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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 푸어-227화 (227/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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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8.레벨이 깡패다. (2)

성검을 버리고 싶지도 않고, 지금의 힘을 포기하고 싶지도 않다.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마왕보다 강해져라.”

용사 스스로가 마왕의 레벨을 넘어설 정도로 성장하는 것만이 유일한 길이었다.

“발뭉이 희생의 한 수를 쓸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강해져라.”

용사의 힘이 마왕을 압도할 정도가 된다면 성검도 굳이 제 주인을 희생시키는 무리수를 쓸 이유가 없었다.

발뭉이 제 주인을 제물로 삼으려 했던 것은 용사가 약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게 쉽지는 않겠지.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르고.”

서부에서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이 모조리 마왕의 경험치가 되었고, 직접 힘을 겨루어본 김선혁은 그게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온몸으로 느꼈다.

“짐작컨대 마왕의 레벨은 너와 내 레벨을 합친 것 이상일 거다.”

“설마요….”

죽음의 기억을 받아들이며 한층 성숙해진 용사도 마왕의 레벨이 그 정도일 줄은 몰랐는지 입을 쩍 벌리고는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제가 마왕을 넘어서는 게 가능하긴 할까요?”

눈에 띄게 흐려진 박준민의 얼굴을 보며 김선혁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다소 무책임하기까지 한 그의 말에 용사가 맥이 빠진 얼굴을 해 보였다.

“뭐든 해보지 않고는 모르는 법이지.”

김선혁이 어깨를 늘어트린 용사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도 해내야 해. 만약 그렇지 않으면 넌 틀림없이 죽을 테니까.”

박준민의 눈동자에 다시 빛이 돌아왔다. 자신에게 선택권이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달은 것이다.

“그럼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용사의 얼굴에 기대감이 떠올랐다. 자신의 형제가 자신을 새로운 영역으로 이끌어줄 거라는 믿음이었다.

“뭘 어떻게 해.”

김선혁이 용사를 보며 피식 웃었다.

“굴러야지.”

하지만 그 웃음은 결코 친절하지도 온화하지도 않았다.

“레벨 올리는 데 노가다 말고 또 뭐 있어?”

마치 용사 앞에 펼쳐진 고난의 길을 예고하듯 그의 입가에 매달린 미소는 불길하기만 했다.

**

가장 가까운 전장을 향해 떠나려는 용사를 김선혁이 붙잡았다.

“왜요?”

“안전하지만 느린 길로 갈래? 아니면 좀 힘들어도 빨리 가는 길로 갈래?”

생각할 것도 없었다.

“빠른 길로 갈래요.”

마왕과의 격차를 메우려면 다소 무리를 하는 수밖에 없다는 걸 용사도 알고 있었다.

“후회 안 하지?”

그런 용사도 김선혁이 의미심장하게 물었을 때는 순간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미 답은 나와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용사는 지금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그래. 그럼 결정한 걸로 알겠어.”

“근데 뭔데요. 대체.”

그는 대답하는 대신 또 다른 질문을 던졌다.

“사냥 중에 최고봉이 뭔지 알아?”

용사는 고개를 저었다.

“사냥 중에 최고봉은….”

김선혁이 그런 용사를 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몰이사냥이야.”

**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자 박준민은 김선혁이 말한 ‘몰이사냥’이 뭔지 깨달을 수 있었다.

크아아아아아.

지축을 울리는 마물들의 발소리를 들으며 용사가 인상을 찌푸렸다.

몰려드는 마물들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평소였다면 일검에 무리를 찢어발기고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남은 마물들을 처리했을 것이다.

만약 저 무리가 오늘 처음으로 맞는 무리였다면 말이다.

“으아아! 또! 또야!”

하지만 불행하게도 몰려드는 마물들은 첫 번째도 두 번째도 아니었다.

스무 번? 아니, 서른 번인가?

한 무리를 처리하고 나면 또 다른 무리가 몰려들었다. 그렇게 이틀을 꼬박 싸웠다. 도대체 자신이 얼마나 되는 마물들을 처리한 것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을 지경이었다.

“아 좀!”

몰려든 마물들을 간신히 처리하고 나니, 저 멀리서 먼지를 피워 올리며 달려오는 북방 기병들이 보였다. 그 뒤에 바짝 따라붙은 수백의 마물들은 덤이었다.

“제발 그만 좀 보내!”

도대체 어디서 그렇게 모아온 것인지 북방 기병들은 끝도 없이 마물들을 유인해왔다.

“인간적으로 더 이상은 무리라고!”

