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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 푸어-197화 (197/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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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숙명 (3)

“인간은 대가가 있어야만 움직인다고 배웠다 했었지요?”

“저희가 제시한 대가가 당신의 필요에 부합되지 않았지만, 만약 할 수 있다면 지금이라도 당신이 원하는 것을 제공할 생각이 있어요.”

나지마의 대답에 김선혁이 말을 이어갔다.

“그럼 이번에는 서로 거래하는 걸로 합시다.”

순수하게 부탁을 들어주는 게 아니었으니, 이번 일은 거래에 가깝다고 볼 수 있었다. 처음부터 대가를 제공하고 부탁을 들어줄 것을 제안했던 나지마는 그의 말에 그 어떤 거부감도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 나무의 힘이 필요합니다.”

나지마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어머니 나무를 언급할 줄은 생각 못했던 모양이다.

“어머니는 지금….”

그녀는 다소 멀찍이 물러나 있는 마인들을 여전히 경계하며 난색을 표했다. 마기를 풀풀 풍기는 마인들 앞에서 어머니 나무가 처한 상황을 언급하기 난처한 눈치였다.

“아티야.”

근래 들어 마기 탓에 좀처럼 나설 일이 없던 바람의 정령이 그의 호출에 반색을 하고 나타났다.

“잠깐 소리가 퍼지는 걸 막아줘.”

‘맡겨주세요.’

잠시 이질적인 기운이 퍼져나간다 싶더니, 이내 그와 퀘이샤들이 있는 공간과 마인들 사이에 바람의 막이 생겨났다.

“원래대로라면 제 것이 되었어야 할 놈 하나가 마기에 오염되었습니다. 그 놈을 원래대로 되돌리려면 어머니 나무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어머니 나무가 마기에 오염된 존재를 정화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이미 수많은 동료들이 마기에 침식되어 마물이 되어가는 모습을 본 마인들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마지막으로 박상진 만큼은 구원해내자며, 생각해낸 것이 바로 어머니 나무였던 것이다.

그리고 김선혁 역시 마기에 오염된 존재를 정화할 힘이 필요했다.

그를 서부로 이끌었던 두 마리의 아룡들 중, 마기에 무릎 꿇고만 아룡의 치료를 위해서였다.

[한번 마기에 굴종한 존재는 이미 용의 아종이라고도 할 수 없어. 게다가 스스로 그 미혹을 이겨내는 것도 아니고 다른 이의 도움을 받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렇게 아룡을 찾아내야 한다며 난리를 치던 페어리 드래곤은 마기에 굴종한 아룡에 대해 놀라울 정도로 냉정했다.

[레드웜과는 달라. 훨씬 더 오랫동안 마기에 노출되어 굴종하고만 아룡은 마기를 벗어나도 온전하지 않을 거야. 운이 좋으면 마룡, 또는 광룡이 되어 있을 테지. 어쩌면 모든 힘을 잃고 완전한 미물이 될지도 모르고.]

그 신랄한 태도를 보건대 음흉한 요정 용은 어머니 나무가 마룡이 된 아룡을 구원할 열쇠임을 알면서도 말을 해주지 않은 게 분명했다.

김선혁은 당연하게도 게하임니스의 말을 무시했다. 아룡의 긍지건 뭐건 간에 그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에게 있어 아룡들이란 강력한 우군이지, 고고하고 깨끗해야 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마인들의 부탁을 들어주기에 앞서 먼저 잃어버린 아룡을 되찾을 생각으로 퀘이샤들에게 협조를 구했다.

그간의 사정을 전부 전해 들은 나지마와 퀘이샤들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저들은 왜 데려온 거죠?”

그저 선하고 온화한 줄만 알았던 퀘이샤들의 눈에 표독한 빛이 어렸다. 어머니 나무와 일족의 안위를 위협한 마왕과 그 일당에 대한 적대감이 생각 이상으로 강한 모양이었다.

