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32 =========================================================================
232. 일심동체 (3)
“대체 누구 말이야?”
“하. 저런 말 한 마리만 있으면 소원이 없겠네.”
아덴버그의 호송대가 도착했다는 말에 달려온 김선혁이 때아닌 소란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왜 이렇게 사람이 많아?”
“이 친구들 전부 다 기병인데요?”
“그러게.”
주변을 둘러보니 정말로 몰려든 사내들이 하나같이 기병의 복색을 하고 있었다. 도대체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엇! 전승공!”
“전승공이시여!”
“사도시여.”
뒤늦게 기지의 두 영웅을 발견한 기병들이 일제히 자세를 바로 하며 군례를 올렸다.
“편히 쉬어.”
이제는 이런 상황에도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김선혁이 손을 휘저으며 말하자, 기병들이 쭈뼛쭈뼛 자세를 풀더니 다시 고개를 돌려 무언가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대체 아까부터 뭘 보고 있는 거야.”
기병들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 김선혁의 시선에 새하얀 백마가 들어왔다.
바람결에 휘날리는 옅은 크림색의 갈기는 더없이 우아하고, 겨우내 쏟아진 눈을 발라놓은 듯한 새하얀 털은 잡티 하나 없었다. 당장에라도 대지를 박차고 내달릴 것 같은 폭발적인 근육으로 둘러싸인 육신은 강인했고, 그래서 더욱 아름다웠다.
“다리 쭉 뻗은 거 봐. 모르긴 몰라도 어지간한 놈은 상대도 안 되겠어.”
“어깨는 어떻고. 저놈 타고 차징 들어가면 보병대고 창병대고 뭐고 아주 작살나겠구만.”
한껏 목을 세우고 코끝을 치켜든 백마의 모습은 마치 그 찬사를 즐기기라도 하는 듯했다.
“네가 왜 여기에…?”
어느 누구에게도 시선을 주지 않던 도도한 백마가 김선혁의 음성에 귀를 쫑긋 세우고는 고개를 돌렸다.
잡티 하나 없이 새하얀 몸뚱이 탓에 유달리 도드라지는 새까만 눈동자에 금세 반가움이 들어찼다.
“스텔라?”
놀랍게도 기병들의 시선을 한 몸에 끈 백마는 그가 영지에 남겨두고 온 애마, 스텔라였다.
푸르릉.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스텔라가 냉큼 다가와 그의 얼굴을 핥았다. 방금까지 보여주었던 도도한 모습이 무색한 애교스러운 몸짓이었다.
“네가 왜 여기에….”
아직까지도 얼떨떨한 기색을 떨치지 못한 김선혁은 그저 몇 번이고 애마의 갈기를 쓸어주었을 뿐이었다.
“섭정 폐하께서 전승공께 보내신 선물입니다.”
호송대 사이에서 튀어나온 갈색 머리의 기사가 그의 의문을 풀어주었다.
“아!”
뒤늦게 오필리아가 말했던 선물의 존재를 떠올린 김선혁이 탄성을 내뱉었다.
“전승공께서 아룡들과 함께 움직이지 않는다는 소식을 들으신 섭정 폐하께서 친히 라인펄에 기별하여 데려온 녀석입니다.”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오필리아의 세심한 배려에 가슴이 먹먹해진 것이다.
“원래대로라면 왕실의 젊고 혈통 좋은 준마를 보낼 예정이었으나 섭정 폐하께서 이 녀석이 전마로 활동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헤아리시어 한사코 이 녀석을 보내기를 원하셨습니다.”
아룡들을 얻은 뒤로는 줄곧 아룡들을 타고 전장을 전전했기에 자연적으로 스텔라와 함께 하는 시간이 줄어들고 말았다.
그래서 더욱 미안했다. 스텔라가 하염없이 주인을 기다리며 좁은 울타리 속에서 가장 빛나는 시기를 보내야 했던 동안 자신은 아룡들과 함께 전장을 쏘다니며 이 가엾은 명마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얼마나 갑갑했을까. 또 얼마나 달리고 싶었을까.”
