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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 숙명 (2)
마기에 찌들어 추악하고 음울한 기운을 온몸으로 풍겨대는 상대를 보며 김선혁은 아룡들을 향해 손을 들어 올렸다.
크르르르.
골드레이크가 온몸의 비늘을 세우고 전면으로 나서고 블루곤이 목을 꿀렁이며 적을 겨냥했다. 레드번과 페어리 드래곤 역시 언제든 날아오를 태세로 그의 명령을 기다렸다. 레드웜은 진즉에 땅을 파고들어 어딘가에서 적을 노리고 있었다.
셀 수도 없는 마물의 군대를 분쇄하고 그 우두머리라고 할 수 있는 마수마저 사냥해낸 아룡들의 기세는 이제 과거와는 그 격이 달랐다.
발을 구르며 앞으로 나선 골드레이크가 사납게 목을 울려대자, 당황한 복면인들이 주춤대며 물러섰다.
“자, 잠깐!”
그렇게 물러난 이들 중에 하나가 황급히 말문을 열었는데, 가래가 낀 듯 탁한 음성이 그 추악한 기운만큼이나 추하고 듣기 거북스러웠다.
“우, 우리는 싸우러 온 게 아닙니다.”
혹시라도 자신들을 공격할까봐 겁이 났는지, 복면인이 양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김선혁은 상대의 말을 믿지 않았다.
다른 곳도 아닌 마왕의 땅이다. 악의로 오염된 대지에 선의를 지닌 존재가 있을 리 없었다. 아니, 설령 그런 존재가 있다고 해도 최소한 눈앞의 이들은 아니었다.
“정체부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일단 상대의 말을 들어보기로 했다.
물론 만반의 대비를 한 채였다.
상대가 지닌 마기는 꽤나 강력했지만, 다섯의 아룡들 앞에서는 보잘 것 없는 힘에 불과했다. 만약 허튼수작을 부릴 기미가 보이면, 그 자리에서 묵사발을 내면 그만이었다.
“자, 잠시만 공격하지 말아주십시오”
잔뜩 겁을 집어먹은 복면인이 그의 눈치를 살피며 얼굴을 가리고 있던 천 조각을 걷어냈다.
“아….”
드러난 얼굴을 본 김선혁이 저도 모르게 침음을 내뱉었다.
역병에라도 걸린 듯 반쯤 녹아내린 얼굴은 이목구비가 거의 무너지다시피 했고, 입술도 없이 드러난 잇몸은 흉물스럽게 변색되어 있었다. 검푸른 핏줄이 우둘투둘 돋아난 피부는 어지간한 마물 이상으로 흉악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끔찍한 건 검은자와 흰자가 반전된 두 눈이었다.
[마인(魔人).]
그 흑백이 뒤집힌 눈을 보며 페어리 드래곤이 노골적으로 경멸의 감정을 드러냈다.
[제 스스로의 의지로 마기를 받아들인 불결한 존재들이야.]
“우리는 마인입니다.”
게하임니스의 예상대로 상대는 마인이었다.
“그리고 그 이전에.”
단지 게하임니스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 있었다면,
“당신과 같은 이방인이기도 합니다.”
마인들이 이방인이었다는 점이었다.
**
놀랍게도 마인들은 마왕 박상진과 함께 반란을 주도한 노르딕의 이방인들이었다.
서부 전체를 손에 넣은 지금쯤이면 당연히 수뇌부에서 떵떵거리고 있을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마기에 의한 피해는 피아를 가리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들이 이리 추레한 몰골을 하고 떠돌고 있을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저희도 이런 꼴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그땐 단지 노르딕의 괴물들로부터 여자들을 지킬 힘이 필요했을 뿐이었는데.”
심지어 당사자들도 이런 결과를 예측하지는 못한 듯,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있었다.
[흥. 동정할 가치도 없어. 만약 네가 저들에게 보일 자비가 있다면, 그건 마기가 골수에 파고들기 전에 저 비참한 생을 끝내는 주는 것뿐이야.]
“음….”
신랄한 게하임니스의 말에 김선혁은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어느 정도는 이 성질 고약한 아룡의 말에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누구 하나랄 것 없이 이목구비가 완전히 무너져 내린 마인들은 마기에 중독된 환자들보다 몇 배는 상태가 안 좋아 보였다. 온몸으로 풍겨대는 마기는 마물과 다름이 없었고, 생기조차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성검의 주인이 이 자리에 있다고 한들 치료할 수 있긴 할지 의문이었다.
안타까웠다. 하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동정의 여지는 있었지만, 그게 크게 다가오지 않은 건 그가 노르딕의 이방인들과 그다지 좋은 관계가 아니었던 탓이리라.
한참 전에 마왕이 갓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아덴버그의 이방인들을 포섭하기 위한 마왕의 사자가 찾아왔었다.
