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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 푸어-218화 (218/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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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9.그가 뿌린 씨앗 (3)

“음….”

김선혁은 잘 떨어지지 않는 눈꺼풀을 억지로 떼어냈다.

껌벅. 껌벅.

의식은 돌아왔는데, 좀처럼 머리가 돌아가지를 않았다. 눈앞에 끝도 없이 펼쳐진 푸른 하늘을 보고 있자니 조금씩 돌아오던 현실감이 다시 저 멀리 날아가고 말았다.

하늘 한 번 더럽게 파랗네.

새하얀 구름도, 푸른 하늘도 오늘따라 유달리 가까운 곳에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주인님!”

그렇게 한참을 멍하니 있자니 친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아티야. 내가 지금 좀 정신이 없다. 그러니까 잠깐만 시간을 좀 줄래?”

느긋하다 못해 태평스럽기까지 한 대꾸였다.

“음?”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을 하고 보니 뭔가가 이상했다. 하지만 그게 뭔지 도통 생각이 나지를 않았다.

“아티야?”

뒤늦게 그가 위화감의 정체를 알아차리고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어머니 나무에게 전대 정령왕의 유산을 물려받아 정령계로 사라졌던 아티야다. 그런 그녀가 왜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네가 왜 지금 여기에….”

이유를 묻던 김선혁은 채 질문조차 끝내지 못하고 입을 쩍 벌렸다.

특유의 온화하고 부드러운 인상은 그대로였지만, 이제는 정령사 안유정과 여기사 아샤 트레일을 닮은 구석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천사.

아티야의 모습을 보았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단어였다.

새하얀 날개를 우아하게 흔들며 자신을 바라보는 아름다운 정령은 도무지 이 세상의 존재 같지 않았다.

“아….”

넋 놓고 그 천사와도 같은 자태를 보고 있자니 아티야가 성큼 다가와 그를 끌어안았다.

“보고 싶었어요. 나의 주인님.”

온기마저 느껴지는 그녀의 육신은 어쩐지 이전과는 그 감각이 남달랐다. 마치 그녀가 인간이 되어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단다. 그들이 왕이 되기에 충분한 그릇이라면 그들 중 하나가 왕으로 거듭날 테고, 그게 아니라면 아예 새로운 존재가 태어나 왕이 되겠지. 하지만 설령 그들이 왕의 그릇이 아니라고 해도 어떤 식으로든 그들은 변하게 될 거야. 그들은 천 년 만에 되찾은 근원을 가장 먼저 접한 최초의 정령들이니까.’

어머니 나무는 당시에도 이런 상황이 올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단지 아티야의 변화가 어디까지일지를 예측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아티야. 너 혹시….”

김선혁이 채 질문을 끝내기도 전에 아티야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저는 정령왕이 아니에요.”

조금도 실망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그런 마음은 잠시뿐이었다.

정령왕이 되지 못했으면 어떤가.

그녀가 과거에 보여주었던 헌신과 봉사는 거짓이 아니었고, 그는 단지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는 부드럽게 웃으며 자신을 끌어안은 아티야를 마주 안아주었다.

“잘 돌아왔어. 아티야.”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 한 친우이자 전장에서는 더없이 믿음직한 우군, 친애해 마지않는 바람의 정령이 마침내 돌아온 것이다.

“주인님.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어요.”

그렇게 말한 아티야가 살짝 떨어지며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저와 다시 계약해주시겠어요?”

아무래도 정령왕의 근원에 접촉하며 기존 계약이 효력을 잃은 모양이다.

“기꺼이.”

아티야의 말에 김선혁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아티야가 환하게 웃으며 손을 뻗어 그의 두 뺨을 잡았다. 그리고는 부드럽게 이마에 입을 맞췄다.

- 고대 바람의 정령(Harpia) 아티야와 계약을 맺었습니다.

- 전대 정령왕의 유산에 접촉하여 그 어떤 바람의 정령보다 근원에 가까워진 아티야는 특별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 그녀는 현존하는 바람의 정령들을 모두 통틀어 가장 유력한 정령왕 후보입니다.

메시지는 그가 알지 못하던 사실까지 알려주었고, 놀랍게도 아티야의 변화는 현재 진행형이었다.

- 하지만 온전히 전대 정령왕의 유산을 상속받기 전까지 그녀는 고대 정령의 신분에 불과합니다. 그녀가 지닌 힘은 고대 정령이 지닌 성질과 한계를 크게 뛰어넘을 수 없습니다.

그녀는 정령왕이 아니라고 단언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현재에 해당하는 이야기였을 뿐이다. 향후 그녀가 정령왕으로 거듭날 가능성은 충분했다.

