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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7. 용기사의 진짜 힘 (1)
김선혁은 그야말로 미쳐 날뛴다는 게 무엇인지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크아아악!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마물들이 비명을 지르며 떠밀렸고,
콰직.
창을 한 번 내지를 때마다 하나의 마물이 쓰러졌다.
마물들의 목숨을 앗아간 것은 화려한 기교도 아니었고, 강력한 스킬도 아니었다. 투박할 정도로 단순하고 간결한 찌르기였다.
창을 잡은 손을 당기며 한 발을 내딛는다. 그리고 다시 반대편 발을 내디디며 힘차게 창을 내찌른다. 그 단순한 동작만으로도 마물들은 속절없이 죽어 나갔다.
그가 염려했던 레드번의 부재로 인한 전력저하는 조금도 드러나지 않는 엄청난 위용이었다.
“이게 대체….”
하지만 정작 그렇게 엄청난 힘으로 마물들을 찢어발기면서도 정작 당사자의 얼굴은 얼떨떨하기만 했다.
한도 끝도 없이 힘이 솟았다. 활기라는 말만으로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거력이 온몸에 충만했다.
그게 단지 비유가 아니었던가.
땅에 발을 붙이고 있는 동안에는 끊임없는 활력을 얻을 수 있을 거라더니, 그게 그냥 비유가 아니었다.
땅의 정령왕이 건네준 선물의 진가는 대지에 발을 붙이고 서 있을 때 발휘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상황에 떠밀려 레드번을 떠나보낸 지금, 김선혁은 원 없이 그 효험을 만끽할 수 있게 되었다.
몸이고 정신이고 할 것 없이 끝도 없이 솟구치는 고양감 속에서 김선혁은 감탄을 내뱉었다.
이거 완전 사기잖아.
몸이 지치지 않는다는 게 이렇게 대단한 것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벌써 수백 번이 넘게 창을 내질렀다. 평소라면 입에 단내가 올라왔을 정도로 과격하게 발을 놀려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치기는커녕 싸울수록 활력이 솟구쳤다.
이러다가는 적을 유인하기도 전에 마물들의 씨가 마르지 않을까 염려해야 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새삼 지금의 감각을 억지로 흩어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지금의 이 충만함을, 이 감각을 조금 더 이어가고 싶었다.
김선혁은 창을 꽉 움켜잡고 짧게 숨을 내쉬었다.
기사들과의 전투를 대비하여 익혀두었던 기형적인 창술이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했다.
발을 내디뎠다.
늘 탈것에 올라 싸워왔던 탓에 다소 어지러웠던 발걸음이 효과적으로 창의 수발을 돕기 시작했다.
손을 내뻗었다.
허리와 어깨, 그리고 손끝까지 알게 모르게 붙었던 군더더기와도 같은 움직임이 보다 간결하게 변화했다.
발끝을 타고 알 수 없는 힘이 솟아올랐다. 다리를 지난 기운이 허리를 타고 내달려 마침내 창끝에 닿았다.
쾅!
그 순간 창끝에 꿰인 마물의 육신이 그대로 폭발해버렸다.
“아….”
손끝에 맴돌다 이내 완전히 흩어져버린 기운, 그 여운이 너무도 애틋해 김선혁은 이곳이 전장이라는 것도 잊고 탄성을 내뱉고 말았다.
그 순간 이제까지 쉼 없이 움직이던 김선혁의 창이 처음으로 멈췄고, 남아있던 마물들이 무방비한 그를 향해 아귀처럼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그의 몸이 마물들의 흉물스러운 몸뚱이에 가려져 보이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그건 정말 찰나에 불과했다.
콰아아!
그를 덮쳐들었던 마물들이 엄청난 폭음과 함께 산산히 흩어져 버렸다.
그리고 흩날리는 마물들의 육편 속에서 다시 드러난 김선혁은 방금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서부에 온 뒤로 쉬지 않고 싸워왔던 탓에 엉망으로 깨어지고 우그러졌던 갑주는 온데간데없었고, 난생처음 보는 붉은 갑주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갑주의 빛깔이 생목을 깎아 만든 창과 완전히 똑같았다.
‘과거 우리 일족에 카타프락토스(Cataphractos)라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단단한 나무 갑옷과 장창으로 무장하고 일각수(一角獸, Unicorn)에 올라탔던 일족의 전사들은 당시 용맹함의 상징이었지요. 이 창은 카타프락토스들이 사용하던 애병을 흉내 낸 것입니다.’