버럭 소리를 치며 항의를 해보았지만, 김선혁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무리는 개뿔. 체력 남아도는구만.”

용사의 가장 큰 힘은 바퀴벌레 같은 생명력이었다. 피로고 부상이고 성검의 주문 한 방이면 말끔히 회복되니 이틀을 꼬박 싸우고도 여전히 활기가 넘쳐 보였다.

물론 그건 김선혁의 생각이었을 뿐, 용사의 생각은 달랐던 모양이다.

“이런 식이라면!”

무리에 섞여 있던 하급 마수 하나를 반으로 갈라내며 박준민이 소리쳤다.

“형님 방식도!”

성검에 거룩한 빛이 서리더니 이내 남아있는 마물들을 전부 휩쓸어버렸다.

하지만 어디선가 나타난 기병들이 뭉텅이로 마물들을 몰아넣고 어디론가 사라졌고, 용사는 또다시 마물들에게 둘러싸이고 말았다.

“발뭉이 방식이랑 다를 게 없잖습니까!”

용사의 절규에 김선혁이 코웃음을 쳤다.

“완전 다르지.”

달라도 아주 많이 달랐다.

성검은 제 주인이 이겨내지 못할 정도로 험난한 전장에 박준민을 몰아넣었고, 그는 박준민이 딱 이겨낼 수 있을 정도의 전장을 만들어주었다.

단지 휴식 시간을 아주 조금(?) 짜게 분배했을 뿐이었다.

“빠르긴 한데,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합니까?”

장장 3일에 걸친 전투가 끝이 났을 때 용사는 완전히 파김치가 되어 있었다. 몸이 지친 것이 아니었다. 휴식조차 없이 몰아치는 전투 자체에 심력이 소모된 것이다.

“이게 제일 빠른 길이야.”

어지간히 힘들었는지 박준민이 반박을 하려다 허공을 훑어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스테이터스를 확인하고 나니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던 모양이다.

“끄응. 그래도 좀 쉬면서 해도 되잖아요.”

“엄살 피지 마. 성검을 포기하고 싶지도 않고, 그렇다고 죽고 싶지도 않다며. 이 정도 고생은 당연히 각오한 거 아냐?”

김선혁은 절대로 봐주지 않았고, 전에 없이 엄격하게 용사를 몰아붙였다.

“이것도 못하겠다 싶으면 차라리 때려치워. 그냥 성검이고 마왕이고 전부 잊고 어디 숨어서 살든지. 그것도 아니면 음흉한 네 인도자 말 따라서 마왕과 싸우다 죽든지.”

“죄송합니다. 형님. 그냥 힘들어서 푸념한 건데.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박준민이 금세 미안한 얼굴로 사과를 했다.

“하아. 준민아.”

그런 용사를 보며 김선혁이 한숨을 내쉬었다.

“성검의 힘은 지나치게 강해. 특히 마기를 지닌 존재들한테는 더욱더.”

성검은 마물과 마수를 잡아먹는 포식자이자, 마기의 천적이었다. 용사는 그런 성검에게 지나치게 의지하고 있었다.

“그게 네 가장 큰 약점이다.”

용사의 전투 스타일은 지나치게 평면적인 것, 그저 제자리에 서서 성검을 움켜쥔 채 달려드는 적에게 신성력을 쏟아내는 게 전부였다.

김선혁이 보기에 그건 전투도 뭣도 아니었다.

“넌 진짜 싸움을 해본 적이 없어. 싸움에 관해서라면 차라리 너보다 서쪽으로 향한 아덴버그의 거검병들이 나을 정도다.”

몸에 좋은 약은 언제나 쓴 법이다. 지금의 경우가 딱 그러했다.

박준민은 신랄하다 못해 날카롭기까지 한 그의 말에 베이기라도 한 듯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김선혁의 독설은 아직 끝이 아니었다.

“넌 정신력도 약해. 네 번이나 죽음을 겪어봤다지만, 정작 네 스스로 한계까지 힘을 쥐어짜 필사적으로 무언가를 해본 적은 없지.”

용사는 강력한 무기에 의존한 전사가 지닐 수 있는 단점이란 단점은 모조리 다 갖고 있었다.

그게 다 음흉한 성검 탓이었다. 저 가증스러운 인도자는 애초부터 제 주인을 제대로 성장시킬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갈 길이 멀다. 준민아.”

박준민이 고개를 푹 꺾었다. 완전히 의기소침해진 모습이었다.

“더 힘내보겠습니다.”

하지만 그도 잠시였을 뿐, 박준민은 금세 다부진 얼굴로 각오를 다졌다.

