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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 푸어-204화 (204/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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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5.대탈주 (1)

그저 곧게 뻗었을 뿐인 몸통에 창머리는 날카롭게 다듬어 송곳과도 같은 형태였고, 감아쥐기 좋게 깎아놓은 손잡이는 알 수 없는 재질의 가죽으로 감겨 있었다.

어디 하나 덧붙이거나 이어붙인 구석이 없는 창은 김선혁이 주로 애용해왔던 아덴버그 식 기병창(Heavy Lance)과는 완전히 다른 형태였다.

창은 흔하디흔한 장창과 흡사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무려 정령왕의 신체 일부를 깎아 만든 창이 투박하다거나 볼품이 없어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우둘투둘한 껍질을 제거하고 속살을 드러낸 생목의 결은 이제껏 그가 본 적이 없는 기이하고 신비로운 무늬였고, 그 빛깔은 갈색보다는 적색에 가까웠다. 그런데 그 빛과 형태가 몹시도 아름다워 차라리 장인이 공들여 조각한 예술품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 빛깔과 결이 지나치게 아름답다고 해서 창이 본연의 목적까지 상실한 것은 아니었다.

마호메드는 생목의 본래 형태를 최대한 훼손하지 않는 가운데, 실용성마저 지켜냈고, 창은 그가 이제껏 사용해왔던 그 어떤 창보다 무언가를 찌르기에 적합한 형태를 띠고 있었다.

“과거 우리 일족에 카타프락토스(Cataphractos)라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단단한 나무 갑옷과 장창으로 무장하고 일각수(一角獸-Unicorn)에 올라탔던 일족의 전사들은 당시 용맹함의 상징이었지요. 이 창은 카타프락토스들이 사용하던 애병을 흉내 낸 것입니다.”

어쩐지 무기라고는 활밖에 사용하지 않는 퀘이샤 장인치고는 지나칠 정도로 훌륭한 창을 만들어냈다 했더니, 원형이 되는 무기가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감탄하기에는 일렀다. 마호메드가 만든 창의 진가는 직접 창을 손에 쥐고 난 뒤에 드러났다.

“아….”

가죽을 덧대놓은 손잡이에 가만히 손을 가져다 댄 순간, 갑작스레 손끝에서부터 온기가 올라왔다. 그리고 온몸에 알 수 없는 활기가 샘솟기 시작했다.

‘생목을 쥐고 있는 것만으로도 네가 부리는 땅의 아이들은 보다 큰 힘을 발휘하게 될 것이고, 너 역시 땅에 발을 붙이고 있는 동안에는 마르지 않는 샘과도 같은 활기를 얻게 될 거야.‘

어머니 나무가 말했던 마르지 않는 활기가 무엇인지 조금이지만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역시 창의 효과 중 일부에 불과했을 뿐이었다.

불쑥.

부르지도 않은 땅의 최상급 정령 누다르가 땅속에서 갑작스레 모습을 드러냈다.

“넌 갑자기 왜 튀어나왔….”

- 최상급 땅의 정령 누다르(Nudar)와 맺은 계약의 종류가 갱신되었습니다.

- 최상급 땅의 정령 누다르와의 가계약이 정식 계약이 되었습니다.

난데없는 메시지에 잠시 어리둥절한 얼굴로 누다르를 보니, 늘상 거만한 얼굴로 거드름을 피워대던 정령이 전에 없이 공손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당신이 손에 쥐고 있는 것은 왕의 유산, 나 대지의 자식 누다르는 앞으로 왕의 대리자를 따를 것입니다.’

단지 힘을 증폭시키고 단단할 뿐이라 여겼던 창은 뜻밖에도 땅의 정령들에게 특별한 물건이었던 모양이다. 누다르는 마치 경배라도 하듯 납작 엎드려 복종을 맹세했다.

다소 갑작스러운 상황이었지만, 아티야와 정령들이 소환에 응할 수 없는 지금의 상황에서는 반길 만한 일이었다.

수만의 피난민들을 데리고 마왕의 권역을 가로질러야 한다는 중압감에 딱딱하게 굳어 있던 김선혁은 강력한 최상급 정령의 합류에 반색을 했다.

하지만 그도 잠시였을 뿐, 그는 이내 심각한 얼굴로 이제는 완전히 허물어져 마기에 잠식당하기 시작한 숲의 경계 너머를 바라보았다.

이제껏 겪어보았던 마수들 중에 가장 강력했던 만티코어보다도 훨씬 더 불길하고 어두운 기운을 지닌 무언가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해일처럼 밀려오는 거대한 악의에 벌써부터 손발이 저릿저릿할 정도였다.

물론 겁을 먹은 것은 아니었다. 악을 사갈처럼 미워하는 정명한 용의 의지가 불러일으킨 적의와 투쟁심이 그의 감각을 각성시킨 것이었다.

