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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 푸어-215화 (215/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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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6.마지막 숨결

“내가 왜 하필이면 여기서 널 기다리고 있었을까.”

한때는 이름 모를 들풀과 꽃으로 가득 차 있었을 평원이 지금에 와서는 마기에 오염되어 검게 썩고 말았다. 풀 한 포기 남지 않은 대지 어디를 보아도 살아있는 것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검게 썩어 악취만 남은 마왕의 권역이라고 해서 그 땅의 수명이 완전히 다한 것은 아니었다.

비록 검게 썩은 흙으로 덮여있었을지언정 그보다 깊은 곳, 땅 밑 어딘가에는 이 끔찍한 재앙에도 소멸되지 않고 살아남은 끈질기고 생명력 강한 정기가 남아 있었다.

“그리고 나는 왜 한 발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을까.”

김선혁이 썩은 대지를 장난스럽게 발로 다지며 마왕을 올려다보았다.

“이제 와서 허세 떨어봐야 네놈이 죽는다는 건 변하지 않는다!”

마왕은 그의 말에 관심조차 없다는 듯이 사납게 소리치며 어둠을 토해냈다.

콰아아아아.

마치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는 어둠을 보면서도 그는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나도 네가 관심이 있을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어.”

잠시 어둠에 밀려났던 용의 기운이 또다시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이런 세세한 걸 신경 쓰기에는 넌 너무 강하거든.”

강대한 어둠은 살아있는 존재를 말살시키는 가장 치명적인 독이었으며, 끔찍한 재앙이었다.

“그리고 그 강함이야말로 오늘 이 자리에서 네가 패배하는 이유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는지 몇 번이고 어둠을 토해내며 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마왕을 보며 김선혁이 차갑게 말했다.

“넌 내가 보기에 한 번도 제대로 된 싸움을 해보지 못한 애송이야.”

서부를 집어삼킨 마왕이 변변찮은 실전 경험도 없다는 그의 이야기는 말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의 말에 확신이 있어 보였다.

“개소리! 노르딕의 가장 용맹한 기사도! 가장 강대한 마법사도 전부 이 손으로….”

“맞아. 네가 다 죽였지.”

“그런데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

마왕이 고집스럽게 마기를 퍼부어대며 사납게 소리 쳤다.

“그런데 말이야.”

어둠의 기세가 더욱 커질수록 김선혁의 목소리는 더욱 차분해졌다.

“마기를 퍼붓고 죽은 자를 일으켜 전장에 밀어 넣는 게 싸움의 전부는 아니잖아?”

마기는 분명 강력한 무기였다. 강력한 기사와 마법사들마저 본신의 실력을 발휘할 수 없도록 정신을 오염시키고 육신을 병들게 만드는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독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통하는 상대에게나 해당되는 이야기였다.

김선혁은 용의 가호를 받는 용기사, 아무리 강력한 어둠이라고 해도 그의 정신과 육신을 침범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안전한 곳에 물러나서 마기만 퍼부어대는 게 전부는 아니라는 말이다. 이 겁 많은 새끼야.”

“뭐?”

화가 난 마왕이 뭐라 말을 하려고 했지만, 김선혁은 더 이상 대화를 나눌 생각이 없었다.

“뭐긴 뭐야. 이쪽은 준비 끝났다는 뜻이지.”

대지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저 미약한 떨림에 불과했던 것이 시간이 흐르자 세상 전체를 무너트릴 듯 강력한 지진이 되었다.

“넌 처음부터 주절주절 떠들 게 아니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나를 죽였어야 했어.”

흔들리는 대지 속에서도 굳건하게 버티고 선 김선혁이 창을 세워 마왕을 겨냥했다.

두근두근.

마구잡이로 뛰어대는 심장 소리는 그의 것이 아니었다.

지맥(地脈), 땅의 기운이 흐르는 대지의 혈관은 아직 완전히 메마르지 않았다.

“붕괴(崩壞).”

끔찍한 재앙 속에서도 완전히 소멸되지 않고 끈질기게 남아있던 서부의 마지막 정기가 그의 주문과 함께 폭발했다.

콰아아아아.

땅이 뒤집히고, 온 사방에서 시뻘건 불기둥이 솟구쳐 올랐다.

하늘을 뒤덮고 있던 강대한 어둠은 수백 가닥의 불기둥에 갈기갈기 찢겨져 나갔고, 수만에 달하는 마왕의 군대는 분노한 대지에게 집어삼켜져 흔적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라져 버렸다.

그 끔찍한 붕괴가 끝이 났을 때 남은 것이라고는 거대한 짐승이 할퀴고 지나간 것처럼 파이고 들쳐져 속살을 드러낸 대지와 펄펄 끓어오르는 대지의 핏물뿐이었다.

마지막 정기를 소모한 대지는 그 맥마저 끊어진 채 완전한 종말을 맞이하고야 말았다.

“컥!”

그렇게 지옥으로 변해버린 땅에 홀로 우뚝 서 있던 김선혁이 왈칵 피를 토해냈다.

