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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 푸어-211화 (21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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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잊혀진 자들 (4)

창의 단면이 흐물흐물하게 변하더니, 누다르의 손길이 닿는 대로 눌리고 펴지고를 반복했다.

비록 중간이 툭하고 부러지긴 했지만 그 남아있는 부분만큼은 단단하기 짝이 없던 금속이 마치 무른 흙 마냥 변해버린 것이다. 누다르는 그렇게 찰흙처럼 변해버린 창의 단면을 자유자재로 다루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볼품없던 창의 모습이 사라져간다.

‘옳지. 착하다.’

누다르는 조금씩 본래의 모습을 찾아가는 창과 대화라도 나누듯 끊임없이 말을 걸었다.

우우우웅.

놀랍게도 창은 몸을 떠는 것으로 누다르의 말에 화답했다.

“이게 무슨….”

작은 난쟁이가 흐물흐물한 쇳덩이를 조물거리며 혼잣말을 이어가는 모습은 그간 온갖 꼴을 다 보았다고 자부하는 김선혁으로서도 처음 보는 기괴한 광경이었다.

하지만 그가 느끼는 기괴함과는 별개로 누다르의 표정은 더 없이 엄숙하고 경건했다. 마치 손에 쥐어진 흐물흐물한 덩어리를 어루만지는 게 평생의 숙원이라도 되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피난민의 피해 사망 사십구 부상 구십칠입니다. 아이와 여자 중에 피해는 없습니다.”

언제 다가왔는지 존이 피해 상황을 보고 해왔다.

“아….”

그때까지만 해도 홀린 듯이 누다르의 작업을 보고 있던 김선혁은 찬물이라도 뒤집어 쓴 듯한 기분이었다.

당장의 사망자야 오십이 채 되지 않았지만, 마물에게 당한 상처는 금세 독기가 골수에까지 파고들어 사망에 이르게 만드는 끔찍한 것이었다.

아마도 구십칠 명의 부상자 중 절반은 내일을 보지 못하게 되리라.

“수고했다.”

비록 피난민들이 저 살겠다고 노약자들을 짓밟아 죽인 전적이 있다지만 사망자가 발생했다는 사실에 입이 쓸 수밖에 없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나으리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의 무거운 음성에 존이 한마디 위로를 내뱉고는 돌아서서 다시 피난민 무리에 섞여들었다.

“참회의 눈물을 흘리고 반성했지만 저 존이라는 자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어요. 그는 여전히 교활하고 이기적이에요. 저 자를 정말 신뢰할 수 있을까요.”

가만히 피난민들을 보고 있자니 나지마가 다가와 말을 걸어왔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으니까.”

가축처럼 길러진 피난민들이 여전히 귀족들에게 수탈받던 그때와 같듯 존 역시 마찬가지일 뿐이었다.

“그럼 그때 흘렸던 눈물은 진심이 아니었던 걸까요.”

“아니. 최소한 그가 그때의 일을 후회했던 것만큼은 진실이겠지. 단지 또다시 같은 상황이 되었을 때, 과연 그 참회가 그의 결정에 영향이 있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을 뿐. 그보다 퀘이샤들은?”

지금은 요정과 인간에 대한 고찰을 나누기에 적합한 상황이 아니었다. 당장 퀘이샤들의 피해가 어떤지 묻는 그의 표정에 근심이 가득했다.

“일족의 어린 전사들이 가벼운 부상을 입기는 했지만, 크게 걱정할 건 없어요. 저희는 인간과는 달리 어머니의 가호를 받고 있으니까요.”

“그나마 다행이군.”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그를 보며 나지마가 말했다.

“말과는 달리 전혀 다행스럽지 않은 얼굴이네요.”

당장 오십에 가까운 사망자가 발생했고 앞으로 그 수는 더욱 늘어갈 것이다. 그의 표정이 좋은 게 도리어 이상한 일이었다.

“그런 표정 짓지 말아요. 가장 날랜 일족을 추려 보냈을 때도 절반 이상이 이 땅에서 죽었어요. 당신이 아니었다면 저들이 무슨 수로 이런 지옥에서 살아남았겠어요.”

나지마의 말은 위로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냉철했지만, 현실이기도 했다.

“흠….”

그의 표정이 나아지지 않자 이번에는 나지마가 화제를 전환했다.

“뭔가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지길래 왔더니 진귀한 구경을 하게 되는군요.”

