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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5. 전룡의 형상 (2)
용사는 멀리 보이는 김선혁을 보고는 눈썹이 휘날리도록 내달렸다.
“형니이이이임!”
그가 살아있을 거라 믿고 있었지만, 그래도 마음 한구석으로는 불안함이 완전히 가시지 않았던 모양이다.
“형님! 형님!”
다소 수척해졌을지언정 전보다 한층 더 성장한 듯한 형제의 귀환을 눈으로 보고 나서야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온 듯한 기분이었다.
그런데 해후(邂逅)의 정을 채 나누기도 전에 산통이 깨지고 말았다.
[멈춰. 투기(鬪氣)다.]
갑작스레 피어난 기세가 앞을 가로막은 것이다.
마치 굶주린 맹수가 지척에서 자신을 노려보는 듯한 기이한 감각, 저도 모르는 사이에 온몸의 근육이 팽팽하게 조여졌다.
누린내?
그저 기분 탓이라고 넘기기에는 코끝을 파고드는 사나운 짐승의 향이 너무도 진했다.
“사도님?”
신전 기사들이 갑자기 멈춰선 용사를 보며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해 보였다.
“음.”
용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수 없었다. 시간이 갈수록 더해가는 투기가 끈적끈적하게 온몸을 훑어 내렸던 탓이다.
어디냐.
기운의 진원지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애초부터 상대는 스스로를 숨길 생각도 하지 않았으니까.
씨익.
흙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인상 험악한 사내가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어 보였다. 늑대가 으르렁거리듯 사나운 미소였다.
영문 모를 투기에 박준민의 표정이 굳어버렸다. 형제와도 같은 이의 생환에 마냥 기뻐하던 청년의 얼굴이 어느새 신의 사도다운 준엄한 것이 되었다.
“다륜.”
그 순간 김선혁이 끼어들었고, 불쾌하게 온몸을 훑어가던 투기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적당히 해둬.”
“그렇지 않아도 그만하려던 참이다.”
사내가 어깨를 으쓱해 보이더니 불쑥 손을 내밀었다.
“반갑다. 다륜이다.”
사내의 얼굴에 다시 한 번 미소가 떠올랐다. 방금 전까지 베어 물고 있던 살벌한 미소와는 완전히 다른 꽤나 호쾌한 웃음이었다.
“다륜은 북방에서 가장 큰 부족 중 하나를 이끄는 대족장이야.”
자기소개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짧은 인사에 박준민이 인상을 찌푸리고 있으니, 김선혁이 나서서 모자란 부분을 채워주었다.
“박준민. 용사다.”
이쪽도 소개가 짧은 건 마찬가지였다.
꽈악.
두 사내가 손을 움켜잡으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하.”
되도 않을 기 싸움을 하는 용사와 다륜을 본 김선혁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랜만이다. 준민아.”
미묘한 분위기를 무마시키기 위해 건넨 한마디에 박준민이 별안간 소리쳤다.
“형니이이이임!”
이미 다륜 따위는 머릿속에서 사라진 듯한 모습이었다.
**
“그렇게 된 거다.”
뒤늦게 모습을 드러낸 대주교와 형식적인 인사를 나누고 자리를 옮긴 김선혁은 박준민에게 지난 사정을 간추려 말해주었다.
“어쨌건 간에 준민이 너도 조심해라. 네 대적자는 진짜 괴물이니까.”
“형님. 저라고 여기서 놀고만 있었던 건 아니라고요.”
하지만 박준민은 그의 말을 그다지 귀담아 듣지 않는 기색이었다.
“까불지 말고.”
“까부는 게 아니라 저 진짜 강해졌다니까요?”
재차 경고를 해도 소용이 없었다. 용사는 그간 스스로 이룩한 경지를 꽤나 자신하고 있었다.
“최소한 지지 않을 자신 정도는 있어요.”
그리고 김선혁이 보기에도 용사는 많은 성장을 이룬 것처럼 보였다.
“아니. 그 정도로는 안 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용사의 말에 회의적일 수밖에 없었다.
부족해. 한참 부족해.