대체 어디가 어떻게 상한 것인지 새빨간 혈인(血人)이 된 그의 모습 그 어디에도 만마의 군주에게 추상과 같이 호통치던 용인의 기상은 보이지 않았다.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처럼 위태로운 모습, 하기야 무리도 아니었다.

자신의 육신을 통로로 이 일대에 남아있는 땅의 기운을 모조리 끌어다 썼다.

정령왕이 남긴 창과 고대 정령이 깃든 갑주가 상당부분 그의 부담을 덜어주었다고는 하나, 아직은 스스로가 완벽하게 통제할 수 없는 힘을 사용한 대가는 그 정도로 완전히 상쇄되지 않았다.

끄응. 두 번은 못 할 짓이야.

마르지 않는 정기 덕에 늘 활기가 넘치던 육신이 손 하나 까딱하기 힘들 정도로 지쳐 버렸다. 강제로 용인화가 풀리는 바람에 온몸의 뼈마디란 뼈마디는 모조리 부서져 나가는 듯 고통이 극심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누다르가 복구해냈던 정령의 갑옷은 이제 오른손을 겨우 감싸고 있었을 뿐이었고, 어머니 나무가 남긴 생목의 창은 가뭄에 시달린 노목(老木)처럼 푸석푸석하게 변해 있었다.

아마도 저 두 물건이 원래의 모습을 되찾으려면 꽤나 많은 기운이 필요할 것이다.

그래도 모험은 성공했다. 비록 스스로도 심대한 타격을 입었다고 하나 수만의 마물과 수십의 마수를 한꺼번에 쓸어버렸으니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었다.

마왕까지 처리하려고 했던 건 너무 욕심이었나….

하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마왕을 처리하는 데는 실패하고 말았다.

비록 사방에 풀어냈던 검은 마기를 온전히 회수하지는 못해 형편없이 쪼그라든 모습이었지만, 마왕은 실질적으로 큰 타격을 입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왕은 지금 이 자리에 없었다. 쫓겨 갔다기보다는 스스로 물러난 듯한 모양새였다.

그 따위 찌질한 놈한테 서부가 무너졌다니….

마기가 통하지 않는 상대의 반격에 지레 겁을 먹고 물러난 마왕은 그가 상상했던 거악과는 달라도 한참은 달랐다.

단지 마왕이라는 병과를 타고 났고, 시류에 떠밀려 혼돈의 파편마저 손에 얻었을 뿐인 소인배, 마왕 박상진은 소심하고 겁 많은 이기주의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이래서야 제 동료를 구해달라며 위험을 무릅쓰고 찾아왔던 마인들이 불쌍해질 지경이었다.

‘만약 상진이가 정말로 원했다면 동부까지는 몰라도 최소한 중부는 끝장이 났을 겁니다.’

마인들은 마기가 서부의 경계를 넘어서지 않았던 것이 모두 마왕의 노력 덕이라고 하였다. 또한 지금의 폭주가 혼돈의 파편에게 잠식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건 그들의 완벽한 착각이었다.

마왕이 서부를 벗어나지 않은 것은 단지 스스로가 지독스러울 정도로 겁이 많고 소심했기 때문이었다.

‘끄아아악.’

아직도 마왕이 지르던 비명이 귓가에 선하게 들리는 듯했다. 제 본체도 아닌 어둠의 일부가 찢겨나가는 사소한 피해만으로도 마왕은 혼비백산하여 도망을 쳤다.

정령왕의 유산 따위는 이미 안중에도 없는 듯한 모습이었다.

볼썽사납던 마왕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리고 있던 김선혁은 인상을 찌푸렸다.

지기의 통로가 되었던 육신이 비명을 질렀다. 온몸이 갈기갈기 찢겨져 나가는 극심한 통증에 의식이 아득해져갔다.

이제는 감당할 수 없는 힘을 사역한 대가를 치러야 할 때였다.

“레드번….”

의식을 잃기 전 그는 간신히 자신의 아룡을 부를 수 있었다.

빼애애액.

레드번이 즉각 그의 호출에 화답을 해왔다. 아무래도 레드번은 주인이 걱정되어 멀리 떠나지 못하고 주변을 맴돌고 있었던 모양이다.

짧은 포효 뒤로 들려오는 퍼드득거리는 날갯짓 소리를 들으며 그는 눈을 감았다.

**

빼애애애액!

시뻘건 용암으로 뒤덮인 대지 위에 덩그러니 남겨진 김선혁을 발견한 레드번이 날개를 접고 하강했다.

아직 식지 않은 용암의 열기 탓에 착륙이 쉽지는 않았다.

탁탁.

바람을 타고 튀어 오른 불씨 몇 개가 날개에 들러붙는 바람에 순식간에 피막의 날개에 구멍이 숭숭 뚫렸다.

삐이이이익.

레드번이 화들짝 놀라 나 죽겠다고 비명을 질러댔다. 하지만 레드번은 날개가 불에 녹는 고통 속에서도 제 목적을 잊지 않았고 마침내 주인 곁에 착륙해내는 데 성공했다.

