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22 =========================================================================
222. 화려한 귀환(3)
함성이 더욱 커졌다. 병사들은 자신들을 죽음의 구렁텅이에서 건져준 구원자에게 열광적으로 환호했고, 저 위대한 초인이 한마디라도 해주기를 바랐다.
“어?”
하지만 전승공은 환호에 화답하여 뭔가를 떠들어대는 대신, 조용히 창을 회수하고 곁에 세워두었던 말 위에 올랐다.
당장에라도 떠나갈 것 같은 표홀한 기상, 병사들이 환호도 멈추고는 어리둥절한 얼굴을 해 보였다.
“저, 전승공이시여!”
놀란 것은 연대장도 마찬가지였던지라 허겁지겁 달려가 전승공의 앞에 섰다.
“혹시 이곳의 남쪽 전선에도 위태로운 곳이 있는가.”
연대장이 뭐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전승공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스토리아 교국과 맞닿은 왕국 최남단에 도달하기까지 수백 킬로미터 전선 중 위태롭지 않은 전선이 없습니다.”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지만 전선의 일부를 책임지는 부대의 대장으로서 근방의 정세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연대장은 곧장 대답을 할 수 있었다.
“그런가. 내가 멍청한 질문을 했군.”
잠시 남쪽을 바라보던 전승공이 말의 고삐를 잡았다.
“이, 이대로 가시는 겁니까?”
마음 같아서는 주둔지에 남은 식량을 전부 털어서라도 감사의 마음을 표하고 싶었지만, 전승공은 그럴 기회를 주지 않았다.
“전장의 수습은 그대들에게 맡기겠다.”
연대장은 대답조차 듣지 않고 말허리를 박차고 내달리는 전승공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설마 저대로 떠나시는 겁니까?”
운 좋게 격전 중에 살아남은 부관이 달려와 얼빠진 얼굴로 물었다.
연대장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멀찍이 물러나 있던 북방의 기병들 사이로 전승공이 섞여드는 모습을 보았을 뿐이다.
두두두두두.
이내 지축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가 들려온다 싶더니 수만의 기병들이 새하얀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남쪽으로 사라졌다.
“정말 가시려나 봅니다.”
설마 이렇게까지 전격적으로 사라질 줄은 생각도 못했던 연대장은 뒤늦게 자신이 감사의 말조차 전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탄식했다.
“대체 어디로 가시길래, 저리 바쁘게 가시는 걸까요.”
“떠나기 전 내게 위급한 지경에 처한 전선이 있는지를 물으셨다.”
“설마 쉬지도 않고 바로 또….”
충분한 휴식은커녕 바람처럼 말을 달려 다음 전장을 찾아 떠난 전승공의 신출귀몰함에 부관이 혀를 내둘렀다.
“아쉽습니다. 최소한 저희에게 구명의 은혜에 대한 보답을 할 시간 정도는 주셨다면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나 또한 아쉽다.”
명성 높은 영웅을 눈앞에 두고도 몇 마디 대화조차 나누지 못했다. 연대장의 눈빛에 아쉬운 기색이 가득했다.
다시 만날 기회가 있다면 어떻게든 오늘의 은혜를 갚으리라 마음먹었지만, 연대장은 그게 쉽지 않을 거란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저분께서 걸음을 서두르실수록 전선의 병사들이 더욱더 많이 살아남을 테니, 감히 저분을 붙잡을 수도 없구나.”
전선은 넓고 영웅을 필요로 하는 곳은 많았으니, 아마도 자신 같은 범부가 일생동안 저 위대한 영웅을 다시 만나는 날은 오지 않으리라.
“부상자를 수습하고, 사지가 멀쩡한 자들은 쓰러진 목책을 보수하라! 오늘 같은 기적은 두 번은 없을 테니, 서두르라!”
아쉬움을 가슴에 묻은 연대장이 빠르게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운은 쉽사리 가시지 않았다.
연대장은 바람처럼 나타났다 바람처럼 떠나간 위대한 초인이 말 내달려 사라진 저 평원 너머를 몇 번이나 바라보았다.
“본대에 전령을 보내 상황을 알려라! 연대 정원 태반이 전사했으나, 전승공의 도움으로 무사히 전선을 지켜냈다고!”
“바로 시행토록 하겠습니다!”
뒤늦게 생각났다는 듯 꺼낸 연대장의 말에 부관이 힘차게 대답했다.
“또한 가장 날랜 전령을 보내 남부 전선에 알려라! 전승공께서 남하하고 계시다는 걸 알려 그들이 포기하지 않도록 하라!”
연대장이 명을 내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다 무너져가는 목책 안쪽에서 열 기의 기마가 뛰쳐나와 남쪽과 후방으로 향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연대장이 한 가지 잊고 있던 사실을 떠올리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전령들이 따라잡을 수 있을까.”
