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래곤 푸어-198화 (198/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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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숙명 (4)

김선혁은 가만히 일백에 달하는 이방인들을 바라보았다.

장난스러운 태도와는 달리 그들의 면면에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방인들은 혹시라도 김선혁이 자신들의 청을 거절할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그 절박한 모습을 보며 김선혁은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 발견했을 때까지만 해도 생존자들 중에는 하급 병과의 이방인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전투력이 약한 자들은 끝도 없이 몰려드는 마물들의 공세를 견뎌내지 못하고 모조리 죽어버리고 말았다.

살아남은 자들은 중급 병과 또는 상급 병과로 각성한 초인들뿐이었다.

전원이 평기사 이상의 힘을 지닌 일백의 이방인, 그것도 아수라장을 헤쳐 나온 백전의 용사들은 견습 기사가 7할을 이루는 정규 기사단 정도는 가뿐하게 찜쪄먹을 정도의 엄청난 전력이었다.

분명 탐이 나는 전력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위협적인 존재이기도 했다.

대륙 서부의 생존자들은 반란의 가담자라는 오명을 피할 수가 없었다. 설령 본의 아니게 서부의 난리에 휘말려 들었을 뿐이라고 강변해봐야 한 번 찍힌 반란군의 낙인은 지워지지 않았다.

대륙의 지배자들은 이들이 지닌 힘에 기꺼워하기보다는 경계하고 두려워 할 것이다.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가장 자비로운 군주들이라고 해도 반란에 가담한 자들은 삼족을 멸하는 게 당연한 세상이다.

하물며 대륙은 과거에 대소환으로 인해 한 차례 몸살을 앓은 바가 있었다. 당시 입은 피해로 각 왕국들이 지닌 초인 전력들은 상당히 쇠퇴하여 아직까지도 완전히 복구가 되지 않은 상태라 했다.

그런 상황에서 과연 누가 있어 서부의 이방인들을 달가워할까.

적어도 아덴버그를 제외하면 말이다.

오필리아가 엄청 좋아하겠네.

‘장하도다. 장해.’

벌써부터 기뻐할 조숙한 왕녀의 모습이 눈에 선해, 그는 피식 웃고 말았다.

“월급 도둑은 바로 해고다.”

초조한 얼굴로 그의 대답만을 기다리고 있던 이방인들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감사합니다! 정말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서부에서 모진 학대와 착취에 시달리다 마침내 정착할 곳을 찾아내고야 만 일백의 이방인들은 감격에 겨워 몇 번이나 허리를 숙여 보였다.

“음….”

그 광경을 바라보는 아돌프 호츠네크 남작을 비롯하여 교국의 인물들은 심사가 복잡해 보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들이 생각하는 충성과 이방인들이 생각하는 충성의 의미는 결코 같을 수가 없었다.

입으로는 충성을 하겠다 말하면서도 무릎 한 번 꿇지 않는 이방인들의 태도도, 또 그런 자들을 꾸짖기는커녕 장단을 맞춰주는 김선혁의 태도도 이들에게는 이해하기 힘든 모습이리라.

아니, 어쩌면 민주주의라는 듣도 보도 못한 기치를 걸고 반란을 일으켰던 불순한 무리들다운 가벼운 행동이라 여기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김선혁에게는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망설이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마지막 남은 희망을 간신히 손에 쥔 이방인들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모진 학대 속에서 수년을 버텨온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울타리였다. 그리고 그는 기꺼이 이들에게 그런 존재가 되어주리라 다짐했다.

“아덴버그의 온당한 지배자이자 아데스덴 왕실의 수장이신 테오도르 티베리우스 로 아데스덴 국왕 폐하께서 적법한 절차에 따라 임명하신 오필리아 라우렐 로 아데스덴 섭정 폐하는 일찍이 나에게 공의 자리를 하사하신 바가 있다.”

의지가 일어난 순간 그의 말투가 돌변했다. 건들거리던 말투에 웃음기가 싹 빠지고, 용기사에 오르며 더욱더 격이 높아진 그의 존재감이 사방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착.