마왕과 만나 처참하게 패배할 용사의 모습이 눈에 선히 보이는 듯했다.
“그 상태로 마왕을 만났다가는 넌 죽어.”
박준민은 그의 말에 자존심이 상했는지, 표정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말을 번복하지 않았다.
자신의 힘을 맹신한 용사가 마왕의 손에 살해당하도록 둘 수는 없었으니까.
“아무리 형님이라지만 이번만큼은 틀렸습니다.”
용사는 여전히 그의 말을 납득하지 못했는지 자존심이 잔뜩 상한 얼굴이었다.
“하아. 어쩔 수 없네.”
좁혀지지 않는 의견차, 결국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한 번 보자. 진짜 네 말이 맞는지.”
**
판테이아 기지에서 다소 떨어진 평원, 김선혁과 박준민이 서로를 마주보고 섰다.
“형님. 아무리 생각해도 진짜 이건 아닌 것 같은데요.”
용사가 난감하다는 듯한 얼굴로 몇 번이나 다시 생각해볼 것을 권유했지만,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네 자신감이 만용인지 아닌지는 겪어보면 알겠지.”
김선혁은 아무래도 용사가 충분한 힘을 갖췄는지 몸으로 확인해볼 생각인 듯했다.
“아룡들도 전부 사라졌는데, 최소한 걔들 돌아오면 그때 시험하시죠.”
하지만 용사의 생각은 달랐던 모양이다. 짐짓 생각해주는 듯한 말속에 스스로의 승리에 대한 확신이 가득했다.
“그게 아니면 최소한 그 창이라도 가져오시죠. 땅의 정령왕이 준 거라면서요.”
김선혁이 고개를 저으며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서로 죽일 듯이 싸울 것도 아닌데, 그것까지 쓸 필요 있나.”
“아, 진짜 이건 아닌 것 같은데.”
도저히 그가 생각을 바꿔먹을 것 같지 않자 용사도 성검을 움켜잡으며 자세를 취했다. 하지만 기세도 뭣도 없는 어정쩡한 자세는 성의가 없어 보이기까지 했다.
“다시 말하지만, 형님. 혹시 형님이 져도 삐치기 없는 겁니다. 형님은 아직 용을 못 만났고, 저는 발뭉이가 있으니까요.”
싸움은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박준민은 마치 벌써 자신이 이기기라도 한 것 같은 태도였다.
“오냐. 명심하마.”
피식 웃은 김선혁이 손을 까딱거렸다. 명백한 도발이었다.
그리고 도발은 통했다.
“진짜 예전의 준민이가 아니라니까 그러시네.”
자존심이 상한 박준민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빨리 끝내라. 어차피 그도 스스로가 완전치 않다는 것을 알고 있을 테니, 큰 좌절은 아니리라.]
“안 그래도 그러려고.”
성검이 분노를 부추겼고, 용사는 성검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고오오오.
성검에 빛무리가 모여들고, 성검을 거친 섬광이 그의 온몸을 둘러쌌다. 그리고 성스러운 신의 갑옷이 되고 방패가 되었다. 완전한 각성을 이룬 용사의 고유 스킬, 디바인 아머(Divine Amor)였다.
변화는 그게 끝이 아니었다.
빛무리에 휩싸였던 성검의 날이 조금씩 투명해진다 싶더니, 이내 빛과 하나가 되어 신성한 불길이 되었다.
만마를 불태우는 성화(Holy Flame), 성검 발뭉의 진정한 모습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지금의 모습이야말로 전선의 수많은 병사들이 칭송하는 용사의 진짜 모습이었다.
“저 지금 진지합니다. 그러니 형님도 전력을 다….”
용사의 경고가 채 끝이 나기도 전에 기다렸다는 듯이 김선혁을 중심으로 금빛 서기가 폭발했다.
성스러운 광휘에 못지않은 상서로운 빛 속에서 용기병은 인간의 태를 벗고 용인이 되었다.
“어?”
그런데 그 모습이 박준민이 알고 있는 용인의 모습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구부정한 등은 과격할 정도로 꺾여 있었고, 머리는 아무런 위화감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드레이크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화르르르.
