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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 푸어-222화 (222/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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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3.화려한 귀환 (4)

로즈호그 왕국 남부 사령부를 통과하여 한창 말을 내달리던 김선혁은 왠지 모를 한기를 느꼈다. 뭔가 중요한 것을 잊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게 도통 뭔지 생각이 나지를 않으니 괜스레 속만 갑갑해졌다.

“뭔가 고민이라도 있는 건가?”

생각에 잠긴 동안 저도 모르는 사이에 속도가 느려졌던 모양이다. 바로 곁에서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아. 다륜.”

자신보다 부족한 이가 절대로 앞에서 달리도록 두지 않는 기질 강한 북방의 유목민들 사이에서도 가장 앞에 선 사내, 다륜이었다.

“안색이 영 좋지 않군.”

쌍꺼풀도 없이 사납게 찢어진 눈에 떠오른 염려의 기색을 읽은 김선혁이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뭔가 찝찝해서. 근데 뭐가 찝찝한지를 모르겠네. 꼭 뭘 하나 중요한 걸 빼먹은 거 같아.”

“아무래도 그동안 뒤를 돌아볼 시간도 없었으니까. 어쩌면 정말로 중요한 걸 빼먹었다고 해도 절대 이상하지 않다.”

입 발린 말 따위는 평생 해본 적 없을 두툼한 입술이 위로인지 뭔지 모를 소리를 지껄여댔다.

“끄응. 고맙다. 끔찍할 정도로 위로가 되네.”

김선혁이 입을 삐죽 내밀고 한마디 하자 다륜이 피식 웃으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설령 뭔가를 놓쳤다고 해도 그게 뭐가 중요한가. 사내는 한 번 내달리기 시작하면 절대 뒤를 돌아보지 않는 법이다. 그리고 놓친 것보다 훨씬 더 큰 것을 손에 쥐는 거지. 그게 사내가 살아가는 방식이다.”

역시나 사내다움을 가장 큰 미덕으로 아는 북방의 사내다운 한마디였다.

“널 보면 내가 하는 모든 고민이 전부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아져서 자괴감이 들어.”

드넓은 초원의 기상을 닮은 것인지 다륜은 고민을 담아두는 법이 없었다. 김선혁은 다륜의 그런 성격에 이따금씩 부러움을 느끼고는 했다.

“고민의 가장 좋은 해결책은 언제나 가장 처음에 내린 결정, 그 뒤에 떠오른 것들은 네 스스로의 대답이 아니다.”

“뭐, 틀린 말은 아니지만 넌 너무 많은 것들을 너무 단순하게만 보려 하는 경향이 있어.”

“초원에는 이런 말이 있지. 단순하지 않은 것은 답이 아니다. 살면서 이 말이 틀렸다고 느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단호하다 못해 확신에 찬 다륜의 태도는 단순무식해 보이기보다는 오히려 현명해 보였다.

실제로 다륜은 군소 부족에 불과했던 미르하치 부족을 북방에서도 가장 큰 두 부족 중 하나로 만들어낸 장본인이었으며, 그 호방함과 현명함으로 부족민들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는 대족장이었다.

스스로의 신념과 가치관을 넘치도록 결과로 증명한 사내의 말이니 설득력이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대화가 끊기자 다륜이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김선혁도 그 시선을 쫓아 뒤를 따르는 수만의 기병들을 눈에 담았다.

처음 북방을 나섰을 때까지만 해도 4만을 꽉 채웠던 기병들의 수가 지금은 많이 줄어 있었다. 대륙의 절반을 종단하는 동안 거의 5천에 달하는 기병들이 전사하거나 부상으로 낙오한 것이다.

“이번에도 나는 틀리지 않았다고 확신한다.”

하지만 비어버린 형제의 자리를 쳐다보는 다륜의 눈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보이지 않았다.

“미안하지만 이번에는 네가 틀렸어. 다시 말하지만 나는 네가 말하는 하늘신의 사자가 아니야.”

김선혁은 부상에서 회복된 직후, 전선의 상황을 듣기 위해 가장 가까운 마을을 찾았다. 그게 하필이면 다륜이 다스리는 마을 중 하나였다.

‘하늘에서 사람이 내려왔다!’

‘하늘신께서 보낸 분이 분명하다!’

