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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 푸어-205화 (205/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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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6.대탈주 (2)

일천의 마물을 홀로 상대하면서도 그는 다소 여유가 있어 보였다. 날개 달린 이상한 괴물을 타고 다닐 때부터 한 가락 하는 놈이라는 건 짐작했지만, 그의 실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하지만 그런 여유도 다른 괴물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거대하고 흉악한 괴수들이 전투에 끼어들면서 사라져버렸다.

그야말로 악전고투.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날개 달린 괴물을 탄 그는 착실하게 마물들의 수를 줄여갔다.

“저게 그 말로만 듣던 기사라는 족속인가?”

“무지막지하구만.”

사내들은 자신들이 이곳까지 기를 쓰며 달려온 목적마저 잊고, 땅이 꺼지고 바위가 부서지는 전투에 감탄하고 말았다.

“근데 하늘로 도망치면 그만일 텐데, 왜 저렇게 용을 쓰지?”

이상했다. 그가 탄 날개 달린 괴물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도망칠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왜 저렇게 기를 쓰고 땅에 들러붙어 싸우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사내들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전투의 박력에 시선을 빼앗겼을 때, 가장 먼저 그가 하늘로 도망치지 않는 이유를 깨달은 것은 존이었다.

“설마….”

존은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른 한 가지 가정을 스스로도 납득할 수 없었던 탓이다.

“그럴 리가 없어. 지들밖에 모르는 귀족 새끼들이 뭐가 아쉬워서….”

하지만 애써 자신의 망상을 털어내려고 해도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괴물들 중 상당수는 싸우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그보다 많은 수의 괴물들은 끊임없이 나아갔다. 그리고 귀족 놈은 거대하고 흉폭한 괴물들과 악전고투를 하면서도 끊임없이 괴물들의 이동을 방해하고 있었다.

마치 그 모습이 괴물들의 앞을 막아서고 있는 듯한 모양새였다.

“아….”

가만히 괴물들이 나아가는 방향을 가늠해보던 존이 신음을 내뱉었다.

괴물들은 존과 사내들이 뛰어왔던 방향을 향해 꾸역꾸역 밀고 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존은 그 끝에 무엇이 있는지 뒤늦게 깨달았다.

피난민. 신령스러운 숲을 빠져나온 수만의 사람들, 그곳이 바로 괴물들이 향하는 곳이었다.

보고 있어도 믿기지 않는 광경, 황당함에 웃음이 새어 나올 지경이었다.

“멍청한 건가?”

존의 웃음을 오해한 사내들이 우직하게 괴물들과 드잡이질을 하는 귀족을 비웃었다.

하지만 그런 그들도 오래지 않아 눈앞에서 벌어진 전투의 이유를 알게 되었다.

“지금 내가 생각하는 게 맞는 건 아니겠지.”

“나도 지금 믿기지가 않는데….”

이따금 대열을 떠나 어디론가 사라지는 그를 볼 때마다 사내들은 안전한 피난처를 찾기 위한 탐색 때문이라 생각했었다.

“설마 그럼 여태까지….”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이제껏 이 지옥 같은 곳을 지나면서도 대열이 한 번도 습격을 받지 않은 건, 그들이 운이 좋았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가 먼저 나서서 괴물들을 처리해왔던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그들이 가장 먼저 느낀 것은 그의 숭고하고 헌신적인 행동에 대한 깊은 감명과 감사가 아닌 막막함이었다.

“어… 그럼 이제 우린 어떻게 하지?”

안전한 피난처일 줄 알고 찾아온 곳이 사실은 괴물들이 넘쳐나는 끔찍한 전장이었다.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내들은 갈 곳을 잃고 갈팡질팡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꾸물거리는 사이, 그와 괴수들의 전투에 밀려나 슬금슬금 눈치를 보던 작은 괴물들이 그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크르르르.

우왕좌왕하는 사내들을 본 괴물들은 보다 손쉬운 사냥감의 등장에 군침을 흘리며 낮게 목을 흘려댔다.

“어?”

뒷목이 빳빳하게 굳어오는 소름 끼치는 감각에 고개를 돌린 존은 뒤늦게 이쪽을 향해 슬금슬금 다가오는 괴물들을 발견하고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뭐해?”

“갑자기 왜 그….”

존의 표정을 본 사내들이 고개를 돌렸다가 괴물들을 발견하고는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미친… 우리 망한 것 같은데….”

“이런 빌어먹을….”

척 보기에도 날렵해 보이는 몸이 맨발로 달려서 뿌리치기에는 힘들 것 같았고, 사내들은 자신들이 죽을 자리를 찾아왔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는 절망했다.

“뭐해! 멍하니 있을 시간에 도망쳐!”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건 존이었다. 존은 괴물의 악의에 몸이 굳어버린 사내들을 다그치고는 그대로 몸을 돌려 달아났다.

크르릉.

사냥감이 달아나는 것을 본 괴물들이 발작적으로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그게 신호가 되었다.

