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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 푸어-213화 (213/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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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4. 마왕 (1)

혼돈의 전령과 조우하며 보다 깊고 농밀한 악의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어렴풋이나마 혼돈의 파편이 지닌 힘을 가늠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진짜 거대한 악 앞에서 혼돈의 전령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불쾌함을 자극하는 싸구려 악의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느긋하게 다가오는 거대한 기운은 단지 존재할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난민들은 걸음을 멈춘 채 보이지도 않은 누군가를 향해 엎드려 굴종의 자세를 표했다.

“어머니, 부디 우리를 지켜주소서….”

“어머니시여.”

세상이 멸망해도 흔들리지 않을 것 같던 요정들마저도 하얗게 질린 얼굴로 천년화의 곁에 바짝 붙어 어머니 나무의 가호를 간절히 기도할 정도였다.

마치 세상에 종말이라도 찾아온 듯한 광경이었다.

마왕은 그렇게 죽은 자들과 온갖 흉악한 것들로 이루어진 군대를 거느리고 갑작스레 찾아왔다.

“하. 이거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거물이네.”

그런 끔찍한 상황에서 평정을 유지하는 건 오직 김선혁만이 유일했다. 그는 세상을 집어삼키고도 남을 거대한 악 앞에서도 홀로 희망을 잃지 않았고, 결코 주눅이 들지도 않았다.

그는 이 세상에 유일한 용의 반려, 혼돈의 파편을 얻은 마왕에 비해 다소 힘이 달릴지는 모르나 그 스스로의 격이 마왕에 비해 부족한 것은 아니었다.

“드라카네이드(용인화).”

말이 끝나는 순간 그는 인간의 태를 벗고 용인의 모습이 되었다.

크르르.

의식해서 나온 으르렁거림이 아니다. 용인의 유별나게 강력한 투쟁심이 마왕을 적이라 규정하고 전의를 북돋기 시작한 것이다.

한 번 의지가 일어나자 그게 금세 기세가 되었고, 마기를 밀어내는 빛이 되었다.

눈부신 서기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그 순간 항거할 수 없는 거악에 짓눌려 있던 공기가 돌변했다.

종말이라도 마주한 것처럼 엎드려 벌벌 떨던 피난민들이 고개를 쳐들고 하나둘 그의 곁으로 몰려들고, 퀘이샤들이 어머니 나무의 유산을 떠받든 채 그를 찾았다.

크르르르르르르르.

김선혁은 계속해서 목을 긁듯이 울어댔다.

크아아아아아.

그리고 그 낮은 울림이 마침내 울부짖음이 되어 온 세상에 울려 퍼졌다.

지금 이 순간 이 일대를 지배하는 것은 마기도 악의도 아니었다.

이곳은 마왕이 지배하는 땅이 아니라 명백한 용의 권역이었다.

“선혁!”

항거할 수 없는 거악의 존재감에 모든 것을 포기했던 나지마가 금빛 찬란하게 빛나는 용인을 보며 벅찬 음성으로 말했다.

그녀의 눈빛 그 어디에도 방금 전의 절망은 찾아볼 수 없었다.

“전투 준비!”

그런 상황은 다른 퀘이샤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용기사라는 강력한 아군의 존재를 상기하고 다시 활을 고쳐 잡았다.

“저희가 돕겠습니다!”

사방에 가득 찬 마물들의 압도적인 숫자도, 마왕의 강력한 기운도 지금만큼은 상관없었다. 용기사와 함께라면 그 어떤 난관이든 해결할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퀘이샤들은 활을 쥔 손에 힘을 꽉 주고는 김선혁의 명령을 기다렸다. 그의 명령만 떨어지면 수만의 마물들을 향해 망설이지 않고 달려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기나긴 포효가 끝이 나고 그가 처음으로 꺼낸 말은 그들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내가 시간을 벌겠다.”

“네?”

용인의 음성에는 여전히 투지가 넘쳤고, 그래서 나지마는 순간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오래 벌지는 못해. 그러니 최대한 빨리 피난민들과 함께 동쪽으로 이동해.”

“선혁, 그게 무슨….”

“전부를 잡아둘 수는 없다.”

그는 질문을 허용하지 않았다.

“최대한 많은 놈들을 잡아보겠지만 아마 힘들겠지. 마왕이 그렇게 되도록 가만히 보고만 있지는 않을 테니까.”

김선혁은 마치 무언가에 쫓기듯 급박하게 지시를 쏟아냈다.

“길을 돌아가도 좋아. 오래 걸려도 좋아. 그러니 최대한 이곳에서 멀어지도록 해.”

눈빛 하나 몸짓 하나, 투지가 가득한 용인이건만 그는 마치 마지막을 준비하듯 계속해서 이후의 일들을 지시했다.

