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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7.레벨이 깡패다. (1)
“형님. 잠깐만요.”
당장에라도 성검을 조각낼 듯 힘을 주고 있던 김선혁은 자신을 붙잡는 음성에 손에서 도로 힘을 빼내었다.
“준민아.”
김선혁은 처음부터 박준민이 깨어났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지금의 대화는 모두 뭣 모르는 용사에게 일의 전모를 알려주기 위한 유도신문에 불과했을 뿐이다.
어쩌면 성검 역시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가 신의 인도자로서 차마 저버릴 수 없는 일말의 결백성 때문이리라.
“방금 전에 한 말이 사실이야?”
[마왕을 쓰러트릴 방법이 있다는 건 거짓이 아니다.]
“그 대가는?”
박준민도 이제 어렴풋이나마 눈치챈 듯했다.
[그때 그때 다르다.]
“지금의 나라면?”
성검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대답을 들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죽을 수도 있구나.”
용사가 참담한 얼굴로 고개를 푹, 하고 꺾었다.
가만히 지켜보던 김선혁은 슬며시 성검을 잡고 있던 손을 떼어냈다. 여기서부터는 자신이 관여할 일이 아니라 생각했던 탓이었다.
“형님.”
하지만 박준민의 생각은 달랐던 모양이다.
“저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려운 질문이었다. 믿고 의지했던 인도자가 사실은 주인이 죽더라도 마왕만 처리하면 그만이라 생각하고 있었다니, 그 배신감이 얼마나 크고 또 앞으로의 일이 얼마나 막막할까.
“너는 어떻게 하고 싶은데?”
용사가 마왕과의 싸움에서 손을 뗀다 하더라도 어느 누구도 이를 무책임하다 비난할 수는 없을 것이다.
헌신과 희생이 숭고한 것은 오직 스스로가 그 모든 것을 기꺼이 감내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만약 누군가가 강요한다면 그건 희생이 아닌 인신공양이나 다름이 없었다.
“저는 발뭉이를 버리고 싶지 않아요.”
이 또한 김선혁이 예상했던 대답 중 하나였다.
“발뭉이가 저한테 숨긴 게 많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놈이 있었기에 제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에요.”
지금의 박준민은 전선의 수많은 이들에게 구원자로 추앙받으며 더없는 영광 속에서 살아가는 진짜 영웅 중의 영웅이었다.
그 칭송과 찬란한 시절에 중독되었어도 단단히 중독되었을 박준민이 성검을 버리고 평범한 이로 돌아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최소한 용사는 이 세상이 힘이 없는 자에게 얼마나 가혹한지 잘 알고 있었고, 성검이 없는 스스로가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지를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러니 도와주세요. 형님.”
용사는 절박했다.
“제가 하찮아지지 않도록, 제가 마왕에게 살해당하지 않도록, 또 제가 이용당하지 않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용사는 아직 믿고 의지할 존재가 하나 더 남아 있었다.
“제게 길을 알려주십시오.”
더욱 다행인 것은 김선혁이 그 대답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
일대의 지형이 완전히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바뀌는 전투가 있었다. 그리고 그 끔찍한 폭발을 감지해내지 못했을 교국의 신전 기사들이 아니었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김선혁과 박준민이 대강의 대화를 마무리했을 때, 일백의 신전 기사들과 사제들이 들이닥쳤다.
“가볍게 대련을 했을 뿐입니다.”
“가벼운 대련 말입니까?”
김선혁의 말에 신전 기사가 황당하다는 듯한 얼굴로 주변을 가리켰다.
거대한 구덩이와 새까맣게 타버린 초원은 마치 운석이라도 떨어진 듯 엉망진창인데, 그게 가벼운 대련의 여파라고 하니 기가 찬 눈치였다.
“아무래도 저희 때문에 기지에 소란이 생긴 모양입니다.”
무려 일백이나 되는 신전 기사들이 이리 완전무장을 하고 달려왔을 정도면 판테이아 기지 역시 발칵 뒤집혔을 게 분명했다.
하기야 그렇게 요란을 떨었으니 기지가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다 해도 그 소란이 전해지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뭐라고 사과를 드려야 할지….”
“사과하실 일은 아니지만, 조금 당황스럽긴 하군요.”
신전 기사가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토로했다.
하지만 김선혁으로서는 달리 해줄 말이 없었다. 가벼운(?) 대련이 있었고, 지금은 그 대련도 끝이 났다. 그 과정의 과격함과 그 뒤에 일어난 일들을 굳이 알려줄 의리는 없었다.
“그보다 사도께서는 어디 다치신 게 아니신지….”
신전 기사가 걱정스레 박준민을 살펴보았다.
“괜찮습니다.”
박준민은 손사래를 쳤지만, 그 안색이 백지장처럼 창백한 것이 당장 쓰러져도 이상해 보이지 않았다. 하기야 죽음 직전에 회생 주문으로 되살아난 육신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심적으로도 거듭 충격을 받은 상태였으니 안색이 좋아 보이는 게 도리어 이상한 일이었다.
