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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8. 용기사의 진짜 힘 (2)
용인화를 마친 순간 가장 먼저 느껴진 것은 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고통이었다. 그리고 그 고통이 금세 분노가 되어 배출될 곳을 찾았다.
때마침 눈앞에 적당한 대상이 있었다.
불길에 휩싸여 끔찍한 괴성을 질러대는 흑기사를 보며 김선혁은 발을 내디뎠다.
쾅.
순식간에 가까워진 거리, 그는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더 낮은 곳에 위치한 흑기사의 투구를 움켜잡았다.
흑기사가 검은 기운이 넘실거리며 피어나는 대검을 찔러오며 저항을 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흑기사의 검은 용인의 단단한 비늘에 생채기조차 낼 수 없었고,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흑기사의 머리통을 움켜잡았다.
끼에에엑.
머리를 잡힌 흑기사가 억눌린 신음소리를 내며 발버둥을 쳐댔다.
하찮다. 너무도 하찮다.
위대한 혼돈을 언급하며 거만을 떨던 흑기사가 보이는 무력한 모습에 용인의 투쟁심이 차갑게 식어버렸다.
“네가 약한 거냐.”
상서로운 빛을 가득 머금은 금안이 흑기사를 향했다.
“아니면 내가 강한 거냐.”
흑기사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저 신음을 내뱉으며 온몸을 비틀어댔을 뿐이었다.
“네놈이 그걸 알 리가 없지.”
싸늘하게 한마디를 내뱉은 김선혁이 흑기사의 투구를 움켜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 우악스러운 손길에 흑기사의 머리통이 몸통과 너무도 쉽게 분리되었다.
피는 나오지 않았다. 그저 뭉클거리며 검은 기운이 흘러나왔을 뿐이었다.
사아아아아.
그 이질적인 광경에 김선혁은 무심코 투구 안쪽을 살펴보았다.
없다. 아무 것도 없다.
살아 움직이는 존재라면 응당 있어야 할 머리가 그곳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투구 안을 가득 채운 것이라고는 단지 텅 빈 어둠뿐이었다.
“음?”
그 공허한 어둠을 바라보고 있던 그는 문득 알 수 없는 위화감에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것도 없는 어둠 너머에서 무언가가 자신을 바라보는 듯한 감각, 그런데 그게 착각이 아니었다.
번쩍.
기이할 정도로 깊어 보이는 투구 저 안쪽에 붉은 선이 그려진다 싶더니, 이내 그것이 섬뜩한 적안이 되었다.
히죽.
붉은 눈동자가 소름끼치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건 또 뭐….
적안의 웃음이 진해질수록 스멀스멀 불길함이 피어올랐다. 하지만 왜인지 그는 그 거북스러운 눈으로부터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마치 빨려 들어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네가 원하는 건 뭐지?]
음산한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깨닫기도 전에 투구 속에서 흘러나온 어둠이 그를 집어삼켰다.
**
괴성과 폭발음을 찾아 달려온 나지마는 눈앞에 펼쳐진 끔찍한 광경에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온 사방이 시체였다. 족히 1천은 넘어 보이는 마물들의 시체가 시산혈해를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나지마가 그리 놀란 건, 내를 이룬 마물들의 피 때문도 아니었고, 끝도 없이 펼쳐진 마물들의 흉물스러운 잔해 때문도 아니었다.
금빛 찬란한 비늘에 둘러싸인 거대한 용인, 그리고 용인의 상체를 반쯤 집어삼킨 어둠. 그녀는 용인이야말로 자신이 애타게 찾던 ‘그’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비명을 질렀다.
“아, 안 돼!”
꿈틀거리며 몸을 키운 어둠이 마침내 마지막 한 점 금빛 서기마저 집어삼키는 것을 본 그녀가 시위에 살을 걸고 힘차게 당겼다.
하지만 그녀는 끝내 팽팽하게 당겨진 시위를 놓을 수 없었다. 이미 하나가 되어버린 어둠과 용인을 구분하여 노리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아….”
그녀의 양손이 힘없이 늘어지고, 시위에 걸려있던 살이 툭 하고 떨어져 발치를 뒹굴었다.
마기보다 몇 배는 농밀한 악의에 완전히 집어삼켜진 그의 모습에 그녀는 차라리 악몽이라도 꾸는 듯한 기분이었다.
“이럴 수는 없어. 이럴 수는 없어.”
자신의 평생을 바칠 반려이기 이전에 어머니의 유지를 전해 받은 그를 이렇게 잃는다는 건 일족의 재앙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바란다고 해서 어둠이 다시 그를 토해낼 리는 없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둠은 탐욕스럽게 몸을 불려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평원의 한 귀퉁이를 잠식했을 뿐이었던 어둠이 어느 순간이 되자 평원에 널린 마물들의 잔해를 전부 집어삼킬 정도가 되었다.
“알려야 해.”