- 아티야가 이 세상에 머무는 시간만큼 그녀가 정령왕이 될 가능성은 멀어집니다. 그녀가 정령계를 떠나 있는 시간이 길어질 경우, 전대 정령왕의 근원은 그녀를 대신할 또 다른 후보를 찾을지도 모릅니다.

- 아티야가 전대 정령왕의 근원을 온전히 흡수하려면 반드시 정령계에 머물러야 합니다.

연이어 들려온 메시지를 들은 김선혁은 왜 그녀가 정령왕이 되지 못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바로 자신 때문이었다.

이 헌신적이고 충성스러운 정령이 주인의 위기를 모른 척할 수 있었을 리가 없었다. 분명 주인이 걱정되어 정령왕이 될 기회마저 걷어차고 정령계를 뛰쳐나온 게 분명했다.

“아티야….”

지금 이 순간에도 조금씩 멀어져 가고 있을 정령왕의 자리를 생각하니 절로 한탄이 나왔다.

“그런 건 제게 조금도 중요하지 않아요.”

하지만 정작 아티야는 이를 아까워한다거나 조급해하는 기색이 조금도 없었다.

“저에게는 주인님과 함께 하는 이 시간이 무엇보다 소중하답니다.”

가장 지고한 존재가 될 기회조차 마다한 바보 같은 정령은 뭐가 그리도 좋은지 배시시 웃기까지 했다.

“후회하지 않아? 지금이라도 돌아가도 돼.”

이제는 자신이 멀쩡한 것도 보았으니 다시 정령계로 돌아가도 괜찮지 않냐고 물었더니 그녀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싫어요. 저는 돌아가지 않을 거예요.”

한 번도 본 적 없는 완강한 거부의 태도, 그로서는 도무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정령왕은 그냥 정령과 달라요.”

그런 그에게 아티야가 말했다.

“정령왕은 누구와도 계약할 수 없는 홀로 오롯한 존재인걸요.”

“아….”

그제야 아티야가 보이는 거부반응의 이유를 깨달은 김선혁이 다시 한 번 탄식했다.

**

한참이나 아티야를 설득해보았지만 설득은 통하지 않았다. 평소 온순하기만 하던 그녀의 어디에 그런 고집이 숨어 있었는지 놀라울 따름이었다.

“알았어. 그 문제는 천천히 생각해보기로 하지.”

아티야의 진로(?)도 진로였지만, 지금은 그보다 중요한 게 있었다.

“대체 여긴 또 어디야?”

보이는 것이라고는 푸른 하늘과 하얀 구름뿐, 도대체 여기가 어디인지 또 자신이 왜 여기에 있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크르렁. 크르렁.

주인이 깨어났음에도 여전히 일어날 생각을 않는 레드번을 깨워 물어볼 수도 없었다. 어차피 물어보아도 말도 못하는 아룡이 대답을 해줄 리가 만무했다.

“상태가 좋지 않은 주인님을 레드번이 이곳까지 옮겨왔어요.”

다행스럽게도 아티야가 그 해답을 알려주었다. 아무래도 그녀가 곁에 머물기 시작한 게 김선혁의 생각보다 훨씬 더 오래되었던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의식을 잃기 직전에 레드번을 불렀던 기억이 있었다. 당시에는 레드번이 자신을 퀘이샤들에게 데려다주기를 바랐는데, 아무래도 이 머리 나쁜 아룡이 멋대로 주인을 엉뚱한 곳에 옮긴 게 분명했다.

“여긴 대륙의 북쪽이에요. 아마 레드번이 과거 머물던 곳인 거 같아요.”

그녀의 말마따나 칼로 깎아 자른 듯한 산봉우리에 절묘하게 만들어진 안식처는 영락없는 와이번의 둥지였다.

하기야 거대한 와이번이 아니고서야 이 세상에 또 어떤 새가 있어 이렇게 커다란 둥지를 만들어두었겠는가.

“아마 레드번이 생각했던 가장 안전한 곳은 자신이 머물던 둥지였나 봐요.”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머리 나쁜 레드번이라면 충분히 할 만한 발상이었다. 자신이 이 근방에서 트리스탄 패거리에게 포획을 당했었다는 것은 까맣게 잊었다는 것만 빼고는 레드번 치고는 꽤나 머리를 썼다고 할 수 있었다.

“트리스탄이 레드번을 북방에서 잡아왔다고 했었지.”

레드번의 둥지가 북방이라는 것만 알았지, 그게 정확하게 대륙의 어디쯤에 위치했는지 들은 바가 전혀 없었다.