이제까지만 해도 느릿느릿 이동하던 괴물들이 앞서 달리기 시작한 괴물들을 따라 덩달아 내달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왜….”

한창 정신없이 자신을 둘러싼 세 마리의 마수들을 상대하고 있던 김선혁은 이제까지만 해도 비교적 느긋하게 움직이던 마물들이 갑자기 내달리는 것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피난민?”

그리고 그 마물들이 향하는 곳에 꽁지가 빠져라 달아나는 일단의 사내들을 발견하고는 얼빠진 얼굴을 해 보였다.

저들이 왜 여기에….

머릿속에 떠오른 의문이 채 풀리기도 전에 몸이 먼저 반응했다. 한차례 창을 내질러 마수들을 떨쳐낸 그가 레드번의 고삐를 잡아당겼다.

빼애애액.

레드번이 날카롭게 울부짖으며 하늘 높이 날아올라 순식간에 마물들을 지나쳐 사내들을 따라잡았다.

“나, 나으리….”

지은 죄가 있었던 탓인지 그를 발견한 사내들은 저승사자라도 본 것처럼 놀란 얼굴을 해 보였다.

“이야기는 나중에!”

김선혁은 그런 그들을 무시하고는 레드번 위에서 뛰어내렸다.

“올라타!”

아무런 능력도 없는 평범한 사람에 불과한 사내들은 죽었다 깨나도 마물들을 뿌리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김선혁은 짧은 시간 동안 수많은 고민을 했다. 하지만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그는 이 멍청한 자들을 살리기로 했다.

“레드번! 이들을 태워서 나지마에게!”

성질 고약한 와이번은 주인이 아닌 다른 자들을 제 등 위에 태우는 게 못마땅한지 날카롭게 울며 불만을 토했지만, 그가 눈을 부라리자 끝내 명령을 거부하지는 않았다.

다만 명령을 수행하는 방식이 다소 거친 건 어쩔 수 없었다.

“으, 으악!”

“사, 살려줘!”

레드번은 날카로운 주둥이로 사내들을 덥석 물어 잡는다던가, 마물들의 살점과 체액이 고스란히 묻어있는 발톱을 세워 깡마른 사내들을 둘, 셋씩 한꺼번에 움켜잡는 식으로 그의 명령을 수행했다.

덕분에 할퀴어지고 깨물린 사내들이 죽겠다고 비명을 질러댔지만, 김선혁도 레드번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서둘러! 빨리 돌아와야 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레드번이 훌쩍 날아올라 저 멀리 사라졌다.

“일 한 번 더럽게 꼬이네.”

그렇게 사내들을 돌려보낸 김선혁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상황이 좋지 않았다.

아직 처리하지 못한 마물들의 수가 삼백 이상이었고, 하나하나가 마물들을 전부 합쳐놓은 것보다 강한 거대 마수가 무려 셋이나 남아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은 레드번이라는 가장 믿음직한 파트너를 잃고 말았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그게 아니지….”

만약 그뿐이었다면, 오늘의 전투는 그저 다소 힘들고 고된 기억으로만 남았을 것이다.

그는 아직 용기사의 진짜 힘을 꺼내지 않았고, 얼마든 이 난관을 헤쳐 나갈 여력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표정은 좋지 않았으니, 저 멀리서 조금씩 몸을 불려가는 불길한 기운 때문이었다.

어머니 나무가 사멸했던 그날 그의 감각에 잡혔던, 거대한 악의가 어디선가 이곳을 지켜보고 있었다.

약아빠진 놈.

필시 상대는 이쪽이 열세를 보이다 가진 패를 모두 꺼내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언젠가 마왕의 땅 외곽에서 마주했던 교활한 마수, 만티코어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김선혁은 이번에도 만티코어를 상대했던 그때처럼 차라리 상대를 유인하기로 작정했다.

갑작스레 나타난 피난민들을 대피시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레드번을 떠나보낸 지금의 그는 미지의 적이 보기에 충분히 위기에 빠진 것처럼 보이리라.

제법 그림이 괜찮았다.

의도치는 않았지만 적을 유인해내기에 충분한 상황이 된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이런 상황에서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소심한 상대를 끌어내기 위한 마지막 결정타뿐이었다.

그리고 그건 아주 약간의 연기력만 있으면 손쉽게 만들 수 있었다.

김선혁은 해일처럼 덮쳐오는 마물들의 파도에 몸을 내던졌다. 그리고는 정신없이 창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

괴물은 마치 귀찮다는 듯이 착지하기도 전에 사내들을 패대기쳤다.

“왁!”

당연하게도 아무런 준비도 하지 못했던 존과 사내들은 사정없이 바닥을 나뒹굴어야 했다.

“내 팔! 내 팔!”

“으아아아! 살려줘!”

사내들이 괴물의 과격한 운송방식(?)에 피투성이가 된 몸뚱이를 부여잡고는 연신 비명을 질러댔다.