“후우.”

김선혁은 당장에라도 용인화를 시도하고 싶은 마음을 애써 억눌렀다.

지금은 싸울 때가 아니었다.

본능적인 투쟁심에 휩쓸려 적을 맞이했다간 자신만 믿고 있는 수만의 피난민들과 퀘이샤들이 어떻게 될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다들 준비를 서두르십시오.”

그의 말에 그렇지 않아도 분주하게 움직이던 퀘이샤들이 더욱더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

퀘이샤들은 신속했다. 그들은 정든 숲을 버리고 떠나는 것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보였지만,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잊지는 않았다.

문제는 피난민들이었다.

그들은 먼 길을 떠나기에는 지나치게 지쳐 있었고, 아이와 노인이 너무도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진즉에 피난 준비를 하라 일렀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떠날 때가 되자 이곳저곳에서 소란이 일어나며, 문제가 터져 나왔다.

“몸에 지니지 못할 물건이라면 전부 버리고 이동한다.”

마기에 쫓겨 이리저리 휩쓸려 다니는 와중에도 포기하지 못했던 세간살이와 물건들이 그의 추상과도 같은 명령에 버려졌다.

제길. 완전히 나쁜 놈이라도 되는 것 같네.

자신을 원망스레 바라보는 피난민들의 시선에 김선혁은 한숨을 내쉬었다. 상황을 모르는 것도 정도껏이지 굼뜨기만 한 피난민들의 행동이 답답할 지경이었다.

앞으로 반나절.

정체불명의 악의가 이곳에 도달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이었다. 어떻게든 그 전에 이들을 이끌고 최대한 먼 곳까지 도망쳐야 했다.

“어서 서둘러.”

답답한 마음에 피난민들 사이를 누비며 계속해서 독촉만 해대었다.

그렇게 분주하게 피난민들을 다그쳤지만, 숲을 벗어날 준비가 끝이 난 건 그로부터 한참이나 지나고 난 뒤였다.

“일족의 배치가 끝났어요. 워낙에 인간들의 수가 많아 모두를 지킬 수는 없겠지만, 지금은 이게 최선이에요.”

보고를 하는 나지마의 얼굴빛은 그리 좋지 않았다.

아니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퀘이샤 일족은 하나같이 음울한 눈을 하고 이제는 생명이 다해 껍데기밖에 남지 않은 거목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 목숨보다 귀히 여기던 어머니 나무가 사멸한 상황에서 애도할 시간도 없이 오래도록 살아온 터전을 떠나야 하는 상황이다.

퀘이샤들의 표정이 밝다면 그게 도리어 이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어머니 나무의 죽음을 애도하기에는 시간이 너무도 부족했다.

어머니 나무가 제 생명과 맞바꾸어 흩어놓은 마기가 다시 꾸역꾸역 몰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김선혁은 조용히 나지마의 어깨를 두들겨 주고는 대열의 레드번 위에 올랐다.

“출발!”

그의 말에 거대한 행렬이 이동하기 시작했다.

**

예상대로 피난민들이 발목을 붙잡았다.

그리 오래 이동을 한 것도 아니건만, 쇠약해져 있던 피난민들 중에 피로를 호소하며 뒤처지는 자들이 너무도 많았다.

“힘들다고 떠들어댈 체력이 있다면, 한 걸음이라도 더 걸어라. 만약 이곳에서 마물들에게 살해당하고 싶지 않다면.”

김선혁은 호통을 치며 지쳐 쓰러진 그들을 일으켜 세웠다.

“차라리 그냥 두고 가십시오. 더 이상은 무립니다.”

개중에는 끝까지 못 가겠다고 버티는 자들이 있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을 이끌었다.

“제 놈은 편하게 괴물 위에서 이동하면서….”

“차라리 우리끼리 살 길을 찾아봐야 하는 거 아닌가.”

“처음부터 자기들이 잘못해서 일어난 난린데, 왜 애꿎은 우리가 이 고생을 해야 하냐고!”

원래대로라면 마왕 일당과 서부의 위정자들이 받아야 했을 갈 곳 잃은 적의와 원망이 그에게 쏟아졌다.

“빌어먹을 귀족 놈들. 높은 데 올라타고 명령질 하는 꼴이라니.”

귓가로 들려오는 피난민들의 불평에 김선혁은 현기증이 났다.

과연 저들은 자신이 어떤 심정으로 이 길을 나섰는지 알기나 할까.

전부를 살릴 수는 없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일부를 포기하고 가고 싶지는 않았다. 힘들 거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최대한 많은 이들을 살리기로 마음먹었다.

언젠가는 저들 중 누군가를 버려야 할 때가 올 것이다. 그때가 되면 보다 많은 수를 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다고 스스로를 다그쳐야 할 것이다.

내 깟 게 뭐라고, 저들을 살리고 죽이고를 결정할까.

