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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5.마왕 (2)
마왕은 그 압도적인 존재감과 격에 맞지 않을 정도로 볼품없는 사내였다.
품이 넉넉한 망토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쩍 마른 체구가 앙상하게 드러난 마왕은 서부를 멸망시키고 수도 없이 많은 생목숨을 앗아간 악마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평범했다.
마치 평원을 달리다 보면 흔하게 만날 수 있는 여행자와도 같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왕은 결코 작아 보이지도, 범상해 보이지도 않았다.
누더기나 다름이 없는 망토도 앙상한 체구도 마왕의 지고함을 훼손할 수는 없었고, 그 존재감을 가릴 수는 없었다.
그야말로 만마(萬魔)를 발아래 둔 제왕의 풍모 그 자체, 지금 이 일대를 지배하는 것은 명백하게 마왕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마왕에게 굴종하지 않은 존재는 금빛 서기를 신갑(神鉀)처럼 두른 한 마리 짐승이 유일했다.
줄기줄기 안광을 흘려대는 짐승, 용인이 마왕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크르르르르.
그 참람한 행태에 마수들이 낮게 목을 울리며 당장에라도 달려들 것처럼 흉성을 내보였다. 하지만 감히 군주의 허락 없이 앞에 나서지는 못하고 그저 사납게 눈만 부릅떴을 뿐이었다.
스윽.
후드 아래 깊게 음영 진 마왕의 얼굴이 용인을 향했다. 그늘에 가려진 표정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마왕은 그저 용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고, 용인 역시 거칠게 몰아쉬던 숨을 다스리며 마왕을 마주 보았다.
“네가 그 소문의 용기병인가.”
먼저 침묵을 깨고 나선 쪽은 마왕이었다.
“꼭 한번 만나고 싶었지.”
놀랍게도 마왕의 목소리는 오랜 지기라도 앞에 둔 것처럼 살갑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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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혁은 그만 당황하고 말았다.
그간 여러 경로를 통해 마왕이 혼돈의 파편에게 완전히 잠식되었다고 들었다. 그런데 막상 얼굴을 마주한 마왕은 그가 생각했던 흉악한 악마와는 거리가 멀었다.
말투는 평범했고, 건네는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이유를 알 수 없는 친근감마저 서려 있었다.
이래서야 혼자 결의를 다지며 으르렁거렸던 스스로의 꼴이 우스워질 지경이었다.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대의 태도, 하지만 그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그가 이 자리에 남은 것은 피난민들과 퀘이샤들이 도주할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최대한의 마물과 마수, 그리고 마왕의 발목을 붙잡아 그들이 안전한 곳에 도달하기까지 버텨야 했다.
그런 상황에서 마왕이 먼저 죽자고 달려들지 않는 것은 그에게 득이 되면 득이 됐지 손해가 되지는 않았다.
최소한 대화를 나누는 지금만큼은 마수도 마물들도 웅크린 채 마왕의 곁을 떠나지 않고 있었으니까.
김선혁은 차라리 이렇게라도 시간을 벌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크르르르.
완전히 자유롭게 해방된 용인의 야성이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이런 망할.
억지로 입을 열어 대답을 해보려고 해도 나오는 것이라고는 사나운 으르렁거림 뿐, 저도 모르게 몸이 움찔대며 마왕을 향해 나아가려 했다.
조금만! 조금만!
필사적으로 투기를 억누르며 숨을 가다듬었다.
눈앞의 모든 것을 파괴하고 싶은 욕망이야 여전했지만 그렇게 여러 번 숨을 고르다 보니 조금이나마 이성이 돌아왔다.
“…왜?”
가까스로 입을 열어 한마디를 건넸다. 비록 어눌하고 사나운 짐승의 목소리였을지언정 마왕에게 대화의 의사를 보이기에는 충분한 시도였다.
“너는 내 우상이었으니까.”
“뭐?”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마왕과의 대화는 김선혁으로 하여금 깊은 혼란을 느끼게 만들었다. 서로 적대해도 모자랄 상황에서 마왕은 계속해서 그에게 호의를 보였다.
“하늘을 나는 동부의 이방인에 대한 이야기는 대륙의 반대편에서도 들을 수 있었지. 그리고 나는 하늘마저 네 것인 양 휘젓고 다니는 너의 자유로움이 너무도 부러웠어.”
사실은 정말 자유롭게 하늘을 날았던 적은 없었다. 언제나 임무가 있었으며 지켜야 할 것들이 있었다. 그의 비행은 적을 말살하기 위한 수단 그 이상도 미만도 아니었다.