“일단 대련이 끝나셨으면 기지로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신전 기사의 말에 박준민이 비척거리며 말에 올랐다.
“음.”
신전 기사는 도대체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한 기색이었지만, 과연 절제력 강한 신전 기사답게 꼬치꼬치 캐묻지는 않았다.
“그럼 모시겠습니다.”
신전 기사들의 호위 속에서 용사와 김선혁은 다시 판테이아 기지로 복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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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작대로 기지는 발칵 뒤집힌 상태였다. 엄청난 마수가 출현한 것은 아닌지 하나같이 긴장이 가득한 얼굴로 만전의 태세를 갖춘 모습이었다.
그야말로 전투를 코앞에 둔 듯 살벌한 기세에 김선혁이 쓴웃음을 지었다.
“생각보다 일이 커졌군요.”
미안함이 담긴 그의 음성에 신전 기사가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전선의 병사들의 일상이라는 게 별거 있겠습니까. 이 김에 경계 상태도 확인해보고 실전에 준하는 훈련이었다 여기면 딱히 문제될 것도 없지요.”
그거야 지휘관인 신전 기사의 입장이었고, 말단 병사들의 입장은 또 다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엘리트 계급에 속한 신전 기사가 그 차이를 알기는 쉽지 않았다.
“일단 경계부터 해제하시지요. 쓸데없는 일로 병사들이 체력을 소모해서는 안 되니까요.”
소란의 원흉인 자신이 할 말은 아니었지만, 조금이라도 빨리 경계령을 해제하는 것이 병사들을 위하는 길이라 여겨 김선혁이 나섰다.
“그렇지 않아도 먼저 전령을 보냈으니, 곧….”
“현 시간부로 경계 해제한다! 기존의 경계 병력을 제외한 전 병력은 막사로 복귀하여 내일을 준비하라!”
신전 기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멀리서 뿔나팔이 울리더니 이곳저곳에서 명령과 복창이 이어졌다.
“일단 저는 보고를 해야 하니, 전승공과 사도께서는 쉬시도록 하시지요.”
신전 기사들이 자리를 비우고 용사도 그들에게 안내를 받아 숙소로 사라졌다.
“이겨내라. 준민아.”
김선혁은 터덜터덜 사라지는 박준민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대련은 끝이 났지만, 용사의 진짜 시험은 지금부터였다.
이제는 꿈을 꾸던 용사가 진실을 마주해야 할 때였다.
**
“용사라는 친구와 한바탕 한 건가.”
숙소로 가는 길에 만난 다륜이 물었다.
“아아.”
김선혁은 애매하게 대답을 흐렸지만, 다륜은 마치 보지 않아도 다 안다는 듯 말했다.
“그 친구 완전 박살이 났겠구만.”
“아직 누가 이겼는지 말 안 했는데?”
그의 말에 다륜이 코웃음을 쳤다.
“그걸 굳이 들어야 알까.”
“너는 나를 너무 높게 보는 면이 있어. 중부에는 나보다 더한 괴물들도 분명 존재한다고.”
“있다고 해도 이곳에는 없다.”
다륜의 말은 단호함을 넘어 확신에 차 있었다.
“참 이상한 일이지. 분명 들리는 바에 의하면 용사라는 친구가 숱한 전장을 겪어온 자라는 건 확실한데, 나는 그 친구에게서 전사의 투기를 터럭만큼도 느낄 수 없었다.”
김선혁은 저도 모르게 다륜을 돌아보았다.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 그런 절박함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놀랍게도 다륜은 박준민의 현 상태를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다.
성검에 의해 강제적으로 죽음에 대한 공포를 거세당한 용사는 다륜의 말대로 절실함이 없을 수밖에 없었다.
“넌 가끔 나를 놀라게 만들어.”
다륜은 그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만약 그 용사라는 친구가 내가 본 그대로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자라면 나는 형제들과 함께 이곳을 떠나겠다. 그자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일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진짜 전사가 아닌 자와는 거래할 생각이 없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다륜은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것이든 포기할 수 있는 사내였다. 설령 용사를 만나기 위해 이곳까지 오는 동안 수천의 형제가 희생되었다고 해도 다륜이 신념을 꺾는 일은 없을 것이다.
다륜은 그런 사내였다.
김선혁은 누구보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조금도 걱정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조금만 기다려. 준민이는 지금 완전하지 않아.”
“오래 기다릴 수는 없다. 초원의 사내들은 한 자리에 오래 머무르는 법을 배우지 않는다.”
아무래도 용사에 대한 다륜의 평가는 그의 예상보다 한참이나 낮은 모양이다. 다륜은 용사가 짧은 시간 내에 변할 거라 조금도 기대하지 않는 눈치였다.
“곧이다.”
그런 다륜을 보며 김선혁이 말했다.