그녀는 여전히 부러진 창을 조물거리느라 여념이 없는 누다르를 보며 눈을 빛냈다.

“고대 정령, 드워프라고 하더군.”

“설마 했더니 정말이었군요.”

말과는 달리 그녀는 생각보다 놀라지 않은 눈치였다. 그게 못내 이상하게 느껴져 그 이유를 물었더니 그녀가 대답했다.

“어머니께서 떠나시기 전에 일족에게 남긴 말씀이 있어요.”

단지 어머니 나무를 언급한 것만으로도 그녀의 표정에 깊은 슬픔이 떠올랐다.

“기나긴 시간 사이로 파묻혔던 이들이 다시 망각의 틈을 뚫고 나타날 테니, 그들로 인해 시간이 거꾸로 흐르기 시작할 거라고요.”

처음에는 그게 단지 잊혀진 존재들이 다시 돌아올 거라는 이야기로 들렸다. 하지만 가만히 그녀의 이야기를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그게 아닐 거라는 생각이 강하게 그를 휘어잡았다.

“그리고 그렇게 돌아온 이들 중에는 마땅히 반겨야 할 존재들이 있겠지만, 그보다 많은 이들은 선의를 갖고 찾아오지 않을 테니 경계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죠.”

김선혁은 예언과도 같은 그 유언의 뜻을 물었지만, 안타깝게도 그녀는 어머니 나무의 유언에 대해 감히 해석을 시도하려 하지 않았다.

“저도 어머니께서 무엇을 말하고자 하셨는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어요. 어머니의 말씀이라는 게 늘 그렇거든요. 그저 기다리면 언제고 그 깊은 뜻을 알게 되는.”

그저 있는 그대로 가슴에 새기고 기억했을 뿐이었다.

“다만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다행스럽게도 그녀는 반겨 맞이해 마땅할 존재로 보인다는 것뿐.”

그녀의 말이 끝나는 순간 누다르의 작업도 끝이 났다.

‘주인이시여.’

성큼성큼 다가온 누다르가 제 키보다 큰 창을 그에게 내보였다.

‘제 몸뚱이의 절반이 뜯겨나가고도 누군가와 함께 다시 전장에 나설 날만 기다린 기특한 놈입니다. 이제 주인님께서 이놈의 한을 풀어주셔야 합니다.’

꽤나 깊은 정이 느껴지는 누다르의 말에 김선혁이 창을 바라보았다.

짜리몽땅한 정령보다는 훨씬 더 컸지만, 창은 그의 기대보다 한참은 작은 모습이었다. 생긴 건 영락없는 기병용 헤비랜스 그 자첸데 정작 그 크기가 2미터도 되지 않는 것이 말 위에서 쓰기에 그다지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드워프들이 만든 무구를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랍니다.’

마뜩잖은 그의 기색을 느낀 듯 누다르가 창을 잡아보라며 그를 채근했다.

“헙!”

창을 건네받은 김선혁은 갑작스레 손바닥을 관통하는 통증에 숨을 들이켰다. 그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미처 파악하기도 전에 창에서 섬광이 터져 나왔다.

팟.

섬광은 금세 사라졌고, 빛이 사라지고 난 뒤에 그를 당황스럽게 만들었던 창은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다.

“이게 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창은 사라진 게 아니었다. 그저 모습을 바꾸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 모습이라는 게 단지 창이 길어진다거나 모양이 슬쩍 변형된 정도가 아니었다.

황당하게도 누다르가 건넨 드워프제 무구는 창이라는 형태를 버리고 단단한 철갑이 되어 있었다.

‘이놈이 주인님 앞에 창의 모습으로 있었던 것은 단지 주인님의 주의를 끌기 위해서였을 뿐입니다.’

“그게 가능해?”

제 몸을 둘러싼 청동색 갑주는 그 둔탁한 빛깔과는 다르게 어디 한군데 결리는 느낌 없이 가볍고 그 착용감이 우수했다. 철갑을 입었다기보다는 가벼운 의복이라도 걸친 듯한 기분이었다.

‘아무리 고대 정령이 만든 무구라고 해도 보통은 불가능한 일이었겠지요. 하지만 이놈은 단순한 무구가 아닌 고대 정령이 깃든 매개체입니다. 비록 시간이 오래 흘러 깃들었던 정령은 수명이 다해 이제 사념만이 남아 흔적도 없게 되었지만 말입니다.’

