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13 =========================================================================
213.잊혀진 자들 (5)
용의 외형을 닮은 용인이었지만, 어디까지나 기본적인 신체 구조는 인간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 덕분에 김선혁은 갑작스레 신체가 변화를 일으켰음에도 그런대로 적응할 수가 있었다.
그것도 방금 전까지의 이야기였다.
그는 한 쌍의 팔 아래 돋아난 새로운 팔뚝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알지 못했다. 아니, 그 이전에 저 낯선 팔뚝이 자신의 것인지조차 모호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게 제 팔이 아니라면 저렇듯 떡하니 겨드랑이 아래 붙어있을 리가 없었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마음속으로 내뱉은 질문에 대답을 해준 것은 누다르였다.
‘제가 주인님의 손이 되어 적들을 쳐부수겠나이다!’
누다르의 말은 단지 비유가 아니었고, 그 결과가 바로 겨드랑이에 돋아난 한 쌍의 팔이었다.
“그건 그럴 때 쓰는 말이 아니라고….”
잘못 되어도 한참은 잘못된 정령의 표현 방식에 작게 항의를 해보았지만, 한 번 자라난 팔은 다시 사라지지 않았다.
‘이건 신경 쓰지 마시고 원래 하던 대로 하십시오!’
“어떻게 신경을 안 써!”
누다르의 황당한 요구에 버럭 소리를 지른 김선혁이 이제는 그 역겨운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접근해온 마수의 머리통을 향해 창을 내찔렀다.
말과는 달리 벌써 제 몸에 돋아난 기괴한 팔 따위는 잊은 듯 깔끔한 공격이었다.
콱.
자신을 향해 곧장 날아드는 창을 고개를 비틀어 피해낸 마수가 톱니 같은 이빨이 돋아난 아가리를 내밀어 창을 물어버렸다.
까드득.
당장에라도 나무로 만들어진 창 따위야 산산조각날 것 같은 거북스러운 소음이 들려왔지만 정작 산산조각이 난 것은 창이 아니라 마수의 이빨이었다. 김선혁이 절묘한 동작으로 어깨를 비틀며 마수의 입을 찢어버린 것이다.
금세 커다란 주둥이가 피투성이가 된 마수가 비명을 지르며 물러났다. 하지만 안심하기에는 일렀다. 여섯의 마수 중 하나를 잠시 밀어냈을 뿐, 상황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크아아앙.
하나가 그의 시선을 끄는 사이에 완전히 코앞까지 다가온 마수들이 각기 발톱과 이빨 그리고 뿔을 내밀며 그에게 달려들었다. 마치 처음부터 그리 하기로 작정이라도 한 듯한 모양새였다.
“합!”
김선혁은 물러나는 대신 기세를 실어 발을 내딛었다.
폭음과 함께 대지가 흔들리고, 마수들의 발밑이 허물어졌다. 순식간에 균형을 잃은 마수들이 나뒹굴고, 그 틈을 노려 그의 창이 또 하나의 마수를 꿰뚫었다.
그야말로 조금의 군더더기도 보이지 않는 깔끔한 찌르기였다.
하지만 이곳에 모인 마수들은 보통 마수들이 아니었다. 하나하나가 한 지역을 지배하는 마수들로 그 어느 놈 하나 만만한 존재가 없었다.
가슴팍에 창이 박힌 마수가 앞발로 그의 창을 짓눌렀다. 때를 맞춰 다른 마수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한 손이 묶여버린 그를 공격해왔다.
“지겨운 새끼들!”
짧게 으르렁거린 김선혁이 가장 근접해있던 마수의 턱을 움켜잡고는 바닥에 찍어 눌렀다.
캬아악!
우악스러운 손길에 짓눌린 마수가 버둥거리며 어떻게든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그럴수록 김선혁은 손아귀에 더욱 힘을 주었다.
콰드득.
이제는 머리통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땅에 파묻힌 마수, 그 사이에 또 다른 마수가 그의 목을 물어뜯을 것처럼 턱을 아구아구대며 달려들었다.
“흐읍!”
양손이 묶여버린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그는 짧게 숨을 들이키고는 입을 쩍 벌렸다.
그 순간 그의 입속에서 빛이 번쩍거린다 싶더니 새빨간 유황불이 토해져 나왔다.
쏴아아아아아.
혼돈의 전령마저도 단번에 머리를 날려버렸던 강력한 용인의 화염 숨결이 순식간에 마수 하나를 흔적도 없이 녹여버렸다.
스스슥.
하지만 화염 숨결의 위력은 딱 거기까지였다.
교활한 마수들이 교묘하게 움직이며 피난민들을 등지고 섰던 탓에 더 이상 무리하게 숨결을 토해낼 수가 없었다.
남은 마수의 숫자는 둘.
몸으로 버틴다. 그리고 반격한다.