빽빼애액.

혹시라도 제 주인이 상처를 입을까 조심스레 발톱을 접은 아룡이 한참을 낑낑거린 끝에 주인의 몸을 감싸 잡아 고정했다.

퍼드득.

힘차게 날갯짓을 하니 주변을 흩날리던 불씨가 또다시 들러붙었다.

삐에에에엑

레드번은 비명을 지르면서도 끝내 제 주인을 용암으로 뒤덮인 대지에서 구해내고야 말았다.

겨우 열기가 미치지 못하는 곳까지 날아오른 레드번이 목을 길게 빼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빼애애액.

마침내 방향을 잡은 것인지 붉은 아룡이 쏜살같이 하늘을 질주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방향이 퀘이샤들과 피난민들이 있는 방향과는 전혀 다른 엉뚱한 곳이었다.

**

중부 왕국 연합은 한참 마왕의 군대와 일진일퇴를 거듭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넓게 펼쳐진 전선을 방어하느라 상당한 피해를 입기도 했지만, 시간이 흐르자 어느 정도 적응하여 효과적으로 적을 요격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하지만 전쟁은 단지 요령만으로 끝이 나지 않았다. 마물들의 수는 아직도 전선을 전부 뒤덮을 정도로 어마어마했고 전투는 계속되었다.

마물과 마수와 생존을 걸고 싸우는 인간들의 노력은 마치 신화시대 이전, 인간이 대륙의 주인이 아니었던 그 시절로 돌아간 듯 필사적이었다.

수많은 이들이 죽었고, 수많은 패배가 있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값진 승리가 탄생하고, 영웅이 태어났다.

용사 박준민 역시 그렇게 태어난 새로운 영웅 중 하나였다.

성검 발뭉의 주인, 신의 사도. 아스토리아의 첫 번째 성기사.

그것이 지금의 그를 가리키는 수식어들이었다.

사람들은 누구보다 열악한 전장에서 연전연승하는 용사를 칭송했다.

서부로 향한 드라흔이 소식이 두절된 지금 중부 전선의 새로운 희망은 바로 용사 박준민이었다.

“음?”

오늘도 어둠을 틈타 경계를 넘은 마수 한 마리를 추적 끝에 격살해내는 데 성공한 박준민은 불현듯 서쪽 하늘을 노려보았다.

“발뭉아. 이건….”

[마왕이다.]

마왕의 하나뿐인 대적자였기에 박준민은 느낄 수 있었다. 서편 하늘에서 요동치는 불길한 기운과 악의는 분명 자신에게 주어진 대적자의 기운이었다.

“노르딕에나 있어야 하는 마왕이 왜 이렇게 가까운 곳까지 온 거지?”

그 존재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먼 곳에 있던 마왕의 기운이 성큼 가까이 다가섰다. 그 난데없는 상황에 박준민이 인상을 찌푸렸다.

[마왕이 누군가와 싸우고 있다. 그것도 아주 강력한 상대를 만났어.]

마왕에 관해서라면 그 누구보다도 통찰력이 강한 성검의 말에 박준민이 버럭 소리쳤다.

“선혁 형님이야!”

[네 짐작이 맞을 거다. 마왕이 이 정도로 힘을 끌어다 쓸 정도면 용기병이 아니고서야 말이 안 되지.]

“역시! 난 형님이 살아있을 줄 알았어!”

연락이 두절된 드라흔에 대해 떠도는 온갖 흉흉한 추측들, 그중에서도 가장 지배적인 것은 마왕의 땅에서 홀로 고군분투하다 전사했을 거란 소문이었다.

[네가 그렇게 요란 떨지 않아도 그의 아룡들이 건재하니,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다.]

“그래도!”

아룡들이 멀쩡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으니 그 주인이 살아있을 거라는 사실은 박준민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지만, 직접 그 정황을 파악하고 나니 반가움이 남달랐다.

“형님이 얼마나 괴물인데, 그런 사람이 잘못 되겠어.”

박준민은 바보처럼 헤실거리며 김선혁의 무사함에 환호했다.

[잠깐.]

잠시 말이 없던 성검이 박준민의 호들갑을 제지했다.

[전투가 끝이 났다.]

그런데 그 음성이 유달리 무거웠다.

“어? 벌써? 마왕의 기운은 아직도….”

[용의 반려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마왕이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았다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박준민의 표정이 하얗게 질렸다.

**

서쪽 하늘에 들끓던 불길한 기운이 잠잠하게 가라앉을 무렵, 박준민은 신성 교국의 최전선이자 서부를 향해 내밀어진 아스토리아의 검 끝이라 할 수 있는 판테이아 기지로 복귀할 수 있었다.

며칠 만에 돌아온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돌아오는 내내 그를 괴롭혔던 불길함의 실체였다.

“드라흔이 전사했다.”

그전에도 흉흉한 소문은 넘치도록 많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판테이아 기지에 퍼진 드라흔의 전사 소식은 전과는 달리 구체적이었고 그 나름대로 근거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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