“아….”

메시지를 통해 고대 정령이 원하는 형태로 모습을 바꾸거나 사물에 깃드는 게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그는 비로소 이 기이한 무구에 얽힌 사연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왜 누다르가 이 창을 볼 때 그토록이나 복잡한 표정을 지어 보였는지 알게 되었다.

‘이놈의 이름은 투르칸 베흐테르(Turkan Behter).’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누다르의 모습이 사라졌다.

하지만 김선혁은 느낄 수 있었다. 누다르는 사라진 게 아니라 갑주 속으로 실체를 옮겼을 뿐이었다.

‘앞으로는 저 누다르가 투르칸 베흐테르 안에 머물며 주인께 힘이 되겠습니다.’

생목에서 전해져 오는 마르지 않는 정기와는 달랐다. 누다르가 완전히 깃든 투르칸 베흐테르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끓어오르는 용암처럼 당장에라도 폭발할 것처럼 그의 온몸을 내달렸다.

“이거라면….”

그 어떤 마수가 몰려와도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은 힘, 정신적인 피로에 다소 탁해졌던 그의 눈동자에 다시 정광이 감돌기 시작했다.

**

투르칸 베흐테르의 힘을 시험해볼 기회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곳은 세상 그 어디보다 흉악한 악의가 지배하는 마왕의 권역, 피난민들의 피와 살을 노리고 달려들 만한 마수라면 질릴 정도로 존재하는 땅이었다.

그리고 김선혁은 수만의 피난민과 일천의 퀘이샤들을 뒤로 하고 가장 선봉에 선 수문장, 몰려드는 마물의 파도에 홀로 몸을 내던졌다.

잠시 창을 내지르며 선두에 선 마물들을 쓸어내는 사이에 그의 몸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수십의 마물들이 창에 꿰뚫려 볼썽사납게 나자빠졌을 무렵에는 이미 그는 완벽한 용인이 되고 난 후였다.

크르르르.

낮게 으르렁거리는 용인 특유의 포효에 주저앉아 몸을 떠는 마물들을 그대로 짓밟으며 힘차게 창을 내지르니 대지가 일어나며 마물들을 집어삼켰다.

순식간에 마물들이 쓸려나가고 그 자리에 여섯 마리의 거대 마수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나하나가 한 지역의 지배자라고 하기에 부족하지 않을 강력한 마수들이었다.

하지만 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마수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크아아아아.

마수들이 사납게 울부짖으며 그에게 마주 달려왔다.

“흡!”

짧게 숨을 들이키며 창을 내지르려는 찰나, 누다르가 깃든 정령의 갑옷이 또 한 번 변화했다.

그렇지 않아도 육중하던 용인의 체구가 더욱 비대해졌다. 단단한 비늘로 둘러싸인 용인이 그 위로 한 겹의 갑옷을 더 입은 듯한 모양새였다.

그리고 그렇게 거대해진 덩치는 마수들을 상대로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다.

끼에에엑!

창으로 공격하고 그마저도 부족하면 그대로 몸으로 들이받는다. 마수들은 그 무식할 정도의 육탄공세에 쉴 새 없이 비명을 질러댔다.

자신보다 훨씬 작은 용인에게 밀려 이리 나뒹굴고 저리 나뒹구는 마수들의 모습이 차라리 애처로울 지경이었다.

그 모든 게 누다르가 깃든 정령의 갑옷 덕이었다.

강인한 용인의 비늘조차도 예사로 떨어져 나가는 과격한 전투 속에서 멀쩡한 것은 오직 투르칸 베흐테르뿐이었다.

신기한 경험이었다.

쏟아지는 마수들의 독액과 사나운 공격 속에서 그는 조금도 위협을 느낄 수 없었고, 오로지 공격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마수들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투르칸 베흐테르의 힘은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고대의 정령이 제 실체를 담은 이 강력한 무구는 그 용도가 무궁무진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놀라운 효용을 확인한 순간은 수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힘의 열세를 느낀 마수들이 한꺼번에 그에게 이를 들이밀고 달려들었을 때였다.

사방을 에워싼 마수들을 보면서도 냉철하게 먼저 처리할 마수들을 추리던 김선혁은 갑작스레 겨드랑이 사이로 이질적인 감촉을 느끼고는 제 몸을 보았다.

“어?”

그런데 그 자리에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될 물체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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