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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 정령왕들의 유산 (1)
평소라면 나타나기 무섭게 더 자주 소환해달라며 칭얼댔을 정령들은 대체 무슨 영문인지 말이 없었다.
“너희들….”
영문을 몰라 사정을 묻는 김선혁에게 대답한 것은 오직 아티야뿐이었다.
‘주인님. 제발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그 모습이 어쩐지 평소와는 달리 서글퍼 보이기도 하고, 간절해 보이기도 해 차마 그 부탁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알았어. 대신 나중에 설명해줘야 해.”
‘고마워요. 주인님.’
어색하게나마 웃어준 아티야가 다시 어머니 나무를 향해 돌아섰다.
그렇게 돌아선 정령들을 보는 김선혁의 심경은 복잡하기만 했다. 늘상 자신만을 바라보던 정령들의 뒷모습이 왠지 생경하기만 해 알 수 없는 서운함마저 느껴질 지경이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자신의 되지도 않을 감정을 빌미 삼아 투정부리기에는 정령들의 태도가 지나치게 심각했다.
“흠….”
그는 일단 입을 다물고 상황을 지켜보기로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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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엾은 바람과 물의 아이들아. 너희들은 버림받은 게 아니란다.]
‘존재마저 희미해지는 듯한 끔찍한 고통 속에서 차라리 계약을 통해서라도 스스로를 보전하고자 했던 우리의 절박함을 오롯한 분께서는 절대로 알지 못할 것이나이다.’
주인을 대할 때면 언제나 미소 지은 채 봄바람처럼 살랑이던 바람의 정령은 그 자리에 없었다. 그녀는 마치 한겨울 칼바람이라도 되는 양 냉랭한 태도로 어머니 나무의 말을 맞받았다.
[내 어찌 오래도록 너희들이 느껴왔을 설움과 고통을 짐작할까. 아마도 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하고도 두려운 나날들이었을 테지.]
어머니 나무는 정령들의 싸늘한 대꾸에도 화를 내지 않았다. 도리어 더욱 자애로운 음성으로 그들을 다독여주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말하건대 그들은 너희들을 버리지 않았단다.]
‘하면 어찌하여 저희가 고통속에서 허우적거리고 방황할 때 단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나이까!’
이번에 대답한 것은 물의 정령 이크람과 이즈디하르였다. 격앙된 심정을 대변이라도 하듯 투명한 물빛으로 이루어진 정령들의 몸이 마구잡이로 요동을 치며 휘몰아쳤다.
[아니야. 아니야. 그들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것이 아니야.]
스산한 바람이 불어왔다. 생기가 가득했던 한여름의 숲이 순식간에 가을을 맞이한 듯 쓸쓸한 소리를 내며 울었다.
[그들은 모습을 드러낼 수가 없었던 것이란다.]
그리고 어머니 나무의 음성 역시 돌변한 숲의 공기만큼이나 깊은 비탄을 담고 있었다.
‘어째서….’
아티야의 질문에 어머니 나무가 대답했다.
[그들은 이미 소멸했으니까.]
**
김선혁으로서는 어머니 나무와 정령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페어리 드래곤을 데리고 왔을 것을 수다스러운 아룡이 성가셔 아스토리아에 두고 온 것이 후회되었다.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어머니 나무가 말하는 ‘그들이’ 누구인지, 또 정령들이 버림을 받았다는 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것들투성이었다.
그런 그도 한 가지 짐작할 수 있는 게 있었다면, 어머니 나무가 말하는 ‘그들이’ 아티야와 정령들에게 몹시 중요한 존재였을 거라는 사실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들이 소멸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정령들이 저리 날뛰어댈 리가 없었다.
‘그럴 리가 없나이다! 만약 그랬다면 어찌 저희들이 그 사실을 몰랐겠나이까!’
아티야는 광풍처럼 휘몰아치며 사방을 할퀴어댔고, 물의 정령들은 성난 파도처럼 일어나 당장에라도 거목을 향해 쏘아져 나갈 것처럼 난동을 부려댔다.
[몰랐을 수밖에.]
풍아보다 사나웠던 아티야의 칼바람도, 해일보다 거셌던 물의 정령들의 분노도 어머니 나무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정령들이 일으킨 재해는 숲에 작은 생채기조차 내지 못한 채, 거짓말처럼 사그라들고 말았다.
[그들은 사라졌지만, 그들의 근원은 여전히 세상에 존재하니까.]
정령들의 분노를 잠재운 어머니 나무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양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그 근원이야말로 오늘 이 자리에서 너희들이 상속받아야 할 그들의 유산이란다.]
어머니 나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하늘까지 맞닿은 거목의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한 뿌리 틈에서 찬란한 빛이 터져 나왔다.
[아이들아. 이것은 너희들의 어머니이자.]
아티야를 비롯한 정령들이 빛무리 속에 완전히 잠겨 들었을 때, 어머니 나무의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너희들의 왕이 남긴 유산이니.]