드레이크를 닮은 억센 턱 사이로 시뻘건 화염이 흘러내렸다. 그 모습 그 어디에도 인간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전룡(戰龍)의 형상….]
사위를 압도하는 용의 기상이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것을 느낀 성검 발뭉이 침음을 내뱉었다.
“전룡의 형상?”
[용이 자신의 반려에게 허락한 가장 강력한 힘이자.]
언제나 여유를 잃지 않았던 성검 발뭉의 음성이 전에 없이 경직되어 있었다.
[완전한 각성에 임박한 용기사의 상징이다.]
성검의 말에 용사가 마른침을 삼켰다. 용도 없는 용기병 따위 자신의 상대가 아니라 여기던 자신감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준비해라!]
성검이 외쳤다.
[전룡의 투지는 상대의 목을 물어뜯기 전까지 사그라지는 법이 없으니, 이 싸움은 더 이상 허울 좋은 대련이 아니다!]
“뭐, 그런 거지같은 경우가 다 있어!”
입장이 바뀌었다. 최대한 빨리 싸움을 끝내려 하던 용사는 이제 자신의 목을 걱정해야 할 상황에 처하고 말았다.
“그냥 테스트라며!”
[떠들 시간이 없다!]
김선혁의 시험은 용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과격하고 위험한 것이었다.
크아아아아!
용인이 사납게 울부짖으며 땅을 박찼다.
[온다! 어서 준비를….]
성검의 경고가 채 끝나기도 전에 용인의 모습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뭐 이리 빨라!”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접근해온 용인의 속도는 절대로 정상적이지 않았다.
[날개! 전룡은 날개가 없을 텐데!]
박준민은 그 비정상적인 속도의 원인을 알게 되었다. 구부정한 등 뒤로 돋아난 푸른 날개 한 쌍, 용인은 달려온 게 아니라 땅을 스치듯 날아온 것이었다.
“흡!”
방어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한 용인의 돌격, 박준민은 급하게 다리를 벌리고 숨을 들이켰다. 짧은 시간에 이룬 완벽한 방어 자세, 전신을 가린 방패가 용인과 그의 사이에 우뚝 섰다.
쾅!
내장이 터져나가는 듯한 끔찍한 충격과 함께 발밑이 허전해졌다. 가공한 속력과 육중한 질량이 합쳐진 용인의 돌격을 버티지 못한 박준민의 몸이 허공을 날았다.
[또 온다!]
하지만 용인의 공격은 이제 시작이었다.
날개를 펼친 용인이 바짝 따라붙어 주먹을 내뻗었다.
[막을 수 없다!]
기세도 자세도 불리하다. 허공에서 중심도 잡지 못한 상태로 막아내기에는 용인의 주먹질에 담긴 파괴력이 지나치게 강력했다.
“알고 있어!”
타오르는 성화를 두른 성검이 용인을 향해 뻗어 나갔다. 용인의 기세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반격이었지만, 달려오는 용인의 힘을 이용하기에는 충분한 공격이기도 했다.
만약 용인이 주먹을 거두어들이지 않으면 제 스스로 검 끝에 몸을 내던지는 꼴이 되리라.
그야말로 그간의 경험이 더해진 대담하면서도 시의적절한 공방일체의 한 수, 하지만 용인의 반응은 용사의 경험과 담력을 아득히 넘어서는 것이었다.
“억!”
세상이 거꾸로 뒤집혔다. 정말로 세상이 뒤집힌 게 아니었다. 단지 용사의 몸이 타의에 의해 뒤집혔을 뿐이었다.
용인이 손을 뻗어 그의 발을 잡아챈 것이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그가 아쉬운 대로 상반신이나마 방패로 가리고는 충격에 대비했다.
쾅!
또 한 번 충격이 용사를 강타했다. 이번에는 뒤로 몸을 날리며 충격을 흡수할 수도 없었다. 발을 움켜잡은 용인의 팔이 그가 물러나도록 허락하지 않은 것이다.
“끄악!”