“만약 최악의 상황이 벌어진다면, 저들을 어떻게 할지는 너희들이 결정해. 네 일족도 할 일이 있잖아.”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나지마는 와락 겁이 나기 시작했다. 자신의 하나뿐인 반려가 혹시라도 저 이기적인 인간들을 위해 홀로 이곳에 남아 희생하려는 것은 겁이 난 것이다.

“저는 남겠어요.”

나지마는 이를 악물고 그를 설득하려 했지만,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너희들은 어머니 나무의 묘목을 안전하게 옮겨야 하잖아.”

“그럼 일족은 두고 저라도!”

“억지 부릴 시간이 없어. 네가 남아 있어봐야 짐이 될 뿐이야.”

결국 남아 있어봐야 짐이 된다는 말에 그녀는 눈물을 머금고 그의 결정을 따라야 했다.

“쓸데없는 걱정하지 마. 나도 여기서 죽을 생각은 없다고.”

그나마 지금 믿을 것이라고는 그의 반드시 돌아오겠다는 약속뿐이었다.

“어서 가. 더 이상 버티기 힘들어.”

어느 순간부턴가 어금니를 꽉 깨물고 힘겹게 말하는 김선혁의 모습에 나지마가 몸을 돌렸다.

“꼭 돌아오세요. 만약 당신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저들을 버리고 갈 거예요.”

피난민이 아니었다면 진즉에 마왕의 땅을 벗어났을지도 모르는 상황, 나지마는 진심으로 피난민들을 원망했다.

그가 대답대신 짧게 손을 젓고는 생목으로 만든 창을 거꾸로 잡아 높게 치켜들었다. 그리고는 힘차게 대지에 쑤셔 넣었다.

검게 변해버린 대지를 타고 퍼져나가는 생명의 기운이 나지마가 나가야 할 방향을 알려주었다.

“저분은 반드시 돌아올 거야. 그러니 걱정말렴.”

“어머니께서 선택하신 분이다. 그런 분이 이런 곳에서 잘못 될 리가 없어.”

반려를 두고 돌아서는 그녀의 참담한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아는 퀘이샤들이 짧게 그녀를 위로해주었다.

그녀는 일족의 말에 힘없이 고개를 끄덕여보이고 지금에 와서는 피난민들의 대표나 다름없는 존재가 된 존을 불러 말했다.

“더 이상의 배려는 없습니다. 스스로가 낙오되지 않도록 도울 수 있는 건 오직 자신뿐이라는 걸 명심하세요.”

눈치 빠른 존은 지금의 상황이 얼마나 좋지 않은지 금세 파악하고는 피난민들을 다그치기 시작했다.

“짐은 전부 버리고 최대한 빨리 걸어! 늦는 놈은 정말 버려질 거라고!”

피난민들도 존의 말이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는 굳은 얼굴로 걸음을 내딛었다.

그리고 지옥의 행군이 시작되었다.

나지마의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이제까지 피난민들의 보폭에 맞춰 이동했던 퀘이샤들이 특유의 가벼운 걸음으로 피난민들을 앞질렀다.

“아까 했던 말 명심하세요.”

피난민들 중에는 제법 앞쪽에 위치하고 있던 존을 힐끔 바라본 나지마가 그렇게 한마디를 남겨놓고는 제 일족을 따라갔다.

“빨리 빨리 움직여 이 굼뱅이들아!”

“여기까지 와서 뭉그적거리다 괴물 뱃속에 처박힐래!”

존의 독촉이 아니어도 이미 피난민들은 거의 뛰듯이 퀘이샤들을 따르고 있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에도 끝내 버리지 못했던 짐마저 전부 내팽개친 채였다.

“너, 너무 빠릅니다!”

처음에는 가볍게 걷는 듯했던 퀘이샤들이 어느 순간이 되자 달리기 시작하자 존은 마음이 급해졌다.

염치가 없는 걸 알면서도 애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요정들은 그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저 계속해서 내달릴 뿐이었다.

“빨리 이동하라고!”

설마 자신들을 일부러 떨구려고 하는 건 아닐까 염려가 된 존이 피난민들을 돌아보며 고래고래 악을 썼다.

“혹시라도 자기들만 살겠다고 무리를 버리는 놈이 있으면, 나으리께서 돌아와서 용서하지 않으실 테니까 알아서들 해!”

하지만 상황이 이렇다고 해서 아이와 노인, 여자들을 버리고 갔다가는 나중에 어떤 일을 당할지 몰랐다. 존은 숨이 찬 와중에도 체력이 약한 이들을 챙기도록 으름장을 놓았다.

나지마는 그렇게 악을 쓰며 따라붙는 피난민들을 보면서도 일족의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물론 피난민들을 일부러 떨구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먼저 앞서 나가서 해야 할 일이 있었을 뿐이었다.

“준비해!”