“네가 또 다른 거래 상대를 찾아 대륙을 헤맬 일은 없을 거다.”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야.”
다륜이 피식 웃으며 그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또 무슨 신묘한 주술을 부릴지 기대하도록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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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전 기사들은 입이 무거운 편이었지만, 여러 사람을 거쳐 보고가 전해졌던지라 전승공과 용사의 대련에 대한 소문은 금세 기지에 퍼지고 말았다.
“누가 이겼을까.”
“그래도 사도님이 아닐까.”
“에이. 그날 성문 쪽에 있었던 친구들 이야기 들어보니, 전승공께서는 멀쩡하셨고 사도께서는 완전히 녹초가 된 상태였다고 하던데?”
병사들은 이 희대의 대결이 어떻게 결착이 났는지 몹시도 궁금해 했다. 하지만 당사자들이 입을 다물고 있으니 소문만 무성해질 뿐, 쉽사리 결론이 나지 않았다.
“병사들의 사기가 걱정되는군요. 승패가 어떻게 되었건 간에 두 사람 다 불패의 영웅들이 아닙니까.”
“최소한 전쟁이 끝나기까지 두 사람의 전적에 패배가 기록되는 일은 없어야 할 텐데 말입니다.”
누가 이겼건 간에 지휘관들의 입장에서는 골칫거리였다.
지휘관들은 차라리 이 소문이 아무런 결론도 나지 않은 채 그대로 지나가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바람대로 소문은 결코 답을 얻을 수가 없었다.
당사자들이 그날의 승패에 대해 떠들 생각이 전혀 없었던 탓이다.
“이겨냈구나.”
성검과 박준민이 무슨 대화를 주고받았는지 김선혁으로서는 알 수 없었다. 단지 확실한 것이 있었다면 용사의 눈빛이 전처럼 가볍지도 그렇다고 패배감에 절어 있지도 않다는 것뿐이었다.
용사는 덤덤히 자신이 돌려받은 죽음의 기억을 늘어놓았다.
“어쩐지 저 스스로도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당시의 제가 어떻게 신전 기사들이 엄중히 지키는 발뭉이를 꺼내 달아날 수 있었는지. 그때 저는 이미 한 번 죽었었던 겁니다.”
용사의 첫 죽음은 김선혁이 예상했던 것보다 한참은 오래 지난 일이었다.
“그리고 마수한테 두 번 죽었습니다. 아마 협공이었던 거 같습니다.”
용사는 기억을 되돌려 받았지만, 급박한 전투의 와중에 일어난 일을 정확하게 기억해내지는 못했다. 그저 죽음의 순간 느꼈던 고통과 두려움만을 어렴풋이나마 떠올렸을 뿐이었다.
그리고 용사는 훌륭하게 죽음의 공포를 이겨냈다. 그거면 충분했다.
지금부터는 앞으로의 일이 더욱 중요했다.
“네가 왜 나한테 무력하게 졌는지 알아?”
“모르겠습니다. 사실 잘 생각도 나지 않거든요.”
박준민의 말에 김선혁이 물었다.
“너 레벨이 몇이냐.”
“얼마 전까지 29레벨이었는데, 이제는 26레벨이에요.”
김선혁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완전한 각성을 이룬 것에 비해 지나치게 약하다 싶었더니, 그 레벨이 자신의 예상보다도 한참이나 더 낮았다.
“음.”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만약 한 번의 죽음을 겪을 때마다 레벨이 3씩 떨어졌다 쳐도 지금의 박준민은 최소한 12레벨 이상은 하락이 된 상태라고 보아야 했다.
그렇게나 많은 마물들을 처리한 용사의 현재 레벨이 29에 불과한 이유가 설명이 된 것이다.
“나는 레벨 39다.”
“아….”
그의 말을 들은 용사가 무언가 깨달음이라도 얻은 얼굴로 탄성을 내뱉었다.
“너와 나의 레벨 차이가 무려 10이었다.”
숫자상으로는 고작 10에 불과한 레벨의 차이였지만, 실질적으로 체감하는 차이는 훨씬 더 클 수밖에 없었다.
한 번의 전직을 더 이루느냐 마느냐가 판가름 나는 엄청난 격차인 것이다.
실제로 완전한 용사가 레벨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불완전한 용기병에게 패배했으니, 싫어도 레벨의 중요성을 인정해야 했다.
“그리고 나는 마왕에게 졌다.”
실질적으로 그가 마왕에게 패배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마왕이 겁을 집어먹고 달아나지 않았다면 당시의 자신이 죽음을 피할 수 없었다는 것 정도는 그도 알고 있었다.
“정령왕의 힘이 담긴 창, 그리고 고대 정령의 힘을 빌리고도 나는 마왕을 압도할 수 없었다.”
김선혁이 박준민의 눈을 보며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말했다.
“그 말은 장비빨이고 뭐고 간에.”
그의 어조는 그 어느 때보다 단호했다.
“레벨이 깡패라는 뜻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