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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 숙명 (1)
중부 전선의 수많은 왕국들이 마왕의 군대를 격퇴해냈지만, 이는 국경을 침범한 마물들의 습격을 잠시 물리친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전선을 넘어 마왕의 땅까지 진출하여 적을 요격하는 데 성공한 것은 오직 신성 교국 아스토리아 만이 유일했다.
교국은 자신들이 보유한 풍부한 사제단 전력과 신전 기사 전력을 최대한으로 운용하여 마물들을 요격했고, 마왕의 군대가 전선에 당도하기도 전에 처리하는 쾌거를 이룩했다.
하지만 그런 교국의 강력한 사제단과 신전 기사단도 감히 마왕의 땅 깊숙이 침투하여 마기의 근원인 마수를 퇴치할 엄두를 내지는 못했다.
교국의 초인들이 지닌 신성력은 분명 마기의 천적이었지만, 스스로가 지닌 신성력 이상으로 순도가 높은 마기 앞에서는 상성이 반드시 절대적인 힘을 발휘하는 것만은 아니었다.
위험을 무릅쓰고 마왕의 땅 깊숙이 침투하여 마기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마수를 쓰러트리는 것은 교국의 초인들에게도 상당한 부담이었다.
그런 그들을 대신해 나선 것이 바로 아덴버그에서 온 손님, 드라흔이었다.
“위험합니다. 아무리 전승공이라고 해도….”
사제단은 만티코어와의 힘겨웠던 전투를 언급하며 그를 만류했다. 하지만 김선혁은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
“저 혼자라면 언제든지 한 몸 빼내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그가 거듭 고집을 부리자 사제단도 결국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그의 소속은 아덴버그, 교국의 사제단이 이래라저래라 강제할 입장이 아니었다.
김선혁은 자신을 따르는 용의 아종을 모두 이끌고 교국의 국경을 떠났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제단은 마물들이 국경을 향해 진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필이면 그가 떠난 방향이었다.
서부의 위기를 알리고 수많은 생존자들을 구출해낸 의인에게 닥친 위기 앞에서 사제들은 간절히 무사귀환을 기도했다.
크아아아아!
그런 그들의 기도를 무시하기라도 하듯, 얼마 지나지 않아 전선 너머에서 끔찍한 괴성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성전을 위해 소집되어 사명감에 불타는 교국의 신병(神兵)들마저도 겁을 집어먹을 정도로 사악하고 불길한 포효였다.
“마수….”
이미 한번 오염된 대지에서 마수와 맞닥뜨린 적이 있던 사제단과 신전 기사단은 직감적으로 이 범상치 않은 울음소리가 평범한 마물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즈음, 또 다른 무언가의 포효 소리가 연달아 터져 나왔다.
각기 다른 다섯 종류의 음색은 마수의 것처럼 사나웠지만, 품고 있는 기운이 전혀 달랐다.
웅혼하고 위맹하다. 그리고 정명하다. 그 어디에도 마수의 포효처럼 사악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건….”
사제단과 신전 기사단에게는 익숙한 울음소리, 신전 기사단은 그제야 드라흔이 혼자가 아님을 떠올려 냈다.
“전승공의 아룡들이 분명합니다!”
뒤늦게 합류한 거북이를 닮은 괴룡(怪龍)을 포함한 다섯의 아룡들이 드라흔과 함께 하고 있었다.
“부디 무사하소서.”
그들은 간절히 드라흔의 무사귀환을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천지가 떠날 듯한 포효 소리는 이틀 밤낮 동안 이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그 소리가 끝이 났을 때, 사람들은 전투가 끝이 났음을 직감했다.
하지만 드라흔은 돌아오지 않았다.
“수색대를 조직해야 합니다.”
사제단과 신전 기사들은 의인에게 닥쳤을지 모를 위기에 전전긍긍했다.
하지만 정작 동부에서 중부까지 말을 내달려 자신들의 영주를 찾아온 전승공의 충성스러운 수하들은 태연하기만 했다.
“영주님께서는 단 하나의 아룡만을 데리고 전장을 전전하실 때도 패배한 적이 없으십니다. 그런 영주님께서 데리고 가신 아룡이 하나도 아니고 무려 다섯입니다.”
앳된 얼굴과 어울리지 않는 날카로운 눈빛을 한 어린 종자는 전승의 이름이 그저 운이 좋아 얻은 것이 아니라며, 오히려 사제단의 사제들을 안심시켜주기까지 했다.
“수십 년의 수행이 헛되었구나. 어린 소녀만도 못한 호들갑이라니, 수십 년의 고련과 강구가 무색하다.”
위로를 하러 찾아왔다 오히려 위안만 받고 돌아가는 스스로의 행태가 부끄러운지 노사제가 한탄했다.
하지만 그런 노사제의 생각과는 다르게 어린 종자와 사내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 아니었다.
하루에도 수백 번씩 끔찍한 상상이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영주의 말을 믿고 억척스럽게 기다릴 뿐이었다.
