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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4. 전룡의 형상 (1)
“연락이 늦어 죄송합니다.”
[오죽하면 그대가 죽었다는 소문이 이 먼 곳에까지 들렸겠는가. 다 그만큼 전선의 상황이 위급했기 때문이겠지.]
다 이해한다고 말을 하는데 왜 그게 더욱 무서운 것인지, 김선혁이 땀을 뻘뻘 흘렸다.
“통신 사정상 모든 것을 말씀드리는 것은 어려우나, 그간 피치 못할 사정들이 있었습니다.”
“연락석이라면 걱정하지 마시기를. 오늘 밤을 샐 수 있을 정도로 교국이 연락석을 제공해주었습니다.”
[그렇다는구나.]
제 딴에는 작게 말한다고 했을 게 분명한 눈치 없는 마법사의 목소리는 안타깝게도 저 너머까지 전해지고 말았다.
결국 그는 모든 것을 내려놓은 채, 그간 있었던 일들을 전부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대는 지독스러울 정도로 말을 듣지 않는구나.]
그리고 사정을 전부 전해 들은 오필리아의 음성은 전보다 더욱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분명 내 그대에게 중부에는 그대 혼자만 있는 것이 아니니 너무 많은 것을 짊어지려 하지 말라 하지 않았던가.]
질책하는 기색이 역력한 오필리아의 말에 김선혁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생면부지의 피난민들을 구하기 위해 그대가 벌인 일로 인해, 정작 그대가 책임져야 할 아덴버그의 소중한 기사와 마법사들이 위험한 지경에 처했다. 그대는 이에 대해 따로 변명할 말이 있는가.]
“없습니다.”
변명할 거리가 있을 리가 없었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아덴버그의 원정대가 위험을 자초하게 된 원인은 명백하게 자신에게 있었으니까.
“제가 그들을 모두 구해오도록 하겠습니다.”
[그대는 여전히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있구나.]
오필리아의 한숨을 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왔다. 그 아무것도 아닌 소리에 김선혁은 더욱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대를 책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니라. 그대는 조금 더 스스로의 위치를 자각할 필요가 있으니, 그대의 안위는 비단 그대 하나만의 것이 아니다.]
오필리아의 음성은 엄격하기까지 했다.
[그대가 위급한 지경에 처하면 그대를 따르는 이들 역시 그러할 것이니, 내가 그러하듯 나의 반려인 그대 역시 스스로의 안위를 떠받드는 많은 이들의 존재를 알아야 할 것이니라.]
바꿔 말하면 자신이 멋대로 굴었기에 다른 이들이 곤란에 처했다는 말이었고, 그 역시 그 사실을 뼈저리게 통감하고 있었다.
[만약 그대가 다시 서쪽 땅에 들어서 전과 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단언컨대 나는 교국을 압박하여 그들로 하여금 대군을 파견토록 하여 그대를 찾게 만들 것이다. 그대는 정녕 교국과 내가 그런 부담을 떠안기를 바라는 것인가.]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중부 왕국들을 지원하는 동부 왕국 연맹의 맹주인 그녀라면 정말로 그리 할 능력이 있었다.
“하지만 제가 찾지 않는다면 원정대는….”
[그대 전승공이여.]
고립되어 고군분투하고 있을 원정대를 생각하면 잠도 오지 않는 김선혁이었다. 인재를 끔찍할 정도로 아끼는 오필리아 역시 분명 그러하리라.
그런데 지금 그녀의 태도로 보아선 원정대에 대한 걱정 따위는 전혀 없어 보였다.
[그대가 본 원정대가 그리 약했던가. 그대는 내가 그렇게 허술히 일을 처리할 거라 생각하는 것인가.]
김선혁은 뒤늦게 그 위화감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원정대의 환수사제 최민영은 절대로 약하지 않다. 최소한 그곳이 지켜야 할 것이 없는 적진이라면 그녀의 강함은 그대 이상이리라.]
