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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9. 잊혀진 자들 (1)
반가움은 잠시였을 뿐, 김선혁은 언제나처럼 뜬금없기까지 한 용의 말에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때?”
[모든 건 처음부터 그리될 수밖에 없었던 것, 거악(巨惡)이 자초하여 앞당겨진 약속의 그날을 말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헤아릴 수도 없는 세월을 경계 밖에서 떠돌아야 했던 잊혀진 이들이 다시 세상에 돌아오게 되었노라.]
여전히 모호하기만 한 말, 하지만 그간 몇 번이나 용에게 약속의 그날에 대해 들었기에 김선혁은 단박에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한때 가장 찬란하게 빛났으나 지금은 완전히 잊혀지고야 만 그 이름들을 세상은 다시 기억해내게 되리라.]
그가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용기병의 병과를 받았던 그날이었다.
‘각성을 축하하네. 전직 병과는 뭐지?’
‘용기병입니다!’
‘용기병? 그게 뭐지? 용? 용을 탄다고?’
‘네.’
‘끙. 오랜만에 또 상급 하나 나오나 했더니….’
‘좋은 거 아닙니까?’
‘아마 좋았겠지. 만약, 용만 이 세상에 있다면 말이야.’
‘어째서!’
‘낸들 아나. 원래 없는 걸. 없는 걸 어떻게 타고 다녀.’
처음으로 용기병에 대해 말했을 때,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를 조롱하고 멸시했다. 그 모든 게 다 용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사람들 탓이었다.
‘진정한 자격을 갖추는 그날까지, 내가 그대를 인도하리라.’
하지만 용은 실재했고, 단지 잊혀졌을 뿐이었다.
“너도 그중에 하나겠군.”
[때가 무르익었으니, 그대는 약속의 그날을 준비하라!]
용의 말을 듣는 순간,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심장에 새겨진 각인이 미친 듯이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쿵쾅쿵쾅.
얼마나 심장이 세차게 뛰었는지 강인한 용인의 심장이 그대로 터져나가지 않을까 염려가 될 지경이었다.
“후우. 후우.”
김선혁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날뛰어대는 심장의 박동을 애써 억눌렀다. 하지만 심장의 난동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고, 그는 억지로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용에게 물었다.
“알아듣게 설명해줘. 내가 뭘 더 준비해야 하지?”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용기병에서 시작하여 용기사에 이르렀고, 아룡도 벌써 다섯이나 수하에 두었다. 이 이상 자신이 더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대는 그대의 기량을 끌어올려 마지막 시험에 대비토록 하라.]
“시험?”
이제까지 몇 번이나 자격을 언급했던 용이기에 예상하지 못한 말은 아니었지만, 시험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으니 답답할 뿐이었다.
[안타깝구나. 원래대로라면 그대와 나의 만남은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 자연스레 이루어질 일이었으나, 지금의 그대는 잊혀진 이들의 귀환을 견디기에는 준비가 충분치 않다.]
거기에 더해 용까지 저리 겁을 주니, 걱정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그 시험이 대체 뭔데?”
[피할 수 없는 선택의 때가 오리라.]
“무슨 선택.”
[나로서는 이 이상 알려줄 수가 없구나.]
용의 말에 인상이 절로 찡그려졌다.
[다만 그대에게 한 가지 당부하건대, 절대로 시험을 가벼이 여기지 말라. 이는 형식적인 것이 아닌 그대가 이제까지 해온 모든 일이 수포로 돌아갈 수도 있는 무거운 것이니, 그대는 목숨을 걸어야 할 것이다.]
엄포를 놓는 용의 태도는 그 어느 때보다 심각했다.
[그대에게 지금까지 말해준 것만 해도 나는 크나큰 부담을 짊어진 것이니, 이 또한 혼돈의 조각이 먼저 율(律)을 어기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노라.]
뭐 하나 속 시원하게 말해주지 않는 용의 태도에 차라리 화까지 날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화를 내거나 억지를 쓰지 않은 건 용의 음성에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던 탓이었다.
대체 무슨 율법이 있기에 하늘 아래 자신만이 존재하듯 광오하던 용마저도 그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고, 또 무슨 시험이기에 이리도 염려를 하는 것인지 도통 짐작이 가지 않았다.
“진짜 환장하겠구만.”
한숨을 내쉬며 그리 푸념을 했더니, 용이 그를 위로했다.
[고난은 클 것이나 그만큼 큰 과실이 그대를 기다리고 있을지니, 진심을 담아 말하건대 그대가 시험을 무사히 통과하여 그 달콤함을 누릴 수 있기를 바라노라.]
“나도 그렇게 되길 바라지.”
그의 말에 용이 다시 한 번 힘주어 격려를 건네왔다.
[그 어떤 고난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불굴의 의지와 용맹이 그대와 함께 하기를.]
그 말을 끝으로 용의 목소리는 끝이 났다.
“큰 과실이라….”