다소 방만한 자세로 사태를 관망하고 있던 원정대의 기사들이 그 위엄에 압도되어 저도 모르게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나는 오늘 이 자리에서 섭정 페하께서 허락하신 공의 권한을 처음으로 행사하려 한다.”

마냥 감격하여 기뻐하던 이방인들 역시 그의 기세에 압도된 것은 마찬가지, 본능적으로 자세를 바로 했다.

“무릎을 꿇으라.”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한 사이에 말에 의지가 실리고 그게 용언이 되었다.

“그리고 충성을 맹세하라.”

털썩 무릎을 꿇은 이방인들이 홀린 듯이 충성을 맹세했다.

“나 전승의 공작이자 라인펄의 영주인 선혁 라인펄 김 드라흔은 왕실이 보장하는 공의 권한으로 이 자리에서 그대들에게 기사의 작위를 수여한다.”

이방인들은 말없이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여 보였고, 그런 그들을 내려다보며 김선혁이 선언했다.

“그대들이 맹세의 가치를 기억하는 한, 나는 언제까지고 그대들의 울타리가 되어줄 것이다.”

**

“그대들이 맹세의 가치를 기억하는 한, 나는 언제까지고 그대들의 울타리가 되어줄 것이다.”

이수혁이 애써 근엄하게 말하자, 거검병을 비롯한 원정대의 이방인들이 야유를 보냈다.

“야이씨. 언제 대장님이 그렇게 방정맞게 말했어!”

“대사만 친다고 똑같냐! 위엄이 달라! 위엄이!”

동료들의 야유에도 이수혁은 마냥 신이 난 얼굴이었다.

“암튼 간에 진짜 소름 돋지 않았냐? 난 아직까지도 닭살이 안 가라앉는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그렇게 말하는 이수혁의 팔에 우둘투둘 닭살이 올라와 있었다.

“멋있긴 하더라.”

이방인들은 방금 전에 자신들이 보았던 기사 서임식을 떠올리며 다시 한 번 감탄했다.

비록 수주에 걸쳐 준비한 정식 서임식처럼 화려하고 정결한 환경은 아니었으나, 그 엄숙함과 위엄만큼은 왕성에서의 그것에 못지않았다.

“그대들의 울타리가 되어줄 것이다. 캬아. 내가 하면 이렇게 오그라드는데, 대장님은….”

중갑을 입은 기사들과 일백의 이방인들이 무릎을 꿇고 한 사람만을 바라보는 광경은 정말이지 다시 보지 못할 장관이었다.

“아. 다시 생각해도 또 소름 돋네.”

그들은 현대에서 넘어온 자신들에게는 허례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는 작위 수여식조차도 멋스럽게 해치우는 김선혁의 위엄에 진심으로 감탄했다.

“그래서 공작인 건가.”

자리가 사람을 만든 것인지, 그도 아니면 그런 사람이기에 그런 자리에 오른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단지 김선혁이 전승이라는 허무맹랑한 이름을 지닌 공작의 자리에 전혀 부족해 보이지 않았다는 것만이 중요했다.

“하아. 부럽다. 우리도 라인펄에서 기사질 하면 얼마나 좋을까.”

“언제는 전장에 같이 서기만 해도 소원이 없다며, 하여튼 간사해.”

이수혁을 비롯한 이방인들은 김선혁에게 기사의 작위를 수여 받은 서부의 이방인들에게 질투심마저 느낄 지경이었다.

왕실에서 작위를 하사 받은 이들이 할 말은 아니었지만, 어쨌건 부러운 건 부러운 것이었다.

“뭐, 방법이 없는 건 아니잖아.”

누군가의 한마디에 이방인들의 분위기가 돌변했다. 뒤늦게 자신들이 이 먼 타국에서의 전쟁에 지원했던 이유가 떠오른 것이다.

“공부터 세우자. 정산 끝나면 우리도 자유야.”

**

“전승공. 외교적인 문제가 생길지도 모릅니다.”

아돌프 호츠네크 남작은 특이한 자였다.

