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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 화려한 귀환(2)
박준민은 곧장 지휘부로 향했다.
“기지로 복귀했다는 말은 들었지만 그래도 이리 무사히 돌아온 걸 보니 마음이 한결 놓이는구만.”
교국과 연합의 책임자들로 이루어진 지휘부의 인사들이 그를 발견하고는 반가운 얼굴을 해 보였다.
“무리를 이끄는 마수가 상급 마수들 중에서도 꽤나 까다로운 놈이었다고 들었는데, 마수뿐 아니라 마물들까지 전부 일망타진했다더군. 참으로 애썼네.”
마왕과의 전쟁이 벌어진 지도 이제 어언 1년이 되어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마수와 마물로 뭉뚱그려 부르던 호칭도 지금에 와서는 상중하 세 단계로 구별하여 그 위협의 정도와 대응에 필요한 병력을 보다 효율적으로 관리하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상급 마수는 최소한 상급 기사가 둘 이상 포함된 정예 기사단 또는 공격 마법에 능숙한 마법사들로 이루어진 마법사단이 아니고서는 처리가 불가능한 존재로, 강대한 힘뿐 아니라 그 교활하고 사악한 잔꾀 때문에 나타났다 하면 전선에 비상이 걸리는 놈들이었다.
만약 운이 좋지 않아 기사단이나 마법사단의 지원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이라면 그 어떤 경우에도 교전을 피해야 하는 끔찍한 괴물이었다.
당연하게도 전선에 배치된 기사와 마법사들은 최우선적으로 상급 마수를 처리해왔다.
그런데 그런 마수가 전선의 보병 5개 중대를 몰살시키고 경계를 넘고 말았다.
자칫하면 전선을 떠받들고 있던 후방이 어지러워질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상황, 그때 나선 것이 용사였다.
그리고 용사는 훌륭하게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고 돌아왔다.
넓게 펼쳐진 전선을 모조리 지켜내야 한다는 중압감에 짓눌리고 있던 지휘부로서는 무리하게 병력을 빼내는 일 없이 최상의 결과를 이끌어낸 것이다.
“꽤 애를 먹기는 했지만, 마수를 처리하고 나니 마물들의 처리는 그다지 어렵지 않았습니다.”
용사의 담백한 말이 건방지게 들리지 않는 건 이러한 배경 때문이었으리라.
“그나저나 큰일이군. 날이 갈수록 마물들과 마수들이 영악해지고 있으니.”
하지만 용사가 후방에 침투한 마수와 마물들을 정리했다고 해서 전선의 상황이 눈에 띄게 호전된 것은 아니었다. 단지 하나의 위협을 제거했을 뿐, 당장 지원을 요청하는 요새와 야전 부대들이 천지 사방에 널려 있었다.
“그래도 이번에 전승공께서 돌아오셔서 조금이지만 상황이 나아졌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군. 언제 무너질까 조마조마했던 북부의 전선들이 전승공과 북방의 기병들 덕에 겨우 숨을 돌릴 수 있었다네.”
그렇지 않아도 김선혁에 대한 소식이 궁금했던 박준민이 반색을 하고 물었다.
“그렇지 않아도 형님, 아니 전승공께서 귀환했다는 말은 들었습니다.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오! 그러고 보니 전승공께서는 사사로이는 사도의 의형제요, 공적으로는 사도의 후견인이었다는 걸 잊고 있었군.”
전승공과 용사의 관계는 전선에서도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했다. 판테이아 기지의 실질적인 사령관이라 할 수 있는 신전 기사단의 단장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인지, 궁금해하고 있을 박준민을 위해 꽤나 자세하게 소식을 알려주었다.
“전승공께서는 무사하셨지. 아니, 그저 무사한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모습을 감추기 이전보다 더 강해졌다 하네.”
“더 말입니까?”
그렇지 않아도 괴물 같던 인간이 더욱 강해졌다는 말에 박준민이 질린 얼굴을 해 보였다.