“저들 역시 어머니 나무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어머니께서 당신의 부탁을 들어주신다고 해도, 저들의 부탁까지는 들어주시지 않을 거예요. 어머니께서는 저들을 정화하는 대신 생명을 거두어 가실 게 분명해요.”

어머니 나무가 그저 커다랗고 신비한 나무가 아니라는 사실쯤은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어머니 나무가 정화해야 할 건 저들이 아닙니다.”

이미 마기의 침식이 상당 부분 진행된 저들은 오래지 않아 마물화 되어버릴 것이다. 저들 스스로도 자신들의 운명을 이미 받아들인 상태였다.

치료하고자 하면 성검의 주인에게 도움을 요청해볼 수는 있겠지만, 저들은 자신들의 침식을 막는 것보다 마왕 박상진을 구하기 위해 마지막까지 움직이는 것을 선택했다.

그들의 선택을 막을 이유도, 권한도 김선혁에게는 없었다.

“이 모든 재앙의 원흉, 마왕을 정화하고자 합니다.”

나지마의 눈동자에 황당한 기색이 떠올랐다.

“제 말을 제대로 듣지 않으셨군요. 어머니께서는 자비로우시지만, 스스로 마기를 받아들인 사악한 이들에게까지 그 자비를 베풀지는 않으실 거예요.”

아무래도 퀘이샤들이 마기에 대해 보이는 적대감은 어머니 나무의 성향에서 기인한 모양이다.

나지마는 설령 어머니 나무가 부탁을 들어줄 의사가 있다고 해도,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지금 시기에 마왕씩이나 되는 존재를 정화하기엔 힘이 모자를 거라 말했다.

또한 마왕 스스로 제 근원인 마기를 정화하여 힘을 깎아 먹는 선택을 할지에 대해서도 강한 의구심을 보였다.

“저도 저들도 어머니 나무가 완전히 마기를 제거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마왕에게 필요한 건 단지 혼돈의 파편을 억제할 계기였다.

제 몸을 침식해 오는 악의에 저항하여 이제껏 마기의 범람을 서부로 한정지어 막아냈던 마왕이라면 단지 그 정도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모르겠군요. 어머니께서 어떤 선택을 하실지는 오직 어머니만이 알겠지요. 다만 아무리 당신이라고 해도 어머니의 의사를 확인하기 전까지는 그 위험천만한 계획에 어머니를 끌어들일 수는 없어요.”

나지마는 어머니 나무가 마왕을 정화하려다 거꾸로 잡아먹히는 상황을 우려하고 있었다. 또한 그녀는 여전히 마인들을 경계하고 있었다.

“저들을, 저들의 말을 믿으세요?”

그녀의 질문에 김선혁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대답했다.

“그럴 리가요.”

마기를 스스로 받아들여 인간이 아니게 된 마인들이다. 마기가 골수에까지 파고들었는데 저렇게 멀쩡하게 보이는 건 그다지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저들이 모종의 목적을 숨기고 어머니 나무에 접근하기 위해 이 모든 말을 꾸며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마인들의 말만 듣고 움직이는 건 멍청한 짓이었다.

“그런데 왜 굳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신뢰할 수 없는 마인들의 말을 근거 삼아 계획을 잡은 것은 마인들의 작당질을 원천봉쇄할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어떤 경우에도 저들이 어머니 나무에 접근할 일은 절대로 없을 거라 약속합니다.”

어차피 움직이는 것은 자신과 아룡들뿐, 속을 알 수 없는 마인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움직일 생각이 전혀 없었다.

저들이 어머니 나무가 있는 퀘이샤 일족의 심처에 접근하지 못하는 이상, 그가 해야 할 일은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처음에 계획했던 대로 퀘이샤들의 부탁을 들어주고, 오염된 아룡을 정화하면 그만이었다.