김선혁은 경악했다.
이제까지 어머니 나무가 말했던 ‘그들의’ 정체를 이제야 알게 되었던 탓이다.
[천 년 동안 존재하지 않았던 물과 바람의 정령왕이 비로소 이 땅에 다시 태어나게 되리라.]
놀랍게도 어머니 나무가 소멸되었다 말한 이들의 정체는 무려 정령왕들이었다.
“이게 대체 뭔 상황이야….”
얼빠진 음성을 내뱉은 그가 빛에 휩싸인 정령들과 어머니 나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
다시 빛이 사라지고 숲이 원래의 모습을 찾았을 때, 정령들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걱정하지 말렴. 그들은 잠시 정령계로 돌아갔을 뿐이니.]
부드러운 음성에 김선혁이 여전히 멍한 얼굴로 물었다.
“그럼 저들은 이제 어찌 되는 것입니까?”
그간의 정확한 사정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물과 바람의 정령이 잃었던 무언가를 되찾게 되었다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저들은 이제 정령왕이 되는 것입니까?”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단다. 그들이 왕이 되기에 충분한 그릇이라면 그들 중 하나가 왕으로 거듭날 테고, 그게 아니라면 아예 새로운 존재가 태어나 왕이 되겠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품었던 기대가 어긋났지만 그는 실망하지 않았다.
[하지만 설령 그들이 왕의 그릇이 아니라고 해도 어떤 식으로든 그들은 변하게 될 거야. 그들은 천 년 만에 되찾은 근원을 가장 먼저 접한 최초의 정령들이니까.]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그 근원이라는 것과의 접촉이 정령들과 득이 되면 됐지, 해가 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김선혁은 다시 돌아올 아티야와 물의 정령들의 모습이 벌써부터 기대가 되기 시작했다.
“응?”
벅찬 기대감에 주먹을 불끈 쥐고 있던 김선혁은 문득 다른 정령들과는 달리 아직 사라지지 않은 정령이 하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누다르?”
누다르. 말도 지지리도 안 듣는 콧대 높은 땅의 최상급 정령이 처음 나타났을 때와 똑같은 모습으로 그 자리에 있었다.
그런데 그 모습이 평소의 오만한 모습과는 상반되게 지극히 공손하고 경건해 보였다.
“아….”
순간적으로 머릿속을 스치고 가는 생각에 김선혁은 탄성을 내뱉었다.
다른 정령들은 소멸된 왕의 유산을 받아 정령계로 돌아갔다. 그리고 오직 땅의 정령만이 남아 어머니 나무를 향해 지극한 공경을 보이고 있었다.
“혹시 당신은….”
만약 다른 자리였다면 생각지도 못했을 의문이었다. 하지만 이미 둘씩이나 되는 정령왕에 대한 언급이 있었기에 그의 의문은 차라리 확신이 되었다.
[네 짐작은 틀리지 않았단다.]
그리고 그의 예상은 맞아 떨어졌다.
[나는 서쪽의 어머니이자, 땅에서 난 모든 것들의 왕.]
퀘이샤들이 섬기는 서쪽의 어머니 나무는,
[대지의 군주란다.]
땅의 정령왕이었다.
**
[이제야 그들과의 약속을 겨우 지킬 수 있었으니, 이 또한 네 덕분이로구나.]
어머니 나무의 목소리는 마치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것처럼 후련한 기색이 역력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하지만 어머니 나무의 후련함과는 별개로 김선혁은 더욱더 많은 의문이 떠올랐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강대한 정령왕들이 하나도 아닌 둘씩이나 한꺼번에 소멸하게 되었던 것인지 도무지 짐작할 수 없었다.
[이것은 내가 아닌 나의 어머니의 기억.]
질문의 무게는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무거웠다. 잠시나마 홀가분해졌던 어머니 나무의 음성이 다시 무겁게 가라앉을 정도로.
[가장 강대하고 강력한 군주들조차도 어찌할 수 없었던 절망과 암흑에 관한 이야기란다.]
용기사가 되며 엄청난 성장을 한 김선혁이지만, 감히 어머니 나무의 힘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녀는 혼돈의 파편을 얻은 강대한 마왕의 권역 한가운데서도 자신의 숲을 온전히 지켜낼 정도로 강력한 힘을 지닌 존재, 그런데 그런 강대한 이가 단지 과거의 일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두려워하고 있었다.
[끔찍한 시절, 그 오랜 전쟁에 휘말려 너무도 많은 종족들이 멸족되거나 영락해버렸고, 그보다 많은 생명이 죽고 소멸되었단다.]
그래서인지 어머니 나무는 당시에 있었던 전쟁에 대해 자세하게 이야기해주지 않았다. 그저 당시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죽었고 얼마나 많은 이들이 고통받았는지를 뭉뚱그려 말해주었을 뿐이었다.