“전승공께서 손을 휘저으니 흙으로 빗은 거대한 성채가 생겼다고도 하고, 거인이 나타나 마물들을 짓밟았다고도 하더군. 허무맹랑한 소문이지만 그만큼 전승공께서 큰 활약을 보였다는 의미라 생각하네.”
노 성기사가 실소하며 말했다. 스스로가 생각해도 소문이 참으로 얼토당토않다 여긴 모양이다.
“원래 이런 종류의 소문은 부풀려지기 마련. 하지만 소문의 반의반만 맞다고 해도 전승공께서 그간 많은 성과를 얻었다고 할 수 있을 테지.”
노 성기사가 전승공이 돌아온 직후부터 세운 전공을 늘어놓았다.
“상급 마수 넷, 중급 마수 열둘, 하급 마수 스물여덟. 과장된 소문을 제외하고서라도 확인된 전승공의 전공만 해도 이 정도네.”
“그건 아무리 형님이라고 해도 좀….”
이제는 김선혁이 무슨 짓을 벌였다고 해도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다 자부하던 박준민마저도 믿지 못할 엄청난 전공이었다.
“그게 다가 아니라네.”
그게 끝이 아니란다.
“사만의 기병을 이끌며 격파한 마물들의 수가 어림잡아도 물경 이십만 이상, 그것도 하급 언데드 따위가 아닌 진짜 마물들의 수만 헤아렸다 하네.”
바로 얼마 전에 홀로 만오천의 마물들과 중급 마수 하나를 격퇴한 박준민이다. 하지만 그가 처리한 마물들 중 대다수는 전장에서 전사하여 신체가 훼손된 언데드가 팔 할이었다. 그리고 언데드는 교국의 어지간한 신전 기사나 사제라면 홀로 일천 정도는 정화가 가능한 하급 중에서도 하급에 속하는 마물이었다.
그런데 김선혁은 그런 하급 마물이 아닌 마기를 원천으로 하는 진짜 마물들만 이십만 이상 격퇴했다고 한다.
이쯤 되면 사람이 아니라 전신(戰神)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위업이었다.
“대체 저 너머에서 무슨 일이 있었길래….”
노 성기사의 말대로 소문의 반의반만 믿어도 김선혁이 엄청나게 성장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우리도 그게 궁금하던 참이지. 하지만 전승공께서는 자세한 사정을 알려주지 않으셨고, 전투가 끝난 직후 최소한의 보급만을 받아 바로 다음 격전지로 이동했다니 전해진 이야기가 전혀 없다네.”
“하기야 형님이라면 그러고도 남을 분이긴 하죠. 원체 가만히 있지를 못하는 양반이니.”
“그 말대로일세. 전승공께서 대륙 최북단에서 모습을 드러냈다는 소문이 처음으로 들려온 게 바로 일주일 전, 그런데 가장 최근에 들려온 소문에 의하면 전승공과 북방 기병들이 벌써 대륙의 절반을 종단했다고 하더군.”
실제로 일주일 만에 대륙의 절반을 주파했다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만큼 김선혁과 기병들의 이동 속도가 빨라 소문이 늦게 전해졌을 뿐이었다.
대체 얼마나 빨리 이동하고 있기에 소문조차 뒤를 따르지 못하는 것일까.
박준민은 왠지 모르게 허탈한 감정마저 느낄 지경이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소문이 있네. 전승공께서 애용하던 붉은 와이번은 보이지 않는다더군.”
노 성기사는 와이번과 함께 하지 않는 용기병에 대해 떠도는 항간의 소문도 전부 알고 있었다.
“혹자는 그게 서쪽 땅에서 있었던 마왕과의 전투에서 붉은 와이번이 희생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말을 타지 못하는 자는 사내로 취급하지 않는 북방 유목민들과 어울리기 위해 일부러 기마를 고집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도 더러 있는 모양일세.”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였다. 마왕과의 전투는 용이 없는 용기병에게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아룡들 중 하나를 잃었다고 해도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호사가들 중에 입 가벼운 자들은 전승공이 이룩한 모든 것들이 아룡들 때문이라고 입방아를 찍어댔지. 이번에는 또 뭐라고 입을 놀려댈지 벌써부터 궁금해지는구만.”
