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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4. 정령왕들의 유산 (3)
아무리 경계가 형편없이 줄어들었다고 해도 숲 안쪽은 숲 바깥과는 철저하게 격리된 별개의 세상이었다. 악의로 검게 오염되어버린 외부와는 달리 숲은 여전히 푸르렀고 또 평화로웠다.
하지만 그 모든 게 순식간에 변해버렸다.
어머니 나무의 사멸이 앞당겨진 이후, 묵언 수행이라도 하듯 침묵을 지키던 퀘이샤들이 한곳에 모여들었다.
“마물을 몰아낸다.”
그 어떤 설명도 없었다. 노퀘이샤가 꺼낸 한마디에 요정들은 그 어떤 질문도 하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제 키만 한 활을 꺼내 들었을 뿐이었다.
꾸욱.
곧게 뻗어있던 활대를 당겨 활줄을 단단히 고정시킨다. 그 단순한 동작만으로 비무장이었던 퀘이샤들은 싸울 준비를 모두 마쳤다.
숲의 그늘에 앉아 곱게 노래하던 요정은 더 이상 이곳에 존재하지 않았다.
활을 잡은 퀘이샤들은 노련한 사냥꾼이었고, 무자비한 전사였다. 복면 사이로 드러난 그들의 눈동자가 섬뜩하기만 했다.
저벅. 저벅.
전투 준비를 끝낸 퀘이샤들이 삼삼오오 모여 숲 외곽으로 사라졌다.
“저도 돕겠습니다.”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김선혁이 나지마를 찾아 자신도 전투에 합류할 의사를 밝혔다.
그런 그를 보며 나지마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당신은 남은 일족들과 함께 어머니의 곁을 지켜주세요.”
“괜찮겠습니까?”
숲 밖에서 들려오는 거북스러운 울부짖음만 들어도 몰려든 마물들의 기세를 짐작할 만했다. 모르긴 몰라도 전력도 그 숫자도 그가 이제껏 겪어보지 못한 엄청난 것일 터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지마는 결단코 그의 조력을 거부했다.
“이곳은 어머니의 숲, 이곳에서라면 설령 마왕이 온다고 해도 저희들은 지지 않아요.”
허세가 아니었다. 그녀는 정말로 자신들만으로 마물들의 습격을 막아낼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나저나 어떻게 하죠? 마호메드도 전투에 참가했던데.”
마호메드라면 생목을 맡겨두었던 퀘이샤 사내의 이름이었다. 아무래도 마물의 침공 소식을 듣고 숲 외곽으로 향한 퀘이샤들 중에 그 손재주 좋은 요정도 있었던 모양이다.
“돌아와서 받으면 그만입니다.”
완성된 창의 모습이 궁금하기는 했지만, 어차피 전투에서도 배제된 마당에 급할 이유가 없었다.
“기대하셔도 좋을 거예요. 잠깐 본 것뿐이지만, 제법 그럴싸한 물건이 만들어진 것 같더군요.”
마물이 넘쳐나는 전장으로 향하면서도 여유를 잃지 않는 그녀의 모습에 김선혁은 그저 무사귀환을 빌어주었다.
“기다리겠습니다.”
“그럼 다녀와서 봐요.”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다른 퀘이샤들과 섞여 숲 외곽을 향해 사라졌다.
“레드번!”
그녀가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자 김선혁은 레드번을 불러 그 위에 올라탔다. 그리고 높게 날아올라 숲 밖의 상황을 살펴보았다.
“이런 미친!”
예상은 했었다. 근래 들어 쇠락했다고는 하지만 일대를 온전히 지켜냈던 어머니 나무가 있는 숲이다. 몰려든 마물들의 수가 적을 거라고는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상황을 예측한 그의 예상을 아득히 넘어설 정도로 마물들의 수는 무지막지했다.
숲의 외곽을 완전히 포위한 마물들은 족히 수만은 되어 보였다.
