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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 일심동체 (1)
녹테인의 붉고 푸른 늑대들을 꺾고, 그리핀도르가 자랑하는 창공의 기사들을 굴복시킨 명성 높은 기사, 마음만 먹는다면 전승공은 대륙의 어느 곳에 가더라도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위치를 꿰찰 수 있는 진짜 거물이었다.
하지만 누구보다 높은 곳에서 가장 화려한 생활이 보장된 지고한 사내는 일신의 부귀영화를 누리는 대신, 전장을 선택했다. 지금 그가 있는 곳은 최고급 원목과 침구가 놓인 왕성의 심처가 아닌, 짚을 채워 만든 딱딱한 야전 침대가 있는 허름한 막사였다.
자신의 나라에 벌어진 전쟁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단지 가장 먼저 서부의 재앙을 발견했다는 이유로 1년이 넘도록 타국의 전장에서 진창을 구르는 전승공, 심지어 그는 본국의 귀환 명령조차도 거부한 채 전장에 잔류한 상태였다.
‘피난민들을 살리기 위해 제 목숨을 걸고 수만의 마물과 마왕을 막아섰다지?’
기가 찰 일이었다. 지금 같은 시국에 그다지 중요하지도 않은 짐 덩이들을 살리기 위해 목숨을 내 걸다니, 전승공은 자신의 위치에 대해 자각이 전혀 없는 자였다.
심지어 그가 이처럼 타인을 위해 목숨을 내건 것은 처음이 아니었다.
녹테인과의 전쟁에서 얼마 되지도 않는 민간인들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항전을 결정한 그에 대한 소문은 동부에서도 한참이나 떨어진 교국에까지 전해질 정도로 유명했다.
당시에 소식을 들은 성기사들과 신전 기사들은 이를 기사의 귀감과도 같은 행동이었다며, 하나같이 입이 마르도록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대주교가 본 전승공은 그저 무모하고 어리석은 사내였다. 자신이 얼마나 중요한 위치에 있는 존재인지 조금도 헤아리지 못하는 멍청이였다.
물론 대주교는 그런 내심을 겉으로 표현할 정도로 우둔하지 않았다. 세상이 전승공과 같은 이를 뭐라고 부르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탓이다.
영웅.
헌신과 희생을 마다치 않는 이런 자를 세상은 영웅이라 불렀다.
‘전승공이야말로 이 시대의 진정한 기사다.’
‘누가 있어 전승공보다 더 대륙을 위해 헌신을 했다 할 수 있겠는가.’
사람들은 이 헌신적인 사내가 걸어온 길을 온갖 미사여구를 붙여 칭송해 마지않았고, 그를 진정한 기사라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대주교 역시 그중에 하나였다.
대주교는 누구보다 더 소리 높여 전승공의 영웅적인 행보를 찬양해주었고, 그의 귀환을 반겨주었다.
한 푼 가치도 없는 말로 전승공과 같은 뛰어난 기사를 교국의 싸움에 내세울 수 있다면 그 무릎인들 꿇지 못하랴.
어차피 그가 받는 칭송은 제단에 바쳐져 피 흘릴 양이 마지막 순간 들을 수 있는 찬양의 노래와 다르지 않았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대주교는 열렬하게 그를 추켜세워 주었다. 칭송과 찬양이 커질수록 그 드높은 이름에 도취된 자가 얼마나 맹목적으로 변하는지 잘 알고 있었던 탓이다.
하지만 상황이 변해버렸다.
아덴버그가 전승공을 보호하기 위해 노골적인 경고를 보내온 것이다.
‘만약 그대가 다시 서쪽 땅에 들어서 전과 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단언컨대 나는 교국을 압박하여 그들로 하여금 대군을 파견토록 하여 그대를 찾게 만들 것이다. 그대는 정녕 교국과 내가 그런 부담을 떠안기를 바라는 것인가.’