아룡을 잃은 것은 뼈아픈 손실이나, 전승공 본인의 저력이 여전히 건재하니 노 성기사는 다행이라 말했다.
“어쨌건 간에 전승공 덕분에 연맹의 전황이 다소 숨통이 트인 건 사실이야. 호기를 놓치지 않기 위해 연맹의 수뇌부들이 따로 방법을 강구 중이라 하고 있으니, 뭐가 됐든 조만간 변화가 생기겠지.”
대강의 상황을 전해들은 박준민이 적당히 자리를 뜨려는데, 노 성기사가 그를 붙잡았다.
“아 참, 혹시 사도는 평소에 전승공과 북방의 유목민들의 관계에 대해 알고 있는 게 있는가?”
“전혀 들은 적이 없습니다.”
박준민이 곰곰이 생각해보았지만 딱히 짐작이 생각나는 건 없었다.
“그래? 참 이상해.”
“뭐가 말입니까?”
그의 대답을 들은 노 성기사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초원에서 나고 자란 이들을 제외하고는 사람 취급도 안하던 북방의 유목민들이 전승공에게만큼은 마치 그 태도를 달리했다는 소문이 있네. 당시에 자리했던 이들이 보기에 전승공과 북방 기병들은 마치 형제처럼 그 관계가 남달라 보였다 말했다니, 그냥 뜬소문은 아니겠지.”
“글쎄요. 제가 알기로 형님께서는 북방에 가본 적이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온 대륙이 좁다고 싸돌아다니던 용기병도 북방과는 연이 없었으니, 더욱더 이상한 일이었다.
“대체 무슨 또 대단한 수를 썼기에 그간 수차례 참전을 권유해도 콧방귀도 끼지 않던 북방의 유목민들이 이리 대대적으로 나선 건지. 도통 짐작이 가지 않는구먼.”
아무리 궁리해보아도 나오지 않는 해답, 결국 당사자가 도착할 때까지 의문은 잠시 접어두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그토록이나 다시 만나기를 바라마지 않는 김선혁은 그 시각 그들의 예상보다 훨씬 더 가까운 곳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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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만의 기병이 일제히 전장을 달리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 그 자체였다. 하물며 그렇게 내달리는 기병들이 쉽게 볼 수 없는 북방의 유목민들로 이루어진 기병들이었음에야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두터운 철갑으로 중무장한 왕국 중갑 기병들의 전통적이고 화려한 복색에 비교하면 북방 유목민 출신 기병들의 무장 상태는 거지꼴이나 다름이 없었다.
기병의 전유물이라 할 수 있는 특수 제작된 마상창도 없었다. 그저 2미터 남짓한 일반 창병들이나 쓸 법한 조잡한 창을 들고 있었을 뿐이었다.
방어구는 더욱 가관이었다.
누더기나 다름없는 가죽 갑옷은 상반신이나 겨우 감쌀 뿐이었고, 투구도 없이 푹 눌러쓴 털 달린 모자는 그마저도 통일되지 않아 제각각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그들을 초라하게 보이게 만든 것은 그들이 탄 말이었다.
일반 전마의 삼 분의 이에도 미치지 못하는 비루한 체구에 빛깔도 고르지 않은 잡털이 잔뜩 섞여 있었다. 왕국의 자부심 강한 기병들이 보았다면 필시 짐말로도 쓰지 못할 하급 품종을 타고 전장에 나왔다며 비웃었을 것이다.
그만큼 북방의 말들은 그 생김새가 볼품이 없었다.
하지만 그 작고 비루한 생김새의 말이야말로 북방의 유목민들이 애지중지하는 애마이자, 북방 초원을 내달리는 악명 높은 기병들이 지닌 힘의 원천이었다.