하지만 김선혁은 굳이 그런 사실을 마왕에게 말해주지 않았다. 자신만의 감상에 젖은 마왕을 그대로 내버려두는 게 이득이라 생각했던 탓이다.
아니, 그 이전에 솔직하게 말하면 끓어오르는 용인의 투기를 누르느라 대답할 여유가 없었던 것도 하나의 이유였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난 네 소문을 들을 때마다 늘 내 일이었던 것처럼 기뻐하기까지 했었어.”
마왕은 차라리 그를 친구 대하듯 친근하게 대했다.
“그것만이 내가 그 지옥 같은 시간 속에서 버텨낼 수 있었던 유일한 낙이었지.”
김선혁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마음이었다. 마왕 역시 그의 이해를 바란 것은 아니었던 모양인지, 굳이 그에게 자신의 마음을 구구절절하게 설명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말이야.”
친근하던 어조는 여전했다. 하지만 김선혁은 그 평이한 어조가 왠지 모르게 섬뜩하기만 했다.
“네가 잘 나가면 잘 나갈수록 내가 처한 상황이 더욱 엿 같은 거 있지.”
그 알 수 없는 불길함에 애써 억눌러두었던 용인의 투지가 끓어오르며 금빛 비늘이 바짝 일어섰다.
“능력 있는 자는 출신에 차별을 두지 않고 출세한다. 동부에서나 통하지 서부에서는 씨알도 먹히지 않을 소리야. 이 개 같은 동네에서 귀족이 아닌 새끼들은 버러지만도 못한 존재거든.”
크르르르르.
저도 모르게 흘러나온 낮은 으르렁거림, 하지만 마왕은 여전히 그런 그의 태도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것처럼 계속해서 떠들어댔다.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이유로 동료가 죽어 나갔지. 단지 검은 머리가 재수 없다는 이유로 죽은 놈도 있었다면 믿겠어?”
하지만 끓어오르는 투지와는 별개로 마왕의 한 서린 말에 저도 모르게 가슴이 갑갑해졌다.
“각성? 팔자 좋은 소리하고 있네. 애초에 광산에서 하루 종일 굴러대는데 각성은 무슨 각성. 적성도 병과도 우리에게는 꿈도 꿀 수 없는 이야기였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왕은 누구보다 빠르게 전직을 마치고 마왕이 되었다. 김선혁으로서는 그게 못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런 우리에게 남아있는 건 독기뿐이었지. 우리를 이 세상에 끌고 온 정체불명의 누군가와 우리 눈앞에서 히히덕거리며 동료의 목을 베고 동료의 연인을 발가벗겨 취하는 금수만도 못한 귀족들을 증오했어.”
한참을 제멋대로 떠들어대던 마왕이 돌연 키득키득 웃어댔다.
“근데 말이야. 그 개 같은 놈들의 개 같은 짓거리들이 내 각성의 밑거름이 됐어.”
별다른 훈련도 실전도 겪지 못한 마왕이 전직 끝에 지금에 이른 이유가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사람들의 절망과 증오, 고통이 내 레벨업의 가장 큰 영양소라는 뜻이야. 그리고 그 말은….”
후드 아래 도사린 어둠 속에서 새빨간 안광이 번뜩였다.
“서부에서 일어난 모든 죽음이 내 힘이 되었다는 말이기도 하지.”
열 개가 넘는 왕국이 멸망당하고 수도 없이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다. 그리고 마왕은 그들의 죽음이 모두 자신을 성장시키는 밑거름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럼 과연 내 레벨은 지금 몇일까?”
새빨간 안광이 넘실거리는 마왕을 본 순간 김선혁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네 레벨은 몇이지?”
마왕이 자신에게 왜 이런 이야기를 늘어놓은 것인지까지는 그로서도 알 수 없었다. 단지 확실한 것이 있었다면 정령왕의 유물과 묘목을 호송 중인 퀘이샤들을 마왕이 도망치도록 두고 본 이유가 언제든 원하는 때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는 자신감의 발로였다는 사실뿐이었다.
“괜한 것을 물었군. 네 레벨이 몇인지는 지금 중요하지 않아.”
후드 아래로 드러난 마왕의 입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지금 네 곁에 용이 있냐 없느냐가 중요할 뿐.”
넘실거리며 피어오른 검은 아지랑이가 마왕의 몸을 조금씩 잠식해가기 시작했다.
“있다면 빨리 꺼내봐.”
어느 순간이 되자 마왕은 검은 기운과 하나가 되었고, 거대한 어둠이 되었다.
고오오오오.
온 하늘을 집어삼킬 듯 거대해진 마왕의 본체, 희미하게나마 비치던 햇살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세상에 가장 깊은 밤이 찾아왔다.
