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래곤 푸어-202화 (202/305)

00203    =========================================================================

203. 정령왕들의 유산 (2)

땅의 정수가 담긴 생목이라고 해도 그게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모르니 김선혁은 뜨뜻미지근한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

[나지마와 아이들이 오염된 땅을 가로지르는 동안에, 마기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필요했던 것은 단지 작은 잎사귀 하나뿐이었지.]

“아….”

탄성이 절로 나왔다.

강인한 아룡마저도 끝내 오염되고 말았던 마왕의 땅에서 요정들이 버틸 수 있었던 이유가 궁금하다 싶었더니, 그게 어머니 나무의 잎사귀가 그들을 보호해준 덕이었던 모양이다.

[생목은 나의 생명과도 같은 것, 그 안에 담긴 기운은 작은 잎사귀에 담긴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단다.]

생목이 지닌 기운이 대단할 거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가지의 정확한 용도만큼은 그도 여전히 감이 오지 않았다.

[네가 만약 대지를 일구는 농부라면 황무지에서조차도 풍요로움을 누리게 될 수 있겠지만 너는 용의 반려, 이런 쓰임새는 크게 와 닿지 않겠구나.]

그녀의 말 대로였다. 생목을 영지에 두고 쓴다면 수확량이 늘어 영지에 큰 보탬이 되겠지만, 그뿐이었다. 이미 안정적으로 돌아가기 시작한 라인펄은 딱히 식량 수급에 부족함이 없어 그녀가 말한 용도가 크게 와 닿지 않았다.

[네게 필요한 건 필시 보다 강력한 무기일터.]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첫 단추를 그리 꾄 탓인지 그도 아니면 천성이 그런 것인지, 지금에 와서 그가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싸움개처럼 싸울 곳을 찾아다니며 싸우는 것밖에 없었다.

그런 그에게 가장 좋은 선물은 황무지를 옥토로 바꿀 무언가가 아닌, 손에 쥐고 휘두를 강력한 무기였다.

[나의 아이들 중에 제법 손재주가 좋은 아이가 있단다. 그 아이라면 생목을 네 손에 맞는 형태로 만들어줄 수 있겠지.]

어머니 나무는 자신의 기운이 담긴 생목이 한낱 무기로 쓰이는 게 못마땅한 기색이었지만, 다행스럽게도 자신이 준 물건이라고 그 용도까지 강요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흠….”

어머니 나무의 말에 김선혁은 눈을 가늘게 뜨고 생목을 살펴보았다.

가지는 그 형태가 곧아 창으로 만들기에 충분해 보였는데, 잘만 다듬으면 꽤나 그럴 듯한 무기가 만들어질 것도 같았다.

“부러지지는 않겠습니까?”

하지만 재질이 재질인지라 조금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오필리아가 왕도의 이름난 장인을 수소문하여 특수한 금속으로 특별제작한 창마저도 격전을 이기지 못해 픽픽 부러져 나가는 마당에 과연 나무로 만든 창이 버텨낼 수 있을까 염려가 되었던 것이다.

그의 질문에 어머니 나무가 한숨을 쉬며 대꾸했다.

[모양새가 보잘 것없다 해서 그 속까지 그런 것은 아니란다.]

그녀는 기껏 큰마음 먹고 준 선물을 그가 영 마뜩잖아 하자 기분이 상한 듯했다.

하기야 누가 있어 정령왕이나 되는 존재가 하사한 물건의 효용을 의심할까. 심기가 불편해지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장담하건대 내 가지로 만든 무구를 부러트릴 수 있는 무기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단다. 최소한 생목이 품은 정기가 메마르기 전까지는 말이지.]

“그렇군요.”

어머니 나무의 말에 그제야 환하게 웃어 보이는 김선혁이었다.

[또한 생목을 쥐고 있는 것만으로도 네가 부리는 땅의 아이들은 보다 큰 힘을 발휘하게 될 것이고, 너 역시 땅에 발을 붙이고 있는 동안에는 마르지 않는 샘과도 같은 활기를 얻게 될 거야.]

하지만 어머니 나무는 평가절하된 생목의 가치가 그뿐이 아니라며 부연설명을 해주었다.

“흠. 땅의 정령의 힘을 증폭시키고, 소유자에게 끊이지 않는 활기를 제공하는 무기라….”

대략적인 설명을 들은 그가 조금은 민망한 얼굴을 해 보였다.

절대로 부러지지 않는 강력한 마법 무구를 주고도 싸구려 물건이나 파는 외판원처럼 한참을 떠들어야 했을 어머니 나무의 참담한 심정을 뒤늦게 헤아리게 된 것이다.

“감사합니다.”