마치 검은 파도가 밀려와 숲을 둘러싼 것 같은 광경, 그보다 끔찍한 것은 그렇게 몰려든 마물들 사이로 범상치 않은 기세를 풍기는 마수들의 모습이 몇씩이나 보였다는 것이었다.
정말 괜찮을까.
김선혁은 뒤늦게 퀘이샤들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수만의 마물, 그리고 마수로 이루어진 강력한 군대, 그에 반해 그들을 격퇴하기 위해 숲 외곽으로 향한 퀘이샤들의 수는 고작해야 일 천이 채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그의 우려는 오래 가지 않았다.
쐬에에에엑!
숲의 외곽에서 굉음이 터져 나온다 싶더니, 빛살과도 같은 무언가가 마물들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끄아아아악!
마물들이 비명을 지르며 몸을 비틀었다. 하지만 마물들이 그렇게 반응했을 때는 이미 늦고 난 후였다.
필시 퀘이샤들이 쏘아 올렸을 화살, 퀘이샤 궁수들은 마물들이 회피할 틈을 주지 않았고, 화살은 파공성을 토해냄과 동시에 마물들을 꿰뚫어 버렸다.
그런데 그 화살의 위력이 무지막지했다.
적게는 다섯, 여섯에서 많게는 수십이나 되는 마물들을 관통하고 나서야 기세를 잃은 화살들로 인해 순식간에 수백이나 되는 마물들이 죽어 자빠졌다.
“아….”
그 모습을 본 김선혁은 나지마가 보인 자신감의 근원을 알게 되었다.
퀘이샤 궁수들의 힘은 그가 상상했던 것 이상이었다. 왜 이런 힘을 지니고도 스스로 묘목을 옮기지 않은 것인지 의문이 들 지경이었다.
“관통력에서 보면 상급 기사 이상….”
단 한 번의 공격일 뿐이었지만, 그가 보기에 퀘이샤들은 마왕의 땅을 가로지를 능력이 충분해 보였다.
[놀란 모양이구나.]
멍하니 퀘이샤들이 마물들을 학살하는 것을 보고 있자니, 어머니 나무가 말을 걸어왔다.
[내가 완전히 힘을 잃어 숲이 사라지고 난 후라면 모를까. 지금의 저들은 이곳에 몰려든 적을 상대하기에 차고 넘칠 정도의 힘이 있단다.]
그러고 보니 나지마 역시 비슷한 말을 했었다. 이곳에서라면 마왕이 찾아온다고 해도 최소한 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 하였다.
그게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정말 어마어마하구만.”
퀘이샤들이 쏘아올린 화살에 마수 하나가 고슴도치가 되어 쓰러지는 것을 본 김선혁은 탄성을 내뱉었다.
**
퀘이샤들은 절대로 숲을 벗어나지 않았다. 철저하게 숲의 경계에 머물며 끝도 없이 화살을 날려댔다.
어지간한 마물들은 어머니 나무의 힘이 미치는 푸른 대지를 침범하지 못했고, 간혹 경계를 넘어서는 마물들은 일제히 날아든 화살세례를 받고는 그대로 절명해버렸다.
한참을 하늘에서 그들의 전투를 지켜보던 김선혁은 정말로 퀘이샤들이 자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다시 지상으로 내려왔다.
“어째서 제게 묘목을 부탁한 겁니까.”
어머니 나무 앞에 선 김선혁은 저렇게 강력한 힘을 지닌 퀘이샤들이라면 묘목을 동부까지 옮기는 데 충분하지 않겠느냐 물었다.
[저들은 할 수 없단다.]
어머니 나무는 퀘이샤들이 저런 강대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이유는 이곳이 바로 그녀의 숲이기 때문이라 설명해주었다.
간략한 설명이었지만, 퀘이샤들이 보이는 지금의 힘과 어머니 나무가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사실만큼은 그도 금방 이해할 수 있었다.