테오도르 티베리우스 로 아데스덴 국왕이 말한 적이 있었다.
‘만약 그 토르고스라는 환수가 적국의 한가운데에서 소환되었다면, 꽤나 재미있는 광경이 벌어졌을 테지.’
그리고 마물이 넘쳐나는 서쪽 땅은 소환사가 날뛰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었다.
“아….”
탄성을 내뱉는 그에게 오필리아가 말했다.
[기다려라. 그들은 반드시 돌아올 것이니.]
그녀의 어조에는 확신이 가득했다.
[그대가 귀환을 미룰 수 있는 건 원정대가 돌아올 때까지뿐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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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으시겠습니까? 통신을 맡은 마법사도 교국의 인물, 섭정 폐하의 발언은 필시 교국 인사들의 귀에도 들어갈 겁니다.”
통신이 이어지는 동안에도 그녀의 곁을 지키고 있었던 레인하르트 후작이 우려를 표했다.
아무래도 그녀가 전승공의 안위에 변고가 생길 경우 교국을 압박하는 것마저 불사하겠다는 말을 한 것이 문제가 되지 않을까 염려하는 기색이었다.
“들어가라고 한 말이다.”
하지만 오필리아는 태연했다.
“전승공은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잘 드는 검(劍)이다. 교국의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최대한 붙잡아 두는 게 이득일 터, 그들이 귀히 여기는 신전 기사단과 사제단을 대신해주기에 더 없이 좋은 장기말이니라.”
“섭정 폐하께서는 그들이 경거망동하지 못하도록 경고를….”
레인하르트 후작이 감탄을 토해냈다.
“전승공은 스스로가 퍽이나 이기적이라 믿는 눈치이나, 실상 들여다보면 그는 이타적이고 희생적인 인물이다.”
거래라는 미명 하에 꽤나 여러 번 밑지는 장사를 해온 김선혁은 사실 적당한 구실만 주면 기꺼이 남을 위해 헌신하는 전형적인 영웅의 표상과도 같은 자였다.
“교국의 교활한 사제들이라면 그런 전승공을 구슬려 원하는 것을 취하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니리라.”
그리고 그런 성격은 대개가 정치에 재능이 없고, 이용당하기 십상이었다.
“전승공이 가진 재능은 전장에서 가장 빛이 나는 것, 나는 그의 재능이 가장 적절한 곳에서 가장 찬란하게 빛나기를 바라노라.”
오필리아는 그에게 모자란 정치적 재능을 스스로가 메워줄 것을 다짐한 바가 있었고, 이번에야말로 그런 다짐이 발휘되어야 할 순간이었다.
“과연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레인하르트 후작은 염려가 완전히 가신 것인지 개운한 얼굴이었다.
“전승공은 맹장에 가까운 기사, 목표가 주어진다면 주변을 돌아보지 않는 성격이지요.”
오필리아가 순간 멈칫했다가 얼굴색을 바꾸었다.
“물론 그렇다고 전승공이 싸우는 것밖에 모르는 무식한 자는 아니다. 그는 기사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섬세하고 사려 깊은 자, 단지 천성이 너무도 선량할 뿐이니라.”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 제 남편을 역성드는 오필리아의 태도에 레인하르트 후작이 피식 웃었다.
“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후작의 말에 오필리아가 괜스레 헛기침만 해대었다.
“그나저나 조금 더 사담을 나누셨어도 좋았지 싶습니다. 그래도 죽었다 살아난 이가 아닙니까.”
다른 이가 이런 말을 했다면 왕족의 개인사에 주제넘은 조언을 한 대가를 혹독하게 치렀을 것이다.
하지만 레인하르트 후작은 오필리아가 어린 시절부터 곁에서 수행해왔던 가장 가까운 측근이자, 왕실의 먼 핏줄이기도 했다.
“무사한 것을 알았고, 더는 위험을 자초하는 일이 없도록 단단히 일러두었으니 그것으로 되었다.”