머릿속에서 종이 울리고, 온몸이 부서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마치 몸속에서 폭탄이 터진 것 같았다.
[정신 차려라!]
발뭉의 목소리와 함께 몸속에서부터 따뜻한 기운이 솟구쳤다. 무지막지한 주먹질에 엉망진창이 되었던 오장육부의 충격이 순식간에 완화되며, 흐릿해졌던 시야가 돌아왔다.
성검 발뭉이 지닌 치유의 힘 덕이었다.
콱.
정신을 차린 박준민이 불안정한 자세로나마 성검을 용인에게 겨누었다.
“홀리 캐논(Holy Cannon)!”
검 끝에 모인 성화가 포탄처럼 뭉쳐 용인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쾅!
황당하게도 용인은 그조차도 주먹으로 맞받아쳤다.
크륵.
신성력으로 만들어진 포탄은 흩어졌다. 하지만 전투가 시작된 이후로 용인이 처음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고도로 응집된 신성력의 충격을 완전히 해소하지 못한 것이다.
탁.
바닥에 내려선 박준민이 욱신거리는 발목을 한 차례 털어냈다. 순식간에 솟아난 신성력이 부어오른 발목을 치유하고, 다시 성검 끝에 모여들었다.
“홀리 캐….”
스킬이 완전히 발동하기도 전에 물러섰던 용인의 모습이 잔상만을 남기고 사라졌다.
화악.
등뒤에서 느껴지는 유황의 숨결, 박준민이 몸을 돌리며 방패를 세웠다.
“합!”
용인의 주먹이 방패 위를 내리쳤다. 하지만 이번 공격은 단순히 그를 몇 걸음 물러나게 만드는 데 그치고 말았다.
근육에 스며든 신성력이 거력이 되어 용사를 받쳐주었다.
쾅! 쾅!
방패 위로 사나운 주먹질이 쏟아졌다.
“크윽.”
용사는 연신 뒷걸음질을 치며 반격을 준비했다. 방패 너머에서 날뛰고 있을 용인이 숨을 고를 그 순간만을 기다렸다.
그렇게 얼마 동안이나 정신없이 용인의 무식한 주먹질을 막아내며 뒷걸음질을 쳤을까. 영원히 끝이 나지 않을 것 같던 주먹세례가 마침내 끝이 났다.
[지금이다!]
발뭉의 신호와 함께 용사가 방패를 내던졌다. 그리고는 양손으로 성검을 잡고는 몸을 횡으로 회전시켰다.
수없이 많은 마수들을 찢어발겼던 신의 참격이 용인을 향했다.
콰악.
용인은 이번에도 맨손으로 그의 공격을 받아냈다. 단지 차이가 있었다면, 성검을 움켜잡은 용인의 두 손이 성화에 못지않은 금빛 서기가 둘러져 있었다는 것뿐이었다.
“발뭉아!”
[신께서 역사하시니 감히 막을 자가 없어라!]
마치 시를 읊듯 낭랑한 성검의 음성과 함께 성화가 폭발적으로 솟구쳤다. 그 강력한 신의 불꽃과 맞닿은 금빛 서기에 균열이 생겨났다.
“안 놓으면 잘립니… 어?”
승기를 잡았다 여겼던 용사의 눈에 의문이 떠올랐다.
성검을 움켜잡은 손 두 개, 그런데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저 거대한 손은 뭐란 말인가.
“왜 손이 네 개…?”
미처 그 해답을 찾기도 전에 용인의 손이 그의 양쪽 어깨를 움켜잡았다.
‘그게 아니면 최소한 그 창이라도 가져오시죠. 땅의 정령왕이 준 거라면서요.’
‘서로 죽일 듯이 싸울 것도 아닌데, 그것까지 쓸 필요 있나.’
입을 쩍 벌린 용인의 주둥이 사이로 시뻘건 화염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죽일 것처럼 싸울 것도 아니라며어어어어!”
[디바인 실드!]
성검 발뭉이 주인을 지키기 위해 자신이 지닌 최강의 방어 스킬을 발동시킨 것과 용인의 타오르는 숨결이 쏟아진 것은 거의 동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