“그렇지 않으면 오늘 이 자리에서 넌 죽을 테니까.”
메아리처럼 울려대는 마왕의 음성은 이미 인간의 것이 아니었으며, 하나의 거대한 악의였다.
“이건 좀 심한데….”
김선혁은 저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고 말았다.
사방을 가득 메우고 있던 마물도 마수도 보이지 않는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오직 어둠. 어둠뿐이었다. 그리고 그의 직감은 이 어둠이야말로 마왕 그 자체라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마왕은 마치 가장 어둡고 깊은 밤과도 같았다.
“어쩐지 쉽게 풀린다 했다.”
하지만 어차피 각오했던 일이었다. 애초에 서부를 지옥으로 만든 당사자와 이야기가 통할 거라 생각하지 않았고, 이야기를 나눌 마음도 없었다.
서부 이방인들의 안타까운 사연과는 별개로 서부의 모든 생명체들을 말살시킨 마왕은 용서받을 수 없는 악 그 자체였고, 그런 자와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눌 정도로 그는 타락하지 않았다.
단지 피난민들과 퀘이샤들이 안전한 곳까지 대피할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시간은 충분할 정도로 벌었다.
빼애애애애애애액!
퀘이샤들을 따라갔던 레드번이 멀리서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피난민들과 퀘이샤들이 이 일대를 완전히 벗어났다는 신호였다.
“너는 내 대적자도 아니고, 나 역시 네 대적자가 아니야.”
마왕의 대적자는 용사였지 용기사가 아니었다. 그리고 용기사의 대적자 역시 용살자였지 마왕이 아니었다.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널 이대로 두는 건 안 되겠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선혁은 이 순간 필생의 대적을 앞에 둔 것처럼 맹렬한 적의를 불태웠다.
“차라리 미쳤으면, 차라리 자기 합리화라도 했으면 나았을 텐데.”
복수심에 불타 저지른 일이라고, 세상이 미웠다고 싸구려 변명이라도 했다면 차라리 나았을 것이다.
하지만 마왕은 너무나도 멀쩡했다. 혼돈에 잠식되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평온한 모습이었다. 자신이 저지른 악행의 무게를 잘 알면서도 한 점 죄책감도 느끼지 않은 것이다.
마왕에게 있어 희생당한 서부의 사람들은 그저 경험치에 불과했다.
“합리화라, 과연 그들이 그럴 가치가 있을까? 너 역시 그놈들이 어떤 놈들인지 질리도록 겪었잖아?”
어디선가 숨어서 지켜본 것일까. 그도 아니면 그가 겪어온 자괴감 자체가 마왕이 연출한 3류 각본의 일부였을 뿐이었던 것일까.
알 수 없었다.
“자유가 뭔지 평등이 뭔지도 모르는, 누가 진정으로 자신들을 위하는지도 모르는 개돼지 같은 놈들은 어차피 살려둬 봐야 아무짝에도 쓸모없을 뿐이야.”
지금 이 순간 확신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어차피 받아들이지 않겠지만, 물어보지. 혹시 이쪽에 설 생각은 없어?”
“엿 먹어. 이 정신병자 새끼야.”
그 스스로가 마왕과 절대로 한 하늘을 이고 살아갈 수 없다는 것뿐이었다.
레벨이 몇에 도달했는지 모를 마왕, 심지어 혼돈의 파편마저 얻으며 완전한 지경에 이르렀다. 그에 반해 그는 용을 얻지도 못했고 레벨도 그리 높지 않았다.
모든 것이 열세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선혁은 마왕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럼 죽어야지.”
마왕이 그의 죽음을 선언했다.
“할 수 있다면 해봐.”
그리고 그는 정면으로 마왕의 선언을 부정했다.
가소롭다는 듯이 코웃음을 친 마왕이 어둠을 토해냈고, 한 번 빠져들면 절대로 헤어 나오지 못할 암흑이 그의 위로 쏟아져 내렸다.
마치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광경이었다.
용인의 기다란 주둥이가 쩍 하고 벌어졌다. 그리고 단숨에 화염을 토해내며 자신에게 쏟아지는 어둠을 모조리 불살랐다.
“용도 없는 용기병 따위가!”
지금의 일격만으로도 용이 없는 용기병 따위는 단번에 압살시킬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것일까. 마왕이 성난 포효를 내질렀다.
하지만 분노도 잠시였을 뿐, 마왕은 갑작스레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용의 기세에 주춤 물러나고 말았다.
“내가 설마 아무 대책도 없이 혼자 남았을까 봐?”
김선혁이 그런 마왕을 올려다보며 사납게 으르렁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