[수많은 어머니들이 소멸하였고, 땅의 어머니 역시 그중에 하나였어. 어리고 보잘것없는 묘목에 불과했던 나라도 남겨 일족의 근원을 전승한 어머니와는 달리 바람과 물의 어머니들은 제 일족에게 근원조차 온전히 전달할 수 없었지.]
놀랍게도 그녀는 소멸되었던 게 바람과 물의 정령왕뿐만이 아니라 말했다. 당시의 땅의 정령왕마저도 전쟁에 휘말려 소멸되었던 것이다.
강대한 정령왕들조차도 떼죽음을 당할 수밖에 없었던 전쟁의 끔찍함에 김선혁은 저도 모르게 침음을 내뱉고 말았다.
[하지만 그들은 차라리 운이 좋은 편이었단다. 그 시기는 그렇게 다른 이에게 훗날을 부탁한 물과 바람의 어머니와는 달리 무엇도 남기지 못하고 쇠락해버린 종족들 역시 헤아릴 수 없었던 진정한 세상의 암흑기였으니까.]
어머니 나무는 정령들보다 더욱 끔찍한 피해를 입은 종족과 군주들이 많다 말했다.
[안타깝게도 그렇게 사라져 버린 이들 대부분이 가장 용맹하고 선한 존재들이었단다.]
최전방에서 어둠과 맞서 싸운 만큼 더욱 큰 피해를 입어야 했던 선하고 정의로운 존재들을 말하며 어머니 나무는 진정으로 슬퍼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중에는 강대한 어둠과 절망조차도 소멸시키지 못한 존재들이 있어. 비록 일족의 대부분을 잃고 큰 상처를 입었지만, 그들은 세상의 이면에 웅크린 채 다시 모습을 드러낼 날만 기다리고 있단다.]
어머니 나무의 음성이 그 어느때보다 또렷하게 김선혁의 귓가를 파고 들었다.
[마치 ‘용’들처럼 말이야.]
**
어머니 나무와 헤어진 김선혁은 여전히 혼란스럽기만 했다.
‘어머니들에 대한 이야기는 인간과는 상관없는 이야기, 그나마 이 정도라도 이야기해준 것은 네가 그 아이들과 계약을 한 당사자이자 과거의 전쟁과 아예 무관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 때문이야.’
어머니 나무는 과거에 있었던 일 중 무엇 하나 속 시원히 알려주지 않았다.
‘용들에 대한 이야기는 네 반려에게 직접 듣는 게 낫겠어. 내가 다 말하면 네 반려가 정말로 화낼 거 같거든.’
정령에 관계된 일은 물론이거니와 용과 관련된 이야기 또한 용에게 직접 들으라며 말을 아꼈다.
‘그리고 그 시기는 내가 보기에 멀지 않았으니, 너는 곧 네 반려와 만나 모든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거야.’
어머니 나무는 오래 지나지 않아 용이 직접 그를 찾아올 거라며 답답함에 몸부림치는 그를 위로했다.
과거의 이야기가 그렇게라도 마무리되자 김선혁은 곧장 현실에 산재한 문제들을 꺼내 들었다.
‘저대로 두면 숲 밖의 사람들은 곧 굶어 죽을 겁니다.’
가장 먼저 숲의 외곽에서 굶주리고 있는 수많은 피난민들에게 숲의 풍요로움을 허락해줄 것을 부탁했고 어머니 나무는 어렵지 않게 그의 청을 들어주었다.
‘과거 용들이 보여주었던 희생과 헌신, 그들의 정의로움에 대한 보답이라고 하자꾸나.’
그녀는 무엇이든 들어줄 기세였고, 김선혁은 내친 김에 다른 청들도 쏟아냈다.
‘네 바람은 모두 이루어질 거야.’
어머니 나무가 수락한 그의 부탁 중에는 단명할 수밖에 없는 아데스덴의 혈족들의 저주를 풀 실마리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어머니 나무의 호의는 거기에서 끝이 나지 않았다.
다음 날 피난민들을 숲에 들어가 그 풍요로움을 누릴 수 있었던 데 대한 감사인사를 위해 찾은 그에게 어머니 나무는 새로운 선물을 주었다.
[과거의 빚은 청산하였지만, 앞으로 네가 해줄 일에 대한 보답은 아직 들어주지 못했으니 너에게 한 가지 선물을 하려고 한단다.]
아데스덴 혈족의 저주를 푸는 것만 해도 충분한 보상이라 생각했던 김선혁에게는 생각지도 못한 소득이었다.
툭.
그런데 막상 어머니 나무가 던져준 보상은 너무도 보잘것없었다. 거목의 이파리가 흔들린다 싶더니 나뭇가지 하나가 툭 하고 그의 앞에 떨어진 것이다.
그녀는 그것을 보답이라 하였다.
“음….”
무심코 실망한 기색을 내비쳤더니, 어머니 나무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것은 가장 나중에 돋아난 나의 가지, 땅의 정수가 담긴 생목(生木)이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