김선혁은 몸에 힘을 주고 마수들의 공격에 대비했다.
쾅!
각오했던 고통은 없었다. 그 대신 묵직하고 둔탁한 타격음이 두 차례 울렸을 뿐이었다.
“아….”
마치 해머로 머리를 두들겨 맞은 것처럼 정신없어 보이는 두 마수를 본 김선혁은 뒤늦게 자신이 급박한 상황에 잊고 말았던 존재를 떠올렸다.
누다르와 한 쌍의 팔이었다.
‘어딜 감히!’
잔뜩 격앙된 누다르의 음성이 들려온다 싶더니, 한 쌍의 팔이 멋대로 움직이며 비틀대는 마수들의 머리통을 마구잡이로 두들겼다.
쾅쾅쾅!
연이은 충격에 마수들이 앞발을 꿇고 널브러지고,
콰직.
작정하고 내리친 일격에 마침내 두개골이 함몰되어 절명하고 말았다.
**
켁.
창에 꿰인 마수가 고개를 떨어트리는 것을 끝으로 습격은 정리되었다.
여섯의 마수 중 살아 돌아간 것은 이빨이 산산조각 난 마수 하나뿐, 나머지는 모두 머리가 깨지거나 창에 관통당해 절명했고 피난민들을 향해 달려들었던 마물들은 퀘이샤에 의해 처리되었다.
“후우….”
그렇게 전투가 끝이 나고 용인화를 푼 김선혁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뭔가 정신없는 싸움이었다. 여섯씩이나 되는 마수를 한꺼번에 상대한 것도 처음이었지만, 정령의 갑옷과 함께 한 싸움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함께 해본 고대 정령이 깃든 무구의 위력은 그의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대단한 것이었다.
이따금씩 제멋대로 움직이는 팔 탓에 동작이 꼬이기도 했지만, 스스로 판단해 적을 공격하고 방어하는 무구가 없었다면 이번 전투를 이리 쉽게 끝낼 수는 없었으리라.
‘아직, 아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다르는 아직 투르칸 베흐테르의 힘이 완전하지 않다며 불만을 표했다.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합니다. 마기에 오염된 땅이 아닌 지기가 넘치는 곳이라면 이놈을 완전하게 되돌릴 수 있을 겁니다.’
누다르의 호언장담에 김선혁은 기대하겠노라 대답해주고는 다시 행렬에 합류했다.
“놀라서 실신한 사람이 몇 있긴 하지만 다친 사람은 없습니다.”
“그거 다행이군.”
존의 보고에 그가 뒤늦게 안도하는 얼굴이 되었다.
“다 나으리 덕분입니다. 어찌나 용감하신지 하늘에서 전신이라도 내려온 줄 알았지 뭡니까.”
아부성 짙은 존의 말을 한 귀로 흘린 그가 손을 휘저었다.
“저 나으리….”
그런데 평소라면 재깍 그의 손짓을 따라 자리를 떴을 존이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였다.
“할 말이 있으면 해.”
뭔가 할 말이라도 있나 싶었지만 존은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아, 아닙니다.”
결국 끝까지 하려던 말을 하지 못한 존이 부리나케 자리를 뜨고 나지마가 다가왔다.
“저는 저 사람이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알 것 같군요.”
“그게 뭐지?”
그렇지 않아도 존이 하려던 말이 무엇인지 신경이 쓰였던 차다. 반색을 하고 물으니 나지마가 말간 시선을 보내왔다.
“당신이 과연 자신들과 같은 ‘인간’이 맞는지 믿어지지 않았겠지요.”
나지마의 말에 순간 그의 얼굴이 굳었다.
“어떤가요? 당신은 정말 저들과 같은 인간인가요?”
하지만 그도 잠시였을 뿐이다.
“별 시답지도 않은 것을 궁금해 하는군.”
잠시 용인의 모습을 빌린다고 해서 자신이 인간이 아닌 것은 아니었다.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해 더 할 나위 없는 확신을 지닌 그에게 나지마의 질문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이었다.
“그렇군요. 제가 시답지 않은 질문을 했군요.”
면박 아닌 면박을 당하고도 나지마는 조금도 무안한 기색이 아니었다. 오히려 깊게 안도하는 얼굴이었다.
“혹시 나를 걱정한 건가?”
“높은 경지에 오른, 강한 힘을 지닌 자일수록 때때로 너무도 사소한 화두에 정신이 무너져 내리기도 한답니다.”
나지마의 말에 김선혁이 대꾸했다.
“내가 마왕처럼 망가질까 봐 걱정한 모양이군.”
“당신은 제가 본 누구보다 강하지만 그만큼 많은 것을 짊어지고 있으니까요.”