당시의 김선혁은 아덴버그에서 이룬 기반을 포기할 수 없어 그저 마음으로만 노르딕의 이방인들이 자신들만의 낙원을 건설하는 데 성공하기를 바라주었다.
선의의 대가는 악의였다.
노르딕의 사자는 왕국을 떠나며 좋지 못한 소문을 퍼트렸고 그는 곤란한 지경에 빠질 뻔했다. 그때 만약 아데스덴 왕실이 한결 같은 신뢰를 보여주지 않았다면, 아덴버그에서의 생활이 참으로 고달파질 뻔했었다.
그때 일만 생각하면 지금도 천불이 나는 김선혁이었다.
물론 눈앞의 마인들과 당시 수작을 부렸던 이방인은 똑같은 인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도 사람인지라 껄끄러운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게다가 서부가 몰락하여 완전히 죽음의 땅이 된 것도 따지고 보면 노르딕의 마왕 탓이었다. 그리고 눈앞의 마인들은 마왕에게 동조하여 스스로의 의지로 마기를 받아들였던 자들이다.
저들 역시 서부에 일어난 참사의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저들의 말만 듣고 마음이 동할 리가 만무했다.
“설마 여기까지 하소연이나 하자고 찾아온 건 아닐 테고. 용건이 뭐지?”
입장을 정리한 그가 조금은 날 선 태도로 물었더니, 마인들의 대표가 당황한 얼굴을 해 보였다.
대체 저들은 자신에게 뭘 기대했던 것일까.
귀족들의 착취와 학대를 이기지 못해 똘똘 뭉쳐야 했던 서부의 이방인들과 동부의 이방인들은 처한 상황이 완전히 달랐다.
동부의 이방인들에게 동포애를 기대하는 건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발상이었다.
“만약 마기를 치료하고 싶은 거라면, 이대로 쭉 동쪽으로 가도록 해. 아스토리아에 가면 마기를 정화해줄 사람을 찾을 수 있을 거야.”
물론 그냥 보내줄 생각은 없었다. 지금이야 저들이 아룡들의 힘에 눌려 이리 온건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지만, 가는 도중에 생각이 바뀌면 어떤 패악질을 부릴지 알 수가 없었다.
보낼 때 보내더라도 따로 조치를 할 생각이었다.
[글쎄. 마인들을 치료해줄 수 있는 건 성검의 주인밖에 없을걸. 하지만 저들이 과연 치료를 받으려고 할까?]
게하임니스는 마인이 된 저들이 마기를 제거한다는 건 마인이 되기 전에 지니고 있던 능력마저도 포기하는 것이라며 절대로 저들이 그런 걸 원할 리 없다 비아냥거렸다.
“마기를 치료하고자 하는 게 아닙니다.”
작은 아룡의 예상과 다르지 않은 대답, 김선혁의 표정이 한층 더 차가워졌다.
“어차피 저희는 늦었습니다.”
하지만 오해였다.
마인들의 대표는 자신들이 받아들인 마기가 이미 골수에 파고들었음을 알고 있었고, 머지않아 완전한 마물이 된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었다.
“그럼 나를 왜….”
마기를 치료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자신들의 몸을 서부가 아닌 다른 땅에 의탁하려는 것도 아니다. 대체 자신을 왜 찾아온 것인지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우리 상진이….”
마인이 간절한 음성으로 말했다.
“우리 불쌍한 상진이 좀 구해주십시오.”
상진, 박상진은 마왕의 이름이었다.
**
스스로의 성장과 아룡들의 성장을 위해 보다 깊은 곳을 향해 나아가려던 김선혁은 계획을 수정해야 했다.
“지금 이 난리가 마왕의 의지가 아니라니. 지금 날더러 그 말을 믿으라고?”
얼빠진 음성으로 혼잣말을 내뱉어보았지만, 말과는 달리 이미 발길은 교국을 향해 돌리고 난 뒤였다.
“만약 상진이가 정말로 원했다면 동부까지는 몰라도 최소한 중부는 끝장이 났을 겁니다.”
마인의 말을 그저 허세로 치부하기에는 서부에서 본 마왕의 힘이 결코 작지 않았다. 끝도 없이 몰려드는 마물들을 중부로 진격시켰다면, 중부가 이렇듯 순탄하게 연맹을 결성하여 전선을 방비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어쩌면 방비가 취약한 이베리아 연합을 비롯한 몇몇 나라쯤은 멸망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마인들은 그게 모두 박상진이 마기를 억제하고 마물들이 서부를 벗어나지 않도록 억제한 탓이라고 했다.
“그런데 왜 이제 와서….”
“떠나기 전까지는 여력이 더 있어 보였는데. 아마도 그게 허세였나 봅니다.”
마인은 그때 차라리 곁을 지켜줬어야 했다며 피를 토하듯 절절한 음성으로 말했다.