북방의 유목민들은 레드번과 함께 나타난 그를 하늘신의 사자라며 호들갑을 떨었고, 그 소문이 다륜에게까지 닿았다.

레드번은 중도에 갑자기 사라졌지만 하늘신의 사자라는 호칭은 그 뒤로도 김선혁을 따라다녔다.

그 와중에 다륜과 북방의 유목민들로부터 진짜 하늘신의 사자가 맞는지 원치도 않는 시험을 받아야 했다.

그리고 그는 모든 시험을 통과했고 북방 유목민들의 인정을 받게 되었다.

‘너를 따라 아버지의 땅을 벗어나는 것 역시 하늘신의 뜻이다.’

다륜은 하늘신의 사자를 돕는다는 명목으로 4만의 기병과 함께 그를 따라나섰다. 그로서는 뭔지도 모를 하늘신의 사자를 사칭한 꼴이 된 것이다.

“사실 네가 정말 하늘신의 사자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다륜의 목소리는 내달리는 말발굽 소리에 묻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청각이 누구보다 예민한 김선혁에게는 바로 곁에서 속삭이는 듯한 선명한 음성이기도 했다.

“중요한 건 너로 인해 상잔의 비극을 막을 수 있었다는 것이지.”

다륜이 군소 부족에 불과했던 미르하치 부족을 성장시키는 과정에서 수많은 부족이 흡수되었다. 그리고 이는 북방에 커다란 변화의 바람을 일으켰다.

미르하치 부족의 성장에 위기감을 느낀 큰 부족들이 작은 부족들을 마구잡이로 흡수하며 세를 불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변화가 끝이 났을 때 북방은 수십만 단위의 부족민을 거느린 두 명의 대족장이 다스리는 곳이 되어 있었다.

다륜을 따르는 미르하치 부족과 이에 대립하는 대부족들이 연합하여 새롭게 탄생한 아시하치 부족이 북방의 초원을 양분한 것이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작은 부족으로 갈라져 있을 때는 크게 도드라지지 않던 사내들의 야망이 갑작스레 불거져 나온 것이다.

변화의 바람은 스러졌지만, 폭풍의 씨앗을 남겨두었다.

그런 상황에서 나타난 것이 김선혁이었다. 다륜은 북방에 감도는 전쟁의 바람을 외부로 트는 것을 선택했다.

미르하치와 아시하치의 가장 날랜 전사들이 각기 2만씩 차출되어 북방을 나섰고, 그게 지금에 이르렀다.

“너를 형제처럼 여기지만 수십만의 부족을 이끌어야 하는 나는 절대로 호인이 될 수 없다. 나는 너를 이용할 것이다.”

어쩐지 미안한 기색이 가득한 다륜의 말에 김선혁이 혀를 차며 대꾸했다.

“이용은 나 모르게 해야 이용인 거고, 이건 상부상조라는 거다.”

북방의 사정이야 어찌 되었든 간에 4만 기병들의 도움을 받게 되었으니 이득을 본 것은 오히려 그와 중부의 왕국들이었다.

“상부상조. 좋은 말이다. 그렇다면 기왕지사 일이 이리된 것, 최대한 많은 걸 챙겨 돌아가야겠군.”

김선혁은 대답 대신 이를 드러내며 다시 한 번 웃어 보였다.

“능력껏 챙겨보라고. 내가 곁에서 도와줄 테니까.”

다륜도 그를 보며 마주 웃어 보였다.

**

김선혁과 북방의 기병들이 마침내 로즈호그 왕국의 국경을 넘어 신성 교국 아스토리아의 최북단에 도착했을 때, 교국의 인물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무사히 돌아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전승공이시여.”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던 다른 왕국들과는 달리 교국의 전선은 비교적 상황이 양호한 편이었다. 그래서 김선혁도 이제까지처럼 전선을 가로질러 바삐 달리는 대신 잠시 걸음을 멈추고 휴식을 취하기로 하였다.

아무리 풍 속성의 도움을 받았다고 해도 연달아 전투를 치르고 휴식을 취하지 못한 북방 기병들의 피로가 극에 달했기 때문이었다.

“아덴버그로부터 전승공께 마법 전문이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김선혁은 그들로부터 아덴버그의 전언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그만하면 충분히 했으니, 이제 돌아오라. 거부는 받지 않을 것이다.]