“그렇다고 전승공이 위험을 마다할 성격도 아니긴 하….”
오필리아의 대답에 후작이 무심코 대꾸하다 입을 다물었다.
“후작이 요즘 많이 한가한 모양이구나.”
이번에는 존경받는 왕실의 노검호도 섭정의 면박을 피할 수 없었다.
**
오필리아가 의도했던 대로 그녀의 경고는 고스란히 교국의 수뇌부에게 전해졌다.
동부 왕국 연맹의 맹주이자 동부의 최강 대국인 아덴버그가 얼마나 전승공을 애지중지하는지를 알게 된 교국은 4만에 가까운 북방의 사나운 기병들과 전승공을 이용하려던 계획을 전면 재검토할 수밖에 없었다.
혹시라도 험악한 전장에 전승공을 투입했다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교국이 짊어져야 할 것들이 너무도 컸던 탓이다.
“판테이아 기지로 갈 생각입니다. 만약 가는 도중에 위급한 전선이 있다면 들려서 돕도록 하겠습니다.”
그런 사정 탓에 교국의 인물들은 전승공이 도움을 손길을 내밀었을 때, 오히려 적지 않은 부담을 느껴야 했다.
“말씀은 감사하나 교국의 방어선은 철옹성과도 같으니, 전승공께서는 그간의 피로를 푸는 데 최선을 다하시지요.”
사제의 말은 다분히 정치적이었지만, 또한 사실이기도 했다. 교국의 방어선이 다른 왕국들이 고전을 면치 못하는 것에 비해 훌륭할 정도로 마물들을 잘 막아내고 있다는 건 거짓이 아니었다.
“그렇습니까?”
김선혁은 한사코 도움을 거절하는 사제의 태도에 의문을 느꼈지만, 굳이 억지를 써가면서까지 참전을 할 생각은 없었다.
오필리아의 당부도 당부였지만, 그 스스로도 마왕과의 전투에서 느꼈던 위기감을 만회할 정도로 성장하기도 했었던지라 더 이상 싸움에 미친 투견처럼 전장을 찾아다닐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레벨이 39에 오른 이후로도 수많은 마물들을 처단했으니, 모르긴 몰라도 조만간 40레벨에 접어들 게 분명했다.
만약 5차 전직이 있다면 그도 멀지 않았다.
“마침 잘 됐군. 엄살을 피우고 싶지는 않지만, 말들도 이제는 쉴 때가 되었거든.”
다륜 역시 기수와 전마가 휴식을 취할 때가 되었다며 그의 말을 반겨주었다.
3일간 충분한 수면과 풍족한 식사를 하며 체력을 회복한 김선혁과 북방의 기병들은 다시 길을 떠났다. 그간 쫓기듯 내달리던 것에 비하면 하품이 나올 정도로 느긋한 행군이었다.
물론 그 기이할 정도로 빠른 이동 속도가 어디 가지는 않았다. 북방의 기병들은 느긋한 와중에도 어지간한 경기병대의 전시 행군 속도인 하루 50킬로미터의 이동 속도를 유지하는 위엄을 보였다.
“이렇게 달리니까 옛날 생각나네.”
골드레이크와 레드번을 얻은 뒤로는 늘상 아룡에 올라타고 홀로 움직여 왔던 그에게 있어 북방 기병들과의 행군은 꽤나 즐거운 일이었다.
햇수로는 몇 년 지나지도 않는 과거의 일이 너무도 아득하게 느껴졌다.
“클라크 일행은 잘 도착했겠지.”
자신의 아룡을 지키기 위해 대륙의 절반을 횡단한 헌신적인 사내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비록 흉악한 마물들과 대적하기에는 그 역량이 부족해 어쩔 수 없이 돌려보내야 했지만, 그 누구보다 믿음직한 이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그러고 보니 영지에 연락을 안 했네.”
뒤늦게 자신이 무사함을 영지에 알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가 인상을 찌푸렸다.