“끙. 세상천지에 있는 위험한 곳이란 위험한 곳은 우리 영주님이 혼자 다 찾아다니는구나.”
어느 기병의 푸념에 클라크와 줄리앙을 비롯한 이들이 어두운 얼굴을 해 보였다.
신성력 높은 사제들과 신전 기사들마저도 감히 들어가지 못하는 오염된 대지의 심처를 홀로 누비는 영주의 행보를 따르지 못한 것에 자괴감을 느낀 것이다.
영주의 곁을 지키겠다고 몇 번이나 다짐을 했던가. 저 너른 등을 보고 함께 전장을 내달리겠노라 스스로에게 맹세했다. 하지만 평범한 자신들이 뒤를 따르기에는 영주의 걸음이 너무 빠르고 거침이 없었다.
“그땐 정말 애송이도 이런 애송이도 없다 싶었는데 말이지.”
말단 기병에 불과했던 영주가 언제 이렇게 훌쩍 커버린 것인지, 직접 교육을 맡았던 클라크는 감회가 새롭기만 했다.
“악을 쓰다 좋지 못한 곳까지 후려치는 그 독기를 봤을 때부터 난 영주님이 될성부른 떡잎이란 걸 알아봤어.”
“맞아. 지금은 굳이 용 쓸 것도 없이 눈빛만으로 한센을 고자로 만들 큰 사람이 되셨어.”
대견함이 클수록 상실감이 큰 건 어쩔 수가 없었던지라, 사내들은 되지도 않을 흰소리를 하며 자괴감을 달랬다.
“그래도 가는 곳마다 영주님을 영웅이니, 구원자니 칭송하는 소리뿐이니 기분은 좋구먼.”
“아무리 그래도 꼭 여기까지 와서 그럴 필요가 있나. 섭정 폐하께서도 무리하지 말라고 하신 걸로 알고 있는데.”
사내들은 자꾸만 위험한 행보를 걷는 자신들의 영주가 못마땅한지, 거듭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김선혁은 그런 그들의 염려와 다르게 영웅심으로 나선 것도, 투철한 희생정신으로 나선 것도 아니었다.
할 수 있는 일이기에 나섰을 뿐이고, 좋은 기회였기 때문에 나섰을 뿐이었다.
**
“으앗차! 레벨업이다!”
일대를 지배하는 초거대 마수와 그 뒤를 따르는 마물의 대군을 맞아 이틀 밤낮을 쉬지 않고 싸운 김선혁은 일행의 염려와는 다르게 활력이 넘쳤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껏 그가 전쟁을 기피했던 것은 살인에 대한 거부감이 컸던 탓이다. 몇 번이나 큰 전쟁에 참전하여 손속에 자비를 두지 않게 되었다고 해도 제 손에 인간의 피를 묻히는 것은 절대로 익숙해지지 않는 일이었고, 그에게 큰 부담이었다.
그에 반해 이곳 서부에서의 전투는 달랐다.
상대는 인간이 아닌 마물들, 손속에 사정을 둬야 할 이유도 없었고, 살인에 대한 가책을 느낄 이유도 없었다.
김선혁에게 오염된 대지는 그야말로 레벨업을 위한 목 좋은 사냥터 그 자체였다.
“이대로라면 40레벨에 도달하는 것도 금방이겠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싸웠다지만 단 이틀 만에 레벨업을 두 차례나 했다. 껌딱지처럼 들러붙는 나지마와 용사마저 떼어내고 홀로 마왕의 땅에 들어선 보람이 있었다.
그야말로 쾌속 성장, 하지만 그는 여전히 부족함을 느꼈다.
마왕은 홀로 대륙 서부를 무너뜨리고 중부를 상대로 전쟁을 벌일 정도로 강력한 존재였다. 그런 마왕에 비하면 그가 갈 길은 아직도 멀기만 했다.
용기병이라는 병과가 마왕이라는 병과에 비해 약한 게 아니었다.
마왕은 혼돈의 파편을 손에 넣어 완전한 진화를 이루었고, 용기병은 아직 진짜 용을 만나지 못했다. 차이가 있다면 단지 그뿐이었다.
단 하나의 차이였지만, 그건 결코 적지 않은 간극이기도 했다.
용을 만나지 못한 이상, 용기병은 죽었다 깨어나도 마왕을 이길 수 없었다.
“빨리 용을 만나야 해.”
근래 들어 그 사실이 그를 미치도록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게 몰락한 서부의 참상을 직접 눈으로 확인했던 탓인지, 그도 아니면 다른 무엇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대적자. 마왕의 각성으로 인해 용사가 깨어났듯, 모든 초월적 존재들에게는 대적자가 있단다. 그게 이 세상을 아우르는 법칙이거든.]
다행스럽게도 페어리 드래곤은 그가 느끼는 조바심의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네 대적자가 아직 죽지 않고 이 대륙에 살아있다면, 네가 용기사가 되었던 그날 깨어났을 거야.]