주인이 아니고서는 제 등을 허락하지 않는 놈이다. 모르긴 몰라도 자신이 영지를 떠난 이후로 한 번도 제대로 달려본 적이 없을 게 분명했다.
“미안하다. 스텔라.”
미안한 마음에 자꾸만 스텔라를 어루만져주었다.
푸르릉.
이 우직한 짐승은 야속한 주인을 원망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반가운 얼굴로 제 주인의 손등을 핥고 또 핥았을 뿐이었다.
“그쪽은?”
스텔라를 반쯤 끌어안은 김선혁이 뒤늦게 기사에게 물었다.
“중앙 기사단 퀸투스 소속, 상급 기사 미텐마이어 뷔코크입니다. 명성 높은 전승공을 만나 뵙게 되어 몹시 영광입니다. 편하게 뷔코크라고 불러주십시오.”
“뷔코크 경. 고맙다. 이 성질 드센 녀석을 여기까지 데려오느라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테지.”
그의 진심 어린 감사 인사에 뷔코크가 손사래를 쳤다.
“충성스럽고 영리한 녀석입니다. 번거로운 일은 전혀 없었습니다.”
빤히 보이는 거짓말이었다. 주인 말고는 눈 아래로 보는 이 성질 더러운 놈을 이곳까지 데려오는 데 수고로움이 적었을 리가 없었다.
“본국으로 돌아가면 반드시 신세 갚겠네.”
“별말씀을. 모든 것은 섭정 폐하의 은덕, 제게 감사하실 일은 아닙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자니 뷔코크가 피식 웃으며 그의 등을 떠밀었다.
“만약 허락해주신다면 먼저 가져온 물자를 아스토리아 측에 인계할까 합니다. 허락해주시겠습니까?”
아무래도 저도 모르게 스텔라와 함께 초원을 내달리고 싶은 마음이 겉으로 표출되었던 모양이다. 은근히 등을 떠미는 뷔코크의 말에 웃음기가 가득했다.
“허락하지.”
“그동안 이 녀석과 회포라도 풀지 않으시겠습니까? 아무래도 이쪽 일을 마무리 지으려면 시간이 더 걸릴 것 같아서 말입니다.”
“일을 떠넘긴 것 같아 미안하긴 하지만 사양하지 않겠네.”
김선혁은 이 눈치 빠른 기사와의 대화가 퍽 즐겁게 느껴졌다. 그래서인지 뷔코크를 대하는 태도가 저도 모르게 부드러워지고 말았다.
“그대와 병사들의 여독은 다녀와서 내가 제대로 풀어주도록 하지.”
“기대하겠습니다.”
뷔코크의 말에 피식 웃어 보인 그가 스텔라 위에 올랐다.
이히이잉.
오랜만에 제 주인을 등에 태운 스텔라가 반가운 듯이 울었다.
“그럼 금방 다녀오도록 하지.”
“다녀오십시오.”
뷔코크의 군례를 받은 그가 박준민을 돌아보며 말했다.
“사정이 생겼으니, 대련은 잠시 뒤로 미루자.”
“뭐, 급할 거 있나요. 신경 쓰지 말고 다녀오세요.”
“그럼 금방 다녀오마.”
그렇게 인사를 남긴 김선혁은 이내 스텔라를 몰아 기지 밖으로 빠져나갔다.
“오랜만에 달려보자. 스텔라.”
스텔라가 기분 좋게 울어 재끼며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하이야!”
그의 구령에 애마가 더욱 힘차게 대지를 박차기 시작했다.
**
김선혁은 하염없이 초원을 쏘다녔다.
다륜의 말을 빌려 내달릴 때와는 그 감각이 달랐다.
미세한 몸짓만으로 말머리를 틀고 속도를 올리고 또 낮춘다. 굳이 신경 써서 진로를 알려줄 것도 없고, 소리 내어 신호를 해줄 필요도 없다.
오랜 시간 동안 전장을 함께 질타했던 애마는 주인과 손발을 맞추는 법을 잊지 않았다.