얼핏 듣기에는 연락두절 되었던 전승공의 무모함에 대한 질책이었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교국에 대한 경고의 의미가 강했다.
전쟁이 시작되기 전이었다면 일고의 가치도 없었을 말이다.
수많은 신도를 거느린 교국의 영향력은 중부 전체를 아우르는 강력한 것이었다. 아무리 녹테인의 동부 지역을 흡수하며 성세가 건국 이래 최고조에 올랐다는 아덴버그라 해도 중부의 종주로 군림해온 교국의 국력에 비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전시였다. 그것도 중부 전체가 국운을 걸고 전념해야 하는 대전쟁을 치르고 있는 와중이었다.
동부 왕국 연맹의 전폭적인 지원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했다.
결국 대신전에서 지침이 내려왔다. 전승공이 위험에 처하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를 기울이라는 지시였다.
이제 대주교는 전승공이 전장에 나서는 것을 말려야 할 입장이 되었다.
혹시라도 변을 당할까 노심초사하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차라리 전승공이 하루라도 빨리 본국으로 돌아가는 게 낫다 여겨질 지경이었다.
하지만 돌아갈 때 돌아가더라도 주머니는 털어서 돌려보내야 했다.
최소한 퀘이샤들이 아덴버그에 합류하는 것만큼은 어떻게든 피해야 했다. 만약 이를 막지 못한다면 대전쟁 이후 아덴버그는 동부를 넘어 중부까지 영향력을 끼치는 초강대국이 되고 만다.
기존의 초인 전력에 퀘이샤들이 더해진 아덴버그의 독주를 막을 국가는 없었다.
하지만 교국의 신실한 대주교들 중 어느 누구도 이 중임을 선뜻 맡겠다는 자가 나오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잘 되든 잘못되든 간에 필연적으로 전승공과 감정이 상할 수밖에 없는 임무였다.
최악의 경우 퀘이샤들의 합류도 막지 못하고 차기 패권국으로 발돋움할 아덴버그의 원한만 사는 일이 생길 수도 있었다.
만약 그런 일이 생긴다면 교국은 절대로 책임자를 보호해주지 않을 것이다. 도리어 이를 독단적 행동이라 덮어씌우고 모든 책임을 지게 만드는 것으로 아덴버그와의 외교적 문제를 차단하려 할 가능성이 농후했다.
이 임무는 교국의 유력한 인사들에게 독이 든 성배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상황에서 나선 것이 대주교였다.
사명감 따위가 아니었다. 대주교는 일신의 보신을 위해 이 임무를 떠안을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과거 용사가 성검의 선택을 받는 과정에서 다소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 용사가 대주교의 지시를 받은 신전 기사들에게 치명상을 입고 만 것이다.
당시의 대주교로서는 교국의 보물을 근본도 모르는 이방인이 취하는 것을 그대로 두고 볼 수만은 없었기에 이를 잘못이라 여기지 않았다.
직접적으로 손을 쓴 건 자신이 아닌 신전 기사들이었고, 어쨌건 간에 용사는 죽지 않고 살았으니까.
하지만 용사는 생각이 달랐던 모양이다.
다시 돌아온 용사의 눈동자에 반감이 가득했다. 그리고 근래 들어서는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드러내며 자신과 반목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지금도 최악을 달리는 관계인데 만약 용사가 마왕을 꺾는 일이 생긴다면 어찌 될까. 교국 내에서 자신이 설 자리는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런 상황이 오기 전에 어떻게든 살 길을 찾아야 했다.
그리고 고민 끝에 찾은 활로가 바로 퀘이샤들의 잔류였다.
퀘이샤들을 온전히 교국에 흡수할 수만 있다면 용사와의 불편한 관계 따위는 더 이상 자신의 앞날을 막지 못할 것이다.
일천이 넘는 퀘이샤들의 힘은 그만큼 대단했다.
