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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 푸어-232화 (232/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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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3. 일심동체 (4)

미친놈처럼 전장을 헤매고 다녔으니 그라두스 순위가 상승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건 올라도 너무 올라버렸다.

설마 그라두스 순위 1위라니, 김선혁으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순위였다.

“전승공께서는 아덴버그의 수많은 기사와 마법사들 중에서도 정점에 서신 겁니다. 명실상부한 최강의 기사가 되신 것이지요.”

자세를 바로 잡으며 존경의 염을 보내오는 뷔코크의 눈빛에는 선망의 빛이 가득했지만, 김선혁은 어쩐지 그리 달갑지 않은 기색이었다.

“저 역시 부족하나마 검의 길을 걷는 자로서 전승공께 진심 어린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 그런데, 기쁘지 않으십니까?”

한참을 떠들어대던 뷔코크가 뒤늦게 그의 표정을 발견하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의 표정에 기쁜 기색이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제야 눈치챈 모양이었다.

실제로 그는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그라두스 서열 1위라는 영광에 취하기보다는 이후의 일이 걱정되었던 탓이다.

“다른 사람들은 뭐라고 하든가?”

“풍문에 의하면 섭정 폐하께서는 이를 당연한 수순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기셨지만, 은근히 기뻐하는 기색이셨다고 합니다. 또한 귀족들과 기사들 역시 전승공께서 이룩하신 수많은 승리를 근거로 하여 그라두스의 순위 재조정을 지지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아니. 섭정 폐하나 다른 귀족들이 아닌 그라두스 순위를 지닌 기사와 마법사들의 분위기를 묻는 것이다. 가령 레인하르트 후작님이라든지 말이다.”

그제야 질문의 핵심을 파악한 뷔코크가 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마법사들은 애초에 그라두스 순위를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분위기였으니 별말이 없습니다.”

“기사들은?”

“음.”

청산유수처럼 그 어떤 대답도 막힘이 없던 뷔코크가 처음으로 곤란한 얼굴을 해 보였다.

“들을 것도 없겠군. 보나마나 내가 돌아오기를 아주 칼을 갈면서 기다리고 있겠지.”

지독스러울 정도로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한 마법사들은 연구와 실험을 통한 진리의 탐구만을 지상과제로 여겨 세간의 평가 따위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이들이었다.

하지만 기사들은 달랐다.

기사들은 기본적으로 투쟁심이 강한 존재들이었고, 필요하다면 상대와 검을 겨루어 자신의 경지와 깨달음이 더욱 높음을 증명하기를 마다치 않았다.

이는 경지의 높고 낮음과 상관없이 모든 기사들이 지닌 공통적 성향이기도 했다. 아니, 오히려 경지가 높은 이들일수록 누군가를 자신의 위에 두는 것에 끔찍할 정도로 민감했다.

그런 상황에서 검을 맞대어 경지의 높고 낮음을 증명할 기회도 없이 사람들이 멋대로 엉뚱한 놈에게 ‘최강’이라는 칭호를 주어 그들의 위에 두어버렸다.

자존심 강한 기사들이 이를 선선히 납득할 리가 없었다.

“실제로 전승공께서 왕국에 복귀할 날을 기다리고 계신 분들이 많기는 합니다.”

역시나 예상대로였다.

“그중에서도 전승공께 밀려 서열 2위가 되신 검성(劍星) 마렉 슈나일 로아힘 공(公)이라든지, 서열 제 6위에 랭크되신 하인리히 폴그램 레인하르트 후(侯)께서는 공개적으로 이런 내심을 내비친 바가 있습니다.”

서열이 올라가니 경쟁심을 드러내는 자들도 하나같이 어마어마한 괴물들이었다.

“환장하겠군.”

왕국에 돌아가자마자 도전장부터 받게 생겼으니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지끈거릴 지경이었다.

“음?”

그렇게 머리를 부여잡고 있던 그는 문득 위화감을 느꼈다.

“근데 왜 레인하르트 후작께선 5위가 아닌 6위지?”

자신이 왕국을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레인하르트의 그라두스 서열은 네 번째였다. 그 위 순위에 변동이 있었다고 해도 다섯 번째가 되었어야 정상이었다.