언젠가 반드시 오고 말 결단의 순간을 떠올리며 매 순간마다 이를 악물었다. 난생 처음 겪어보는 중압감에 숨이 턱턱 막혀왔다.

하지만 그는 절대로 내색하지 않았다.

“힘이 남는 장정들은 노인과 아이들을 챙겨라!”

그는 오직 강압적으로 명령할 뿐이었다. 그게 조금이라도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는 길이라 믿으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반드시 살려서 데려간다. 능력이 닿는 한, 최대한 살려서 데려간다.

그건 그 누구도 몰라줄 그 혼자만의 각오였다.

꽈악.

음울한 눈으로 피난민 행렬을 돌아보고 있던 김선혁은 힘주어 허리를 감아오는 손길에 뒤를 돌아보았다.

“나지마….”

복면 사이로 드러난 것이라고는 푸르게 빛나는 눈동자뿐이었지만, 그는 그 한없이 호의적이고 선량한 눈빛에 조금이나마 힘을 얻었다.

“고맙습니다. 나지마.”

어머니 나무가 남긴 유산들은 퀘이샤들과 피난민들이 마기에 침식되는 상황은 막아주었지만, 사방에 넘쳐나는 마기 자체를 정화해준 것은 아니었다.

온 세상에 마기가 가득했고, 그 탓에 예민한 용기사의 감각마저 무뎌지고 말았다.

“잠시 주변을 살펴보고 와야겠습니다.”

**

하늘 높이 날아올라 사라지는 괴수를 바라보던 존은 작게 욕설을 내뱉었다.

“빌어먹을 새끼. 서부 놈도 아닌 게 왜 여기까지 와서 행패람.”

끔찍한 저주가 왕국을 휩쓸었을 때 귀족들은 곧 상황이 해결될 거라며 호언장담을 했다. 비록 귀족들이 포악하기는 하지만 그들 중에는 자신들이 죽었다 깨나도 이루지 못할 일을 너무도 손쉽게 이루는 기사와 마법사들이 있었다.

그래서 존과 영지민들은 귀족들의 말을 믿고 하루라도 빨리 저 음충맞은 하늘이 걷혀나가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그들의 믿음은 완벽하게 배신당했다.

밤사이에 말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영주 일가와 가신들이 전부 내빼버린 것이다. 그리고 다음 날 저녁 괴물들이 영지를 습격했다.

그때부터 지옥이 시작되었다.

괴물들은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학살했고, 그 시체를 먹어치웠다. 혼란한 틈을 타 도망쳤지만, 살아남은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존 역시 가족을 모두 잃고 간신히 제 목숨만을 구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서쪽 숲은 안전하다.

그러던 와중에 한 가지 이야기를 들었다. 예로부터 신령한 존재가 있다던 서쪽 숲은 괴물들로부터 안전하다는 소문이 들려온 것이다.

살아남은 사람들끼리 뭉쳐 서쪽으로 향했다. 물론 쉽지 않았다.

처음에 나섰던 이들 중 태반이 괴물들의 습격에 죽어났다. 가는 길에 많은 피난민들이 계속해서 합류했지만, 더욱 많은 사람이 죽어나갔을 뿐이었다.

영주가 도망쳤다. 국왕까지도 왕성을 비우고 도망쳤다.

사람이 모이자 왕국의 사정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알게 되었다.

빌어먹게도 이 땅에는 더 이상 귀한 존재들이 남아있지 않았다. 그들은 재산을 챙겨 동쪽에 국경을 맞댄 이웃 왕국에 망명을 했고, 남은 것은 아무것도 모르던 평민들뿐이었다.

그 전까지만 해도 단지 두려울 뿐이었던 귀족들과 왕에 대해 처음으로 증오를 품게 된 순간이었다.

자고 일어나면 어제 함께 귀족들을 욕했던 동료가 시체가 되어 있었다. 시체조차 남기지 못하고 실종된 이들은 그보다 훨씬 많았다.

그런 악몽과도 같은 시간 속에서 그는 더욱 더 귀족들을 증오하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신령스러운 존재가 지켜준다던 숲에 도착했다. 난생 처음 보는 요정들이 길을 막고 숲을 통제했지만, 마물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존은 안도했다.

간간히 숲 밖으로 튀어나온 동물들을 사냥하거나, 풀뿌리, 나무껍질을 뜯어먹으며 이를 악물고 버텨냈다.

구차한 인생이었지만 살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숲 밖으로 나오는 동물들은 많지 않았고, 먹을 것은 늘 부족했다. 기껏 죽을힘을 다해 숲까지 도망쳐 온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이 굶어 죽었다.

그래도 버텼다.

그러던 와중에 저 검은 머리의 귀족이 나타났다.