어머니 나무의 설명을 전부 들은 김선혁은 가만히 고개를 들어 거목을 올려다보았다.
“괜찮으십니까?”
마지막으로 봤을 때까지만 해도 천년만년 존재할 것처럼 푸르고 생기가 넘치던 어머니 나무는 부쩍 힘이 없어 보였다.
[네가 떠날 때까지는 큰일은 없을 거야.]
누렇게 색이 바랜 잎들과 힘없이 늘어진 잔가지들을 보건대 어머니 나무가 오래 버틸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음….”
그런데 그렇게 생기를 잃어 푸석푸석하게 변해가는 어머니 나무의 거대한 몸 중에서 유달리 생기가 넘치는 곳이 있었다.
“저건…?”
아직 다 여물지 않아 입을 꼭 다문 새하얀 빛깔의 크고 작은 꽃망울이 셋, 수줍게 고개 숙인 꽃의 자태가 신비롭고 곱기만 하다.
하지만 김선혁에게는 그게 아름답다기보다는 도리어 꺼림칙하게 느껴졌다. 꽃망울이 마치 거목의 생기를 모조리 먹어치우고 자란 것처럼 보였던 탓이다.
[땅의 어머니들이 생명이 다하기 전에야 피울 수 있는 천년화(千年花)란다. 전대의 어머니께서는 여섯 송이를 피워내셨지만, 나는 이리도 부족하여 세 송이밖에 피우지 못했구나.]
어머니 나무는 저 새하얀 꽃이야말로 땅의 어머니들이 죽기 전에 남길 수 있는 가장 값진 유산이자, 가장 순수한 기운이 집약된 땅의 정수라 하였다.
“설마 하필 마물들이 지금 몰려든 건….”
[아마도 지금 몰려든 마물과 마수들은 천년화를 탐낸 혼돈의 종자가 보낸 것일 터.]
어쩐지 이상하다 싶었다.
차라리 어머니 나무가 수명이 다하여 완전히 흙으로 돌아가고 난 뒤에 찾아왔다면 일이 쉽게 풀렸을 텐데, 왜 그새를 참지 못하고 이리 몰려들어 피해를 자초한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마왕은 어머니 나무의 마지막까지 기다리지 못한 게 아니었다. 기다리지 않은 것이었다.
[완전히 만개한 천년화는 그야말로 정령왕의 정수 그 자체, 하지만 꽃이 피지 않았다 하여 그 기운이 하찮은 것은 아니니, 누군가가 꽃을 취하기 전에 먼저 빼앗으려 한 것이겠지.]
“설마 저 천년화라는 것까지 제가 책임져야 하는 겁니까?”
어머니 나무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김선혁은 그녀의 침묵이 긍정이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묘목만 해도 마물들이 기를 쓰고 달려들 거라 하더니, 이제는 천년화라는 정령왕의 유산까지 떠안게 되었다.
모르긴 몰라도 마왕의 땅을 벗어나는 게 예상보다 몇 배는 힘들어질 게 분명했다.
아오. 일 한 번 더럽게 꼬이네.
단순히 묘목을 옮기고 퀘이샤들을 이주시켜 아덴버그를 부강하게 만들려 했을 뿐인데, 어쩌다 보니 죽음을 앞둔 정령왕과 마왕의 싸움에 끼어든 꼴이 되어 버렸다.
거기에 더해 책임져야 할 피난민들까지 그 수가 수만에 달했다.
아무래도 고생길이 열린 것 같았다.
“차라리 여긴 내가 아니라 준민이가 왔어야 했어.”
마왕의 진짜 대적자인 용사 박준민이 그리워지는 김선혁이었다.
“알겠습니다. 저것도 제가 책임지도록 하죠.”
그는 마음 독하게 먹고 천년화까지 떠안기로 마음먹었다.
[모르고 있었구나. 저 세 송이 중 한 송이는 네 것이란다.]
“네?”