“설마 내가 자리를 비운 동안 후작께서 패하신 건….”

레인하르트 후작 같은 괴물이 누군가에게 패배하는 일은 쉽사리 상상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 말고는 후작의 순위 하락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실제 결투가 있었는지 어땠는지 직접 본 사람은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그라두스 순위가 발표되었을 때, 레인하르트 후작님을 존경하는 기사 중 누군가가 후작님의 순위에 불만을 품고 이 일을 고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그때 후작께서 대답하시기를.”

잠시 뜸을 들인 뷔코크가 짐짓 흉내라도 내듯 근엄한 음성으로 말했다.

“‘싸워 이기고 지고의 문제가 아니다. 나는 그녀와 다시는 싸우고 싶지 않다.’라고 하셨답니다.”

“그녀?”

레인하르트 후작처럼 호승심 강한 기사가 맞서는 것을 피할 정도의 강자가 여인이라고 하니 그 정체가 더더욱 궁금해지는 김선혁이었다.

“대체 누구지 그게?”

그가 호기심을 보이자 신이 난 뷔코크가 새롭게 떠오른 강자의 정체를 알려주었다.

“티어휘터. 그녀가 레인하르트 후작님의 그라두스를 가져갔습니다.”

티어휘터라는 성이 어디선가 들어본 적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도통 떠오르지가 않았다.

한참을 궁리하고 있자니 뷔코크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그녀는 전승공과 같은 이방인 출신이기도 합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김선혁은 티어휘터가 누구의 성인지를 떠올릴 수 있었다.

“최민영!”

티어휘터는 소환사 최민영에게 왕실이 하사한 성이었다.

**

자신을 찾아 원정대가 서부로 향한 뒤 실종되었을 때 김선혁은 당장에라도 그들을 찾아 마왕의 땅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그때 그를 말린 건 오필리아였다.

‘원정대의 환수사제 최민영은 절대로 약하지 않다. 최소한 그곳이 지켜야 할 것이 없는 적진이라면 그녀의 강함은 그대 이상이리라.’

그녀는 최민영이 그의 생각과는 달리 약한 존재가 아니며, 충분히 제 힘으로 서부에서 살아 돌아올 수 있을 거라 말했다.

그 말을 믿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설마 그녀가 레인하르트 후작보다 높은 그라두스를 지닌 강자가 되었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그가 아는 후작은 사람들이 엉뚱한 이를 자신의 위에 두고 떠들어대는 것을 가만히 두고 볼 정도로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었으니까.

“레인하르트 후작님의 말씀이 있었지만 몇몇 호승심 강한 기사들은 이에 승복하지 못하고 그녀에게 도전장을 내밀었습니다. 그중에는 그라두스 서열 13에 랭크된 흑기사 라크하드 폰 슈터하임 백작님도 계셨지요. 결투 신청은 받아들여졌습니다. 하지만 무슨 이유인지 그들의 결투는 왕도 아데스덴이 아닌 왕도에서 멀리 떨어진 동부 불모지에서 치러졌지요.”

김선혁은 눈을 빛내며 그 결과를 물었다.

“그들이 결투를 치르고 돌아왔을 때, 그들 중 어느 누구도 티어휘터 자작의 그라두스 서열에 대해 불만을 표하지 않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들 역시 후작님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티어휘터 자작과 다시는 싸우고 싶지 않다.

뷔코크의 말에 그나마 남아있던 염려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 레인하트르 후작뿐 아니라 그라두스 서열 13에 랭크된 강자와 다른 기사들조차 그녀의 강함을 인정해줄 정도라면 더 이상 그녀와 원정대의 안위를 염려하는 게 무의미한 일이었다.

기지에 남아 그들의 생환을 가만히 기다리고 있어야 했던 김선혁의 마음에는 알게 모르게 원정대에 대한 책임감과 죄책감이 상당히 무겁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 중압감을 상당히 털어버릴 수 있었다.

오필리아의 말대로 최민영은 절대 약하지 않다. 그녀가 원정대를 살려 반드시 돌아올 거라는 믿음이 생기는 순간이었다.

“자네 덕분에 짐을 하나 덜 수 있게 되었다. 정말 고맙다.”