“잘 생각했어.”

김선혁이 웃으며 그 어깨를 두들겨주었다.

“쉴 만큼 쉬었으니, 다시 가자.”

멀리서 기병들이 또 한 무리의 마물들을 꼬리에 달고 달려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 수가 지나치게 많았다. 더욱 끔찍한 것은 저게 끝이 아니었다는 것이었다.

서쪽과 북쪽, 그리고 남쪽. 흩어졌던 기병들이 속속 복귀했다. 각기 수천씩의 마물들을 꼬리에 단 채로 말이다.

“못 막으면 기지까지 불똥 튄다.”

어느새 멀찍이 물러난 김선혁이 강 건너 불구경하듯 말했다.

**

박준민은 이제까지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마물들과 맞서 싸웠다. 신성력을 끌어올려 손쉽게 전투를 하는 대신 제 몸을 움직이며 마물들을 상대하기 시작한 것이다.

“잘 하고 있네.”

입 아프게 떠들었던 것이 마냥 효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에 김선혁이 미소를 지었다.

이제까지 쉽게 마물들을 처리했던 것에 비해 다소 손발이 어지러워 보이기는 했지만, 용사는 분명 스스로 변하려고 하고 있었다.

“끼어들지 마라.”

한참 전투를 지켜보고 있던 그가 나직하게 경고했다.

“퀘이샤들이 얼마나 자신의 반려를 귀히 여기는지는 나도 아는데, 지금 당신이 나서는 건 절대로 준민이를 위하는 게 아니야.”

“그는 당신과 달리 아직 약합니다.”

언제 나타났는지 스르륵 모습을 드러낸 복면의 사내는 박준민의 반려 퀘이샤였다.

“지금 약하다고 계속 약할 수는 없지. 더욱이 마왕을 대적자로 둔 용사라면.”

김선혁의 말에 퀘이샤 사내는 반박하지 못했다. 그저 못마땅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을 뿐이다.

미움 받은 모양이군.

하기야 미움을 받지 않는 게 도리어 이상한 일이었다.

과격한 대련 끝에 용사를 빈사지경으로 만들었을 때, 퀘이샤도 먼발치에서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 단지 일대일 결투의 형식을 빌린 대련에 나설 구실을 찾지 못했을 뿐이었다.

제 반려를 초주검으로 만든 것도 모자라 이제는 가혹하게 혹사시키니 퀘이샤 사내가 그를 좋아하지 않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만약 준민이가 진짜로 위험해진다면 그때는 나도 말리지 않는다. 하지만 그게 지금은 아니다.”

퀘이샤 사내는 대답도 없이 다시 모습을 감췄다.

그 사이에도 박준민은 수많은 마물들을 상대로 혈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중간중간 신성력을 일으켜 마물들을 정리하고는 있지만 최대한 몸을 써서 적을 상대하려는 노력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모습이었다.

“당장 근방에 있는 놈들은 전부 끌고 온 모양이다.”

한참 용사의 전투를 지켜보고 있는데 다륜이 나타나 일대의 상황을 알려주었다.

“그럼 이제 서쪽에 있는 놈들만 남았군.”

“부족에서도 가장 날래고 뛰어난 전사들이 갔으니, 그쪽에 있는 놈들도 곧 이쪽으로 몰려들 거다.”

한창 정신이 없던 박준민이 들었다면 기겁을 했을 소리였지만, 김선혁은 오히려 흡족하게 웃고 있었다.

용사의 성장도 성장이었지만, 사실 그가 이곳을 전장으로 삼은 이유는 따로 있었다.

이곳은 마왕의 땅과 교국을 연결하는 통로였다. 그리고 서쪽으로 떠난 아덴버그의 원정대가 다시 복귀한다면 반드시 지나야 하는 길이기도 했다.

“계속 정리하다보면 돌아오는 사람들도 조금은 수월하게 돌아오겠지.”

이것이야말로 더 이상 전면에 나서지 말라던 오필리아의 당부를 어기지 않으면서도 그가 원정대를 도울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물론 간간히 흘러나온 마수들을 처리하는 건 그가 의도하지 않은 덤이었다.

“이건 내가 찾아간 게 아니라, 지들이 오는 거니까.”

“그런 것 치고는 기세를 전혀 숨기는 기색이 없구나.”

“기분 탓이야.”

어쨌건 간에 용사도 성장시키고, 아덴버그 원정대의 귀환길도 청소하고, 자신도 마수를 잡아 적당히 레벨 업에 필요한 경험치도 챙기고, 그로서는 나쁘지 않은 장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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