변수가 끼어들 여지는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

나지마와 퀘이샤들은 김선혁의 선택에 더 이상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그가 빼앗긴 아룡을 원래대로 되돌리는 데까지의 계획이었을 뿐, 퀘이샤들은 마왕과 관계된 사안에 관해서는 여전히 결사반대의 입장을 고수하고 있었다.

이 정도는 그도 충분히 예상했던 상황이었다.

“어차피 당장은 저도 마왕과 접촉할 생각이 없습니다.”

혼돈의 파편까지 손에 넣은 마왕과 만나기에는 스스로의 준비가 너무도 부족했다. 만약 일이 틀어진다면 최소한 한 몸 빼낼 수 있을 정도까지는 힘을 길러야 했다.

그리고 지금은 우선적으로 마기에 굴복한 아룡을 찾아 원래대로 되돌리는 게 우선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진짜 용과 만날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근래 들어 침묵 중인 용과의 만남이 그 시기를 가늠할 수 없다는 게 문제였다.

“모르겠군요. 만약 그뿐이라면 굳이 이 거북스러운 자리를 만들 이유가 없지 않았나요?”

나지마의 질문은 확실히 일리가 있었다. 하지만 그도 생각하는 바가 있었기에 이런 자리를 주선한 것이다.

“나지마. 만약 어머니 나무의 묘목이 안전한 곳으로 옮겨진 뒤에 당신들의 일족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오직 어머니 나무의 안위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나누었을 뿐, 후에 남겨질 일족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들은 바가 없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나지마는 그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순간 흔들린 눈빛만 보아도 남겨질 자들이 어떤 운명을 맞이하게 될지는 그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도 지금의 어머니 나무의 수명이 끝나는 대로 그들은 마기에 오염되어 멸족하게 될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죽음을 각오하고 마왕의 땅을 탈출하든가. 그 어느 쪽이든 남겨진 자들에게 주어진 운명은 가혹하기만 했다.

“저와 당신의 거래는 끝이 났습니다. 하지만 저들과 당신들의 거래는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습니다.”

나지마는 마인과의 거래라는 말에 형언할 수 없는 거부감을 보였다.

“마인들은 마물들을 조종할 힘이 있다더군요. 어쩌면 그 능력이 남겨진 당신의 일족이 마왕의 땅을 무사히 벗어날 수 있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모릅니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상당한 피해를 입어야 했던 나지마와 퀘이샤들이다. 마인들의 도움을 받는다면 남겨진 자들이 무사히 마왕의 땅을 벗어나는 게 수월해질 것이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가 원하는 것을 주고받아야 하겠지만, 김선혁이 보기에 퀘이샤들은 충분히 대가를 지불할 능력이 있어 보였다.

“저희는 어머니를 배신할 수 없습니다.”

“배신하라고 한 적 없습니다.”

“저들이 원하는 걸 들어준다는 건, 어머니를 위험에 처하게 만들 수도 있어요.”

김선혁은 나지마의 단호한 대답에 고개를 저었다.

“지금 당장은 그렇지요. 하지만 찾아보면 방법이 있을 겁니다.”

당연하게도 그 방법을 생각해내는 건 퀘이샤 일족의 몫이었다. 그는 어디까지나 실마리를 제공할 뿐이었다.

“어쩌면 저들이 원하는 게 하나가 아닐 수도 있지요.”

그는 문득 라파예트와 롤랑 두 기사가 떠올랐다. 태어난 조국을 저버리더라도 라이더로 남기를 원했던 창공의 기사들이나, 끝까지 힘을 포기하지 못해 차라리 마기의 침식을 받아들이기로 한 마인들이나 크게 다르다 느껴지지 않았다.

**

“으아. 성격에 맞지도 않는 짓을 했더니, 머리가 다 아프네.”

과연 퀘이샤들이 어떤 결정을 내릴지, 또 어떤 방법을 찾아낼지는 김선혁으로서도 알 수 없었다.

“나 혼자 궁리하는 것보다는 저들 전체가 같이 방법을 생각해내는 게 낫겠지.”