그의 감사 인사에 뷔코크가 알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었다. 표정을 보니 괜히 그라두스 순위를 말해준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흠….”

김선혁은 뷔코크를 통해 본국의 상황을 비교적 상세하게 전해 듣게 되었다. 취약한 보안 탓에 마법 통신과 전문으로도 받아볼 수 없었던 이야기들도 다수 있었는데, 그중에는 오필리아의 대관식에 관련된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미 섭정 폐하께서 국왕 폐하를 대신하여 국정의 크고 작은 일을 도맡아 처리해오신지 시간이 꽤나 흐른 지금, 귀족들 중에 섭정 폐하의 혜안과 그 역량에 대해 의문을 품은 자는 더 이상 없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의 거행이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는 건, 섭정 폐하께서 모든 일정을 공의 귀환 이후로 선언하셨기 때문입니다.”

대소신료들이 몇 번이나 대관식에 대해 언급했지만, 오필리아의 마음을 꺾을 수 없다 하니 아무래도 그녀는 기어이 자신의 남편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생각인 모양이었다.

“정말 빨리 돌아가야겠군.”

한 나라의 왕위를 계승하는 중대사가 자신 때문에 무기한 미루어지고 있다니, 이제는 어지간한 핑계 따위는 씨알도 먹히지 않게 되었다.

꼼짝없이 원정대가 돌아오는 대로 바로 본국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후. 알겠다. 내가 본국의 상황이 궁금해 피곤한 사람을 붙잡고 있었군. 이만 돌아가서 쉬어도 좋다.”

“별말씀을. 명성 자자한 전승공의 존안을 이리 마주하고 왕국의 소식을 가장 먼저 전할 수 있었던 건 제게도 뜻깊은 시간이었습니다.”

적당히 인사치례를 한 뷔코크가 막사를 나서고, 그렇게 그날의 하루가 끝이 났다.

그리고 다음 날이 되자 김선혁은 곧장 스텔라를 찾았다.

“스텔라?”

그런데 스텔라의 상태가 이상했다. 평소라면 콧김을 뿜으며 달려와 친한 척을 했을 스텔라가 바닥에 주저앉은 채 도통 일어나지를 못했다.

푸르릉.

거칠게 투레질을 하며 끙끙거리지만 이내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는 스텔라, 김선혁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스텔라!”

주인의 안타까운 음성에 스텔라가 다시 한 번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용을 썼다. 하지만 스텔라는 힘이 달리는지 이내 도로 주저앉고 말았다.

“아….”

그 모습을 본 김선혁이 한 걸음에 달려가 스텔라를 끌어안고는 눈을 질끈 감았다.

처음 기병대에 배속되어 프레드릭 중대장과의 거래를 통해 스텔라를 얻고도 무려 여섯 해가 지났다. 그가 전장을 누비는 동안 스텔라의 나이도 어느덧 열한 살이 되었다.

일반적인 말의 수명은 대개 20년 정도다.

하지만 중무장한 주인을 태우고 전장을 내달리는 전마 같은 경우에는 그 수명이 절반이 채 되지 않았다. 온갖 소음과 위협이 가득한 전장에서 받는 스트레스와 잦은 부상, 그리고 전투의 격렬함 속에 전마의 수명은 단축될 수밖에 없었다.

그중에서도 스텔라는 김선혁과 함께 수많은 전장을 누벼온 전마다. 위험을 마다치 않는 주인 탓에 늘 크고 작은 상처를 달고 살아야 했으며, 늘 가장 과격한 전장의 한가운데에서 주인을 위해 내달려야 했다.

다른 전마들보다 단명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선혁은 스텔라가 더 달릴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다.

자연적으로 태어난 백마의 특징상 노화가 겉으로 도드라지 않았기에 더더욱 그렇게 생각했다.

그건 착각이었다.

오필리아는 스텔라가 전마로 달릴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하였지만, 실상 전마로서의 스텔라는 이미 수명이 다한 상태나 다름이 없었다.

어쩌면 스텔라는 쇠약해진 스스로의 다리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 더더욱 그리 꼿꼿하게 서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오직 주인을 등에 태우고 다시 한 번 초원을 질주하고 싶은 충성스러운 짐승의 염원이 꺼져가는 육신에 마지막 힘을 불어넣어줬을 것이다.