“주변국에서 저들을 받아들인 우리 왕국을 못마땅하게 여길 가능성이 높습니다.”

“음….”

만약 이 귀족파 기사가 왕실의 힘이 팽창하는 것에 대해 우려하는 기색이 조금이라도 내비췄다면, 김선혁은 단호하게 권위와 힘으로 찍어 눌렀을 것이다.

하지만 아돌프 호츠네크의 표정에는 조금도 사심이 없었다. 그가 보기에 이 중년 기사는 진심으로 왕국의 앞날을 걱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쩌면 이러한 모습이야말로 귀족 출신의 기사들을 온갖 구실을 붙여 중앙 기사단에서 복무하도록 만든 아데스덴 왕실이 바라던 모습일지도 몰랐다.

아돌프 호츠네크는 기사이면서도 관료적인 면모가 다분했다.

“이미 받아들인 이들을 내치는 것까지는 바라지도 않습니다. 다만 저들을 먼저 왕국으로 돌려보낸다는 말씀만은 거두어주십시오.”

중년의 기사는 저들로 하여금 서부에 남아 자신들의 과오를 씻을 기회를 주어 타 왕국의 반발을 완화하자고 하였다.

나름대로 합리적인 조치였다. 왜 오필리아가 아돌프 호츠네크를 원정대의 인솔자로 선택했는지를 알 수 있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합리적이라고 해서 그게 꼭 최선의 선택은 아니었다.

아돌프 호츠네크는 현명했지만, 전쟁 경험이 전무했다. 이론뿐인 기사의 머릿속에는 오랜 전쟁이 얼마나 끔찍한 정신력의 소모에 병사들을 노출시키는지에 대한 경험이 들어있지 않았다.

그리고 김선혁이 보기에 생존자들은 너무 오랜 시간동안 서부 귀족들의 학대에 시달렸다. 또한 지나치게 오랫동안 마왕의 땅에서 싸워야 했다.

그는 생존자들이 지닌 무력이나 의욕과는 별개로 휴식이 절실하다 판단했고, 그래서 그들을 전선에 남겨둘 생각이 전혀 없었다.

“계획에 번복은 없다.”

“전승공….”

그의 단호한 태도에 아돌프 호츠네크가 다시 한 번 설득을 하려 했다. 하지만 김선혁은 요지부동이었다.

“만약 다른 왕국이 아덴버그에 불만을 품고 모종의 수작을 부린다면, 그건 저들 무리가 정말로 불순한 종자들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아덴버그에 일백이 넘는 초인 전력이 추가되는 것을 우려한 때문일까.”

당연히 후자였다.

“그들은 가뜩이나 기세가 오른 아덴버그가 또 한 번 도약의 발판을 마련하는 게 영 마땅치 않겠지. 어떻게든 압박하여 제 발로 찾아온 복덩이들을 걷어차게 만들려 할 거야. 내 말이 틀린가?”

중년의 기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다 아직 우리 왕국이 만만하기 때문이지.”

동부의 늑대라 불리는 녹테인을 상대로 압도적인 승전을 거두고 그리핀도르의 자랑인 창공의 기사들을 굴종시켰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결과에 불과할 뿐, 실질적으로 아덴버그가 다른 왕국에 비해 압도적인 무력을 지녔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위세는 올라갔지만, 반대로 주변국들의 견제를 받게 되었다. 이번 일을 통해 그 견제가 더욱 노골적으로 변할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말이야.”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김선혁의 표정에는 일말의 걱정도 보이지 않았다.

“만약 아덴버그가 더 이상 만만하지 않게 되면 어떨까?”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아돌프 호츠네크는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는지 얼빠진 얼굴을 해 보였다.

“나는 서부에서 살아남은 모든 생존자들을 모두 흡수해 아덴버그로 보낼 생각이다.”