민망함에 때 늦은 감사의 인사를 하니, 어머니 나무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

원래대로라면 어머니 나무와 만나자마자 묘목을 받아 아덴버그로 떠나려 했던 김선혁은 몇 가지 사정으로 인해 조금 더 숲에 머무르게 되었다.

퀘이샤들은 아직 마인들과의 거래를 받아들일 것인지에 대해 일족의 의견을 완전히 모으지 못한 상태였다.

“어머니를 두고 떠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물며 그 끔찍한 마의 종자들과 거래를 하다니!”

퀘이샤들은 생명처럼 떠받들었던 어머니 나무의 곁에서 떠나는 것에 대해 대체적으로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어린 묘목을 보호할 파수꾼이 필요하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다들 인지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매일 같이 모여 머리를 맞대고 일족의 중지를 모으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당신의 창이 완성되기까지는 결정이 날 테니,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나지마는 쉽게 끝이 나지 않는 일족의 회의에 혹시라도 그의 일정이 지장을 받을까봐 몹시 염려하는 눈치였다.

“괜찮습니다.”

전선에 남겨두고 온 원정대와 아룡들이 신경 쓰였지만, 그에게는 이쪽의 일도 전선의 사정에 못지않게 중요한 사안이었다.

강력한 퀘이샤 궁수들을 아덴버그로 이주시킬 수만 있다면 조금 더 기다릴 필요가 있었다.

게다가 아무리 마인들이 길을 열어준다고 해도 그들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는 이상, 마물과 싸울 최소한의 대비는 되어 있어야 했다.

김선혁은 퀘이샤 일족이 그 역할을 해줄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상급 기사 이상의 힘을 지닌 퀘이샤 궁수들이라면 혹시 모를 마물들의 습격을 능히 막아내고도 남을 테니까.

그렇게 얼마나 시간을 보냈을까.

지지부진하여 도무지 결론이 날 기미가 보이지 않던 퀘이샤 일족의 회의가 생각보다 한참 이르게 끝이 났다.

[머지않아 생명이 다하여 흙으로 돌아갈 나를 위해 이곳에 남을 필요는 없으니, 너희들은 그를 따라 이곳을 벗어나거라.]

퀘이샤들이 스스로 미래를 결정하기를 기다리던 어머니 나무가 보다 못해 나서서 그들에게 이주를 명령한 것이다.

“어머니! 어찌 이 끔찍한 땅 한가운데 어머니 홀로 남겨두고 떠날 수 있겠나이까!”

[필멸조차 마다치 않는 너희들의 마음은 고맙지만, 너희들의 보살핌이 필요한 건 내가 아니란다.]

퀘이샤들은 그녀의 말에 강하게 반발했지만, 새로운 묘목을 돌봐야 한다는 사명을 끝끝내 모른 척하지 못했다.

결국 곧 수명이 다할 어머니 나무의 곁에는 마찬가지로 천수가 다한 노 퀘이샤들이 남게 되었다.

그렇게 결정이 나자 일의 진행이 가속화되었다.

어머니 나무는 퀘이샤들에게 당장에라도 떠날 채비를 갖출 것을 당부했고, 그 모습이 어쩐지 조바심마저 느껴질 정도로 조급해 보였다.

김선혁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가 서두르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숲이 줄어들고 있어요.”

어느 날 찾아온 나지마가 숲의 경계가 빠른 속도로 줄어들고 있다며, 슬픈 얼굴을 해 보였다.

그 말을 들은 그가 레드번에 올라 주변을 살펴보니, 과연 그녀의 말 대로였다.

처음 도착했을 때까지만 해도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거대했던 숲이 형편없이 쪼그라들어 있었다.

“대체 왜….”

김선혁이 본 거목은 아직 그 잎이 푸르고 무성하기만 했고, 그래서 거뜬히 몇 년은 더 버틸 수 있을 거라 여겼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마치 그녀의 사멸이 코앞까지 다가온 것처럼 보였다.

이해가 가지 않았다.

김선혁은 어머니 나무를 찾아가 직접 그 이유를 물었다.

[만약 그대로 버텼다면 족히 10년은 더 버틸 수 있었을 거야. 하지만 어차피 흙으로 돌아갈 것, 그렇게 10년을 더 버텨봐야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가 찾아온 이유를 짐작이라도 하고 있었는지, 어머니 나무는 덤덤하게 사정을 설명해주었다.

[마지막 순간 조금이라도 의미 있는 것들을 남기고 싶었단다.]

어머니 나무의 말을 듣는 순간 김선혁은 직감했다.

그녀의 수명이 갑작스레 줄어든 이유가 자신과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달은 것이다.

“혹시 이 생목이….”

어머니 나무는 생목을 건네주며 그 안에 땅의 정수와 자신의 생명이 담겨 있다고 말한 바 있었다.