그리고 말들은 수만의 마물들을 향해 거침없이 돌격을 함으로서 그러한 사실을 증명해 보였다.
크아아아악!
엄격한 훈련을 거쳐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전마들조차도 마주했다 하면 똥오줌을 싸며 주저앉고야 마는 마물의 포효가 온 천지를 울려댔다.
하지만 북방 기병들이 탄 전마는 겁을 집어먹지도 주저앉지도 않았다. 마치 마물들의 흉성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 그저 기수의 몸짓에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기수들이 슬쩍 몸을 틀면 말이 방향을 틀었다. 기수가 고삐를 잡으면 속도가 빨라졌다가 다시 느려졌다.
그 어디에도 군더더기가 없었다. 초원의 말들은 놀라울 정도로 민감했고, 끈덕졌다.
하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따로 있었다.
초원의 기병들은 기이할 정도로 말이 없었다. 흔한 기합성은커녕 부대의 기동을 지시하는 구령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전장에는 오직 내달리는 말발굽소리와 마물들의 포효소리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그런 침묵이 깨어질 때는 북방의 기병들이 마치 애들 장난감 같은 짧은 활을 들어 올렸을 때뿐이었다.
삐이이이이이이익!
일반적인 화살의 파공성과는 달랐다. 마치 수만 개의 피리를 동시에 부는 듯한 기괴한 소리가 천지 사방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렇게 피리 소리가 울려퍼졌다 싶으면 여지없이 수천의 마물들이 비명을 지르며 픽픽 나자빠졌다.
놀라운 일이었다.
단련된 정병들이 힘주어 내지른 창도 쉬이 꿰뚫지 못했던 마물들의 거죽이 마치 물 먹은 종잇장처럼 찢겨져 나가고 꿰뚫렸다.
크아아아!
언제나 사납게 달려드는 쪽이었던 마물들이 내몰리고 내몰려 한데 뭉쳐 우왕좌왕할 뿐 이 생소한 적들에게 어찌 대응해야 할지 도통 감을 잡지 못했다.
무리를 이끄는 마수가 있다면 이렇게까지 무력하게 당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을 이끄는 마수는 진즉에 죽어 나자빠진 후였다.
단출한 복장을 한 기병들 사이에서도 유달리 도드라지는 중갑을 걸친 기병 하나가 개전과 동시에 쏜살같이 달려와 마수의 심장에 창을 쑤셔 박은 것이다.
그리고 마수를 일격에 즉사시킨 사내는 기병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다 쓰러져가는 목책의 앞에 신장(神將)처럼 버티고 선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마치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붕괴.”
그렇게 전장을 노려보고 있던 사내가 어느 순간이 되자 나직하게 한마디를 읊조리며 대지에 나무창을 꽂아 넣었다.
콰르르르르.
그 순간 북방의 기병들에게 몰려 발 디딜 틈도 없이 한데 뭉쳐 있던 마물들의 땅 밑이 허물어졌다.
마물들이 비명을 지르며 흐물흐물 변해버린 땅을 헤치고 나오려고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대지는 그럴수록 더욱 집요하게 마물들의 발을 잡아끌었고, 결국 얼마 가지 않아 마물들은 모조리 거대한 구덩이에 파묻히고 말았다.
그리고 대지는 제 입으로 기어 들어온 마물들을 단번에 집어삼켰다.
“이게 무슨….”
마물들의 대대적인 습격으로 와해 직전이었던 보병연대의 연대장은 이 믿어지지 않는 광경을 보고는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을 뿐이었다.
“우, 우리가 이겼어!”
“살았다고!”
죽음 직전에 겨우 되살아난 보병들이 질러대는 함성에 연대장도 자신이 살아남았음을 깨닫고 환호했다.
“이겼다! 승리했다!”
환호는 이내 이 기적적인 승리의 주역에 대한 함성이 되었다.
“전승공 만세!”
“드라흔 만세!”
대지에 기둥처럼 우뚝 선 창을 잡고 있는 사내, 김선혁이 보병들의 환호에 화답하듯 손을 들어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