언제 몰려왔는지 자신을 둘러싼 퀘이샤들과 나지마를 본 김선혁은, 결국 용과의 대화 내내 참았던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하지만 용과의 대화가 고생만을 암시한 것은 아니었다.
용은 잊혀진 이들이 돌아옴으로써 혼돈의 파편이 절대로 서부를 벗어나지 못할 거라 말했다. 그가 가장 우려하고 있던 부분이 자연스럽게 해결되는 것이다.
게다가 지금은 한숨만 내쉬고 있기에는 영 상황이 좋지 않았다. 시험이고 나발이고 간에 당장 자신만 바라보고 있는 수만의 피난민과 일천의 요정들부터 안전한 곳으로 옮겨야 했다.
갈 길이 멀었다. 그리고 해야 할 일 역시 산더미였다.
“사람들을 모아주십시오.”
**
“사, 살려주십시오!”
“용서해주세요!”
열 명의 사내들이 바닥에 넙죽 엎드려 필사적으로 살려달라 외쳐댔다. 김선혁이 마물들의 접근을 차단하기 위해 행렬을 떠났을 때, 자신만 살겠다고 수작을 부린 이들이었다.
“하아.”
그런 그들을 보며 그는 가만히 인상을 찌푸렸다.
이미 오는 길에 나지마를 통해 이들이 어떤 거짓말을 했는지 전부 들었던지라 그의 표정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아무리 피난민들을 살리기 위해 악역을 자처하기로 작정한 순간, 감사를 받는 것을 포기한 그라지만 이건 아니었다.
그는 이 비열한 사내들을 살리기 위해 어려운 결정을 했다. 늘 함께 했던 레드번을 돌려보내고 홀로 마물들 사이에 남았다. 물론 위험을 헤쳐 나갈 자신이 있었다고는 하나 표면적으로 목숨을 건 것만큼은 사실이었다.
그런데도 이들이 한 행동은 어땠는가. 어쩌면 위험에 처했을지도 모를 은인의 상황을 모른척했으며, 자신의 치부를 가리기 위해 거짓말을 서슴지 않았다.
그로 인해 도움이 필요했을지도 모를 그는 혼자 외롭게 전투를 해야 했다.
아마도 자신이 돌아올 수 없을 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아니, 자신이 차라리 돌아오지 않기를 바랐을 게 분명했다. 그래야 자신들의 치부가 영원히 가려질 테니까.
그 비열한 짓거리를 생각하면 할수록 치가 떨렸다.
“단지 살고 싶었을 뿐, 다른 뜻은 없었습니다요!”
그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자 사내들이 더욱 필사적으로 애원했다.
“할 말은 단지 그뿐인가?”
하지만 그의 표정은 누그러지지 않았다.
“나지마.”
“네.”
복면 사이로 드러난 나지마의 눈빛은 사내들을 천 갈래 만 갈래 찢어 죽여도 성이 차지 않을 듯 이글거리고 있었다.
“이들 중에 유일하게 사실을 말한 이가 있다고 했지?”
“네. 저 자예요.”
그녀의 손짓을 따라 고개를 돌린 김선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지마가 가리킨 남자는 그가 진즉부터 눈 여겨 보던 이였다. 다른 사내들이 저마다 변명을 하며 살려달라 애원할 때 유일하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던 남자였다.
그리고 남자는 다른 이들이 용서를 빈다고 소란을 떠는 이 순간에도 가만히 그의 처분을 기다리듯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너, 이름이 뭐지.”
“존입니다.”
모든 것을 포기한 듯 체념어린 투로 대답하는 존이 잘못을 빌지 않자 나지마가 못마땅한 듯 나서려 했지만, 그가 손을 들어 제지하자 반쯤 열린 입을 도로 다물며 물러났다.
“너만큼은 정상을 참작하여 유언이라도 남길 기회를 주도록 하지.”
존은 이번에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눈을 질끈 감았을 뿐이었다.
그 어떤 변명도 없는 존을 본 김선혁은 확신했다. 존이라는 사내가 차마 제 잘못을 빌 수조차 없어 벌을 받는 것으로 과오를 청산하려 한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다.
“유언은 없는 모양이군.”
“사, 살려주십시오!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제발 목숨만큼은!”
정작 존은 말이 없는데 사내들이 아우성을 쳐댔다. 아무래도 유일하게 사실을 고한 존에게 마저 그가 유언이니 뭐니 떠들어대자 자신들의 처지가 그보다 좋진 않을 거라 예상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김선혁은 그들의 그러한 예상을 충분히 충족시킬 작정이었다.
“이들을 따로 떨어트려 행렬과 함께하지 못 하도록 하라.”
언젠가 하급 병과의 이방인들 중 반발하는 이들에게 고되고 궂은일을 맡겨 기회를 준 적이 있었다. 처음에는 이들에게도 그런 벌을 주어 반성의 기회를 줄까도 고민했다.