[그것 역시 하나의 이유가 될 수는 있겠지.]

그때는 단지 비유일 뿐이라며 흘려들었지만, 지금에 와서 보니 그게 아니었다. 생목에는 정말로 그녀의 생명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란다. 그러니 그리 미안한 얼굴 하지 말렴.]

어머니 나무는 미안해하는 그를 도리어 위로해주었다.

[한참 전에 이리 했을 것을… 지금도 너무 늦은 감이 있구나.]

그녀는 사멸이 앞당겨지더라도 다음 대의 어머니 나무의 묘목에게 더욱더 많은 정기를 전해주었다면 지금에 와서 이리 염려가 되지는 않았을 거라 후회했다.

[하지만 너를 만나서 다행이야.]

그녀는 용의 반려가 마침 이 땅에 나타난 것에 몹시 안도하고 있었다. 그게 과거 그녀가 보았던 용들에 대한 기억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 때문인지는 그도 알 수 없었다.

[미안하구나. 네 마지막 청은 들어줄 수 없겠어.]

혼돈의 파편에게 완전히 먹혀버린 마왕 박상진을 구제할 방법이 있는지 물었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사멸을 앞둔 그녀는 자신에게는 그 정도로 큰 힘이 남아있지 않다며 미안하다 말했다.

[과거 우리 어머니들은 너무도 큰 희생을 했고, 나는 물과 바람의 어머니가 남긴 아이들처럼 내 아이들이 고통받기를 바라지 않아. 그래서 나는 얼마 남지 않은 기력이나마 내 아이들에게 모두 물려주려 한단다.]

그녀는 끝까지 퀘이샤들과 정령들의 어머니로 남기를 원했고, 김선혁은 얼굴도 모르는 마왕 박상진을 위해 그런 그녀를 설득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애초에 마왕은 숙명이 정한 그의 상대도 아니었다. 마왕을 상대하는 건 성검 발뭉의 주인이자 당대의 용사인 박준민의 몫이었다.

어머니 나무가 그렇게 죽음을 준비하는 사이, 김선혁과 퀘이샤들도 숲을 떠날 준비를 하느라 바쁜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나, 나으리 오셨습니까.”

그간 숲에 머무는 동안 몇 번이나 마주했던 피난민들은 김선혁을 극도로 어려워했다.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비교적 온건한 축에 속하는 동부의 귀족들과는 달리 서부의 귀족들은 지독할 정도로 평민들을 괴롭혀대는 존재였다. 그런 귀족들에게 시달려온 서부의 평민들은 귀족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깰 정도로 두려워했다.

그리고 용이 새겨진 화려한 갑주를 차려입은 김선혁은 그런 그들이 보기에 감히 자신들이 쳐다보지도 못할 정도로 지체 높은 귀족 그 자체였다.

그들은 혹시라도 그의 심기가 상할까 봐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끄응.”

자신들이 굶어죽지 않도록 구제해준 당사자를 두고도 고마워하기 보다는 두려워하는 피난민들의 모습에 그의 마음이 다시 한 번 무거워졌다.

하지만 그는 그들을 달래주지 않았다.

“최대한 빨리 떠날 준비를 마치도록.”

그들을 모두 다독여 이해를 구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지금은 귀족에 대한 그들의 트라우마를 이용하더라도 최대한 빨리 숲을 떠날 준비를 하는 게 중요했다.

“다시 말하지만 이곳을 지켜주던 숲의 가호가 곧 사라진다. 그때까지 준비를 마치지 못하면, 전부 끔찍한 꼴을 당할 테지.”

이렇게 협박이라도 하지 않으면 숲 밖으로 나서기를 극도로 두려워하는 피난민들을 이끌 수 없었다.

다시 며칠이 지나고 숲은 이제 피난민들이 실감할 수 있을 정도로 쪼그라든 모습이 되었다.

한때 울창했던 숲이 마기에 오염되어 끔찍하게 변해버린 모습을 보고 나서야 피난민들은 김선혁의 말을 믿기 시작했다.

굼뜨게 움직이던 피난민들이 부랴부랴 먼 길을 떠날 준비를 서둘렀다.

“나, 나으리. 준비 끝났습니다요.”

“저희도 준비 끝났어요.”

다시 며칠이 지나 피난민들도 퀘이샤들도 모든 준비를 끝마쳤고, 때를 맞추어 어머니 나무의 생목을 맡겨두었던 퀘이샤가 무기의 제작이 끝이 났음을 알려주었다.

“마수와 마물들이 몰려오고 있어요!”

그리고 마치 기다리고 있기라도 했던 것처럼 마수와 마물들이 숲을 향해 몰려오기 시작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