규칙적인 진동이 엉덩이를 때려대는 기분 좋은 감각에 김선혁이 미소를 지었다.
아룡들과 함께 달릴 때는 느끼지 못했던 특유의 진동과 속도감에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하지만 미소는 길지 않았다.
정말 너도 나이를 먹었구나.
스텔라는 여전히 빨랐지만, 한창때와 비교할 수는 없었다. 그 사실을 느끼자 그는 서글퍼지고 말았다.
미안하다. 스텔라.
그런 그의 내심을 느낀 것인지 스텔라가 짧게 울며 더욱더 속도를 올렸다.
마치 자신은 아직 괜찮다고 말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래. 너는 여전히 최고다. 스텔라.”
한계에 도달했다고 생각했던 스텔라의 속도가 계속해서 빨라졌다.
빠르게 흘러가는 풍경도 바람도 시간의 흐름도 서서히 희미해져 간다. 김선혁은 무아지경에 빠져 온 초원을 내달렸다.
그렇게 얼마나 스텔라와의 기분 좋은 질주를 만끽하고 있었을까.
동쪽에서 한 무리의 기병들이 달려왔다.
“여어!”
다륜과 북방 기병들이었다.
“아덴버그에서 끝내주는 녀석이 도착했다고 해서 가봤더니, 벌써 사라졌더군.”
금세 김선혁을 따라잡은 다륜이 스텔라를 힐끗거리며 말했다.
“나이가 있지만 꽤나 좋은 놈이다. 허우대만 멀쩡한 남부의 말들과는 틀린 녀석이야.”
말에 관해서 만큼은 평가가 박한 다륜치고는 꽤나 후한 평가였다.
“좋은 놈?”
하지만 그는 다륜의 칭찬이 그다지 성에 차지 않았다.
“스텔라는 겨우 그 정도가 아니야.”
그렇게 말한 김선혁이 허리를 낮췄다. 그리고는 쏜살같이 뛰쳐나갔다.
“지금 초원의 아들들에게 도전하는 건가!”
“도전자는 너지. 챔피언은 스텔라니까.”
스텔라의 속도가 더욱 올라가고 그 뒤를 따라 다륜과 북방의 기병들이 말을 내달렸다.
“하이야! 하이야!”
북방 기병들 특유의 날카로운 구령과 말발굽 소리가 뒤섞였다. 그리고 그 사이로 사내들의 거친 숨소리가 녹아들었다.
**
북방의 기병들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내달리던 김선혁은 기억 한구석에 침잠되어 있던 아련한 감각을 다시 떠올릴 수 있었다.
레드번은 누구보다 빠르고, 골드레이크는 누구보다 저돌적이다. 아룡들을 타고 전장에 나서면 어느 누구도 그의 앞을 가로막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아룡들과의 질주가 때로는 공허할 때도 있었다.
누구도 뒤를 따를 수 없고 누구도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없는, 아무리 달려도 채워지지 않는 고독. 그건 아마도 다른 누군가와 함께 내달리기에는 아룡들이 지나치게 빠르고 난폭했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지금 스텔라와, 다륜과 함께 내달리는 김선혁의 가슴은 더 없이 충만한 감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마치 이 세상에 처음 떨어져 아무것도 모르고 중갑 기병대의 사내들과 함께 내달리던 그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
서로가 등을 맞대고 어깨를 기대고 수많은 적들을 향해 무모한 돌격을 감행하던 그때의 감각이 김선혁의 가슴을 채워주었다.
“즐거워 보이는군.”
이제는 경주의 승자도 패자도 중요하지 않게 되어버린 순수한 질주, 다륜이 그를 보며 말했다.
“기분을 깨고 싶지는 않지만, 이제 돌아가야 할 때다. 지금부터 부지런히 달려야 겨우 해지기 전에 기지로 돌아갈 수 있을 거다.”
다륜의 말에 꿈속을 헤매듯 잔뜩 고양되어 있던 김선혁의 정신이 차가운 현실로 돌아왔다.
“날씨가 차다. 우리 말이야 워낙에 추운 곳에서 내달리던 놈이라 괜찮지만, 그 녀석은 삭풍을 견디며 달리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아.”