반려를 잃은 상실감에 눈물을 흘리는 건 그 뒤에 해도 늦지 않다. 나지마는 떨어진 살을 주워 일족이 있을 곳으로 향했다.
아니. 향하려 했다.
힘차게 내딛으려던 발을 멈춰 세운 그녀가 하늘을 바라보았다.
마기로 오염된 보랏빛 하늘 위로 느릿느릿하게 맴도는 붉은 괴수가 있었다.
레드번이었다.
용기사와 한 몸이나 다름이 없는 레드번은 제 주인을 삼킨 어둠을 보면서도 결코 조바심을 내지 않았다. 그저 느릿느릿하게 한 자리를 맴돌았을 뿐이었다.
“설마….”
주인과 심령으로 연결된 아룡이 저리도 태연하다는 건, 그녀의 우려와는 달리 그의 신변에 크게 문제가 없다는 의미나 다름이 없었다.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달은 그녀가 다시 어둠을 바라보니, 조바심 탓에 제대로 보지 못했던 광경들이 하나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모든 것들을 종합해본 결과 나지마는 그가 무사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쩌적.
그런 그녀의 예상을 확인이라도 해주듯 흠 없는 어둠에 작은 선이 생겨났다. 그리고 작게 그어진 선은 이내 거대한 균열이 되었고, 그 사이를 통해 찬란한 금광이 새어나왔다.
마치 깊은 밤 어둠을 몰아내는 햇살처럼 빛이 어둠을 흩어냈다.
그리고 마침내 완전히 어둠이 사라졌을 때, 평원에는 마물들의 잔해도 어둠도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오직 우뚝 선 용인만이 그 자리에 존재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하늘까지 치솟은 금빛 서기를 보고 달려온 것인지 퀘이샤들이 나타나 나지마에게 자초지종을 물었다.
하지만 그녀라고 정확한 사정을 알 리가 없었다. 그녀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어둠이 용인을 반쯤 먹어치운 상태였고, 단지 그것만으로 어둠의 정체를 파악해내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잠시….”
중구난방으로 떠들어대던 일족을 비교적 나이를 먹은 노 퀘이샤가 제지했다.
힐끗.
노 퀘이샤가 턱짓으로 나지마를 가리켰다.
덜덜.
뒤늦게 긴장이 풀린 것인지 몸을 오들오들 떠는 그녀의 모습을 본 퀘이샤들이 입을 다물었다.
퀘이샤들에게 반려란 평생 동안 영혼을 나눌 유일한 존재였고, 반려를 잃는다는 건 실로 끔찍한 일이었다. 반려를 잃은 퀘이샤들 대부분이 수명을 다 누리기도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걸 생각해보면 방금 전 나지마가 느꼈을 공포는 그들이 상상한 것 이상으로 끔찍한 것이리라.
휘청.
나지마가 몸을 비틀댔다. 일족의 사내 하나가 황급히 그녀를 부축했지만, 그녀는 가만히 손을 저어 도움을 거절했다.
그녀에게는 제 스스로를 추스르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 남아 있었다.
나지마는 비칠거리며 김선혁에게 향했다. 다른 퀘이샤들도 그녀의 뒤를 따라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가장 먼저 제 반려의 무사함을 확인했다.
다행스럽게도 용인의 금빛 거체는 생채기 하나 없이 멀쩡했고, 그 빛에 한 점 어둠도 섞여들지 않았다.
“선혁.”
건재한 반려의 모습에 나지마가 안도하며 그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김선혁은 그녀의 말에 대답을 하는 대신 북쪽 어딘가를 노려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혼돈의 파편을 만났다.”
나지마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그를 보았다. 다시 살펴보아도 그가 혼돈에 잠식된 기미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혼돈은….”
그의 나직한 음성에 나지마가 마른침을 삼키며 가만히 그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런데 이후 이어진 말은 그녀가 예상했던 것과는 한참은 다른 엉뚱한 말이었다.
“더럽게 말이 많은 놈이더군.”
**
처음 어둠이 덮쳐들었을 때까지만 해도 김선혁은 위기감을 느꼈다. 하지만 이내 제 몸을 덮은 어둠이 자신에게 조금도 영향을 미치지 못함을 깨닫고는 느긋하게 어둠을 관찰했다.
사실 관찰할 것도 없었다. 어둠은 말 그대로 어둠이었을 뿐, 새카만 빛 어디를 보아도 똑같은 모습이었으니까.
특이한 것이 있다면 머릿속에 들려오는 음산한 목소리뿐이었다.
[나를 받아들여라.]
마음 깊숙한 곳의 욕망을 살살 건드리는 음성에 김선혁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럼 네가 원하는 모든 것을 주마.]
굳이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정도는 알 수 있었다.
혼돈의 파편.
흑기사가 언급했던 혼돈의 파편이 분명했다.
어둠의 정체를 깨달은 순간 눈앞에 펼쳐진 새카만 세상이 변화했다. 그리고 많은 것이 펼쳐졌다.