수십 킬로미터의 거리를 놀이 삼아 기마 경주한다는 북방의 사내들이다. 전승공 또한 신출귀몰함과 신속한 기동으로 명성이 높은 기사였으니, 과연 전령이 그들의 걸음을 따라잡을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
아데스덴 왕성의 분위기는 영 좋지 않았다.
제 아비인 테오도르 티베리우스 로 아데스덴으로부터 군주의 모든 권한을 적법하게 위임받은 섭정 오필리아가 근래 들어 부쩍 날카로운 모습을 보이고 있었던 탓이다.
지고한 위치에 오른 공작과 후작의 위를 지닌 귀족들마저도 감히 왕성에서 큰 소리를 내지 못했고, 가장 유력한 귀족들마저도 대전을 지날 때면 숨죽인 채 발소리조차 내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 살얼음판과도 같은 왕성의 분위기 속에서 유일하게 소란이 허락된 이들이 있었다.
“섭정 폐하!”
바로 서부의 상황을 실시간으로 전해 받아 보고하는 전령들이었다.
“로즈호그 왕국의 마법 전문이 도착했나이다!”
평소라면 그 경박스러움을 몇 번이나 질책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필리아는 대전의 문을 열고 몸을 내던지다시피 엎드린 전령의 과격함을 나무라지도 질책하지도 않았다.
“전승공께서 또다시 전선에 모습을 드러내셨다는 소식이나이다!”
그저 초조한 얼굴로 전령을 바라보다 한마디를 툭, 하니 내뱉었을 뿐이었다.
“자세히 말하라.”
전령이 잠시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빠르게 보고를 쏟아냈다.
“마지막으로 모습을 드러내셨던 로즈호그 왕국의 포칭키 요새에서 200킬로미터 떨어진 로즈호그 왕국의 전선 중남부에 전승공께서 모습을 드러내셨다는 마법 전문이 도착했나이다!”
오필리아가 왕좌에서 슬며시 등을 떼고는 전령을 눈빛으로 독촉했다.
“해당 전선을 수비 중이던 보병연대가 괴멸하기 직전, 전승공께서 북방의 기병들을 이끌고 나타나 8천의 마물들을 격파하셨다고 하나이다.”
그녀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남편의 소식에 몹시도 반가워하면서도 뭔가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이었다.
“전승공께서는 건재하시며, 8천의 마물과 상대하는 와중에도 터럭만 한 상해도 입지 않으셨다는 로즈호그 왕실의 전언이 있었나이다.”
전령이 말을 끝마치기가 무섭게 오필리아가 말했다.
“전승공이 포칭키 요새에서 3만의 마물들과 격전을 치른 게 바로 사흘 전이다. 그런데 그대는 전승공이 사흘 만에 200킬로미터를 남하해 로즈호그 왕국의 중남부 전선에서 또다시 수천의 마물들과 격전을 치렀다는 말이냐.”
“바, 바로 그러하나이다.”
그녀의 목소리에 노기가 서렸다.
“이번에도 전승공은 잠시도 쉬지 않고 바로 전장을 이탈했다더냐.”
그녀의 분노에 전령이 바짝 얼어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저, 전투 직후 가장 위급한 전선이 어디인지를 여쭤보시고는 곧장 남하하셨다고 들었나이다.”
“또다시 단 하루도 쉬지 않았다는 말이로구나.”
오필리아가 가만히 손가락으로 왕좌를 두들겼다. 톡톡 거리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전령이 흠칫흠칫 몸을 떨었다. 혹시라도 지고한 섭정의 분노가 애꿎은 자신에게 튈까 염려하는 모습이었다.
“섭정 폐하!”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런 끔찍한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또 다른 전령이 대전의 문을 열고 나타난 것이다.
“전승공께서 금일 로즈호그 왕국 남부의 노보스 평원에서 3만의 마물과 교전, 모두 일망타진하셨다는 로즈호그 남부 전선 사령부의 마법 전문이옵나이다!”
새롭게 나타난 전령의 보고에 오필리아가 먼저 있었던 전령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노보스 평원이라면 바로 직전에 전투를 치르셨던 곳으로부터 250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곳이옵나이다.”
“이번에는 사흘 동안 250킬로미터를 주파하여 3만의 마물과 교전한 게로구나.”
수만의 마물을 물리친 승전보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음성이 싸늘하자 전령이 어리둥절한 얼굴을 해 보였다.
“전승공께서 이동하시던 중에 격퇴한 마물들의 수가 추가로 1만이라는 로즈호그 사령부의 추가 전문이 있었나이다.”