마호메드가 말했던 용맹한 기수, 카타프락토스의 모습이 길고 긴 시간을 뛰어넘어 이 자리에 모습을 드러냈다.
“으음.”
일백의 마물들을 단번에 육편으로 만들어버린 김선혁이 휘청이다 겨우 균형을 잡았다. 한꺼번에 마물들을 처리하느라 상당한 기력을 소모한 듯한 모습이었다.
크르르.
끔찍한 폭발 속에서도 살아남은 세 마리의 마수들이 그 모습을 보고는 눈을 번뜩이며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어딘가에 숨어 그가 지치기만 기다리고 있던 거대한 악의가 모습을 드러냈다.
걸렸구나!
모든 기력을 소진한 것처럼 맥없이 마수들의 공격에 떠밀리던 김선혁이 실눈을 뜨고 멀리 피어오르는 검은 먼지구름을 노려보았다.
“음?”
그런데 적의 모습이 그가 상상했던 것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기이할 정도로 새까만 갑주에 제 키만 한 대검을 움켜쥔 흑기사, 농밀한 악의에 흉물스러운 마수를 떠올렸건만 정작 모습을 드러낸 적은 평범한 인간이었다.
단지 특이한 점이 있다면 타고 있는 말과 무장이 검은색 일색이었다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적이 평범한 기사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해서 방심할 수는 없었다. 그가 느꼈던 거대한 악의는 이제껏 상대했던 그 어떤 마수의 마기보다 불길하고 사악했으며, 지금에 와서는 한층 더 지독하게 변해 있었다.
정령왕의 힘이 깃든 나무 갑옷 안쪽까지 파고드는 농밀한 악의에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아직 아니야.
당장에라도 마수들을 뿌리치고 흑기사를 향해 창을 겨누고 싶었지만, 그는 애써 솟아오르는 투쟁심을 억눌렀다.
그는 흑기사가 충분히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조금만 더.
마수들의 맹렬한 공격에 연신 뒷걸음질을 치면서도 한시도 흑기사를 시야에서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흑기사가 더 이상 몸을 돌려 달아나지 못할 정도로 접근했을 때, 김선혁의 기세가 돌변했다.
선빵필승.
언제나 그가 신념처럼 떠받들던 필승의 전략, 그는 강하게 창을 휘둘러 마수를 떨쳐내고는 창을 겨드랑이에 끼웠다.
수많은 기사들을 무릎 꿇렸던 단기돌격의 자세, 그의 몸을 중심으로 광풍이 불기 시작했다.
“윈드….”
나직한 읊조림과 함께 창의 방향을 고정했다.
“피어싱.”
말을 끝맺으며 발을 내디뎠다.
당장에라도 그를 짓밟을 것처럼 대검을 겨누고 달려들던 기사가 검 끝에 흑광(黑光)을 피워올렸다.
쐬에에엑.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수백의 마물을 학살하며 가다듬어진 찌르기가 흑기사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대검을 감산 흑광과 창끝에 어린 대지의 기운이 부딪쳤다. 하지만 흑광은 그 심상찮은 기세에 비해 허무할 정도로 쉽게 사그라들었고, 발가벗겨진 대검이 창에 밀려 높게 튕겨 나갔다.
양손으로 잡은 검이 허공으로 치솟은 덕에 훤히 드러난 가슴, 김선혁의 창이 그렇게 무방비로 드러난 흑기사의 흉갑을 파고들었다.
콰직.
갑주를 깨고 생살을 파고드는 감각이 손끝을 타고 전해져 왔다.
예상과는 달리 너무도 손쉽게 제 심장을 내어준 흑기사, 그러나 김선혁에게는 강적의 급소를 꿰뚫었다는 기쁨은 없었다.
검은 투구 속에서 섬뜩하게 빛나는 붉은 안광을 본 순간,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턱.
가슴께를 꿰뚫린 흑기사가 손을 들어 그의 창을 움켜잡았다.
꽈악.
그리고는 힘을 주어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까드득.
깨어져 나간 흉갑이 창을 긁는 소리가 끔찍했다.
김선혁은 순간적으로 창을 비틀며 상대의 상처를 벌려 출혈을 유도했다. 하지만 흑기사는 가슴의 상처가 헤집어지는 상황에서도 창을 잡아 계속해서 제 몸 뒤로 통과시키는 기행을 멈추지 않았다.
상처가 더욱 벌어지며 창이 통과하는 속도가 빨라졌다.