운이 좋아 합의점을 찾을 수 있다면 수명이 다한 어머니 나무와 함께 버려질 수많은 퀘이샤들이 살 길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만약 그들이 마왕의 땅을 무사히 벗어난다면 그들이 향할 곳은 정해져 있었다. 어머니 나무의 묘목이 자리를 잡을 아덴버그만이 그들의 유일한 정착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상급 기사 이상 가는 힘을 지닌 궁사들이 다수 포함된 퀘이샤 일족이 아덴버그에 자리를 잡게 된다는 건 굉장한 이득이었다. 물론 그들을 합리적으로 전력화시킬 방안은 현명한 테오도르 국왕과 오필리아가 떠올려야 할 몫이었다.

“나도 아덴버그 사람 다 됐네….”

김선혁은 이렇게 먼 곳에까지 와서 아덴버그에 도움이 될 방법을 떠올려낸 스스로가 대견하게 느껴져 피식 웃고 말았다.

“영주님!”

“전승공이시여!”

퀘이샤들과 마인들을 남겨두고 홀로 진지로 돌아온 김선혁은 자신을 보고 달려드는 줄리앙과 아돌프 호츠네크 남작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이들의 표정이 어쩐지 지나치게 흥분한 기색이었던 탓이다.

“무슨 일….”

그의 질문에 어린 종자와 중년 기사가 동시에 대답했다.

“전승공께서 구조해오신 이방인들 전원이 아덴버그로 귀향을 결정했습니다!”

“영주님과 함께 돌아온 이방인들이 마기 중독을 이겨내고 라인펄에 잔류할 의사를 밝혀왔습니다!”

비슷하면서도 다른 대답, 중년의 기사가 헛기침을 하며 말을 정정했다.

“그 많은 이방인들이 전원 전승공께 일신을 의탁하겠노라 밝혔습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저편에서 이방인 무리가 우르르 다가오더니 그를 둘러쌌다.

“저쪽 세상에서나 이쪽 세상에서나 어차피 말만 다를 뿐 사람 위에 사람이 있는 건 마찬가지라고 하셨지요?”

민주주의라는 허울 좋은 명분에 휘말린 대다수 이방인들을 두고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큰 의미를 두고 한 말은 아니었다.

단지 이들이 이곳 세상의 군주제에 지나치게 반감을 드러냈기에, 그리 말했을 뿐이었다.

그가 보기에 현명한 군주가 다스리는 아덴버그는 저쪽 세상의 대한민국에 못지않은 좋은 나라였다. 요컨대 사회의 시스템보다 사람이 중요한 것이다.

물론 군주정의 폐해는 그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최소한 그가 겪은 지금의 아덴버그는 저쪽 세상 이상으로 살 만한 곳이었다. 스스로의 가치를 입증해야 한다는 전제가 있었지만, 애초에 이방인들은 기본적으로 하급이라고 해도 언제든 평기사 이상의 수준에 도달할 잠재력이 있는 존재들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이곳 세상이 마냥 나쁜 곳만은 아니었다.

“너무 색안경을 끼고 볼 필요는 없다는 말이었어.”

그의 말에 이방인 무리가 입을 모아 말했다.

“그래서 기왕이면 저희는 저희가 원하는 사람 밑에서 한 번 얼마나 살 만한 세상인지 겪어보려고 합니다.”

“그게 설마 난가?”

이방인들 중 하나가 나서며 대표로 대답을 했다.

“만약 귀족이 사장이고, 왕이 회장이라면.”

씨익 웃어 보이는 얼굴 그 어디에도 학대 받던 과거의 그늘은 보이지 않았다.

“당신은 대기업 임원정도겠지요.”

“뭐?”

뻔뻔스러운 대답에 그가 황당한 얼굴을 해보이니 이방인들의 대표가 쐐기를 박았다.

“취업 좀 시켜주십시오. 충성을 다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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