그게 누구의 말이든 간에, 심지어 적의 말이더라도 귀하게 여기는 북방의 사내다운 한마디에 김선혁이 스텔라를 슬쩍 바라보았다.
스텔라는 그간 갇혀 지냈던 시간을 보상이라도 받으려고 하는 것처럼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멈춰야 했다.
다륜의 말마따나 전마 치고는 나이가 많은 스텔라가 견디기에는 초원의 바람이 너무도 차가웠다. 더 이상 무리를 했다간 스텔라의 몸이 상하고 만다.
“돌아가자.”
아쉬움이 가득한 그의 말에 기병들이 말머리를 틀었다.
**
기지에 도착했을 때는 거의 해 질 녘이 되어 있었다.
“수고했다. 스텔라.”
스텔라는 주인과 헤어지기 싫은지 몇 번이나 그의 옷자락을 물고 늘어졌다. 자존심 강한 스텔라답지 않은 어리광이었다.
“자. 착하지. 내일 또 올 테니까, 오늘은 이만 쉬어.”
한참을 달래 겨우 스텔라를 떼어낸 김선혁이었지만 발걸음이 쉽사리 떨어지지 않는 것은 그도 마찬가지였다.
“내일 또 달리자.”
우직한 짐승은 주인이 사라지고도 한참이나 제 주인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다 철푸덕 주저앉았다.
**
“오랜 친우와의 회포는 충분히 푸셨습니까?”
때마침 볼일이 끝났는지 뷔코크가 김선혁을 찾아왔다.
“전부 풀려면 대륙 끝에서 끝까지 달려도 부족하다. 오늘은 이 정도가 적당해.”
“말에 대한 사랑이 남다르시군요.”
“그간 스텔라에게 몹쓸 짓을 했으니까. 남은 시간 동안이라도 좋은 주인이 되어줘야지.”
솔직한 그의 대답에 뷔코크가 감탄을 토했다.
“섭정 폐하께서도 말에 대한 사랑이 남다르신 거로 알고 있습니다. 중앙 기사단에서도 이름난 기사들 중에 섭정 폐하께 말을 하사받지 못한 자나, 애마의 이름을 받지 못한 자가 드물 정도지요.”
아룡들을 아끼는 만큼이나 말에 대한 사랑이 남다른 오필리아였다. 아니, 그녀는 동물이라면 뭐든 아끼고 좋아했다.
그런 그녀니 스텔라가 마지막 시간을 주인과 함께 보낼 수 있도록 배려를 해준 것이리라.
“병사들은?”
“일단 숙소에 짐을 풀고 다시 집합하도록 일러두었습니다. 혹시 제가 주제넘었던 것이라면 사과드립니다.”
“아니. 잘했다. 먼 길에 가장 고생하는 건 병사들이지. 휴식시간을 빼앗는 건 안 될 말이지.”
꽤나 마음에 드는 뷔코크의 시원한 일처리에 그가 내친김에 병사들이 오늘 푹 쉴 수 있도록 하라 명령했다.
“환영회는 내일 하는 걸로.”
“병사들이 아쉬워할 겁니다. 여기 오는 동안 왕국의 첫째가는 기사를 만난다는 사실에 몹시 기대하는 눈치였거든요.”
뷔코크는 대화를 할 줄 아는 자였다. 하는 말마다 상대방을 유쾌하게 만드는 면이 있었으니, 김선혁도 피식 웃고 말았다.
“첫째가는 기사라니, 레인하르트 후작께서 들으시면 날 죽이려고 하겠군.”
“농담이 아닙니다. 지금 왕국 내에서 그라두스 순위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한동안 외지를 전전하느라 까맣게 잊고 있었던 그라두스를 떠올린 그가 흥미롭다는 얼굴로 물었다.
“그래? 지금 나는 몇 위지?”
“전승공께서는 현재 왕국 내에서 폭풍의 기사 드라흔이라 불리고 계시며, 그라두스는.”
뷔코크가 엄지를 추켜세웠다.
“서열 제 1위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