존 역시 상처의 통증이 심한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차마 비명을 지를 수 없었다. 이깟 상처와 고통에 비명을 지르기에는 자신이 너무 꼴불견처럼 느껴졌던 탓이었다.

차라리 욕이라도 시원하게 먹었다면 이렇게 마음이 무겁지는 않았을 텐데, 귀족 사내는 멋대로 행렬을 이탈한 자신들을 나무라는 대신 기꺼이 자신의 탈것을 내주었다.

그리고 혼자 수많은 괴물들 사이에 남았다.

그 마지막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그래서 그는 피륙에 난 상처가 고통스럽다 울부짖을 수조차 없었다.

“잠깐.”

사내들이 나 죽겠다고 비명을 지르는 사이, 복면을 뒤집어쓴 요정이 다가왔다. 언제나 귀족 사내의 곁을 지키던 여자 요정이었다.

“당신들이 왜 레드번을 타고 왔죠? 왜 그분은 함께 오지 않았죠?”

빠르게 쏟아진 질문에 제 상처를 붙잡고 신음하던 사내들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 그게 잠깐 헤매다가 행렬을 이탈했는데, 갑자기 이놈이 와서 저희를 물어왔지 뭡니까.”

사내 하나가 대답이랍시고 늘어놓은 대답이 가관이었다.

“그, 그렇습니다요. 저는 오줌이 마려워서 잠깐 나갔다가. 일도 다 못 보고 끌려왔지요.”

“저는 뭘 좀 떨어트린 것 같아서….”

더욱 황당했던 것은 어느 하나 사내가 고한 새빨간 거짓말을 정정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사내들의 말에 요정의 푸른 눈동자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그녀는 어떤 질책도 하지 않았지만, 그 냉랭한 눈빛만으로도 앞다투어 거짓을 늘어놓던 사내들의 입을 다물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당신은요?”

그녀는 사내들을 차갑게 일별하고는 존에게 물었다.

존은 대답 대신 눈을 질끈 감았다.

사내들처럼 거짓말을 할 염치는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 냉엄한 요정 앞에서 사실대로 보고할 용기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존은 차라리 입을 다무는 것을 선택했다.

“만약에.”

하지만 그는 끝까지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그분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미간 사이에 칼이 겨누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끔찍스러운 감각이 그대로 눈을 감고 있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그대로 있다간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르고 죽어 나자빠질 것 같은 공포, 존은 반사적으로 눈을 번쩍 떴다.

“아….”

다행스럽게도 요정이 정말로 자신에게 칼을 겨눈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안심할 수는 없었다.

날붙이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차갑고 날카로운 요정의 눈동자가 자신을 옭아맬 것처럼 노려보고 있었다.

“오늘이 가기 전에 당신들을 모조리 죽여 버릴 거예요.”

그 차갑게 일렁이는 시선과 마주한 순간 뱀 앞에 선 개구리 마냥 몸이 굳어 버렸다.

“그리고 그건 당신들뿐 아니라, 저들 역시 피해갈 수 없을 거라고 장담해요.”

존은 직감적으로 요정의 말이 절대 허언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러니 사실대로 말해요.”

요정이 준 마지막 기회, 존은 사내들을 바라보았다.

그 자는 절대로 살아 돌아올 수 없어. 너도 봤잖아. 혼자서 그 괴물들 사이에 남아서 어떻게 살아남겠어. 우리만 입을 다물면 우리가 뭘 했는지는 아무도 모를 거라고.

입을 열어 말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의 필사적인 표정과 눈빛 안에서 존은 많은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다.

순간적인 갈등. 하지만 답을 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저희는….”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판, 자신에게 있었는지도 몰랐던 쥐꼬리만 한 양심을 따르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그분께서 혼자 도망치려고 한 거라 생각했습니다요. 그래서, 그래서….”

한 번 입을 열자 그간의 망설임이 거짓이었던 것처럼 술술 이야기가 나왔다.

“그분은 저희를 살리기 위해, 혼자 괴물들과….”

마지막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존은 이질적인 감각에 뺨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눈물?

영지가 지옥으로 변했던 그 날, 완전히 말라버렸다고 생각했던 눈물이 자신도 인식하지 못한 사이에 계속해서 흘러내리고 있었다.

내가 울어? 귀족을 위해서?

머릿속이 뒤죽박죽이 되었다. 평생을 살아오며 굳어버렸던 무언가가 깨어져 나간 듯한 기분이었다.

“저희 같은 무지렁이 몇 때문에 돌아가셔야 할 분이 아닙니다!”

난생 처음으로 누군가를 위해 진정을 담아 울부짖었다.

“그분을 살려주십시오!”

요정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날개 달린 괴물이 사라진 방향을 가늠해보고는 훌쩍 대열을 이탈했을 뿐이었다.

끔찍한 괴물들이 우글거리는 그곳을 향해 내달리는 요정의 발걸음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리고 그녀가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저 먼 곳에서 무언가의 포효가 터져 나왔다.

괴물들의 포악한 울음소리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보다 격 높고 웅혼하고 압도적인 무언가의 포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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