“스텔라. 스텔라.”

김선혁은 왈칵 솟아오르려는 눈물을 애써 참으며 쇠약해진 애마의 육신을 어루만져주었다.

“미안하다. 정말 미안해.”

이 우직한 짐승은 자신을 좁은 울타리 속에 가두어 두고 신경도 쓰지 않았던 주인을 원망조차 하지 않았다. 오히려 어떻게든 일어나려 애를 쓰며 버둥거렸다.

하지만 전날의 질주를 끝으로 힘이 다한 스텔라는 다시 일어날 수 없었다.

“선혁! 오늘은 같이 나가는 거다! 우리 부족에서도 가장 날랜 놈들로 모아왔….”

누군가에게 김선혁이 마구간으로 향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일까. 신이 나서 찾아온 다륜이 뒤늦게 그와 스텔라를 발견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문 닫아. 스텔라 춥다.”

그의 나직한 음성에 다륜이 황급히 마구간의 문을 닫았다.

“스텔라가 감기 걸렸나 봐. 도통 일어나지를 못하네. 여긴 내가 살던 세상처럼 약도 따로 없는데.”

“선혁.”

“왜 하필이면.”

그의 덤덤한 음성에 다륜의 표정이 무거워졌다.

“왜 나 같은 주인을 만나서.”

김선혁은 힘없이 늘어진 스텔라의 목을 끌어안고 몇 번이고 갈기를 쓸어 만져 주었다.

“멍청한 새끼. 저밖에 모르는 새끼. 뒤늦게 후회해서 뭘 어쩌겠다고.”

바싹 메마른 음성에 다륜이 다가와 그의 어깨를 잡았다.

“선혁.”

“형니이이임. 어제 못한 대련 오늘… 어? 형님?”

그때 마굿간의 문이 벌컥 열리며 박준민이 뛰어 들어왔다.

쉬잇.

다륜이 가만히 손가락을 세워 입을 가리며 용사에게 눈짓을 했다.

“아….”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용사가 입을 다물고는 김선혁과 스텔라를 번갈아 살펴보았다.

기력이 다했는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눈을 껌벅거리는 새하얀 백마와 가만히 애마를 끌어안고 있는 주인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박준민이 별안간 마구간을 뛰쳐나갔다.

그리고 용사는 다시 돌아왔을 때 성검을 꽉 움켜잡고 있었다.

“거룩한 광휘 앞에 엎드려 말하니, 거룩한 음성이 말하기를 네가 아직 더 할 일이 있으니, 돌아가 맡은 바 소임을 끝마치라. 그리 하면 낙원에 들어설 것이니라. 라고 하시더라.”

박준민이 경건하게 성구를 읊자, 성검이 새하얀 백광을 내뿜기 시작했다. 그렇게 퍼져나간 섬광이 스텔라를 감싸 안았다.

푸르릉.

찬란한 섬광에 닿은 스텔라가 거칠게 투레질을 하더니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아….”

“오래는 못 버텨요. 그래도 한 번 더 달려볼 정도는 될 거예요.”

박준민의 말에 김선혁이 깊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고맙다 말했다. 그리고는 잠시 망설이다 스텔라의 독촉에 안장을 얹고 그 위에 올라탔다.

“가자.”

그가 애마와의 마지막 질주를 위해 마구간을 나서려던 그 순간, 갑작스레 기지의 종이 댕댕거리며 울려대기 시작했다.

“서쪽 방면 30킬로미터 거리, 대규모 마물 무리 발견! 기지를 향해 접근 중이랍니다! 기지 내의 기사님들과 지휘관 분들은 전부 지휘소로 모이시랍니다!”

그를 발견한 병사 하나가 황급히 전황을 알려주고는 다시 어디론가 사라졌다.

잠시 소란스레 전투 준비를 하는 병사들을 지켜보던 김선혁이 마침 지나가던 하급 장교를 불러 세웠다.

“사령관께 알려라.”

영문을 몰라 눈을 껌벅이는 장교에게 그가 말했다.

“이번 싸움은 내가 맡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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