짤막한 문장을 확인하는 순간 절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이제까지 말을 달리는 동안 느껴왔던 찝찝함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누구지? 도대체 누구기에 너 같은 위대한 전사에게 저리 강압적으로 말하는 건가.”

궁금해하는 다륜에게 전문의 내용을 말해주었더니, 다륜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내가 속한 왕국의 섭정이자 왕실의 하나뿐인 왕위 계승자.”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건 지나친 간섭이 아닌가. 전장에 나가 있는 전사에게 이리 강압적으로….”

“그리고 내 아내이기도 하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떠들어대던 다륜이 입을 다물었다.

“음.”

이제껏 그 어떤 문제에 당면해서도 고민하는 기색이 없던 호방한 사내가 이번만큼은 그의 시선을 피하며 딴청을 피웠다.

“남의 가정사에 왈가왈부하는 것은 사내의 도리가 아니지.”

심지어 되도 않을 핑계를 대며 발을 빼기까지 했다.

“한 번 내달리기 시작하면 뒤를 돌아보지 않는 게 사내라며.”

“하지만 그게 마누라라면 이야기 다르다. 자고로 집안의 평화를 지키지 못하는 자는 아무리 대단한 것을 이루었어도 그 말로가 비참한 법이다.”

이제까지와는 백팔십도 다른 다륜의 태도에 황당함마저 느껴질 지경이었다.

“참고로 이러한 마법 전문이 교국의 북부 도시와 주요 거점 전체에 도착해 있습니다.”

마법 전문을 전해준 사제의 말에 김선혁이 눈을 질끈 감았다.

어지간해서는 현장에서의 일에 관여치 않는 오필리아가 이 정도까지 한 것을 보면 화가 단단히 난 게 분명했다.

“그리고 이건 먼저 확인하신 전문과는 별개로 도착한 전언입니다. 가급적이면 빠른 시일 내에 통신을 연결하여 왕실과 연락을 취할 것을 권장한다고 하였습니다.”

차라리 전선을 내달렸다면 몰랐을 텐데, 이미 이렇게 도시에 들려 전언을 들은 이상 무시할 수도 없게 되었다.

“큰일이네. 아직 원정대를 찾지도 못했는데.”

가장 염려했던 피난민들과 퀘이샤 일족이 무사히 판테이아 기지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정작 그가 책임져야 했던 아덴버그의 원정대와 교국의 지원군이 자신을 찾기 위해 서부로 향한 뒤로 실종되고 말았다.

아덴버그로 귀환을 할 때 하더라도 실종된 원정대를 찾는 게 우선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집만 피우기에는 오필리아가 보낸 전언이 너무도 단호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만약 전승공께서 원하신다면 통신을 전담할 마법사를 이쪽으로 불러들이도록 하겠습니다.”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비록 비공식적인 라인을 통해서라지만 아덴버그에서 따로 요청이 있었던지라, 교국에서도 북부의 거점마다 통신 마법에 능한 마법사를 따로 파견하여 혹시 전승공께서 도착하시면 도움을 드릴 수 있게 준비를 해놓았습니다.”

평소라면 분명 고마웠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니었다. 사제와 교국의 호의가 이번만큼 거북스러웠던 적이 없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빠르든 늦든 간에 분명 오필리아는 자신이 전언을 들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때 가서 오필리아의 화를 더 돋우지 않으려면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연락을 취하는 게 최선이었다.

“그럼 최대한 빠른 시일 내로 마법사를 불러들이도록 하겠습니다.”

사제의 각별한 배려(?)에 김선혁이 한숨을 내쉬었다.

**

[…….]

통신은 분명 연결되었다. 그런데 어쩐지 저 너머에서는 말이 없었다. 김선혁은 혹시 통신 마법에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닌지 마법사에게 눈짓을 보냈다.

“거리가 멀긴 하지만 통신 상태는 비교적 양호합니다. 이베리아 연합의 중개소 역시 마찬가지로 상태가 나쁘지 않습니다.”

마법사가 고개를 저으며 그의 기대(?)를 저버렸다.

“섭정 폐하.”

심호흡을 마친 그가 목소리를 가다듬고 오필리아를 불렀다.

[듣고 있노라.]

한참 만에 들려온 오필리아의 어조는 지독할 정도로 무미건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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