용의 반려이면서 땅의 정령왕의 유지를 이어받은 존재, 거기에 더해 스스로가 동부의 강대국 아덴버그의 최고위 귀족이기까지 하다. 본신의 무력과 권력, 명성까지 뭐 하나 부족함이 없는 그가 하고자 마음만 먹는다면 이 세상에 얼마든 해악을 끼칠 힘과 영향력이 있었다.
나지마의 염려가 마냥 기우는 아닌 것이다.
“짐이라….”
김선혁이 잠시 피난민들을 둘러보았다.
“뭐, 짐이 좀 많기는 하지.”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정작 그의 표정은 그리 어둡지만은 않았다.
“그리고 지금 당장 필요한 건 다 있으니까. 마냥 나쁜 건 아니야.”
가장 큰 문제였던 피난민들에 대한 통제도 존이라는 조력자를 얻어 어느 정도 해결이 되었고, 퀘이샤들의 전투력은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훌륭했다.
거기에 정령왕의 신체로 만든 창이 끊임없이 활기를 주었고, 고대 정령이 깃든 무구가 부족함을 채워주었다.
이 정도면 마왕의 땅에서도 주눅 들지 않을 정도의 전력이었다.
**
마수 여섯이 마물들을 이끌고 행렬을 습격했다가 패주한 후 한동안 마물들의 습격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그때 목숨을 잃은 마수들 중 하나가 이 근방을 지배하는 우두머리였던 모양이다.
덕분에 김선혁과 피난민들은 한동안 마물에게 시달리는 일 없이 나아갈 수 있었다.
“대충 이 정도면 절반쯤 온 건가.”
험난한 여정 중 절반을 완수했다. 그리고 그 말은 그들이 마왕의 권역 한가운데 접어들었다는 말이나 다름이 없기도 했다.
“슬슬 다시 올 때가 됐을 텐데.”
지나치게 오랫동안 습격이 없으니 차라리 불안해질 지경이었다. 마치 폭풍전야라도 되는 듯한 기분에 그는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레드번을 타고 짧게나마 근방을 수색했다.
여전히 보이는 것이라고는 근방을 어슬렁거리는 소규모 마물 무리 몇뿐, 습격의 조짐은 보이지 않았다.
“예감이 좋지 않아요.”
퀘이샤들도 마물들이 자취를 감추자 불안해진 모양인지, 근래 들어 부쩍 신경이 곤두선 모습이었다.
“뭔가 일이 벌어질 건 확실한데, 그게 뭐냐가 문제군.”
김선혁은 만약의 상황을 대비했다.
먼저 존을 불러 피난민들을 더욱 철저하게 단속할 것을 주문했고, 퀘이샤들에게는 언제든 전투를 시작할 수 있도록 만전을 기하도록 지시했다.
그렇게 얼마나 작위적인 침묵 속에서 길을 재촉했을까.
김선혁이 우려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럴수록 심장을 옥죄는 불길함은 계속해서 강해져만 갔고, 어느 순간이 되자 조바심마저 느껴질 지경이 되었다.
“올 거면 빨리 와라.”
끊임없이 정기를 보충 받는 육신이야 지칠 리 없다지만, 고도의 긴장 상태를 계속해서 유지하자니 정신력의 소모가 상당했다.
심력이 고갈되어 가는 것은 김선혁뿐만이 아니었다.
퀘이샤들 역시 날이 갈수록 표정이 어두워진 건 마찬가지였다.
자신들을 호위해주는 이들의 표정이 어두워지자 피난민들도 덩달아 긴장했다. 평생을 초식동물처럼 살아온 그들 역시 주변을 둘러싼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엄마….”
이 지옥 같은 곳에서도 씩씩함을 잃지 않았던 어린 사내아이가 제 어미의 품을 파고들었다.
“괜찮아. 아무 일도 없을 거야.”
아이의 어미가 부드럽게 사내아이를 달래주었다. 하지만 말과는 달리 주변을 둘러보는 어미의 시선은 꼭 포식자의 냄새를 맡은 초식동물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방법을 바꿔서 이쪽을 피 말려 죽이기로 작정한 건가.”
김선혁의 푸념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는 정말로 피가 마르는 듯한 기분이었다. 차라리 적이 얼굴이라도 보이면 박살을 내련만 그것도 아니니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본인이 마물과 마수를 찾아 사냥하자니 남겨질 행렬이 불안했다.
“분명 뭔가 온다. 그것도 곧.”
이제는 최고조에 오른 위기감이 계속해서 경고를 보내왔다.
그리고 결국 그의 예감대로 불길함의 실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도 그가 상상했던 것 중에 가장 최악의 모습으로 말이다.
하지만 김선혁은 그 최악의 상황을 마주하고도 주눅이 들기는커녕 도리어 눈을 번뜩이고 있었다. 마치 모든 걸 예상하고 기다리고 있기라도 했다는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