하지만 전령은 제 본분을 잊지 않았고 이내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자랑스러운 어투로 추가로 입수된 사실을 알려주었다.
“정황상 마물들의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이동하신 것 같나이다.”
전승공이 이번에는 그냥 이동한 게 아니라 아예 싸우면서 이동했다는 뜻이었다. 그 말에 오필리아의 표정이 한층 더 싸늘해졌다.
타이밍이 어긋나 대전을 빠져나가지 못했던 전령 하나가 안절부절 못 하고 발을 동동 굴러댔다.
“또한 이번 전투에서 로즈호그 왕국 남부 사령부가 골치를 썩던 상급 마수 한 쌍이 처리되어, 로즈호그 왕국 사령부가 각별한 사의(謝儀)를 표해왔나이다.”
다른 곳도 아니고 남부 전선을 총괄하는 사령부가 있는 곳이다. 충분한 기사 전력과 마법사 전력이 없다면 그게 도리어 이상한 일이었다.
그런 사령부에서조차 처리하지 못해 애를 먹었다는 상급 마수이니, 그 흉폭함과 교활함이 얼마나 대단할지는 직접 마수를 보지 못한 이들도 알 수 있었다.
“들리는 풍문에 의하면 이번에 처리된 상급 마수 한 쌍에게 로즈호그 왕국의 상급 기사 하나와 선임 기사 셋, 평기사 열여섯이 희생되었었다 하옵나이다.”
아마도 제 딴에는 자랑스러워서 한 말일 것이다. 하지만 눈치 없는 전령이 쓸데없이 덧붙인 한마디에 대전의 분위기는 한층 더 가라앉았다.
하기야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전선의 외곽을 끼고 돌며 수도 없이 전투를 이어가는 전승공은 많은 이들에게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었지만, 눈앞의 섭정에게는 하나뿐인 부군이었다. 그런 전승공이 로즈호그 왕국의 초인들도 애를 먹던 마수와 드잡이질을 했다는데 그녀의 기분이 좋을 턱이 없었다.
“더 할 말은 없는가.”
뭣도 모르는 전령이 뭔가 더 말을 늘어놓으려고 했지만 곁에 있는 동료에 의해 조용히 제지되었다.
오필리아는 전령들이 더 전할 보고가 없는 듯하자 무표정한 얼굴로 손을 휘저었다.
철컥.
이내 전령들이 사라지고 홀로 남은 오필리아가 가만히 왕좌의 팔걸이를 꽉 움켜잡았다.
“아주 천지사방의 적이란 적은 혼자 다 처리할 기세구나.”
보고는 오늘이 처음이 아니었다. 그녀의 남편은 돌아오기가 무섭게 화려한 전공을 잇따라 세웠고, 도움을 받은 왕국들이 수십 통에 가까운 마법 전문을 보내왔다.
그때마다 오필리아는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이번에는 또 어떤 흉폭한 마수와 싸운 것일까. 혹시라도 다치지는 않았을까. 무리한 이동에 타지에서 병이라도 얻는 것은 아닐까.
죽은 줄 알았던 부군의 귀환을 반길 틈도 없이 그녀의 속이 문드러졌다.
그런 그녀의 속을 아예 신경도 쓰지 않는 것인지, 김선혁은 단 하나의 짤막한 전문만을 보내왔을 뿐이었다.
[왕실의 우환을 걷어낼 물건을 입수. 조만간 귀환하겠음.]
모두가 죽었다 믿었을 정도로 큰 위험을 겪어놓고는 일언반구 자신이 겪은 일에 대한 이야기도 하지 않는 이 배우자를 야속하다 해야 할지, 믿음직스럽다 해야 할지 오필리아는 판단이 서지 않았다.
어쩌면 이 단순한 사내는 왕실의 우환을 해결할 물건을 무사히 입수했다는 사실에 자신이 기뻐할 거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게 그녀는 몹시도 못마땅했다.
잠시 볼일을 보고 돌아오겠다던 그가 왕국을 떠난 지도 어언 1년이 넘었다. 왕국의 당당한 섭정으로서 표를 내지는 않았지만, 바로 얼마 전 그가 죽었다는 소문까지 듣고 나니 전처럼 마음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왕실의 전담 마법사에게 지시해 언제 또 어디서 무슨 위험천만한 일을 벌일지 모를 남편에게 전문을 보냈다.
“전승공의 이동 경로를 예측하여 전문을 보내도록 하라.”
대기하고 있던 시종장이 종이를 꺼내 들고는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그만하면 충분히 했으니, 이제 돌아오라. 거부는 받지 않을 것이다.”
그 단호한 어투에 전문을 받아적던 시종장의 펜이 흠칫 멈추었다가 다시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