[아무래도 혼돈의 파편이 계약자를 집어삼킨 모양이야. 혼돈의 파편은 일개 인간이 다루기에는 지나치게 음흉하고 탐욕스러운 힘이거든.]
작은 아룡이 혀를 차며 한 말에 김선혁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리고 이번에도 게하임니스의 예상은 맞아 떨어졌다.
마인은 박상진이 혼돈의 파편을 얻은 뒤로 행동이 이따금씩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행동했다며, 마치 하나의 몸에 두 개의 성격이 들어간 것 같았다고 말했다.
“당신들의 말이 거짓이 아니기를 바라겠습니다.”
모든 정황이 하나의 진실을 가리키고 있었지만, 김선혁은 끝까지 일말의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덮어놓고 믿기에는 오염된 땅에는 악의가 너무 짙었다.
김선혁과 아룡들은 마인들을 가운데 두고 동쪽으로 향했다. 신성 교국 아스토리아가 있는 방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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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출발하고 난 뒤에 더욱 방비를 강화했는지, 신성 교국의 국경은 수도 없이 많은 병사들로 복작거리고 있었다.
“대장님!”
그중에서도 낯익은 얼굴을 발견한 김선혁은 얼빠진 얼굴을 해 보이고 말았다.
“수혁이 너….”
아덴버그에서 일백이십의 정예들을 보낸다고 하더니, 설마 그들이 하급 병과 출신의 이방인들일 줄이야. 그는 반가운 얼굴들을 둘러보았다.
이수혁을 비롯한 거검병, 그리고 수호병과 저격병이 전원 함께였다.
“앞으로! 아덴버그 성전 원정대 총원 일백이십! 섭정 폐하의 명받아 전승공께 합류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이끌고 온 인물은 귀족파 소속의 상급 기사였다.
아무래도 왕실의 전력이라 할 수 있는 이방인들과 귀족파 출신의 기사들을 절반씩 섞어 원정대를 꾸린 모양이었다.
개중에 상급 기사는 단 하나 뿐이었지만, 전원이 평기사급 이상으로 이루어진 원정대의 전력은 결코 약하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지원군은 바로 환수사, 최민영이었다.
“대장님….”
오랜만에 만난 그녀는 여전히 신뢰가 가득한 맹목적인 얼굴이었는데, 자랑할 게 몹시도 많은 얼굴이었다.
아무래도 북부에서의 훈련이 제 나름대로 상당한 성과를 보았던 모양이다.
반가운 마음에 그들을 둘러보던 김선혁은 이내 심각한 얼굴을 해 보였다. 지금은 해후를 나누기에 그다지 좋은 때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탓이다.
“이야기는 나중에.”
이수혁과 최민영을 비롯한 이방인들은 잠시 서운한 얼굴을 해 보였지만, 금세 길을 열어주었다.
“그쪽….”
“아돌프 호츠네크 남작입니다! 불러주실 때는 부관, 또는 아돌프면 족합니다!”
귀족파 출신이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호의적인 태도, 김선혁은 아돌프 호츠네크 남작에게 부대를 맡기고는 나지마를 비롯한 퀘이샤들을 찾았다.
“잠시 할 이야기가 있으니, 바깥으로 좀 갑시다.”
내내 자신을 귀찮게 여기던 그가 먼저 불러내자 나지마는 눈을 휘어 올리고는 제 일족을 불러 모았다.
“이쪽으로.”
국경 수비대의 눈이 미치지 않는 곳까지 도착한 퀘이샤들이 별안간 활에 시위를 걸고 저 너머를 노려보았다.
그런 그들의 시선이 향한 곳에 마기와 동화하여 있는 듯 없는 듯 이쪽을 바라보는 마인들이 있었다.
“잠시, 활을 거두고 이야기를….”
김선혁은 그들에게 마인들이 해주었던 이야기를 전부 들려주었다.
“그런데 왜 저희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주시는 거죠? 그리고 저 불결한 것들은 뭔가요?”
제 일족과 크게 연관이 없다 여긴 것인지, 노르딕의 상황에 다소 놀라기는 했지만, 나지마의 음성은 시큰둥하기만 했다.
한숨을 내쉰 김선혁이 이들을 한자리에 모은 이유를 설명해주었다.
“일단 당신의 부탁을 수락하겠습니다.”
나지마를 비롯한 퀘이샤들이 그의 말에 낮게 환호했다. 어지간히 기쁜 모양인지, 복면 사이로 드러난 눈들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하지만 본론은 지금부터였다.
“하지만 그 전에 먼저 협조를 구해야 할 것 같군요.”
“이 손으로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지.”
당장 무릎이라도 꿇을 것처럼 공손한 말투가 전과는 또 달랐다. 아무래도 어머니 나무의 묘목을 옮겨주겠다는 부탁을 수락하고 난 뒤라 완전히 은인으로 대접하기로 작정한 모양이었다.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던 김선혁이 마인들을 일별하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