하지만 생각을 고쳐먹어야 했다. 이곳이 만약 안전한 어딘가였다면 모를까, 수만의 피난민들을 통제해야 하는 상황에서 좋지 못한 선례를 만드는 건 더 큰 문제를 키우는 것과도 같았다.
지금은 자비를 베풀 때가 아니었고, 저들은 자비에 감사할 자들도 아니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목이라도 잘릴까 걱정하고 있었는지 생각보다 약한 처벌에 사내들이 반색을 했다. 하지만 그의 말은 아직 끝이 나지 않았다.
“저들에게 물 한 모금도 제공하지 말라. 또한 저들은 더 이상 저주로부터 몸을 지킬 가호를 받지도 못할 것이며, 마물로부터 보호받지도 못할 것이다.”
사내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니, 이내 그의 발치에 무릎 꿇고 더욱 필사적으로 용서를 빌었다. 하지만 그는 결정을 번복하지 않았다.
“제, 제발!”
한참을 애원해도 그가 요지부동이자 사내들의 표정이 악귀같이 일그러졌다.
“빌어먹을 놈! 제깟 놈이 뭔데!”
“내가 뭘 그렇게 크게 잘못했다고! 다친 사람도 없고 잘 됐잖아!”
“잠깐 자리를 벗어난 게 그렇게 큰 죄냐!”
김선혁의 눈빛이 더욱 차갑게 식었다.
인간이 얼마나 추해질 수 있는지 보여주기라도 할 것처럼 저주를 퍼부어대는 사내들의 모습이 지독할 정도로 뻔뻔했다.
“차라리 이 자리에서 죽여!”
“어차피 죽을 거 그냥 죽이라고!”
이제는 완전히 본성을 드러낸 사내들의 악다구니에 그가 싸늘하게 말했다.
“죽여달라고?”
근본적으로 그는 사람을 죽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 비겁하게 굴지 말고 직접 그 창으로 날 죽이라고!”
어쩌면 이들은 그런 그의 성격을 진즉에 눈치챘을지도 몰랐다. 하찮은 평민들을 위해 기꺼이 위험을 감수하는 모습을 보고 성정 무른 철부지라고 멋대로 판단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마 그래서 그가 직접 손을 쓰지 못하는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사내들이 김선혁에 대해 조금도 알지 못했기에 한 오해였다.
그는 살인을 혐오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이라고 판단되는 순간 얼마든 무자비해질 수 있는 존재였다.
이제 와서 손에 피를 묻히는 것을 두려워하기에는 그가 걸어온 길이 워낙에 험난했다.
아마 사내들은 그가 얼마나 수많은 전장을 거쳐 왔고, 얼마나 많은 적들을 제 손으로 처리했는지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었으리라.
“정말로 그렇게 해줄까?”
그의 나직한 한마디에 담긴 살의에 사내들이 숨조차 쉬지 못하고 몸을 달달 떨어댔다.
**
사내들을 질질 끌고 사라졌던 퀘이샤들이 돌아왔다. 그들이 자리를 비운 시간은 짧았지만, 발 빠른 요정들이 사내들을 먼 곳에 버리고 오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수고했습니다.”
김선혁은 퀘이샤들의 노고를 치하해주면서도 사내들에 대해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는 무단으로 대열을 이탈했던 사내들 중 유일하게 끌려나가지 않은 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여전히 체념한 듯 고개조차 들지 않는 존의 모습에 그가 나직하게 명령했다.
“앞으로 너에게는 절반의 식수와 식량만을 줄 생각이다. 어린아이, 노인, 여자, 지쳐 걸음이 늦는 이가 있다면 가장 먼저 달려가 그들을 도와라. 그리고 만약 네가 이곳을 완전히 벗어날 때까지 버텨낸다면 그때 모든 죄를 용서해주마.”
존이라는 사내는 버려진 사내들을 부러워하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고 최소한 살아는 있을 테니, 그것이 죄인의 유일한 위안거리가 되리라.
“차라리 깔끔하게 전부 이 자리에서 본보기를 보이는 게 낫지 않겠어요?”
존마저 사라지고 나자 나지마가 불만스럽게 말했다. 온화하기만 한 줄 알았던 요정이 제 반려와 관련된 일에서 얼마나 냉혹해질 수 있는지 김선혁은 그녀를 통해 알게 되었다.
“어차피 저들 중에 살아서 이곳을 벗어날 이는 없을 테니, 이 정도면 충분해. 그리고 나도 나름대로 교훈을 얻었고 말이야.”
“교훈이요?”
그녀의 질문에 그가 주변을 둘러 보았다.
“히, 히이익!”
갑작스러운 소란에 어느새 몰려들어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피난민들은 그와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고개를 떨구며 몸을 벌벌 떨었다.
약자의 전형적인 모습, 마치 먹이사슬 가장 아래에 놓인 초식동물을 보는 듯한 모습이었다.
“약자라고 반드시 선한 것은 아니라는 교훈.”
그렇게 말하는 그의 눈빛이 어째서인지 아데스덴의 그것을 닮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