벌거벗은 미녀와 산더미처럼 쌓아올린 재화, 그 아래 엎드린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 그 모든 게 환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심코 손을 뻗고야 말 정도로 생생한 광경이었다.
어지간한 이들이라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돌아가고 말았으리라.
그만큼 혼돈이 보여준 환상은 인간의 욕망을 자극하는 노골적인 것이었다.
“내가 원하기만 하면 뭐든 줄 수 있다는 건가?”
[그 무엇이든.]
그가 흥미를 보이는 듯하자 혼돈의 목소리가 한층 더 낮아졌다.
“그거 참 흥미가 동하는 소리네.”
[말하라. 모든 것을 주마.]
혼돈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메아리를 치듯 울려왔다.
“그래? 그럼 하나만 좀 부탁하자.”
눈앞의 광경이 한층 더 어지러워졌다.
“너랑 마왕.”
마치 그가 깊은 생각을 하지 못하게 방해라도 하려는 듯한 모습이었다.
“둘이 좀 어디 찌그러져서 안 보였음 좋겠는데.”
그 순간 음산한 메아리가 뚝, 하고 끊겼다.
“너하고 마왕만 아니었으면 진즉에 내 소원은 이뤄졌어. 이 빌어먹을 놈아.”
[나는 네가 상상할 수도 없는 힘을 줄 수 있….]
김선혁은 혼돈의 말을 끝까지 들을 생각이 없었다.
“그렇게 상상할 수도 없는 힘을 준 흑기사가 지금 누구 손에 어떻게 됐더라?”
그의 말에 혼돈이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난 괴물이 되고 싶은 생각은 요만큼도 없어.”
물론 용인화를 이룬 그의 모습이 인간이라고 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었지만, 그가 생각하기에 용인은 속이 텅 빈 반인반마보다는 인간적이었다.
최소한 용인은 살아있는 존재였으니까.
“그러니까 이제 좀 꺼져 줘.”
[다시 한 번 생각….]
“거 참 구차하네. 위대한 혼돈 씩이나 되는 놈이 말이야.”
끈덕지게 달라붙는 혼돈의 음성에 김선혁이 비아냥거렸다.
[네놈은 반드시 후회하게 될 것이다.]
그는 끝까지 삼류 악당이나 할 법한 대사를 읊어대는 혼돈을 비웃으며 온몸의 기세를 끌어올렸다.
파앗.
금빛 찬란한 서기가 순식간에 어둠을 찢어발기고, 눈앞에 다시 평원이 드러났다.
김선혁의 무사함을 확인한 나지마가 안도하고, 퀘이샤들이 사악한 혼돈을 만나고도 이리 멀쩡하게 돌아온 그를 칭송했다.
하지만 그는 지금 이 순간 그들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이런 식이라면 어지간한 이들은 혼돈의 유혹에 넘어갈 수밖에 없다.
김선혁은 스스로가 혼돈의 유혹을 이겨낸 것이 혼자만의 힘이 아니라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만약 자신이 용기사가 아니었다면, 자신의 반려가 용이 아니었다면 혼돈이 보여준 환상이 환상이라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덜컥 받아들였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만큼 혼돈은 인간이 원하는 그 모든 욕망에 통달한 존재였다.
단지 혼돈이 간과한 것이 있다면, 용기사의 정신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단단하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다른 인간들이라면 어떨까.
모르긴 몰라도 열 중 여덟은 혼돈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넘어갈 것이다.
흑기사 역시 그렇게 혼돈의 꾐에 넘어간 존재였다.
‘사자(死者)들의 왕 박상진.’
‘홍염(紅焰)의 마도사 이서라.’
‘섬광(閃光)의 기사 한성웅.’
‘암흑(暗黑)의 사제 조철현.’
노르딕에 반란이 일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명성을 떨치기 시작한 네 명의 이방인, 그들은 모조리 상급 병과를 얻은 강자들이었다.
그리고 그중에 섬광의 기사 한성웅이 바로 그가 방금 전에 상대했던 흑기사의 정체였다.
김선혁이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던 것은 혼돈이 그를 들여다보았을 때, 그 역시 혼돈의 속을 들여다보았기 때문이었다.
“만약 혼돈이 중부와 동부로 눈을 돌린다면….”
끔찍했다. 욕망에 눈이 먼 초인들과 군주들이 혼돈의 하수인을 자처하는 세상, 그런 때가 온다면 지금의 재앙은 비교도 할 수 없는 진짜 재앙이 찾아오게 되리라.
생각에 잠겨 있던 그의 머릿속으로 반가운 음성이 파고들었다.
[그대의 우려는 실로 옳다.]
오랜만에 들려온 용의 음성에 김선혁이 상황도 잊고 반색을 했다.
“용아!”
경망스러운 호칭에 용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못 들은 척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혼돈은 당장 서부를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니.]
확신에 찬 음성으로 용이 선언했다.
[마침내 때가 도래했기 때문이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