다른 이들이야 원체 뚝심이 있는 자들이니 그런대로 버텼겠지만, 어린 종자는 필시 제 영주의 전사 소식에 꽤나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어쩌면 다시 중부로 돌아오겠다고 난동을 부렸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는가.”
비교적 느린 행군 속도에 지루해진 것인지 다륜이 말을 걸어왔다.
“좀 보고 싶은 사람들이 떠올라서.”
김선혁도 마침 무료하던 차라 전 드레이크 기병대와 치렀던 전투를 몇 가지 이야기해주었다.
“사스테인이라. 그래. 분명 들은 적 있는 이름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나라 밖 소식에 무지한 북방의 대족장이 녹테인의 정예 기병대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왕국들 중에 우리 북방의 사내들을 흉내 낸 이들이 있다고 들었지. 그게 사스테인이었어.”
그러고 보니 북방 기병들의 전투 방식이 왠지 모르게 익숙하다 했더니, 사스테인 기병단 때문이었던 모양이다.
“뭐, 그래 봐야 겉모습이나 겨우 흉내 낸 정도겠지. 애초에 왕국의 덩치만 큰 말을 타고 북방의 사내들을 따라 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야.”
“그렇긴 한데. 사스테인도 꽤 대단한 기병단이었어. 기마술과 궁술은 북방의 기병들에 비해 처진다고 해도 그들은 전원이 검력을 사용 가능한 견습 기사들로 이루어진 자들이었거든.”
그 말에 다륜이 코웃음을 쳤다.
“넌 아직 우리 북방 기병들의 진짜 힘을 본 적이 없어.”
그간 수도 없이 많은 전투를 함께 해왔는데 이제 와서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
“비록 마물이란 놈들이 미물치고는 꽤나 흉폭하고 거칠기는 했지만, 이제까지 우리가 한 건 사냥일 뿐이다. 우리는 북부를 나선 후로 아직까지 단 한 번도 ‘싸움’다운 ‘싸움’을 한 적이 없다.”
그저 자존심이 상해 허세를 떨었다고 하기에는 다륜의 자신감이 지나쳤다.
“언젠가 인간을 적으로 두고 싸울 그 날이 온다면 그때 넌 비로소 북방이 지닌 진짜 힘을 보게 될 거야.”
“기대하도록 하지.”
무심코 자부심 강한 사내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여긴 김선혁은 선선히 그 말에 고개를 끄덕여주는 것으로 대화를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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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며칠을 느긋하게 달렸을까. 김선혁과 기병들은 어느새 판테이아 기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곳에 네가 말한 그자가 있는 건가.”
그간 얼마나 많은 전투가 있었는지 마물들의 피로 누렇게 변색된 판테이아 기지의 성벽을 바라보던 그는 다륜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맞아.”
그 순간 판테이아의 성문이 열리며 일단의 무리가 뛰쳐나오는 것이 보였다.
“이쪽으로 오는군.”
유달리 시력이 좋은 북방의 사내답게 다륜이 이를 가장 먼저 발견하고는 눈을 가늘게 떴다.
“마중 나오는 건가.”
“그렇게 보란 듯이 먼지를 피워 올리며 달려왔으니 마중 나올 만도 하지.”
격전 중에도 더럽혀지지 않은 순백의 갑주를 차려입은 기사들이 달려오는 것을 본 김선혁이 그중에서도 반가운 얼굴을 발견하고는 미미하게 웃어 보였다.
“마침 저기 오네. 저 친구가 내가 말한 그 친구야.”
“호오.”
거대한 대검을 등에 둘러메고 가장 선두에서 달려오는 사내의 모습이 유달리 눈에 띄었다.
“저자가 우리 거래의 핵심을 담당하는 그자로군.”
다륜의 날카로운 시선이 향한 곳, 그곳에는 김선혁을 보며 그렁그렁한 눈을 하고 달려오는 용사, 박준민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