척 보기에도 고귀해 보이는 행색, 존과 사람들은 단박에 상대가 귀족, 그것도 자신들로서는 감히 쳐다보지도 못할 정도로 까마득한 위치에 있는 귀족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내 눈에 보이는 귀족 놈들이 있으면, 반드시 목을 매달아 버릴 거야.”

존은 입버릇처럼 그렇게 떠들어왔고, 실제로도 귀족을 만나면 그렇게 할 생각이었다. 그가 생각하는 귀족들은 쓰레기보다 못한 존재들이었으니까.

악에 받힌 인생, 못할 게 없었다.

하지만 검은 머리의 귀족을 본 순간,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그 항거할 수 없는 위엄과 압도적인 존재의 격 앞에 증오도 분노도 부질없었다.

정신을 차린 순간 자신은 이미 납작 엎드려 몸을 떨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최대한 빨리 떠날 준비를 마치도록.”

빌어먹을 귀족 놈이 자신들에게 허락된 마지막 안식처마저 빼앗으려 했다.

“제 놈이 떠나라고 하면 떠날 줄 알고.”

“우리 적당한 곳에 숨자고. 마침 여긴 숨을 곳도 많으니까.”

사람들은 앞으론 말을 따르는 척 하면서 뒤로는 정체불명의 귀족을 비웃었다. 신령한 존재의 가호가 있는 한 이 숲에서는 더 이상 괴물들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오래 가지 않았다.

갑자기 초목이 시들기 시작하더니 저주스러운 기운이 숲을 침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곳에 온 뒤로 단 한 번도 듣지 못했던 마물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게 다 검은 머리의 귀족들이 오고 난 뒤에 생긴 변화였다.

“저놈이 이 모든 일의 사달이 분명해.”

“저 귀족 놈이 오고 나서 모든 게 엉망진창이 됐다구.”

사람들은 그 모든 게 다 저 빌어먹을 귀족 놈 탓이라고 말했다. 존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그가 보기에도 갑작스레 시들어버린 숲이나 괴물들의 습격은 귀족과 관계가 있어 보였다.

“떠나야 한다.”

그런 빌어먹을 놈이 귀중한 재산을 숲에 내버리고, 사람들을 다그쳤다.

그리고 다시 지옥이 시작되었다.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육신으로 나선 길이다. 장정인 자신도 이렇게 힘든데 아이와 노인들을 오죽할까.

결국 지쳐 쓰러지는 자들이 속출했다.

하지만 피도 눈물도 없는 귀족 놈은 잠시만 쉬었다 가자는 사람들의 청을 끝끝내 무시했다. 그리고 발에 피 물집이 잡힌 아이와 노인들을 강제로 질질 끌고 갔다.

“조금만 힘내라.”

가증스러웠다. 비록 온몸을 거적때기와도 같은 천으로 가린 괴상한 몰골이나마 여자일 게 분명한 요정을 뒤에 태우고 힘내니 뭐니 떠들어대는 귀족 놈의 행태에 절로 욕이 튀어나왔다.

“저 새끼. 분명 도망칠 거야.”

이따금씩 사라졌다 돌아오고를 반복하는 귀족 놈, 존은 자신들이 곧 미끼로 쓰이거나 버려질 거라 여겼다. 다른 귀족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어느 날, 쉬지 않고 나아가던 행렬이 정지했다. 평소와는 달리 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잠시 뒤 괴물에 올라탄 귀족 놈이 사라졌다.

그 모습을 본 존은 슬금슬금 대열을 빠져나갔다.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던 요정들과 눈이 마주쳤을 때는 오금이 저렸지만, 요정들은 무심하게 자신을 바라보다 다시 고개를 돌렸을 뿐이었다.

존은 귀족 놈이 도망쳤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귀족 놈이 괴물을 타고 날아간 방향이야말로 안전한 곳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몰래 대열을 빠져나와 귀족이 사라진 곳을 향해 내달렸다.

남겨진 사람들에게 미안했지만, 어차피 살 놈은 살고 죽을 놈은 죽는 게 우리네 인생이다. 그리고 보통은 눈치가 빠른 사람들이 더 오래 사는 법이다.

마치 자신처럼 말이다.

“헉헉.”

대열을 빠져나와 무작정 달리다보니 열 명 정도 되는 사내들이 따라붙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들이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왔다.

“내 눈이 좋은 편인데, 멀지 않은 곳에서 내렸어. 조금만 힘내자고.”

사내의 말은 사실이었다. 존과 사내들은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을 달린 끝에 그 빌어먹을 귀족 놈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어? 어?”

하지만 그들이 예상했던 안전한 피난처도, 혼자 도망쳐서 희희낙락하고 있을 귀족 놈의 얄미운 모습도 그 자리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곳에는 족히 일천은 되어 보임 직한 마물들에게 둘러싸여 격렬하게 창을 휘둘러대는 귀족 놈의 모습이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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