“아덴버그에서도 더 이상 전승공께서 번거로운 일에 휘말리는 것을 바라지 않는 눈치이니. 어떻소? 우리 교국이 일을 마무리 지으리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가능성은 충분해 보였다.
전승공은 대의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할 줄 아는 기사의 귀감과도 같은 사내, 그런 우직한 자들은 교국에도 많았다.
바로 신전 기사들과 성기사, 그리고 말단 사제들이었다. 그리고 그런 이들이야말로 대주교가 이 자리까지 올라오며 수도 없이 발판으로 삼았던 이들, 대주교는 전승공을 구워삶을 자신이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적당히 명분을 내세우며 현란한 언변으로 구워삶자 전승공은 아무런 대꾸도 못한 채 이쪽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그간 참으로 많이도 애쓰셨소. 우리 중부를 위해, 아니 더 나아가 대륙의 평화와 안녕을 위해 전승공과 동부의 형제들이 보여준 신의는 결코 잊지 않을 것이오.”
날 벼린 진검보다 세 치 혀가 무서운 건 만고불변의 진리였다.
“고맙소. 정말로 감사하오. 중부의 형제들을 대신해 진심으로 감사를 표하는 바요.”
대주교는 이만하면 충분히 되었다 여기고 일을 마무리 짓기로 했다.
“또한 동부가 그러했듯 우리 중부 역시 서부의 형제들에게 일어난 비극을 남의 일이라 여기지 않고, 퀘이샤 일족이 처한 문제는 물론이거니와 서부의 모든 피난민들을 구제하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겠소.”
노골적으로 선을 긋는 대주교의 표정은 마치 대단한 선심이라도 쓰는 듯 후덕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하지만 그 가식적인 웃음이 사라지는 데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래서 도와주겠다는 겁니까? 말겠다는 겁니까?”
이제껏 가만히 듣고만 있던 전승공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 표정과 말투가 심상치 않았다.
“방금 전에 말하지 않았….”
“착각하고 있군.”
쓸모없는 피난민들조차도 제 혈육처럼 여겨 목숨을 내던졌던 헌신적인 기사는 그 자리에 없었다.
“전승공? 착각이라니 지금 대체 무슨 말을….”
“못 들었습니까? 귀하께서 아주 단단히 착각을 하고 있다 말했습니다.”
말은 분명 존대인데 어쩐지 어감이 그렇지가 않았다. 짜증이 가득한 어투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니 그제야 전승공의 표정이 보였다.
경멸.
마치 벌레라도 보는 듯한 시선에 대주교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나는 이베리아 연합까지 퀘이샤들의 길 안내를 해줄 자들이 필요했던 거지, 퀘이샤들을 이주시키는 문제로 귀하의 의견을 듣고자 온 것이 아닙니다.”
“말했지 않소. 이는 전승공께서 독단으로 결정할 일이 아니라, 조금 더 대국적인 견지에서 결정해야 할 일이라고….”
그때 멈춰야 했다. 그랬다면 최소한 전승공의 성질을 건드리는 일은 없었으리라.
하지만 대주교는 멈춰야 할 순간을 놓치고 말았다.
“대체 날 얼마나 우습게 본 겁니까.”
노골적인 언사에 대주교가 입을 쩍 벌렸다. 하나의 교구를 총괄하는 대주교는 교국에서만큼은 세속의 영주보다 더한 권위를 지닌 존재였으니 어디 가서 이런 취급을 받아보았겠는가.
“우습게 보다니, 신을 섬기는 자로서 내 어찌 그런 망발을 하겠….”
“그런데 그걸 지금 명분이라고 내세운 겁니까?”
이제는 끝까지 들을 생각도 없는 모양인지, 전승공이 말허리를 중간에 툭 하고 잘라먹었다.
“허어.”
대주교는 당황스러움을 숨기기 위해 헛웃음만 내뱉었다.
“귀하께 묻겠습니다.”
“뭘 말이요?”
전승공이 성큼 다가와 물었다.