어느 순간이 되자 검은 투구 속에서 흘러나오는 악취 나는 숨결이 느껴질 정도가 되었고, 그 순간 흑기사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네가 김선혁이냐?”
마치 지옥의 망자 수십이 동시에 흐느끼는 듯한 끔찍한 음성에 김선혁은 인상을 찌푸렸다.
이 세상에서 물려받은 드라흔의 이름이 아닌 저쪽 세상의 이름으로 이쪽을 불렀다는 건,
“이방인이군.”
상대가 이방인이라는 뜻이었다.
“언젠가 꼭 한번 만나보고 싶었다.”
“그런 것 치고는 바로 안 튀어나오고 꽤 오래 주변을 맴돌았지.”
그가 이죽거리자 흑기사가 한층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넌 너무 위험하니까.”
“신중한 놈이네. 근데 어쩌나. 기껏 기회를 노렸는데 바로 이런 꼴이 돼서.”
“이게 끝이 아니라는 걸 알 텐데.”
흑기사의 말에 김선혁이 싸늘하게 대꾸했다.
“그건 네 생각이고.”
그는 창을 움켜잡은 손에 힘을 쥐고 힘차게 비틀었다. 그 우악스러운 손짓에 창이 크게 움직이며 흑기사의 상처가 더욱 벌어졌다.
주먹 하나가 오고 갈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랗게 벌어진 구멍, 그런데 사람이라면 응당 나왔어야 할 피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피 대신 흘러나오는 건 검은 연기뿐이었다.
“완전히 마기에 침식됐군.”
인간과는 완전히 궤를 달리하는 기괴한 육신, 김선혁은 상대가 인간을 벗어난 괴물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기?”
흑기사가 그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
“이건 마기 따위가 아냐.”
그렇게 말한 흑기사의 몸이 투둑거리는 기분 나쁜 소리와 함께 비틀린다 싶더니, 김선혁의 강력한 돌격에 앞발이 부러져 무릎을 꿇고 있던 흑마와 합쳐져 버렸다.
“보다 근원적이고 순수한 힘.”
반인반마(半人半馬), 기괴한 괴물로 변해버린 흑기사의 얼굴 가리개가 덜그럭거리며 움직였고, 그때마다 바이저 아래에 돋아난 날카로운 이빨이 섬뜩하게 빛이 났다.
“위대한 혼돈이다.”
부러졌던 앞발을 곧게 편 흑기사가 붉은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조금 전보다 몇 배는 농밀해진 악의는 이제 안개처럼 넘실거리며 실체를 갖고 김선혁을 짓눌렀다.
하지만 정작 끔찍한 악의에 노출되었음에도 그는 태연하기만 했다.
“지금 그게 완전체야?”
“뭐?”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장난스러운 어투.
“그게 변신 끝난 거냐고.”
흑기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내가 왜 네가 본체로 돌아가는 걸 그대로 보고만 있었는 줄 알아?”
그 역시 흑기사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드라카네이드(Drakanade)”
나직한 한마디가 끝이 나는 순간 김선혁의 온몸이 찬란한 금광에 휩싸였다. 그리고 다시 빛이 걷혔을 때, 그곳에는 반인반마로 변한 흑기사를 내려다보는 거대한 용인이 있었다.
“궁금했거든.”
쭉 찢어진 주둥이 사이로 울부짖는 짐승처럼 사나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갑작스레 커져 버린 몸 탓에 이리저리 몸을 비틀어 감각을 되살리던 그가 이내 만족스럽게 웃었다.
“원래는 이런 성격 아닌데.”
위기감을 느낀 것인지 가슴께를 꿰뚫은 창을 재빠르게 밀쳐낸 흑기사가 순식간에 거리를 벌리고 대검을 겨누었다.
“너한테 좀 시험해봐야겠어.”
유황 내 나는 숨결이 강해진다 싶더니, 어느 순간이 되자 억센 턱 사이로 타닥거리며 불꽃이 튀기 시작했다.
“지금 내가 얼마나 강한지 말이야.”
“크아아아아아!”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흑기사가 끔찍한 괴성을 내지르며 기세를 북돋웠다. 하지만 그런 흑기사의 포효는 보다 강렬한 용인의 포효에 완전히 먹히고 말았다.
크아아아악!
세상 그 어느 짐승보다 사납고 웅혼한 포효, 그와 동시에 용인의 주둥이에서 화염이 쏟아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