지금으로서는 부디 이곳이 서부와 너무 멀리 떨어진 곳이 아니기를 바랄 뿐이었다.

“나지마하고 사람들은 어떻게 됐으려나.”

마왕을 쫓아 보냈으니 퀘이샤들이 어떻게든 활로를 찾았을 것이다. 단지 얼마나 많은 피난민들이 살아남았을지가 걱정이었다.

"당장 돌아가 봐야겠어."

몸을 일으킨 김선혁은 먼저 몸 상태부터 확인해보았다.

오랜 시간 의식을 잃고 있었던 탓에 다소 굳어버리긴 했지만 몸 상태는 나쁘지 않았다.

감당할 수 없는 힘을 끌어다 쓴 대가로 피를 한 바가지나 쏟아냈던 것에 비하면 놀라울 정도로 몸이 회복된 것이다.

"레벨도 엄청 올랐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32레벨에 불과했던 레벨이 무려 39에 육박해 있었다. 짧은 시간 만에 이룬 성장 치고는 실로 놀라운 성장이라고 할 수 있었다.

마왕과 단 한 차례 격돌한 것만으로도 9레벨에 가까운 성장을 이룬 것이다.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그가 상대했던 마왕은 홀로 서부를 멸망시킨 괴물이었다. 수많은 절망과 죽음을 먹고 성장하여 도대체 그 레벨이 몇인지조차 가늠할 수 없는 진짜 강자, 그런 마왕을 용도 없이 격퇴했다는 정말이지 대단한 일이었다.

게다가 그가 상대해야 했던 것은 마왕 혼자만이 아니었다. 마왕은 수만의 마물과 수십의 마수들을 거느리고 나타났고, 그는 그들을 모조리 땅속에 파묻어버렸다.

이쯤 되면 용기사가 아니라 그보다 더 성장이 더딘 병과라고 해도 폭발적인 성장을 이루지 않는 게 도리어 이상한 일이었다.

“39라….”

십의 배수에 도달할 때마다 전직을 했으니, 만약 5차 전직이 있다면 머지않았을 것이다.

“이럴 때가 아니지.”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김선혁이 세차게 고개를 털고는 레드번을 깨웠다.

“레드번!”

하지만 몇 번을 불러 보아도 깊게 잠이 든 아룡은 깨어나지 않았다.

“제가 돌아왔을 때도 레드번은 날고 있었고, 제가 돌아온 이후로도 레드번은 한 번도 날갯짓을 멈추지 않았어요. 적어도 이곳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말이에요.”

어쩐지 잠귀 밝은 레드번이 유달리 깊게 잠이 들었다 싶더니, 이곳까지 오는 여정이 마냥 쉬웠던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하려나.”

어차피 시간이 필요한 것은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몸 상태가 생각보다 나쁘지 않다 뿐이지, 그게 당장 최상의 컨디션이라는 뜻은 아니었다.

온몸의 혈관이 찢겨지고 뼈가 무너져 내리는 듯한 통증은 사라졌지만, 그 후유증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지금 같아서는 용인화는커녕 제대로 스킬이나 쓸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내가 잠시 미쳤었네.”

이런 상태로 적지나 다름없는 서부로 향하려 했던 스스로가 어이없을 지경이었다.

“나도 조금 더 쉬어야겠다.”

“걱정 말고 쉬세요. 제가 주인님과 레드번을 지킬게요.”

주먹을 꽉 쥐고 다부지게 말하는 아티야의 모습이 믿음직스러웠다.

“그럼 부탁할게.”

눈을 감으니 금세 수마가 쏟아졌다.

**

다행스럽게도 김선혁이 몸을 추스를 즈음하여 레드번 역시 잠에서 깨어났다.

빼애애애액!

주인이 반가웠던 것인지 레드번이 좁은 둥지에서 종종 뛰어대며 시끄럽게 울어댔다.

“고생했다. 네 덕분에 살았어.”

빽! 빼애액!

커다란 덩치에 비하면 앙증맞기까지 한 앞발로 제 가슴을 두들겨 보이는 레드번의 모습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여기가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돌아가야지.”

휴식은 끝이 났다. 이제는 다시 싸워야 할 때였다.

빼애애애액.

김선혁의 말에 레드번이 길게 울부짖으며 날개를 펼쳐 들었다. 그리고는 힘차게 날갯짓을 시작했다.

“가자. 우리가 있어야 할 곳으로.”

장장 한 달 동안이나 행방불명되었던 용기사가 다시 한 번 서부로 향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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