가장 앞에서 내달리던 노 퀘이샤의 구령에 내달리던 퀘이샤들이 한껏 허리를 젖혔다. 속도들 줄이지 않는 가운데 취한 묘기에 가까운 사격자세였다.

“쏴!”

노퀘이샤의 지시가 끝나기가 무섭게 일천 발의 화살이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다시!”

첫 번째 사격의 여운으로 떨리는 시위의 진동이 채 잦아들기도 전에 퀘이샤들이 다시 한 번 화살을 쏘아 올렸다.

쐬에에에엑!

그들은 그렇게 피난민들이 따라오기 힘들 정도로 빠르게 달리면서도 쉬지 않고 화살을 쏘아 올리는 신기를 보였다.

키에에에엑!

퀘이샤들이 쏘아올린 첫 번째 화살이 대지에 떨어질 때 즈음, 전방에서 수많은 마물들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그게 시작이었다.

전방에서 계속해서 비명소리와 신음이 터져 나왔다. 피난민 무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가로막은 마물들의 무리였다.

퀘이샤들은 계속해서 활을 날려댔고, 마침내 화살이 무수히 박혀 대지에 널브러진 마물의 무리가 눈에 보일 정도가 되었다.

“이런….”

사거리를 높이기 위해 극단적으로 높게 쏘아올린 화살들은 충분한 위력이 실리지 않았고, 그 덕분인지 퀘이샤들의 뛰어난 궁술에 비해 생각보다 많은 마물들이 살아서 길을 막고 있었다.

이대로 적진을 돌파하는 것이야 퀘이샤들에게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는 일이었지만, 그렇게 했다가는 뒤에서 따라오는 피난민들의 길이 막히고 만다.

어떻게 해야 할까.

달리면서 쏘는 화살은 위력이 충분하지 않다. 강맹한 기세를 살리려면 잠시 멈춰 서서 사격을 가해야 했다.

그들이 잠시 고민하는 사이에 절묘한 각도로 날아온 새빨간 화염이 마물들의 중심을 꿰뚫었다.

“아….”

굳이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나지마는 그 유황내 나는 불꽃이 누구의 것이지 알 수 있었다.

안 돼. 돌아가 봐야 짐만 될 뿐이야.

지금이라도 돌아가서 돕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자꾸만 느려지는 발걸음을 그녀는 억지로 떼어내며 남아있는 마물들을 향해 화살을 겨냥했다.

**

“후우. 후우.”

퀘이샤들이 남아있는 마물들을 처리하고 길을 여는 것을 확인한 김선혁은 심호흡을 하며 몸을 돌렸다.

여기서부터는 퀘이샤들을 믿어야 했다. 아니, 설령 그들이 힘에 부쳐 피난민들 중 상당수를 버린다고 해도 어쩔 수가 없었다.

지금 그가 상대해야 할 것은 내달리는 피난민들 앞을 가로막은 마물들이 아니라 성큼 다가온 거대한 악의였다.

“준민이는 이런 놈을 상대해야 하는 거야? 진짜 불쌍하네.”

마왕의 대적자로 각성한 용사의 처지가 새삼 불쌍해질 정도로 마왕의 기운은 강대했다.

하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마물의 군대 사이에 홀로 남겨졌다는 어려움도 거악을 앞에 두었다는 위기감도 지금의 그에게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씨익.

드레이크를 닮은 긴 주둥이가 쭉 하고 찢어졌다.

용인의 외양에 걸맞는 사나운 미소, 이제껏 억눌러 두었던 용인의 본능이 마구 끓어올랐다.

이는 김선혁이 용인화의 능력을 얻은 뒤로 내내 싸워와야 했던 용 특유의 기질이었으며, 책임져야 할 수많은 것들을 가진 자의 자제심과 상극에 위치한 용인의 성질이었다.

크아아아아!

그 어느 때보다 사나운 포효와 함께 용인의 광폭한 본성이 완전히 해방되었다. 그의 주변을 둘러싼 정명한 기운이 완전히 달라졌다.

보다 야만적이고 보다 본질에 가까운, 사나운 짐승의 투기였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그가 퀘이샤들마저도 먼저 보내야 했던 이유였으며, 마왕이라는 강대한 적을 상대로 꺼내들 수 있는 용기사의 가장 강력한 무기였다.

투두둑.

주둥이가 더욱 길게 튀어나오고 그 사이에 감춰져 있던 날카로운 이가 턱 사이로 튀어나왔다. 기형적일 정도로 넓은 어깨가 한층 더 벌어지고 등이 과격하게 굽었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용의 형상을 띄었다지만 인간 쪽에 더욱 가까웠던 용인의 모습이 보다 용에 가까운 것이 되었다.

크르르르.

사나운 짐승이 목을 울리고 그 순간 수많은 마물들과 마수들에게 둘러싸인 마왕이 그의 앞에 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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