일백의 전력이 추가된 게 경계할 일이라면 그 이상의 전력을 추가하여 차라리 두려워하게 만들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뒤늦게 그의 의도를 알아들은 아돌프 호츠네크가 어지간한 수의 이방인들을 영입하는 정도로는 오히려 더한 견제를 받을 거라며 끝까지 우려를 표했다.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뒤늦게 당도한 원정대가 미처 파악하지 못한 사실이 있었다. 김선혁이 퀘이샤들과 나눈 거래였다.

어머니 나무의 묘목을 성공적으로 아덴버그의 땅에 이주시킬 경우, 상급 기사 이상의 힘을 지닌 수많은 요정들이 아덴버그에 머물게 된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요정들은 그의 강력한 우방이 되어주는 데 망설임이 없을 것이다.

김선혁은 그러한 계획을 아데스덴 왕실에 알렸다. 마침 원정대에는 연락을 위한 고위 마법사가 포함되어 있었고, 연락석 또한 충분히 지니고 있었다.

[그대는 언제나 왕실에 고민거리를 던져주는구나.]

모든 설명을 들은 오필리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말과는 달리 수많은 초인들의 합류를 기뻐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감수할 가치가 있는 일이다.]

오필리아는 중부에서 벌어진 끔찍한 전쟁이 끝났을 때 대륙의 판도가 완전히 바뀔 거라 예상했다. 그리고 그때 아덴버그가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남으려면 더욱 큰 힘이 필요하다 판단하노라 말했다.

[왕실은 언제나 그래왔듯이 그대를 지지하노라. 그대는 주변의 압박에 굴하지 말고, 연연해 하지도 말라.]

당연하게도 다소 무리하다 여길 수도 있는 그의 계획을 기꺼이 지지해주었다.

[그런데 그대는 도통 내 말을 듣지를 않는구나.]

얼핏 듣기에는 평소와 다름이 없는 말투였지만, 김선혁은 알 수 있었다.

오필리아는 지금 화를 내고 있었다.

“아….”

그제야 마지막 통신이 어떻게 끝이 났었는지를 떠올린 김선혁이 뒤늦게 뜨끔한 얼굴을 해 보였다.

[분명 중부에는 그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했건만, 그대는 여전히 스스로가 유일한 인물인 것처럼 행동하는구나.]

아무래도 홀로 마왕의 땅 깊숙이 들어갔던 그의 만행을 누군가를 통해 들은 게 분명했다.

[그대는 영웅이 아니다.]

조롱도 비난도 아니었다. 단지 부담을 덜어주고자 던진 한마디였을 뿐이었다. 김선혁은 화가 난 와중에도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오필리아의 태도에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명심하겠습니다.”

하지만 그 태평스러운 태도가 오히려 오필리아의 화를 더 돋우고 말았다.

[그대의 말과 행동은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대가 내 말을 명심했다면 그 요정의 부탁도 거절했을 테지.]

은근히 나지마를 신경 쓰는 듯한 태도, 김선혁은 황급히 준비했던 말을 꺼내 들었다.

“하지만 퀘이샤 전력을 아덴버그로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더라도 그들의 부탁을 들어주는 건 꼭 필요한 일입니다.”

[설명하라.]

잠시 감정을 내비치기는 했지만, 그의 말투가 진지해지자 오필리아는 금세 평소의 태도로 돌아왔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쉰 그가 말을 이어가려다 멈칫 통신 마법의 주체인 마법사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믿을 만한 자다. 그러니 그대는 망설이지 말라.]

용케도 김선혁이 망설이는 이유를 알아챈 오필리아가 마법사의 신분을 보장해주었다. 겨우 걱정을 덜어낸 그가 말했다.

“퀘이샤들은 인간보다 수명이 훨씬 긴 편입니다. 그리고 그건 단지 그들이 정령의 피를 이었기 때문만이 아니라고 합니다.”

오염된 아룡을 치료하기 위해 퀘이샤들과 대화를 나누다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들이 그토록이나 오래도록 젊음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은 그들이 어머니 나무의 은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다소 뜬금없다 느낄 수 있는 말이었지만, 오필리아는 단박에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을 짐작해냈다.

[설마….]

“제 예상대로라면 국왕 폐하께서 처하신 문제를 퀘이샤들이 해결해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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