이건 또 무슨 소리인지 김선혁은 순간적으로 얼빠진 얼굴을 하고 말았다.
정령왕이 죽기 전에 남길 수 있는 가장 값진 유산, 그것도 세 송이밖에 없는 천년화 중 한 송이를 퀘이샤도 아닌 외부인에 불과한 자신에게 준다니, 차라리 황당할 지경이었다.
[네게 주어질 꽃은 세 송이 중에서도 가장 작고 가녀린 꽃, 하지만 단명의 저주를 받은 네 친인들을 치유하기에는 충분할 테지.]
“아….”
그 말을 듣고 나서야 그는 천년화가 단명의 저주를 받은 아데스덴의 혈족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물건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더불어 어머니 나무가 처음부터 자신에게 저 애물단지 꽃들을 떠넘길 생각이었다는 사실 역시 알게 되었다.
**
퀘이샤 일족과 마물들의 전투는 3일 밤낮을 쉬지 않고 이어졌다.
요정들은 활줄이 끊어지면 이어 붙이고, 화살이 떨어지면 가지를 꺾어 살을 대신하여 마물들을 향해 화살을 퍼부어댔다.
그리고 4일째 아침이 밝았다. 그 무렵 즈음하여 전투에 참가한 퀘이샤들 중 손이 멀쩡한 이는 단 하나도 없었다.
퀘이샤들은 손가락이 너덜너덜하게 변해 활이 피로 물들어 뻘겋게 될 때까지 화살을 쏴댔다.
하지만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공격을 퍼부어댔음에도 불구하고, 마물들의 수는 여전히 많이 남아 있었다.
퀘이샤들의 공격에 쓰러진 만큼 새로운 마물들이 몰려들었던 탓이다.
전투는 도무지 끝이 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런 전투를 종결시킨 것은 퀘이샤도 마수도 마물도 아니었다.
솨아아아아.
격전의 와중에도 선명하게 귀를 파고드는 나뭇잎 부딪치는 소리, 한창 적을 상대하느라 정신이 없던 퀘이샤들이 갑작스레 활을 늘어트렸다.
“어, 어머니….”
퀘이샤들은 경계를 넘어 꾸역꾸역 밀려드는 마물들조차 뒤로 한 채 숲의 중심으로 달려왔다.
[때가 왔구나.]
그런 그들을 반겨준 것은 임종을 앞둔 어머니 나무였다.
[부디 아이들이 일굴 새로운 숲이 오래도록 풍요롭기를.]
그녀는 자신의 아이들에게 마지막 가호를 내려주었고, 퀘이샤들은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며 어머니의 마지막을 지켜보았다.
[또한 용의 반려에게 찬란한 광명만이 남아있기를.]
그녀의 말이 끝이 나는 순간 온 숲이 빛에 휩싸였다. 한참이나 이어지던 빛이 다시 사라졌을 때, 숲의 외곽을 가득 메우고 있던 마물들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어머니 나무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완전히 만개한 세 송이 하얀 꽃과, 작은 묘목이 말을 잃은 거목 아래 피어 있었다.
“어머니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을 따르라 했습니다.”
마지막 순간 어머니 나무의 유언이라도 들었던 것일까. 퀘이샤 일족의 장로가 다가와 김선혁에게 말했다.
“떠날 준비를 하십시오. 지금 당장 이 숲을 떠나야 합니다.”
어머니 나무가 마지막 순간 사방에 퍼뜨린 정령왕의 기운에 휘말려 숲을 습격한 마물들은 모두 박멸되었다. 하지만 김선혁은 멀지 않은 곳에서 빠르게 다가오는 불길한 기운을 느끼고는 피난을 서두르라 지시했다.
“늦었지만, 여기 완성된 물건입니다.”
그리고 퀘이샤들이 각자 마지막 채비를 정비하는 사이, 어머니 나무의 생목을 맡겨두었던 퀘이샤 마호메드가 찾아와 한 자루 창을 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