“귀하께서는 퀘이샤들의 자유를 억압하려는 겁니까?”
설마 이렇게까지 직설적으로 물어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대주교는 얼빠진 얼굴을 해 보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전승공은 이제 막 입을 열었을 뿐이다. 대주교의 고난은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이건 교국 전체의 의사입니까. 아니면 귀하만의 생각입니까.”
외교적인 문제가 생길 수도 있는 민감한 질문을 거침없이 던져오는 전승공의 태도는 이제껏 대주교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직설적인 것이었다.
“대체 무슨 말이 묻고 싶은 거요.”
“못 알아듣겠습니까?”
전승공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어 내렸다.
“당신이 지금 하는 행동이 교국의 뜻인지, 아니면 당신 개인의 독단인지를 묻고 있는 거잖아.”
형식적으로나마 공대를 해주던 전승공의 어투가 하대하듯 변해버렸다.
“다, 당신?”
생각지도 못한 호칭에 대주교가 눈을 부릅떴다.
“대주교면 교국에서 어느 정도 위치지? 남작? 백작?”
하지만 대주교는 이를 제대로 항의할 기회조차 없었다. 전승공이 갑작스레 추상과 같은 기세로 호통을 친 것이다.
“아덴버그의 적법한 섭정이자 하나뿐인 차기 왕위 계승자이신 오필리아 라우렐 로 아데스덴 폐하께서 전승이라는 이름을 내려 나를 공의 위에 임명하셨으니, 나의 권위는 일국의 공작과 왕자에 전혀 부족함이 없다!”
사나운 마수조차도 뒷걸음질을 치는 용의 기세다. 평생토록 험한 전장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대주교가 작정하고 내뿜는 드래곤 피어를 감당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과연 너는 어디의 누구이기에 그 알량한 의자에 앉아 일어나지도 않고 나를 맞이하여 그리 무례를 저지르는가!”
대주교는 당장 숨이 넘어갈 것 같은 얼굴로 벌벌 떨 뿐이었다.
“대답하라! 네가 앉은 의자는 나와 너 사이의 높고 낮음을 만회할 정도의 권위를 지니고 있는가! 또한 그 권위를 교국이 보장한다고 이 자리에서 공언할 수 있는 것인가!”
이제껏 가만히 듣고만 있었던 것이 무색하게 전승공은 무섭도록 대주교를 몰아쳤다.
안타깝게도 대주교의 판단과는 달리 전승공은 자신의 위치를 전혀 모르는 아둔한 자가 아니었다. 또한 대주교가 생각하는 것처럼 세상 물정 모르는 우직한 기사도 아니었다.
아덴버그의 테오도르 국왕은 일찍이 김선혁에게 속성으로 정치 과외를 해준 바가 있었고, 그는 어떻게든 자신을 깎아내리기 위해 안달이 난 귀족들과 반목하며 몇 번이나 상대를 굴복시킨 적이 있었다.
그때 김선혁은 깨달았다.
자신은 귀족들이 태어나면서부터 갈고 닦아온 교활한 언변 따위 갖고 있지 않았다. 그 대신 세 치 혀를 무기로 삼은 이들이 절대 갖지 못할 전장의 기상이 있었다.
‘그대의 결정은 곧 아덴버그의 공식적인 입장, 그대는 그대가 행하고자 하는 바를 행하라. 아데스덴이 그대의 뒤를 받쳐 주리라.’
또한 용사와 반목하여 끈 떨어진 신세가 되었을 대주교와는 달리 뒤를 받쳐주는 든든한 뒷배가 있었다.
그랬기에 그는 소란을 듣고 들어선 교국의 기사들을 보고도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아덴버그 성전 원정대의 사령관이자, 왕국의 당당한 공작으로서 정식으로 요청하노니, 성하와 면담을 요청하는 바이다!”
오히려 김선혁은 당당하게 외쳤다. 애초에 일을 크게 키워서 불리한 건 대주교였지 그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