“용기사의 대적자는 뭔데?”
김선혁은 대체 용기사의 대적자가 무엇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고, 그래서 게하임니스에게 물었다.
[용살자(Dragon Slayer).]
실체가 와 닿지도 않는 그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전신의 근육이 팽팽하게 조여지고 심장이 차갑게 식어버리는 느낌이었다.
마왕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되었을 때와는 달랐다. 당시에 그가 느낀 것이 분노와 증오였다면 지금의 그가 느끼는 것은 보다 근원적인 감정이었다.
위기감.
존재의 근원을 위협하는 천적에 대한 강렬한 경계심이었다.
[그 참람된 이름이 바로 네 대적자의 이름이란다.]
페어리 드래곤 스스로도 그 이름을 언급하기 거북스러운지 맑은 음성이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리고 만약 그 자가 너를 찾아온다면, 반드시 둘 중 하나는 이 세상에서 사라질 수밖에 없어.]
불길한 예언을 읊조리는 작은 아룡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그건 네 스스로의 의지가 아무리 굳건해도 절대로 피할 수 없단다.]
**
김선혁은 계속해서 마수와 마물을 찾아다니며 전투를 치렀다.
다섯의 아룡들을 이끌고 다니는 강대한 용기사 앞에 그 어떤 마물과 마수도 무력했다. 만티코어와의 전투 이후로 부쩍 강력해진 아룡들은 이제 어지간해서는 궁지에 몰리지 않게 되었다.
“자, 먹어라. 아룡들아. 먹고 무럭무럭 자라라.”
극독을 먹고 성장하는 레드번에게 있어 마수와 마물들의 사체는 더없이 훌륭한 에너지원이었다. 하지만 다른 아룡들의 경우에는 마기가 지닌 치명적인 독성이 그다지 유익하지 않았다.
그런 아룡들이 지금 더없이 맛 좋은 별미라도 먹듯 마수의 사체를 먹어치우고 있었다.
그 모든 게 블루곤 덕이었다.
동부에서 중부까지 오는 데 무려 두 달이 걸린 이 느려 터진 해룡은 그간의 미미했던 존재감을 만회라도 하듯 놀라운 활약을 보였다.
그 어떤 것으로도 생채기를 남길 수 없는 강력한 껍질과 강대한 마수조차도 떡실신을 시키는 물대포는 말할 것도 없었고, 마기조차도 정화시키는 수 속성의 힘은 김선혁조차도 기대하지 못했던 바였다.
[지금의 네 결정이 훗날 어떤 식으로 돌아올지는 나도 예상할 수가 없구나.]
마수의 시체를 끝까지 거부하는 것은 페어리 드래곤만이 유일했다.
“잔소리 하려면 입가에 흐른 침이나 닦고 해.”
김선혁의 핀잔에 게하임니스가 입을 다물었다.
“그나저나 이제 이쪽도 마물이 없네.”
마물이라면 눈이 뻘겋게 달아올라 군침을 삼키는 레드번과 아룡들 덕에 마물들의 씨가 말라 버렸다.
처음 이 땅에 들어섰을 때까지만 해도 악다구니를 쓰고 달려들던 마물들이 어느 순간이 되자 김선혁과 아룡들을 피해 다른 지역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건 마수라고 해도 다르지 않았고, 덕분에 전선에서는 넘쳐나는 마물들이 오히려 자신들의 땅에서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기현상이 일어났다.
이제는 정말 마수를 찾으려면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야 할 판국이었다.
김선혁은 고민했다.
이대로 조금만 더 마왕의 땅을 헤집고 다니면 5차 전직도 꿈이 아니었다.
잠시 고민하던 그가 교국이 있는 방향을 돌아보았다. 지금쯤이면 아덴버그에서 출발한 원정대가 이베리아 연합을 통해 당도했을지도 모를 시간이었다.
“어쩐다.”
돌아가자니 슬슬 가시권에 들어온 5차 전직이 아쉽고, 무시하고 가자니 전선 안쪽의 상황이 염려되었다.
하지만 답은 이미 정해진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어디선가 빠르게 성장하고 있을 대적자의 존재가 그의 등을 떠밀었다.
[이제까지 우리가 지나온 구역은 사실상 마왕의 땅에서도 변두리에 불과했어. 하지만 저 안쪽부터는 진짜 마왕의 권역이야. 저 너머에서 느껴지는 마기는….]
“이곳에서 느끼는 마기와는 비교도 안 되지.”
[만약 들어간다면 너도 우리도 단단히 각오해야 할 거야.]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어.”
결정을 내린 그가 막 서쪽을 향해 발을 내딛었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그 걸음을 멈춰야 했으니, 앞을 막아선 일단의 무리들이 있었던 탓이다.
머리끝까지 망토를 뒤집어쓴 무리의 복색은 퀘이샤 일족의 그것과 닮았지만, 그 느낌이 천지 차이였다.
그들은 이 오염된 대지와 너무도 잘 어울리는 추악한 기운을 두르고 있었다.