고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본 순찰 대장은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교국이 자랑하는 신전 기사들조차도 처리에 애를 먹는다는 사나운 늑대들이 한꺼번에 튕겨져 나가고 있었다.
단 한 명의 기사가 수백의 다이어 울프들의 한가운데를 완벽하게 관통한 것이다.
“대장! 성문입니다!”
그 놀라운 광경에 눈을 찢어져라 부릅뜨고 있던 그는 이내 부하의 고함에 다시 정면을 바라보았다.
수십의 신전 기사들이 거룩한 성광을 머금은 검을 움켜잡은 채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워! 워!”
그들이 열어준 길을 따라 달리던 순찰대장은 이내 말의 속도가 줄자 그대로 뛰어내렸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저 사람은 대체 누굽니까!”
흥분하여 외치는 그에게 신전 기사들 중 하나가 대꾸했다.
“전승공이시다.”
“아….”
워낙 상황이 다급하여 미처 알아보지 못했던 전설적인 기사의 이름에 순찰대장이 탄성을 내뱉었다. 이제야 그 놀라운 돌격을 납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전승공께서 왜 혼자….”
차르르르르.
쇠사슬 풀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싶더니 둔탁한 무언가가 돌을 긁으며 내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반사적으로 소리의 진원지를 찾아 고개를 돌린 순찰 대장의 눈에 서서히 내려오는 성문의 모습이 보였다.
“전승공께서 아직 밖에….”
이번에도 순찰 대장은 말을 끝마칠 수 없었다.
저 너머에서 한 무리의 기병들이 나타난 탓이다.
“으악! 어떤 미친놈들이 성문 앞에서!”
만약을 대비해 집결해 있던 병사들이 갑작스레 성문 앞 광장에 난입한 기병들을 보고는 사방으로 몸을 날렸다.
“비켜라! 비켜!”
밀집된 병사들을 이리저리 피한 기병들이 성문을 향해 내달렸다.
“부딪친다!”
이미 말머리 정도 높이까지 내려온 성문, 병사들은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기병들은 마치 그들을 놀리기라도 하듯 말에 엎드리듯 매달려 곡예처럼 성문을 빠져나갔다.
그 와중에도 성문의 틈은 꾸준히 좁아지고 있었지만,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성문에 부딪치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마지막 기병은 말과 함께 옆으로 눕듯이 묘기를 부리며 빠져나가는 기예를 선보이기까지 했다.
“음? 무슨 일인가?”
성문 앞에 일어난 소란에 노기사가 사정을 물으니, 어디선가 달려온 병사가 상황을 보고해주었다.
“전승공과 함께 온 북방의 기병들이!”
“그들이 왜!”
“성문을 빠져나갔습니다!”
쿵!
때마침 둔탁한 소리를 내며 완전히 닫혀버린 성문, 노기사가 아연실색한 얼굴로 성벽 끝까지 달려가 고개를 내밀었다.
두두두두두.
성문 앞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내달리는 기병들, 그중에서도 선두에 선 사내는 노기사도 익히 아는 자였다.
“끼얏호! 다륜 님 나가신다!”
**
뿌우. 뿌우. 뿌우우우우우.
다륜을 뒤따르던 북방의 기병 하나가 뿔 나팔을 길게 불었다. 성 밖에 주둔 중이던 형제들을 부르는 신호였다.
뿔 나팔 소리가 몇 번 울리기도 전에 기지 동쪽에서 수만의 기병들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들은 이내 쏜살같이 달려와 다륜의 뒤에 합류했다.
수만의 기병들이 대오를 갖추는 건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실로 놀라운 광경이 아닐 수가 없었다.
“허벅지에 기름이라도 잔뜩 낀 거냐! 느려 터져 가지고는!”
하지만 다륜은 그런 사내들을 보면서 못마땅한 듯 혀를 찼다. 물론 북방의 거친 사내들은 대족장의 폭언에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마치 어디서 개가 짖나 싶은 얼굴로 귀를 후벼 팔 뿐이었다.
“도대체가 대족장에 대한 존경심이 보이지 않는 놈들이로다!”
다륜은 그런 모습이 익숙한지 한마디를 쏘아붙이고는 진지한 얼굴로 외쳤다.
“오랜만에 밥값 좀 하자! 이 식충이들아!”
그리고는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곧장 저 멀리서 한창 검은 늑대들과 전투 중인 자신의 친우를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컹!
창에 꿰뚫린 다이어 울프가 비명을 지르며 나가떨어지고, 남아있는 다이어 울프들이 주춤주춤 물러나기 시작했다.
아우우우!
시기를 맞춰 킹 다이어 울프가 길게 울부짖자 다이어 울프들은 아예 몸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김선혁이 이내 스텔라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푸르릉.
용사의 신성력 덕인지 스텔라는 마치 전성기 시절로 돌아간 듯 당당하고 기력이 넘쳐보였다.
아직 더 싸울 수 있다.
스텔라의 음성이 머릿속에 들려오는 것 같았다.
후우.
짧게 숨을 몰아쉰 그가 창을 거머쥐며 그 사이에 접근해온 수만의 마물들을 노려보았다.
“선혁.”
때마침 다가온 다륜이 수만의 기병들을 뒤에 두고는 그에게 말했다.
“뛰어난 말은 언제나 무리를 이끄는 법, 그 녀석이라면 초원의 진짜 전마들을 이끌 자격이 충분하다.”
다륜이 손을 들자 수만의 기병이 일사분란하게 김선혁을 중심으로 쐐기꼴 형태로 자리를 잡았다.
푸르릉.
수만의 말과 사나운 전사들이 뿜어대는 투기를 등 뒤에 두고도 스텔라는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았다. 도리어 그게 당연하다는 듯이 목을 한껏 치켜들었다.
그 모습이 마치 수만의 무리를 이끄는 여왕처럼 도도해 보였다.
아덴버그에서도 가장 명성 높던 기병대의 선봉을 도맡아왔던 명마, 김선혁은 자랑스러운 얼굴로 스텔라의 갈기를 쓰다듬어주었다.
다시 예전 그때처럼.
김선혁은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런 그의 뒤를 따라 사나운 북방의 기병들이 일제히 대지를 박찼다.
“전군.”
서서히 올라가는 속도, 그의 주변으로 바람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돌격.”
그 순간 수만 기병들의 기세가 폭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